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심은 행복에 굶주린
윤회하는 모든 중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제공되는
행복의 성찬입니다.
《입보리행론》3-33
가을이 오면 모든 것들이 풍요롭습니다.
여러분들의 좋아하시는 가을에다 결실로 얻어지는 모든 것들을 모아
조상님 전에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추석이 왔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쓸쓸해지는 것은
겨울을 맞이하는 길목에서 느껴지는 스산함 때문이겠죠.
여러분들은 이 가을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시나요?
넉넉해서 좋다고 하시겠죠.
풍요로움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가을이 오면 왠지 더 너그러운 마음올
그동안 지나온 일들을 돌이켜보며 다른 이들을
서운하게 하지는 않았던가 하고 반성하곤 하니까요.
지난 늦여름에 터진 연예인을 중심으로 한 학력위조사건을 기억하시죠.
사실 학력이나 학벌이 그다지 상관없는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학력을 위조하는 것은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 때문이 아닐까요?
학벌이 주는 후광을 기대했고, 그 후광 속으로 날아드는
불나방들 속에서 그들은 성공했습니다.
그들이 대학에서 어린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된 것이
가장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직업적인 생활을 하는 데는 그 거짓말이 경범죄 정도에 해당할지 몰라도,
그들이 대학에서 교수를 하기 위해선
졸업장과 학위가 필요했으므로
그들은 문서를 위조함으로써 범법행위를 하고 만 것입니다.
입학조자 하지 않은 대학의 성경시간에 공문으로 초대되어
성경강좌까지 한 간 큰 사람이 있다 하니 참 대단한 일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중학교를 중퇴한 것이 최종학력인
고은 시인은 올해 서울대에서 정식으로 강좌를 맡았다고 합니다.
서울대 측은 “그의 학력은 서울대 강의 자격과 무관하다.
시인으로서 그가 평생 쌓아 온 업적만으로 충분하다. 아니 과분하다.“하고 하면서
예술가로서의 존경을 표하는 것을 보면서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진실하게 살아가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잘못된 길을 가다가 아니라도 생각되면
확실하게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자 여러분, 그대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 사건을 접한 대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착잡합니다.
어떤 이는 학벌위주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며,
그들 또한 이런 사회의 희생양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는 이런 가식적인 사기행각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도 하지요.
이 두 가지 논쟁은 당연한 것입니다만,
다른 하나는 엄청난 독설을 통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인신공격형입니다.
그들의 글들을 읽다 보면 그 분노가 전해져 오는 것 같습니다.
비단 이번 사건만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잣대를 가해야 할 논쟁이 발생하면
인터넷이나 신문과 방송 등에서 토론이 아니라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올 것 같은 무서운 말들이 넘쳐납니다.
그들의 행위의 결과에 다라 자비심 없이 냉정하게 판단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강하고 공격으로 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에 부처님이 지금 우리들의 이런 모습을 보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남의 죄를 들추고자 하는 사람은 다섯 가지를 알아야 한다.
그 죄가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어야 하며,
그 때가 적절해야 하고,
법도를 어기지 않고 보탬이 되는 것이어야 하며,
거칠거나 험하지 않고 부드러워야 하며,
미움에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들추어야 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를 갖추면 남의 죄를 들츨 수 있다.
《잡아함경》18권 한글장 6채 17쪽
그동안 학력을 위조하며 거짓으로 살아온 이들에게
우리는 동정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거짓말이 그들의 행복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 지도 모른 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로써 그들은 병들고 그들을 따르던 많은 이들의 마음에도 상처가 남겼습니다.
더구나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기 마련이라 악업을 지었으니
악한 과보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지요.
불자라면 우리는 그들의 거짓된 행동을 처벌하기 위해서 논쟁하기 보다는
그들이 두 번 다시 거짓된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경책해야 합니다.
안 그대로 신경질 나는데 너 잘 걸렸다는 마음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을 삼아서는 안됩니다.
우선 그런 자세는 분노 때문에 자신이 증오심에 불타고
마음으로 병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 계속되다 보면 삶을 점차 불행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직장상사나 동료 때문에, 자식 때문에
부모형제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들과 헤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점점 시들어 가겠지요.
