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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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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 보면 사람이 참 인색해진다. 뭐든지 뚫어지게 째려봐야 글감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즐겨 쓰는 말로 사람이 참 ‘까칠해진다’. 게다가 타고난 품성도 옹색하여, 뭐든 작은 꼬투리 하나를 잡았다 싶으면 이를 침소봉대하여 전체 문제인 양 툴툴거린다. 오늘은 잘 만들어진 방송의 작은 꼬투리 하나를 잡으려 한다. 그것은 한국방송공사(KBS)의 ‘우리말 겨루기’이다. 예심에 1,600여 명이 참가하고 달인이 되기 위해 적게는 몇 달, 많게는 1년 넘게 공부한다는 프로그램, 말장난의 향연으로만 이어지는 토크쇼의 범람 속에서 국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우리말 지킴이, 국립국어원에서 보증한 품질 좋은 이 프로그램에 딴지를 걸려 하고 있으니 이제 필자는 곤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을 꺼내보자. 태생적으로 모든 퀴즈 대회는 출전자가 알고 있는 지식이 ‘맞냐, 틀리냐’의 문제, 즉 옳고 그름의 문제와 닿아 있으므로 이 프로그램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말 겨루기’를 문제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언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적인 직업의식이 발동한다.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우리가 겨루고 있는 그 ‘우리말’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겨루어야 할 우리말, 그것은 정말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퀴즈의 특성상 낱말을 빨리 떠올리는 순발력을 뺀다면) 표준어이다. 또한 우리말 실력을 겨루자고 할 때 그 우리말은 ‘지나간 말, 기억되지 않은 말, 말한 적 없는 말’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겨루어야 할 우리말은 ‘공부’해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우리말’인데도 남이 써 놓은 책을 봐야지만 알 수 있다. 서점에 널려 있는 ‘당신의 우리말 실력은?’류의 책들이 언어를 과거로 계속 회귀시키고 현재의 언어는 뭔가 잘못된 것, 고치고 증보되어야 할 것, 더럽혀진 것으로 보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돌아가야 할 무엇, 그래서 지금은 거의 혹은 전혀 쓰이지 않는 말들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말 ‘실력’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국어’ 앞에만 서면 그렇게도 작아지는 것은 아닐까? 표준어를 국가에서 제어하는 한, 그것은 은근할지언정 난공불락의 권력이 된다. 개인은 그 말에 어떠한 각주도 달 수 없으며 오로지 수긍하고 따라야 한다. 물론 권력 자체가 무어가 그리 나쁘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의 효과는 개인의 자발적 복종, 문제의식이 소실된 추종을 낳는다. 그래서 자신의 입에서 나오지만 언제나 표준에 미치지 못하므로 정정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내 말은 늘 부족하며 불구적 우리말, 우리말 아닌 우리말이 된다. 따라서 ‘우리말’은 아무 의심 없이 ‘표준어’와 동의어로 쓰이는 것이다. ‘우리말 겨루기’가 실제로는 ‘표준어 겨루기’, ‘맞춤법 겨루기’가 된다. 이것은 정당하지 않다. 언어는 그렇지 않다. 일반 상식 퀴즈와 언어 퀴즈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지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기술적(記述的) 지식과 다른 하나는 과정적 지식이다. 기술적 지식은 각각의 지식이 분리되어 있으며 기억하느냐 못하느냐, 또는 정확하게 아느냐 부정확하게 아느냐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6.29 선언은 누가 했는가?”, “1평(平)은 몇 제곱미터인가?”, “‘소나기’를 지은 작가는 누구인가” 등에 대한 지식은 모르면 그저 “무식하다”, “그것도 모르냐”는 정도의 핀잔만 들으면 된다. 그렇지만 과정적인 지식은 이와 다르다. 과정적인 지식은 하위 지식들이 전체 지식과 분리되지 않고 통합된다. 부분에 대한 지식이 전체 지식에 유기적으로 통합된다. 예컨대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은 페달을 밟아 바퀴를 돌리는 일과 균형을 잡는 일, 속도를 내거나 줄이는 방법, 모퉁이를 도는 방법 등을 분리하여 기억하지 않는다. 두 가지 지식이 엄격하게 분리되지는 않지만, 상식 퀴즈는 기술적 지식에 가깝다. 언어에 대한 지식은 어떤 성격일까? 언어학자조차도 ‘단어’는 하나하나씩 분리되어 있는 기술적 지식이고, ‘문법’은 체계를 이루며 통합되고 확장되어 가는 과정적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어’와 ‘문법’은 구분되지 않는다. 어떤 언어학자는 “각각의 단어는 고유한 문법을 갖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모든 언어 지식은 그것이 단어이든, 문장이든 다 ‘과정적 지식’이다. 그런데 우리말 겨루기는 그러한 과정적 지식을 기술적 지식으로 변경한다. 단어들은 또각또각 나뉘어 다른 단어들과는 무관하게 고립되어 홀로 존재한다. 여기에 가장 큰 ‘실증적’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이 사전의 뜻풀이다. ‘우리말 겨루기’는 사전 뜻풀이를 절대화한다. ‘우리말 겨루기’에서 사전 뜻풀이를 절대시하고 있음을 극명히 보여주는 코너는 1단계 다섯째 판이다. 다섯째 판은 ‘제시된 낱말을 보고 뜻 맞히기’이다. 예를 들어 ‘자몽하다’라는 낱말을 주고 (‘(ㅈ)(ㄹ) 때처럼 (ㅈ)(ㅅ)이 (ㅎ)(ㄹ)한 상태이다’ 식으로) 뜻풀이에 쓰이는 말의 첫소리를 맞추고 나서, 이 낱말의 뜻이 ‘(졸릴) 때처럼 (정신)이 (흐릿)한 상태이다’라고 말하면 ‘정답!’이 된다. 낱말 자체도 생소할 뿐만 아니라, 그 뜻을 추리하여 맞히는 과정이 거듭되다 보면, 대중들은 사전 뜻풀이가 낱말의 ‘의미’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자닝하다’의 뜻은 무엇인가? ‘파니’는? 도대체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인가? 