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룡산[主龍山]에 관한 논담
김 종 훈
요 며칠 전, 전라도 화순고을 모후산자락의 조그만 마을, 사평초등학교 총동문회 임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매년 꽃피는 사월이면 동문축제를 여는 데, 그 행사 준비를 위한 예비모임인 셈이다.
여리고 철없던 시절의 아이들이 이젠, 제각기 장성하여 경향각처에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동경하던 터라, 친목위주의 행사진행으로 일정을 채우곤 했었건만, 올해부턴 보다 의미 있고, 추억을 가꾸는 장을 마련키 위해 “문예지 발간”을 추진 중이라는 동문회총무의 추진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고을과 출신학교를 상징하는 “문예지의 제호”를 공모하고 있으니, 좋은 문구가 있으면 추천해 달라며 운을 뗐다.
나는 한참을 궁리하고, 망설이다가 사회자에게 발언권을 얻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동문 여러분! 우리고을은 예로부터 모후산 밑에 둥지를 틀며 살고 있으니 ‘모후산골 사람들의 이야기’ 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데 이르렀다.
이윽고, 한 동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여러분! 모후산[母后山]은 우리고을의 주산[主山]이 아닙니다. 우리주민들이 여태까지 주산을 잘못알고 있었던 겁니다.” 하며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그 이유로는, 우리고을 사람들의 생활근거지로부터 서쪽에 자리하면서 호남정맥[正脈]을 이어받은 천운산[天雲山]이 곧, 우리고을의 주룡[主龍]이 될지언정, 정맥에서 분리 돼 지맥[支脈]으로 뻗어 내린, 동편의 모후산[母后山]은 결코 주룡이 될 수 없다는 논리인 듯싶었다.
얼핏 듣기론, 그럴 듯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그 부분에 대한 지식이 있어 보였다.
풍수며 산세를 보는 안목과 지식이 전무 하다시피 한, 나로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에 관한 견문도 없던 처지라, 대뜸 상투적인 말로 “행정 구역상 천운산은 동면에 속하고, 모후산이 남면인데 무슨 말이냐” 하고 쏘아 붙이듯 반론을 펴고 말았다.
‘바른말도 노기가 서리면 그른 말로 들리고 마는 법이던가!’
동문회의 좌장 격으로 참여한 원로동문 한 분이 내게 충고하여 꾸짖듯 “어이! 자내 그런 소리 하지말소!, 천운산 줄기가 우리 면으로 칠 할이고, 삼 할이 동면인데 거 무슨 말인가?” 라고 하면서 술병에 마개를 꽂듯 순식간에 내 말문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리고 여러 동문들 또한, 반신반의 하며 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빈 술잔만 서로 권하면서 어색함을 감추려 애쓰는 모습들이 역력해 보였다.
동문회총무 또한 주위를 한참 살피더니만, 중재가 필요함을 알아차린 듯, 그럼 두 제안을 모두 포용한다는 뜻에서 ‘모후산골 사평사람들’로 하면 어떨까요? 하고 중재안을 내놓아, 모두 박수로 일단락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주룡산에 관한 미심쩍은 설유는 시간이 갈수록 논담의 두미가 흐트러져, 천운산을 들고나면 모후산이 눈앞에 선하고, 모후산을 업고나면 천운산이 품에 드는 만큼이나, 가슴을 옥죄여가며 안쓰러운 느낌을 준다.
“고을, 고장, 고향”이러한 낱말들이 생겨난 배경에는 분명, 그 지역을 형성케 하고, 삶에 터전을 주는 유명산천이 있기 마련이며, 또한 그 산천으로 말미암아 꿈을 키우고, 위안을 받으며, 애락을 함께 나누며 살아간다.
그리고 고향을 그리며, 사유할 때마다, 맨 먼저 그것들이 소유한 사물들을 떠올리면서, 그에 얽힌 이야기들로 향수를 달래곤 한다.
다행이도 우리고장엔 아름다운 두 명산과 크고 작은 시냇물이 있어 참 좋다.
동편에 다소곳이 자리하고서 자모의 자태를 자아낸 모후산!, 그리고 장엄하기 그지없고, 위풍당당한 엄부의 상을 지닌 서쪽의 천운산!.