그들과 싸우다 보면 주변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남아 있는 외로운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나의 삶이 이렇다면 불자로서 나는 어떻게 이 상황을 대처해야 할까요?
첫째, 분노를 인욕과 관대한 마음으로 변화시키자.
둘째, 용서하자.
셋째, 자신을 사랑하자.
이것이 바로 보리심을 내는 것입니다.
보리심은 다른 말로 자비심이라고 합니다.
이 보리심은 수행의 목적의식이지요.
산을 오르는 등산가에게 정상이 목표라면
수행자에겐 보리심이 목표입니다.
보리심을 지닌 자는 반드시 사홍서원, 즉 중생을 다 건지고,
번뇌를 다 끊으며, 법문을 다 배우고,
불도를 다 이룬다는 맹세를 가슴에 담아두고
항상 수행할 것을 서원해야 합니다.
수행이 성취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 분노를 인내와 관대한 마음으로 변화시키자.[인욕]
보시와 부처님들께 올린 공양 등을 통해
수 천 겁 동안 쌓아 온
모든 공덕이 단 한순간의 분노로
파괴될 수 있습니다.
《입보리행론》5-3
수행! 기분 좋을 땐 수행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듯한데
정작 화가 치밀어 오를 땐 수행을 이렇게 해야 하는지
난감한 경우가 있으시지요.
아무리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해도 화가 솟구쳐
마음의 평화는 깨져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나를 화나게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이 점차 눈덩이처럼 커져만 갑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온통 그 사람이 보입니다.
나는 그 미운 사람에게 그만 꽉 잡혀 옴짝달싹 못 하고 맙니다.
내 마음 가득한 이 미움은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미쳐버릴 것 같다고 표현합니다.
마침내 분노가 폭발하면서 우리의 얼굴과 몸은 평온했던 사람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 되어 주변사람과 기르는 짐승까지
슬금슬금 도망가게 합니다.
그때 나오는 에너지는 가히 생명을 죽일 것 같기 때문이지요.
그 기운에 조금이라도 노출이 되면 함께 미움과 분노로 물들 것 같으니
달아날 밖에요. 그리고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
무서운 사람으로 각인이 되어버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끔찍한 일이지요.
부처님은 분노와 미움은 자비심과 이타적인 마음을 갖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고 합니다.
인간이 가치와 마음의 평화를 파괴하기 때문이죠.
분노의 표현인 부정적인 생각은
미움은 단순히 억누른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을 인내심과 관대한 마음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이것을 인욕이라고 합니다.
분노를 표현하고 발산하는 것이 좋지 않다면
어떤 해결방법이 필요한가에 대해
달라이라마는 명상을 통해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과
정면 돌파하는 방법 두 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면에 만족을 느끼고 친절한 마음과 자비심을 키우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여 마음의 평화를 만들어 놓으면
순식간에 분노를 터트리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나게 만드는 상황이 생길 때, 우리는 분노를 직접 마주하고
그것에 대해 명상해야 합니다.
어떤 것 때문에 분노가 미워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깊이 살펴본 뒤 그렇게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적절한 반응인지,
특히 그런 분논가 좋은 것인지 파괴적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런 노력으로 자제력이 생긴다면
다음에 그런 감정에 적극적으로 싸워 나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인내와 관용의 정신으로 그 부정적인 감정에
적극적으로 싸워 나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인내와 관용의 정신으로 그 부정적인 감정에 맞서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분노와 미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경험에도 여러 수준이 있지요.
가볍게 화가 난다면 당신은 그 순간에 그것과 직접 해결하십시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이 아주 강하게 솟구친다면
그것에 도전하거나 맞서기가 힘듭니다.
그런 경우 곧바로 그 일에 대해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된다면 그때야 비로소 명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분노한 원인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혹시 사회적 문제, 집안문제, 자신의 문제에 있어서
항상 참고 또 참자는 생각으로 살아오시진 않으셨는지요.
이제는 직접적으로 나서서 해결하시고
마음의 평안을 찾으세요.
그래도 안 되는 일은 부처님처럼 해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날,
젊은 청년 핑기카가 찾아왔습니다.
