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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조선후기 문화중흥의 극점에서 조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이루어낸 화성 신도시 건설사업
(華城城役)은 수원에 민족문화의 위대한 금자탑을 남겨놓았다. 자족적 신도시(自足的 新
都市) 건설을 지향하였던 정조대의 선인들은 뛰어난 문화역량과 차원높은 역사의식을 가
지고 화성을 건설하였으며, 그 자취는 화성성곽과 화성행궁(華城行宮), 기타 수많은 부대
시설과 만석거(萬石渠, 일명 일왕저수지), 축만제(祝萬堤, 일명 西湖)저수지 등 치수와 농
업진흥을 위한 여러 시설에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계획도시로서 건설된 화성은 단순한 지방적 문화유산이 아니라 정조대 조선 전통문화의
세련성과 다양한 전체상을 조망하게 하는 국가적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더구나 화성이 건설된 이후 화성 신도시 건설의 전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한 공사보고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10권 10책으로 간행됨으로써 화성은 언제라도 완벽
한 복원이 가능한 문화유산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지난 1996년은 이러한 정조시대의 신도시 '화성'이 준공된 지 200년 되는 해였다. 이 해
를 보내며 '사적3호 수원성곽'은 국가에 의해 '사적3호 수원 화성'으로 다시 지정되어 공식
적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는 일제가 '숭례문(崇禮門)'과 '흥인지문(興仁之門)' 등 정식 명칭
을 제쳐두고 '남대문' '동대문' 등의 속칭으로 문화재 지정을 하였던 것을 바로잡는 조치의
일환이었다.
사실 '화성'은 단순히 수원성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곽으로 둘러싸인 수원 신도시 전
체의 정식 이름이자 본명이었다. '화성'이란 이름은 화성에 성곽이 건설되기 1년 전,
1793년 1월 정조에 의해 팔달산(八達山) 아래 새로이 조성된 신도시를 지칭하는 것으로
등장하였다. 당시 정조는 팔달산에 올라 남쪽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잠든 현륭원(顯隆園)
을 바라보며 그 뒷산인 '화산(花山)'의 '花(花는 華와 통용)'를 따다가 팔달산 아래 신도시
의 이름으로 삼았던 것이다. 신도시 화성에 다시 '화성'이란 이름으로 불리우는 성곽이 건
설되기 시작한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화성은 전장 6Km에 달하는 화성성곽은 물론 6백 칸에 달하였던 거창한 규모의
화성행궁, 그리고 화성 신도시의 수많은 도시기반시설과 생산기반시설까지를 포함하는 팔
달산 기슭의 신도시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일본사람들이 수원에 있는 성곽이라고 하여 속칭 '수원성곽'으로 사적
지 지정을 한 이후, 그간 우리는 이를 추종하여 본명과 신도시로서의 의미를 잊은 채 '수원
성'이라 불러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껏 화성은 성곽만이 전부인양 인식되게 되었으
며, 오늘까지 문화유산의 보존과 복원도 성곽에만 집중되어 화성의 더많은 부분은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무차별적으로 훼손되어 왔다.
더구나 우리는 '사적3호 수원성곽'의 잘못된 지정을 시정하여 화성의 본명을 되찾는다고
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일제시대 이래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아직도 '화성'의 신
도시로서의 면모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여 '수원화성'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다시 성곽
만을 문화재로 지정하게 되었으며, 성곽 외의 수많은 문화유산은 모두 외면한 채 이제는
성곽만의 '수원 화성'을 '뛰어난 군사건축물'이라고 하면서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하기에 이른 것이다.
2. 화성(華城)건설의 동기와 역사적 의의
화성 신도시는 1794년(정조 18) 1월 부터 1796년(정조 20) 10월까지 국력을 기울여
진행된 호대한 건설사업의 결과로 탄생하였다. 전성을 맞았던 조선의 경제적 능력과 문화
적 역량이 남김없이 투입된 이 신도시는 조선 사회와 문화의 발전 성과가 반영된 첨단의
계획도시로서, 정조로서는 즉위 이래 품어온 오랜 숙원과 꿈의 실현을 위한 기반을 마련
한 것이었다.
화성은 정조의 장기적 정국 구상에 따라 건설되었다. 1789년(정조 13) 정조는 양주 배봉
산(현재 서울 전농동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초라한 묘소를 천하명당이
라는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여기에 왕릉에 버금가는 위의를 갖추었으며, 화산 아래 있던
수원 읍치는 팔달산 아래 현재의 위치로 이전시켰다. 그리고는 다시 5년만에, 살아있었다
면 사도세자와 혜경궁(惠慶宮)이 함께 육순(六旬)이 되는 해를 맞아 10년 계획으로 화성
신도시 건설사업을 일으켰다.