매일 아침, 모후산 너머 동쪽나라에서 물안개 헤집고 솟아오른 일출은, 우리고장 사람들의 희망과 애환을 함께 싣고 창공을 나른다. 그리고 곱게 익은 노을빛 되어 천운산 품안에 들고서야 하루의 결실을 살며시 부려놓곤 한다.
그러하기 때문일까? 동편에 모후산은 우리고을의 아침의 산이요, 어머니의 화신이며, 서쪽에 천운산은 저녁을 상징하는 산이요, 아버지의 분신이 돼, 불철주야 우리고장 사람들의 안녕을 보살펴 왔다 여기며, 그렇게 믿고 살았던 것이다.
이러 하건데, 두 명산을 두고 철없는 말로 주룡을 거론 한다면, 이는 마치 부모님을 한 자리에 모셔놓고 주인을 선택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단지, 지형지세와 산명을 우리인류의 생활상에 견주어 풍자해 보라고 한다면, 남좌여우[男左女右]라 하였으니, 모후산은 여성이요, 천운산은 남성이며, 지명이 모후[母后]이니, 또한 여성이요, 천운[天雲]은 남성의 상징이라고 가히 미루어볼 수 있겠다.
그리고 여성은 출산을 하는 것이니, 모후산은 유래와 전설, 사찰과 보물을 나았고, 남자는 안위를 일삼는 것이니, 천운산은 거친 바람과 침탈을 막아 주었으며, 정맥에서 지맥이 뻗어 나와 음양을 이루었으니, 천운산 지아비에 모후산 지어미가 합궁을 하는 형세로도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예로부터 지아비는 지어미의 택호를 얻어, 가업을 이루며 살아 왔음을 볼 때, 모후산댁에 모후산양반이 곧, 우리의 명산택호로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선현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의 피로 나에 몸을 이루었네”,하고 노래 하였다.
천운산에 걸터앉은 검은색구름, 마파람 타고 날아와 모후산 허리춤에 한바탕 몰아치고 나면, 임산부가 출산을 하며 양수라도 쏟아내는 냥, 소낙비를 퍼붓곤 하였으니, 천지의 조화가 아니고서야 이 어찌! 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뿐이 아니다. 두 명산에 얽힌 설화와 그 업적은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려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자비령을 넘어 쳐들어오자, 왕은 왕비와 태후를 안위코자 안동과 순천을 거쳐 이곳 모후산 기슭에 피난처를 마련하였고, 마침내 수려하고 아늑한 산세에 반하여 곧바로 가궁을 지어 환궁할 때까지 해를 넘기며 살았다고 전하며, 정유재란 때는 동복현감 김성원이 모후산에 노모를 모셔놓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백제 627년, 당나라 사람 유마운이 창건하였다는 유마사는, 나주 불회사, 영광 불갑사와 같이 백제시대에 건립돼, 호남불교의 맥을 잇고 있으며, 고려 초기 건립양식으로 보이는 팔각원당형의 해연부도는 보물 제1116호로 지정돼 있다. 그리고 절 입구에 보안교[普安橋]며, 요사채 안쪽에 있는 제월천[濟月泉]은 중생들의 수많은 사연과 희망을 전설로 안은 채, 오늘을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지명의 유래 역시 그러하듯, 모후산 위골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배나들이[舟坪마을]흥을 돋고, 용안소[龍安마을] 굽이돌아, 긴사래 밭에[長田마을] 목을 축이며, 천운산물줄기 사평천[沙坪川]을 합수목에서 만나, 장선[長船마을] 밑바닥에 물을 대며, 두강을[頭江마을] 건너, 송정[松亭마을]에 잠시 쉬었다가, 사수[泗水마을]를 지나, 배소[舟山마을]를 들러, 충용강[忠壯公유적지]을 선회하면서 안위를 돌봐주길 손꼽아 기원 한지가 오래다.
형세가 이러 하건데, 하물며 두 명산의 품안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은혜를 입고 우거하면서 어찌 참아, 주인을 가리며 주룡을 논한단 말인가?
모후[母后], 천운[天雲] 두 명산은, 우리 고을사람 모두를 함께 사랑할 뿐, 특정인을 가려서 들추지 않거늘~~~
첫댓글 가 본적은 없지만 글을 읽다보니 눈~앞에 소송이 나서 자란 동네가 선 하게 보이듯 합니다. 산수 경치 아름다운 곳에 성장 하신 덕분에 지금의 소송이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