핑기카는 다른 종교를 수행하는 이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의 친척이 부처님교단으로 출가를 하자 너무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이 누구며, 화를 내는 사람인지
참을 만한 사람인지 떠보기도 하고 남의 제자를 가로챘으니
모욕도 줄 겸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처님을 만나자마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모욕을 끝도 없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원정사가 발칵 뒤집혔겠죠.
스님들이 핑기카를 향하여 달려가자 부처님은 놔두라고 합니다.
이 광경을 보고 핑기카는 부처님이 자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습니다.
부처님은 핑기카가 퍼붓는 욕설을 잠자고 듣고만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욕을 하던 그도 부처님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맥이 빠져 저절로 입을 다물고 부처님을 바라봤습니다.
이때를 기다렸다가 부처님은 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젊은이여, 그대의 집에도 가끔 손님이 찾아오는가?”
“물론 그렇소.”
“그러면 그대는 그들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는가?”
“당연하지!”
“만약 손님이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는가?”
“그야 물론 내 차지가 될 것이요.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요?“
“젊은이여, 오늘 그대는 나에게 욕설로 차려진 진수성찬을 대접하려 했소.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받고 싶지 않구려.
그러니 그 모욕적인 말들은 모두 그대 차지가 될 것 같소.
젊은이여, 만약 내가 그대의 욕설을 듣고 화를 내면서
똑같이 욕을 했다면 손님과 주인이 권커니 자커니 하는 꼴이 되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소.“
핑기카는 조용히 웃고 있는 부처님 앞에 너무나 부끄러운 나머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잡아함》42권 1152《빈기가경》에서-
인욕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참다 참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말합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욕이 아닙니다.
죽도록 참다가 도루묵을 만든 경우지요.
둘째, 용서하자.[참회]
우리가 인욕을 수행하게 되는 것은
나쁜 의도를 갖고 있는 이들 덕분으로
그들이 곧 우리들의 인욕이 원인이므로,
우리는 성스러운 불법처럼 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입보리행론》6-111-
분노를 미움으로 드러내지 않고 잘 참고 관대한 마음으로
자비심으로 변화시켰으면 이제는 분노를 일으킨 마음으로 참회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나를 분노케 하는 행동을 하게 된 그를 향해
참회해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과 물건을 훔친 사람의 죄를 논할 때
불교의 법은 물건을 함부로 두어 다른 이로 하여금
탐심을 일으킨 것이 훔친 사람보다 더 나쁘다고 합니다.
수행자는 항상 자신을 점검하고 나로 인해
타인이 불행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참회하고, 또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행자의 이상향인 보살의 길을 향한 마음 닦음입니다.
깨끗이 마음을 청소하고 나면, 나의 업장은 소멸되어
나를 중심으로 만나는 모든 일들이 다 보살의 모습이며,
보살의 마음으로 나를 도와주며 나를 부처님의 세상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때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은
나쁜 행위로 인해 쌓여 갑니다.
반대로 착하고 바르게 살며 항상 보시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선한 행위를 하면 점차 때는 벗겨지는 것입니다.
참회의 참은 ‘잘못했습니다’라는 뜻이고,
회는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부처님 앞에 앉아 참선, 명상, 기도, 염불을 하면서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깊이 반성하면
우리는 점점 청정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청정한 마음은 곧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당연히 분노와 미움은 사라져 가고 있겠지요.
셋째, 자신을 사랑하고.[행복]
나 자신과 같은 이들이여, 깨달으소서!
모든 것은 허공과 같다는 것을,
이것은 윤회의 뿌리를 자를 가장 예리한 칼이요,
깨달음으로 이를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아무리 참기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참아야 하는 것은
분노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기를 잉태한 엄마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열 달 동안 많은 것들을 조심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병들지 않게 보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처님의 성품을 지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더불어 다른 이도 부처님의 성품을 지닌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모두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같으므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듯 남들도 보호해야 합니다.
나와 남이 모두 행복을 바란다면 모두 함께 수행해야 합니다.
행복해지는 길이 바로 보리심을 발해 부처님의 성품이 드러나도록 하는 길이라면
그 수행이 어렵다고 한들 어찌 저 혼자 갈 수 있겠습니까.
