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윤동재(시인)
무엇이
살맛나게 하는가? 진수성찬이 살맛나게 하는가? 명품으로 휘감고 사는 것이 살맛나게 하는가? 지위가 남보다 높은 게 살맛나게 하는가? 이름이
뜨르르하게 나면 살맛나는가? 누가 나에게 무엇이 살맛나게 하는가? 정색을 하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삶을 함께 나눈 아름다운
추억이 살맛나게 한다고. 추억을 먹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쓰러지지 않는다고.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초등학교
때 나는 여름방학이 되면 칠곡군 칠곡면 관음동(지금은 대구광역시) 큰외갓집에 가서 이모와 함께 방학 내내 보냈다. 이모가 방학 숙제도 살펴주고
곤충채집과 식물채집도 도와주었다. 이모가 대구 시내 갈 때도 데리고 가 주었다.
그때
우리 집은 경북 영천군 화북면 삼창동에 있었다. 지금은 화북면이 화남면과 화북면으로 둘로 나뉘어졌고 화북면사무소는 자천에 있지만 화남면사무소는
삼창에 있다. 우리 동네에는 지곡초등학교가 있었다. 교문을 나서면 냇물이 우리를 기다려주었다. 냇물을 따라 가보기도 하고 멱을 감기도 했다.
피라미를 잡기도 하고 다슬기를 줍기도 했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예쁘고 고운 여선생님이셨다. 이름은 정관주. 담임선생님은 방학이 되어 대구 나갈 때는 나를 대신동 삼송빵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담임선생님이 우리 동네에 사셔서 부모님이 미리 부탁해 두셨나 보았다. 그러면 이모가 미리 거기 나와 있다가 맞아주었다.
외삼촌은
여러 분이지만 이모는 한 분뿐이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랬던지 이모는 나를 끔찍이 좋아했다. 무엇이든지 좋은 것은 다 내게
주었다. 나는 이모가 주는 것은 고마움도 모르고 늘 넙죽넙죽 잘 받았다. 정관주 선생님과 함께 대구에 나와 삼송빵집에서 이모와 셋이서 빵도 먹고
도너츠도 먹고 아이스케키도 먹었다. 이모와 정관주 선생님이 무슨 얘기를 잠시 나누었는지는 도무지 기억에 나지 않는다.
이모와
나는 삼송빵집을 나와 정관주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달성공원에 가서 실컷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칠곡 큰외갓집에 갔다. 큰외갓집은 농사를 지으면서
담배도 팔았다. 논농사도 지었지만 채소농사도 많이 지어서 들깻잎이나 호박잎, 호박, 풋고추, 박, 오이를 대구 서문시장에 내다 팔았다. 채소를
기르는 것은 큰외삼촌 몫이었고, 들깻잎을 따고, 호박잎과 호박을 따고, 오이를 따는 일은 이모의 몫이었다. 그리고 시장에 내다파는 일은
큰외숙모가 맡았다. 나는 이모가 들깻잎을 따러 산자락 밭에 갈 때면 따라 나섰다. 어린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이모는 들깻잎을
따러 갈 때 꼭 나를 데리고 갔다. 이모가 들깻잎을 따는 동안 나는 산자락을 다니면서 산딸기를 따먹고 놀았다.
이모는
더러 대구 시내에 나가 친구를 만날 때도 나를 데리고 갔다. 주로 중국집에서 친구들을 만나 짜장면 한 그릇 사 먹고 이야기하다 돌아왔다.
짜장면이 나오기 전에 단무지를 미리 주면 어린 나는 그걸 미리 다 먹고 또 더 달라고 했다. 그러면 이모가 더 얻어주었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올
때도 이모는 대신동 삼송빵집에 가서 도너츠와 빵을 사서 달성공원에 갔다. 달성공원에서 이모와 나는 그걸 먹고 이곳저곳 둘러보며 쉬다가 큰외갓집에
돌아왔다. 삼송빵집을 꼭 들르게 된 것은 칠곡 가는 버스를 삼송빵집 앞에서 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달성공원에
가면 이모는 돌에 새겨진 한글을 짚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내가 생땀을 흘리며 읽어 내려가면 이모는 잘 읽는다고 나를 칭찬해 주었다. 커서 공부
잘 할 것이라고 힘을 북돋워주기도 했다. 한글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뜻도 모르고 음만 겨우 겨우 읽었다. 거기에 적여 있던 ‘세월歲月’이라는
한자말과 ‘침실寢室’이라는 한자말은 이모가 묻지도 않았지만 어린 나는 속으로 물으면 어쩌나 하고 시껍했다.
