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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회사에 다니는 사위녀석이 열흘 전쯤 전화가 왔다. 사위 : 아버님! 혹시 23일날 저녁에 시간약속 있으세요? 나 : (일정표를 보고나서) 아니 없는데, 왜 집에 와서 식사 같이 하려구? 사위 : 아니오, 별 약속 없으시면 어머님이랑 같이 김성환 디너쇼에 다녀오셨으면 해서요. 나 : 그래? 나야 괜찮은데 장모님이 같이 가겠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후 지난 17일날 증조부님 기일이 돼서 딸녀석이 엄마가 제사음식을 만드는 일손을 돕겠다고 우리 집에 오는 길에 티켓 두 장을 가지고 왔다. 티켓을 보니 한 장에 18만원 하는 로얄석이다. 전문 가수의 디너쇼 같으면 엄청 비싸겠지만 탤런트가 하는 디너쇼라 다소 가격은 저렴한 편이었다. 어떻든 이래저래 해서 어제 저녁에 집사람과 함께 서울 장충동 그랜드 앰버서더호텔 2층 홀에 6시반에 입장했는데, 7시반부터 식사를 제공해주더니 가수 배일호를 선두로 해서 여러 가수들의 열창이 시작됐다. 그리고 주인공인 김성환은 8시가 돼서야 약 700명이 운집한 테이블 중앙위치에서 마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혼자서 흘러간 옛 노래를 여러 곡 불렀다. 그는 3일 전에 감기에 걸렸다고 했다. 정말 목소리가 약간 탁하게 느껴졌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친구 김성남이라는 사람이 막간사회를 보았는데, 그도 연예인이라고 했다. 디너쇼를 빛내 준 마지막 초청가수는 현숙이었고, 10시까지 나머지 시간은 김성환이 혼자서 자신의 노래를 비롯한 기타 대중가요와 판소리 창까지 두루두루 불러주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여기에서 실상 중요한 것은 관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보다 디너쇼에서 나온 수익금을 김성환이 한 푼도 갖지 않고 연평도 주민을 위해 전액 기부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하는 다른 연예인도 다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평소 연예인들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지라 누가 누군지, 또 누가 어떤 자선사업을 하는지 실상 깊이 있게 아는 바는 전혀 없다. 그런데 김성환의 디너쇼는 어제가 벌써 32회째이고, 가수가 아닌 탤렅트로서는 유일하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연예인들은 디너쇼나 자선사업을 하면 매스컴에 띄우지만 김성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사회자가 소개했다. 그래서 형제처럼 지내는 가수 배일호도 댓가를 한 푼도 받지 않고 해마다 찾아와서 노래를 불러주곤 한단다. 아마도 우리 사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훈훈하고 아직도 살만한 사회인 것 같다. 위정자들이 이런 사람들로부터 진정하게 서민을 위하는 행복과 삶의 질이 어디에 있는지 깨우치고 생각을 바꿔야 할것이다.
김성환은 고향이 군산이고, 사회자인 그의 친구는 금강건너 충청도 서천이란다. 당시는 서천에서 군산으로 학교를 다녔던 게 맞다. 내가 아는 어느 분이 서천 장항에 있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는데, 당시 장항엔 중고등학교가 없어서 아들을 금강대교 다리 건너편 군산으로 학교를 보냈고, 대학은 서울로 보냈던 걸 알고 있는 터이다. 어제 김성환 디너쇼를 관람하고 쇼의 질을 평가하기보단 그의 자선에 찬사와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조부님을 뵌적도 없지만 돌아가신 아버님의 말씀에 의하면 일제 때 24칸 집에 천석지기 지주셨던 조부님께서 중국으로 건너가 사진관을 차려놓고 독립운동가에게 뒷돈을 대주셨다는데, 지금와서 그 근거와 기록을 확인할 수는 없다. 5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은 어머님과 함께 그런 사실만을 가슴에 담으신 채, 소련 후르시초프의 사주로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정권을 세우자 지주 집안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숙청대상이었기에 8.15해방 직후 이북에서 월남하셨다. 그리고 6.25남침 전쟁을 겪으시면서 춥고 배고프다는 것을 비로소 몸소 체험하셨고, 이때부터 거리에서 구걸하는 고아, 걸인, 나병환자를 눈에 보이는 대로 집으로 데리고 오셔서 의식주 생활을 같이 하셨던 분이 나의 아버님이시다.