모두 함께 가야 합니다.
그가 비록 나를 힘들게 하는 번뇌의 원천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무리 무섭던 사람도 자꾸 보면 보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사랑해야 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한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준비가 된 것이지요.
사랑을 한 방향으로만 하는 사람은 차별심이 생겨서 점점 더 무지해지고,
양 방향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은 평등심이 날로 늘어나
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부처가 되실 분인 까닭에
모두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움, 그런 것 놓아버립시다!
이 세 가지의 보리심을 내었다면 여러분들은
마음속에 자비심이 충만해지셨습니다.
수행자로서의 준비가 모두 끝난 것입니다.
이제는 불자로서의 결실을 준비해야 하는데
분노와 미움을 놓아버리고 자비심으로 채워져 가는 이 상태로
여러분들은 모두 정진해야 합니다.
깨달음은 정진에 달려 있습니다.
정진이 없으면 공덕도 없습니다.
바람이 없으면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얼마 전에 연꽃이 가득 피어 있는 연못에 갔습니다.
연꽃 향기에 내 마음과 몸을 맡긴 채 흠뻑 취해 있었지요.
그러다 싱그러운 푸른 잎사귀 사이로 아주 작은 꽃봉오리와
활짝 피어난 연꽃송이, 꽃잎을 떨어뜨린 채 태어날 씨앗을 품은 연봉까지
모두 한 연못 안에서 피고지고 한 장소에서
다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은 정말 신선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바라는 연못의 뻘 속에서
연꽃이라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것을 눈으로 봤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동시에 깨침의 길입니다.
깨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수행자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연못을 중심으로 모인 모든 것들,
물.뻘.고기 그리고 연꽃이 피기까지의 여러 모습들
,
연못 속의 연근과 연밥, 연봉과 꽃이 피어나도록
푸르게 받치고 있는 잎까지
모두 인연이 깊은 사바세계 수행자들의 모습과 다름없습니다.
마치 수행처의 방장 스님, 선원장 스님, 수좌 스님들과 후원 살림을 돕는
원주 별좌 스님들과 공양물을 보시하는
우바새와 우바이 불자들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간에 펴고 있는
포교를 담당하는 스님들과 포교사들처럼 보입니다.
불자로서의 결실을 원만히 이루려고 한다면
우리는 삼보에 귀의하고 불보살님에 대한 찬양과
예배와 공양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수행의 씨앗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을 감사하면서
공덕을 쌓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세상에 진리의 가르침이 항상 하기를 기원하며
정진하고 또 불법을 포교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가 쌓은 공덕을 모든 이들에게 회향해야 하는데
이 것이 바로 기복불교가 나눔의 불교로 바뀔 수 있는 길입니다.
수직의 나눔이 아니라 수평의 나눔이어야 겠지요.
이런 회향의 마음이 바로 대승보살의 마음입니다.
불교 수행에 있어서 결실이란 깨침입니다.
깨달음을 향해 가는 우리들은 일상에서 결실을 맺기 전에 만나아 하는
고통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마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우며 자라는 농작물처럼
폭풍, 가뭄, 우박, 병충해 그리고 돌보지 않는 농부의 게으름,
이런 것들은 우리들의 삶에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고통이 심해지면 당연히 분노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이 분노는 다시 원망하는 마음이 되어 나를 병들게 하며
무기력하게 하고 마침내 불행한 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수확해야 할 때 아무것도 건질 것 없는 쭉정이가 되어 버린다면
얼마나 비참해지겠습니까
이제 여러분들은 분노, 미움, 증오 이런 것들을 거두고
편안한 마음, 보리심을 낼 준비가 되셨습니다.
이제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래 삶을 성숙시켜 가노라며
수행자의 이상향인 보살도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여래의 씨앗을 심고, 여래의 성품을 나와 남에게서 발견해가며
보리심이란 정진력으로 보살피면
보살도라는 꽃이 피고 드디어 여래라고 하는 열매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그대들 모두 부처님이시니
지극한 마음으로 그대들의 자성청정심을 향해 모두 예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