커서
보니 한글이 새겨져 있던 돌은‘이상화 시비’였다. 거기에는 <나의 침실로>라는 시인 이상화의 작품 일부를 새겨놓았던 것이다. “마돈나
밤이 주는꿈 우리가엮는 꿈 사람이안고 궁구는목숨의꿈이 다르지않느니/아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歲月모르는 나의 침실寢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게로” 대학에 진학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이상화 시인에 대해서 강의를 듣고 달성공원 이상화 시비를 찾았을 때는 이상화 시인이 내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더욱이 이상화 시인이 “너도 시 한 번 써 보래이! 시 한 번 써 봐!”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대학 2학년 때부터 부지런히 시 습작을 하다가 4학년 가을에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기 시작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추천을 마쳤다. 굼뜨고 재주가 모자란 탓에 지금까지 시집을 세 권 냈다. 시인이 되고 나서도 달성공원 이상화 시비는 자주 찾았다. 그때마다
부끄러워서 목이 움츠러들었다. 이상화 시인은 생전에 시집을 낸 적이 없지만 남긴 시들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 돋올새김 되어 있는데 나는 내가 시를
쓴다는 사실을 나밖에 모르고 있지 않는가.
지난
여름 역사, 문학을 전공하는 분들과 함께 중국 산서성 태항산 조선의용군 항일 전적지를 답사했다. 그때 하남성 정주에서 안양으로 가다가 휴게소에서
쉬었는데 과일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수밀도’를 팔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는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아하!
이게 이상화 시 <나의 침실로>에 나오는 바로 그 수밀도구나!’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사실
나는 그동안 ‘수밀도’가 복숭아의 한 종류겠거니 하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본 적은 없었다. 충북 감곡이나 경북 영덕 복숭아 산지에 가면 황도
백도는 쉽게 볼 수 있는데 수밀도는 볼 수 없다. 수밀도를 중국에서 보게 되다니! 과일은 세관 통과가 어려우니 사진을 찍어서라도 이상화 시인께
보여드리면 이해해 주시겠지 하며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다음에 달성공원에 가면 이상화 시인의 시비 앞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꼭
보여드려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이모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결혼을 했다. 이모부는 금성판매주식회사에 다니는 분이었다. 금성사에서 나오는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라디오 들을
비롯한 전자제품을 파는 회사였다. 이모는 이모부를 따라 부산, 광주, 충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나는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큰외갓집에도
갔지만 이모집에 가는 일이 더 많았다. 중학교 때는 이모가 교복을 맞추어 주었고 영어 사전도 사 주었다.
몇
해 전부터 나는 분당 율동공원 안에 있는 주말농장에 땅을 빌려 농사를 조금 짓고 있다. 그런데 해마다 빼놓지 않고 심는 것은 들깨다. 들깨가
자라서 잎을 딸 수 있게 되면 내 어린 시절 들깻잎을 따던 이모를 떠올리면서 혼자 미소 짓는다. 들깻잎을 한 잎 두 잎 따다 보면 어느 새
이모도 내 곁에 와서 들깻잎을 따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러면 내가 들깻잎을 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한 잎 두 잎 따고
있구나 하고 느낀다. 들깨를 심고 키우는 일은 추억을 심고 키우는 일이고 들깻잎을 따는 일은 추억을 따는 셈인 것이다.
올해도
빌린 땅에다 봄에 들깨를 절반이나 심었다. 농사를 짓다가 보면 팔월 중순이면 대개 무, 배추를 심기 시작한다. 내가 모시는 분(아내)이 들깨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무, 배추를 심자고 했다. 나는 늘 내가 모시는 분의 말씀을 무조건 따르지만 그것만은 안 된다고 했다. 구실은 들깨가 많지는
않지만 잘 키워 들깨 기름도 짜 보자고 했다. 한 홉이 되든지 한 되가 되든지 들깨를 수확하면 모란시장 참기름집에 가서 기름을 짜 보자고 했다.
내가 모시는 분은 못마땅해 하면서도 내 말을 들어주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살맛나게 하는가? 아파트 평수인가? 통장에 넣어둔 돈인가? 지위가 높아지는 일인가? 뜨르르하게 이름이 나는
일인가? 아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어린 시절 이모와의 추억을 떠올리면 살맛이 난다. 그리고 대구 달성공원은 그 많고 많은 공원
가운데 그저 그런 공원이 아니고 내게는 단 하나뿐인 ‘내 마음의 공원’이다. 나는 이 공원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마음으로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