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초고] 대한민국호, 파도를 헤쳐가려면 ―아테네처럼
*모두가 노를 젓고, 모두가 키를 잡는 배*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플라톤의 배
국가를 배에 빗댄 것은 플라톤이 처음이었다. 《국가》에서 그는 선원들이 저마다 키를 잡겠다고 다투는 배를 그렸다. 별자리와 바람을 읽을 줄 아는 참된 항해사는 쓸모없는 몽상가 취급을 받는다. 결론은 분명했다. 배는 아는 자가 몰아야 하고, 선원들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이천사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비유는 살아 있다. 국민은 생업에 바쁘니 전문가와 정치인에게 맡기라는 말, 투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말, 나라는 누군가 지켜주는 것이라는 말이 모두 플라톤의 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대한민국호가 지금 헤쳐가야 할 바다는 잔잔하지 않다. 네 강대국이 에워싼 바다에서 남북은 여전히 대치하고 있다. 가장 오래 기대온 동맹국 미국은 동맹의 문법을 스스로 허물며 계산서를 내밀고 있다.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 남쪽을 5천만이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군사적 수단으로만 보는 시각에 갇혀 있다. 게다가 인구는 줄고, 기후는 요동치고, 산업의 지형은 AI를 따라 통째로 바뀌고 있다. 이런 바다에서 선원이 선실에 누워 항해사만 탓하는 배는 오래가지 못한다.
아테네의 배
플라톤이 그린 배와 달리, 실제로 아테네를 살린 배는 삼단노선이었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한 것은 귀족 기병이 아니라 노를 저은 시민들이었다. 그 노잡이들은 대개 재산이 가장 적은 계층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민회에 나가 전쟁을 할지 말지를 표결했다.
여기에 아테네 민주주의의 비밀이 있다. 전쟁을 결정하는 손과 노를 젓는 손이 같은 손이었다. 결정의 대가를 스스로 치르는 사람들은 쉽게 선동되지 않는다. 적어도 자기 목숨이 걸린 결정 앞에서는 신중해진다. 책임과 권한이 한 저울 위에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전몰자 추도 연설에서 공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을 조용한 사람이 아니라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사적인 일에만 매몰된 사람을 가리키던 말 '이디오테스(idiotes)'가 오늘날 '바보(idiot)'의 어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테네는 참여를 그저 권하지 않았다. 민회가 열리는 날이면 붉은 물감을 묻힌 밧줄로 광장의 시민들을 민회장으로 몰았고, 옷에 물감이 묻은 채 늦게 온 사람은 불이익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동시에 기원전 4세기 초부터는 민회에 참석한 시민에게 수당을 지급했다. 가난한 시민도 하루 벌이를 포기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의무를 묻되, 의무를 다할 조건은 국가가 먼저 마련했다. 필자가 앞서 쓴 「투표장에 가지 않을 권리는 있는가」(옥천신문, 2026.9.14)에서 제안한 의무투표의 원칙이 이미 그곳에 있었던 셈이다.
노를 놓는 두 가지 방식
오늘 대한민국호에서 노를 놓아버리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투표장에 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유라고 부르지만, 투표장에 가서 백지를 내는 기권과 아예 가지 않는 불참은 다르다. 기권은 '어느 쪽도 아니다'라는 판단을 남긴다. 불참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남이 저은 방향으로 함께 실려 간다. 세금도, 파병도, 주거정책도 투표하지 않은 사람을 비켜 가지 않는다. 결과를 피할 수 없는 사람이 결정에서만 빠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의무의 방기다.
다른 하나는 절반의 시민을 처음부터 노잡이 명단에서 빼는 것이다. 필자가 「남녀사회복무제를 상상한다」(한겨레:온, 2026.5.25)에서 밝혔듯, 국방의 의무를 성별로 나누는 제도는 여성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성을 온전한 시민의 자리에서 밀어낸다. 평등의 논리를 끝까지 밀면 같은 보호만이 아니라 같은 책임에 이른다. 복무의 방식은 국방·재난·돌봄·생태로 다양해도 그 무게는 같아야 한다.
