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첫 시범단지… 600여 가정서 태양광 發電 등 시행
주택에 '스마트 계량기' 설치, 전기량·요금 실시간 파악해
"스마트그리드 전국 확대 땐 에너지 수입 47兆 줄어든다"
10일 오후 제주시 구좌읍 한 가정집. 안방에서 할아버지와 손녀가 전기장판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 부엌에선 며느리가 전자레인지에 생선을 굽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느라 분주하다. 그런데 냉장고 뒤편 전기계량기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집 마당에 세워진 풍력발전기가 이 순간 가족들이 사용하는 전기보다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반 가정집에서 전기를 만들어 사용하고 남으면 전기회사에 팔 수 있는 '스마트그리드(Smart Grid·지능형 전력망)'가 만든 생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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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시 구좌읍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의 한 가정집 지붕에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돼 있다. 이 집의 주인은 전기가 남을 경우 한국전력에 전기를 판매할 수도 있다. /LS산전 제공
이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난 9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제주도에 스마트그리드 시범단지가 문을 열면서 600여곳의 가정은 일상 속에서 스마트그리드를 경험하고 있다. 미국 콜로라도주 볼더시의 경우 1만5000가구가 스마트그리드 시대에 살고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도 스마트그리드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왜 세계는 이처럼 경쟁적으로 스마트그리드에 투자하고 있는 것일까?
◆태양광·풍력·전기차 시대엔 스마트그리드가 필수
앞으로 전기차가 상용화되면 전국의 도로 여기저기서 불규칙한 전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예컨대 새해 첫 아침 일출을 보려는 사람이 몰린 동해안에서 한꺼번에 많은 자동차가 전기 플러그를 꽂아 충전을 한다면 전국이 정전 등 전력 대란을 겪을 수도 있다.
특히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차츰 높아지면 이 같은 전력수급 불균형은 더 확대된다. 햇볕과 바람 같은 자연의 힘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어 전기 생산이 불규칙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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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현재의 전력공급 시스템으로는 미래의 녹색에너지 시대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전력수요에 따라 전기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고, 전기가 남는 지역에서 모자라는 지역으로 옮길 수 있는 효율적인 전력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스마트그리드 기술이다.
스마트그리드는 현재의 전력공급망에 정보기술(IT)을 결합해 전기를 공급하는 쪽과 이를 소비하는 쪽이 쌍방향·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도록 한 시스템이다.
예컨대 스마트그리드가 구축된 가정에서는 전기가격이 싼 시간대에 전기차 충전 같은 대량의 전기소비를 집중할 수 있다. 공장 역시 이 시간에 전기를 잔뜩 모아놨다가 전기가 비싼 시간에 모아둔 전기를 사용하면 된다. 또 사용하고 남은 전기를 팔 수 있어 각 가정과 기업은 단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발전 및 송전 설비를 덜 지어도 된다.
◆'소통' 강화가 핵심 기술
현재의 전력망은 발전소에서 나온 전기를 송전, 변전, 배전 과정을 거쳐 일방적으로 가정에 공급한다. 스마트 전력망은 가정에서 남는 전기를 전기회사로 보낼 수도 있다. 전기회사에서 집으로 보내는 전기의 전압이 220V(볼트)이면 집에서 생산해서 쓰고 남은 전기에 이보다 약간 높은 221V(볼트)의 전압을 걸어 밖으로 보내는 것이다.
스마트그리드 시대엔 계량기도 똑똑해진다. 가정에서 생산하거나 사용하는 전력정보를 전기회사에 실시간으로 전달한다. 또 전기회사에서 전기 가격정보를 받아 집 안 가전제품에 전달한다. 가전제품들은 스마트 계량기로부터 받은 정보를 활용해 전기료가 싼 시간대에 가동을 늘리거나, 이때 전기를 모아두게 된다.
황우현 한국전력 스마트그리드 실증팀장은 "기존 계량기는 고장이 나도 소비자가 신고를 해야 전기회사에서 알 수 있었지만 스마트 계량기는 자체 점검과 통신이 가능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산업계 지형도도 바뀌어
스마트그리드는 산업계의 지형도도 바꿀 전망이다. 전기 관련 산업이 활성화되고 통신과 가전, 건설 등 다른 분야까지 파급 효과가 이어질 것이기 때문. 정부는 스마트그리드가 전국으로 확대되면 2030년까지 에너지 수입은 47조원 줄어들고 74조원의 내수시장이 새로 생기며 수출도 49조원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지난해 미국 스마트그리드 시장은 214억달러(약 24조원), 전 세계 시장은 693억달러(약 77조원) 규모였다.
국내에서는 현재 제주시 구좌읍에 2013년까지 6000여가구 규모의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가 만들어진다. 이곳에는 한전·SK·포스코·LG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하고 있다.
김창섭 경원대 전자정보통신공학부 교수는 "스마트그리드는 발전소에서 사용자까지 한 방향이었던 지금의 전기공급 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기술"이라며 "스마트그리드가 보편화되면 전기소비 패턴이 바뀌면서 일상생활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스마트그리드(Smart Grid)
전력망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그리드'와 스마트를 조합한 것으로 '지능형 전력망'이라고 불린다. 전기회사가 각 가정으로 일방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기존 전력망에 통신기능을 더해 전기회사와 소비자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전기의 생산과 소비를 최적화하도록 한 시스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