내가 군대에서 전역을 한 해가 1976년도 4월인데, 1978년도 8월 18일날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하였고, 2개월 후 지금은 없어졌지만 아버님은 지금의 고양시에서 지인들과 함께 뜻을 모아 우리나라 최초로 소위 노인예비군이라는 것을 창설하셨었다. 당시 수색 33사단에 가셔서 가끔 사격훈련도 하시곤 했다. 그리고 평소에 우리 집이 그다지 큰 집도 아니었지만 대문쪽 문간방은 항상 나병환자, 고아와 걸인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이런 기간이 1983년도에 아버님이 뇌졸증으로 쓰러지실 때까지 이어졌다. 난 어린 시절부터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아버님의 행적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과 생각을 갖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우리 식구도 먹고 살기 힘들었고, 특히 어머님이 옆에서 고생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아버님이 야속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후회하지만 당시는 아버님의 높고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해 한 때는 아버님께 반항을 했던 적도 있다.
- 어릴 적 5살 시절에 3대독자인 나를 앉혀놓고 나무로 짠 사판(모래판)에 나무 막대기로 천자문을 가르쳐주셨던 아버님! -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무릎꿇고 앉아 벼루에 적당량의 물을 붓고 먹을 가는 방법에서부터 벽지 초배지에 붓글씨로 천자문을 쓰게하셨던 아버님! - 붓이 기울어지면 글씨를 바르게 쓸 수 없다고 하시면서 붓대롱 위에 초대대통령 이승만박사의 초상화가 담긴 백환짜리 동전을 올려놓고 글을 쓰게 하셨던 아버님! - 만약 붓을 수직으로 세워서 쓰지 못하거나 손이 떨려서 동전이 떨어지면 가차 없이 종아리를 걷어 올려 싸릿대로 만든 회초리를 치셨던 아버님! - 군대생활 중 원주 육군제1하사관학교에 면회오셔서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고 하시면서 훈련생활 서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나를 보시고 아직 사내자식이 덜 됐다고 꾸지람을 주실 때 그토록 밉고 야속했던 아버님! 가훈으로 - 정직하게 살라, 만약 네 양심을 속이면 네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던 아버님! -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무조건 도우며 살라,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 경우 이자는 물론 원금조차도 받을 생각을 하지말고 빌려주라고 하셨던 아버님! - 사람을 넓고 깊게 사겨라. 마음이 오가는 사람 사이의 관계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무형재산이다. 고로 적을 만들지 말라하셨던 아버님!
그러셨던 아버님이 55년동안 피우신 담배 때문에 만성폐쇄성 폐질환으로 제곁을 떠나신지도 벌써 5주기를 맞습니다. 2011년 새해 첫날 저녁은 아버님을 뵙는 날입니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이날은 당신이 가장 사랑해주셨던 셋째 딸이 살고 있는 음성에서 올라오시겠다고 저한테 전화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머님을 뫼시러 동서울 터미널로 나갈겁니다. 아버님이 가시던 그날도 무척 추웠었기에 오늘은 문득 아버님 생각이 더욱 나는 날입니다.
동창여러분! 넉두리 좀 했습니다. 용서바랍니다. |
첫댓글 글을 읽고보니 삼송리에서 뵙던 아버님 생각이 나는구나.
너와는 유달리도 인생의 닮은점이 많았지? 똑같이 큰 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너나 나나 남동생이 세상을 먼져 떠나고, 결혼해 내가 아들낳으면 너도 아들낳고, 내가 딸낳으면 너도 딸낳고,너가 딸 시집보내면 내가 아들 장가보내고 아버님 돌아가신 날도 같아 음력으로 (11월27얼)제사일이 새해 첫날(2011,1,1)이구나. 그래도 너와 다른것은 넌 아직 집안의 지주인 어머님이 계시니 정성껏 잘해드려라. 이제 난 손자도 보고 효도가 뭔지 알만하니 부모님이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무쪼록 새해엔 사업 번창하고 가정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메리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그러게 말이다. 정말 너와 나는 묘한 인연이야. 고등학교 시절부터 붙어 지냈는데, 살아가는 모습까지 비슷하니 말이다. 격려 고맙다. 새해에도 늘 건강하고 가정도 다복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