물론 달인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이 문제들을 너끈히 풀지만, 필부 입장에서는 그 답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부디 ‘실력 없는’ 사람의 투정이라 보지 말기를. 단어를 정의할 수 있는가? 그것도 ‘옳게’ 정의할 수 있는가? ‘도깨비’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사전을 펼쳐 보니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표준대사전)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하고서 비상한 힘과 괴상한 재주를 가져 사람을 호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험상궂은 짓을 많이 한다는 잡된 귀신’(민중사전)이라고도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사전의 공통분모인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 ‘잡된 귀신’이 도깨비의 의미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잡된 귀신’은 무엇인가? 우리말에 대한 질문이 ‘너 이 단어 아냐?’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모국어의 아름다운 도약은 먼 훗날의 일일 것이다. 그럼 퀴즈 프로그램에서 뭘 물어보란 것이냐고 항의할지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무책임해 보이겠지만 ‘묻지 말라’이다.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하지 말라’이다. 언어는, 의미는 퀴즈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언어는 알아맞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람을 ‘너는 잘 산 인생’, ‘너는 못 산 인생’이라고 판별할 권한을 가진 이가 있을 수 없듯이, 언어도 ‘이 말은 옳고 저 말은 틀렸다’고 말할 권한이 그 누구에게도 없다. ‘의미는 이것!’이라고 말할 방법이 없다. 의미는 비결정적이며 중의적이다. 뜻풀이를 맞혀야 하다니, 이 얼마나 무섭고 폭력적인 발상인가? 낱말을 정의(定義)할 수 있다는 생각, 정의된 법전이 있다는 생각은 언어에 대한 왜곡된 의식을 낳는다. 언어를 맞고 틀리고의 문제로 단순화할 때, 그런 행위만으로 ‘우리말’(표준어)은 ‘오만한’ 이데올로기로 치닫게 된다. 언어에는 유일무이한 속성, 변경되지 않는 무엇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럼 언어는 무엇인가? 개인이 ‘폐쇄적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상호의존과 관계의 고리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듯이, 언어 또한 ‘고정된 언어’가 아닌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언어는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단어는 그것이 단어인 순간부터 다른 단어와의 상호의존의 고리, 다른 단어와 이어지는 연속의 질서 속에 놓인다. 언어를 이렇게 볼 때 사전에 갇힌 언어, 외우고 맞혀야 하는 언어가 아닌, 즐기고 삶을 확장시키는 언어, 관계 속에서 시시각각 생성되는 언어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낱말의 의미를 말하더라도 그것은 늘 불완전하며,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는 불온한 몸부림일 뿐이다. 언어의 불확정성을 망각하게 만드는 모든 시도는 설령 그것이 ‘상금’을 건 흥미로운 내기일지라도 중단되어야 한다. 의미는 언제나 생성 중이고 변화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를 고정시켜 놓은 사전은 언어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원죄를 타고 난다. 설령 몇 개의 사전에서 일점일획도 다르지 않은 뜻풀이를 하더라도 그것은 부정직한 베껴 쓰기의 결과일 뿐이지 모든 언어 사용자들이 공인한 불변의 확정태일 수 없는 것이다. 의미는 다른 낱말로 ‘다시쓰기’될 뿐이다. 다시쓰기는 의미가 역동적으로 계속 확장해 간다는 뜻이다.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이 국가가 과학적 권위를 부여한 ‘뜻풀이’일지라도 미안하지만 결코 받아들이고 수긍할 수 없다. 사전에 담긴 뜻풀이는 그저 그 기호의 존재를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손가락이 없을 때 아쉽긴 하겠지만, 그것이 의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을 의미라고 우기면 안 된다. 사전 뜻풀이는 의미가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실체로 환원될 수 있다는 허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 기호 속에 고정된 의미, 잘 정리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오만한 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것이다. ‘당신 자신도 다른 텍스트에 대한 오만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국어학자들은 자신들이 사전에 적어놓은 뜻풀이가 인쇄되지 않은 수많은 ‘의미’에 대한 오만한 텍스트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퀴즈 프로그램 ‘우리말 겨루기’는? | |
첫댓글 김진해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또다시 어려운 국어를 실감하게 되네요. '우리말 겨루기' 프로그램을 그렇게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오늘 처음 해봤습니다. (어려워서) 문장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말씀하시려는 내용에 대해서 감이 옵니다. 그동안 대충 훑어보고 가던 '아름다운 우리말'을 오늘 새삼스럽게 또박또박 잘 읽고 갑니다. 지현씨 고맙습니다.
저도 글이 살짝 어려워요..감사합니다, 선배님 ㅎㅎ
우리말 겨루기를 보면서 글자 한자라도 틀리면 정답이 될 수 없는 뜻풀이 문제가 제일 어려운 코너인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글을 읽으면서 아주 많이 공감을 합니다..물론 저도 모두를 이해한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