아테네가 여성을 시민에서 배제한 논리가 바로 '싸우지 않는 자는 결정하지 않는다'였다. 우리가 아테네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 배제가 아니다. 아테네가 절반만 이룬 공동체를 온전히 완성하는 일이다. 모든 시민이 노를 젓는 배가 아테네를 넘어서는 배다.
노만 젓고 키는 못 잡는 배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이 글은 시민을 꾸짖는 글이 된다. 아테네 시민이 기꺼이 노를 저었던 것은 키를 잡는 손도 그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추첨으로 공직과 배심을 맡았고, 민회에서 직접 법을 만들었으며, 위험한 권력자를 도편추방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오늘 한국의 시민은 어떤가. 책임은 이미 입증했다. 남성들은 수십 년 동안 국방의 짐을 졌고, 시민들은 두 번의 광장에서 배가 좌초하기 직전에 스스로 키를 되찾았다. 그런데 권한은 여전히 몇 년에 한 번 선장을 고르는 데 그친다. 선장이 항로를 벗어나도 광장에 나가는 것 말고는 되돌릴 방법이 마땅치 않다.
노는 모두에게 맡기면서 키는 소수에게만 쥐여주는 배에서 선원들이 노를 놓는 것은 게으름 때문만이 아니다. 저어봐야 방향이 바뀌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무투표와 남녀복무를 말하는 것은 시민의 권한을 넓히는 일과 한 묶음이어야 한다. 사표를 줄이는 선거제도는 거대 양당이 서로의 실패를 먹고 사는 적대적 공생을 끊어낼 수 있다.
주권자에게 키를 돌려주는 길은 또 있다. 파병이나 원전처럼 공동체의 운명이 걸린 주요정책에 대한 국민투표의 상설화,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이 숙의하는 추첨숙의형 시민의회, 잘못된 대리인을 불러들이는 국민소환이 그것이다.
아테네 시민이 전쟁을 스스로 표결했듯, 파병에 나설 사람들과 그 부모들이 파병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사고의 위험과 핵폐기물을 대대로 떠안을 사람들이 원전의 증설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결과를 짊어질 사람이 결정에서 빠지는 것은 투표장에 가지 않는 시민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민을 결정에서 빼놓는 제도에도 똑같이 해당한다.
오월동주에서 동주공제로
《손자》는 서로 원수인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도 한 배를 타고 풍랑을 만나면 좌우의 손처럼 서로를 돕는다고 했다. 원수끼리 한 배에 탄 오월동주는, 풍랑을 만나면 같은 배를 타고 함께 물을 건너는 동주공제(同舟共濟)가 된다. 남녀가, 세대가, 진영이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는 지금의 우리는 오월동주에 가깝다. 파도는 그 배를 동주공제의 배로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다. 격변의 시대에 한 나라의 시민은 좋든 싫든 한 배에 탄 운명공동체다.
플라톤의 배는 항해사 한 사람의 지혜를 믿었다. 아테네의 배는 노를 젓는 수백 명의 판단을 믿었다. 파도가 높을수록 믿을 것은 후자다. 한 사람의 항해사는 틀릴 수 있지만, 자기 목숨을 걸고 노를 젓는 사람들은 쉽게 배를 암초로 몰지 않는다.
대한민국호가 이 파도를 헤쳐가려면 모든 시민이 노를 젓고, 모든 시민이 키를 잡아야 한다. 책임과 권한의 저울이 수평을 이룰 때, 배는 비로소 우리의 배가 된다.
작은 도시국가 아테네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이겨내고 결국 페르시아제국을 무력화시킨 힘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함께 읽을 글*
- 「투표장에 가지 않을 권리는 있는가」, 옥천신문, 2026.9.14. https://www.ok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1991
- 「남녀사회복무제를 상상한다 ―모든 시민이 나라를 지키는 새로운 계약」, 한겨레:온, 2026.5.25.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961
첫댓글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5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