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38.7× 106.5cm 비단 바탕의 수묵담채화로 보통의 동양화 두루마리와는 다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되고 있다. 왼쪽은 현실세계이고 오른쪽은 꿈 속의 도원세계인데 현실세계는 평평하고 완만하게 그렸고, 도원의 세계는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산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전개되고 있다. 현실세계는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린 듯한 느낌이고, 왼편의 도원세계는 위에서 바라보는 듯한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려져있다.
그림에는 안평대군의 발문부터 김종서,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서거정, 최항, 이개, 성삼문 등 당대 최고의 사대부 20여명의 찬문(칭찬하는 글)이 친필로 붙어있다. 이로 인해 이 [몽유도원도]는 그림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조선초기 문인들의 문학과 서예적 성취를 알게 하여 그 역사적 가치도 매우 높다.
이 작품은 조선초기 시, 서, 화의 정수를 결집한 작품으로 평가되며 한국화의 원형으로 조선시대 회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조선초기 학자인 성현은 이 작품을 두고 ‘그림이 신묘한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몽유도원도]는 현재 우리나라에 없고 일본의 덴리대학에서 소장 중인데 언제 일본으로 건너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에 탈취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안견의 영향

안견이 죽은 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세조 초기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견은 당대에 가장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그를 따르는 화가들이 많아서 조선후기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안견의 화풍을 따른 화가로는 양팽손, 신사임당, 김시, 이정근, 이흥효 등이 있었다, 이들 안견파의 특징은 산을 크고 웅장하게 표현하고, 인물이나 동물을 작게 그렸다. 그들은 몇 개의 흩어진 경치와 사물을 조합해 구성하는 방식을 선호하였고, 자연의 묘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붓놀림에 있어서도 필체가 드러나는 것을 감추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 그림들은 대부분 사실화라기보다는 중국의 산수를 상상하여 그리는 상상도가 많았다. 안견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후기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등장 때까지 이어졌다.
한편, 안견의 그림은 일본의 화단에도 영향을 주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화가이자 선승이던 슈우분(周文)이 1423년 대장경판을 하사받기 위한 일본 사절에 참여하여 조선으로 와서 4개월간 머무는 동안에 안견의 산수화를 보고 이를 배워간 것이다. 슈우분이 그린 [죽재독서도] 등은 안견의 화풍과 매우 흡사하다. 슈우분의 그림은 이후 그 화풍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 답습되어 무로마치 막부 시기 산수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안견의 화풍이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미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