1794년 1월, 화성성역의 착공은 10년 후 갑자년(甲子年, 1804년)에 왕위에서 물러나
수원으로 은퇴하고자 하였던 정조의 의중에 따른 것이었다. 갑자년은 현륭원을 천하명당
자리에 옮긴 후 그 음덕인 듯 바로 다음해 1790년에 얻은 왕세자가 15세가 되어 성년(成
年)에 들어서며, 혜경궁이 칠순(七旬)이 되는 해였다. 정조로서는 사도세자를 국왕의 위격
으로 추숭하는 일이 숙원이었음에도 이를 자신이 추진하는 것은 영조의 각별한 부탁을 저
버리는 결과가 되므로, 장차 전위(傳位) 후 자신의 부탁을 받아들여 새 임금이 사도세자
의 추숭을 실현하도록 의도하였다.
한편 성역이 한창 진행되던 1795년 윤2월 정조는 혜경궁을 화성에 모시고 가서('乙卯園
幸') 회갑 잔치(回甲 進饌宴)를 성대히 치루고, 다음해 1796년에는 화성성역의 대역사(大
役事)도 훌륭히 마무리함으로써 즉위 20년을 맞은 왕권의 공고함을 과시하였다. 더구나
국초의 한양(漢陽) 건설(1394년) 이후 꼭 400년만에, 그를 의식하며 수원에 대역사를 일
으켜 한양에 비견될만한 훌륭한 도시를 2년여의 단기간에 건설해 냄으로써 중흥을 맞이
한 조선의 국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화성성역은 정조의 왕권 강화와 조선왕조의 중흥
을 상징하듯 추진되었던 국가적 사업이었던 것이다.
화성 신도시의 건설은 정조로서는 갑자년 이후 사도세자의 추숭과 자신의 은퇴를 대비하
는 사업이었지만 이는 조선사회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추진된 사업이
기도 하였다. 영·정조대의 조선사회는 전면적 변동에 직면하여 있었으며 조선사회의 중심
이었던 서울은 전사회적 변화의 핵심에 위치하여 그 변화를 선도하고 있었다. 화성 신도시
의 건설은 서울에서 비롯된 이러한 기류의 귀결이었다.
서울은 영조 정조대에 급격한 도시적 발전을 이루고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며 대전환을 맞
고 있었다. 국내외 유통경제망의 중심으로서 서울은 상업의 요지 곳곳을 연결하는 교통로
와 대청 대왜 무역로를 통하여 외부세계와 연결된 대도시로 발전하였으며 경화사족(京華
士族)의 주도로 서울만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서울의 도시적 발전은 서울생활권의
확대와 수도권의 발달을 가져오고, 서울에서 삼남(三南)으로 향하는 교통로의 확대와 수
도권 교통의 요지에 새로운 도시 건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화성신도시를 건설하여 여기에 유수부(留守府)를 둠으로써 기존의 개성, 강
화, 광주유수부와 함께 서울을 동서남북으로 둘러싼 수도권의 4유수부 체제를 완성시키
게 된다. 특히 서울 남쪽으로 과천을 거치는 기존의 교통로 외에 서울에서 시흥 안양을 거
치는 시흥대로(始興大路)를 개설하여, 화성 신도시를 매개로 삼남지방과의 보다 원활한
연결을 도모하고 화성에 상업세력을 양성하여 화성을 새로운 상업도시로 등장시켰다.
또한 화성에는 당시의 농업생산력 발달 추세에 부응하여 만석거저수지 등 수리시설과 대
유둔(大有屯, 일명 北屯) 등 시범농장을 설치하고 여기에 최신의 수리 및 영농기술을 적용
함으로써 화성은 전국적 농업개혁을 선도하는 도시로 떠오르게 되었다. 화성건설과정에
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고안한 거중기(擧重器)와 여러 최신의 기술이 실용화되었
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수차(水車) 등 외래의 기계와 수리기술이 시험되고,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과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등 학자들이 구상하였던 농업론이 실현
되는 등 우리나라 농업발달사에 획기적 사건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화성신도시 건설은 생산력과 유통경제 발달에 따른 당시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직
접적으로 반영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당시 진보적 학자들의 새로운 학문연구 성과도 적극
도입되었다. 조선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부응하는 선진적 도시로서 화성은 장차 정조가 상
왕(上王)이 되어 내려와 머물게 될 때 새로운 정치적 위상을 가지며 더욱 획기적으로 발전
할 것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1800년 6월 급작스러운 정조의 서거로 화성 신도시의 더이
상의 발전은 좌절되고 갑자년(1804년) 이후를 겨냥하였던 정조의 오랜 숙원과 꿈 역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갑자년 이후를 겨냥하여 건설된 신도시 화성은 정조 사후 예정되었던 역할을 하지는 못하
였지만 그 후로도 기왕의 규모를 유지하며 정조의 꿈의 문화유산이자 정조시대의 문화적
금자탑으로서 오늘까지도 건재하고 있다. 현재 백만 인구의 삶의 터전으로서 수원이 가지
는 경기도 도청소재지로서의 정치적 위상과 농업진흥청, 서울대학교 농생대가 있는 농업
연구 중심도시로서의 위상, 1번 국도와 경부선 철도가 관통하는 교통중심지이자 상업중심
지로서의 위상은 이백년 전 신도시 건설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때 형성된 성곽도시로서의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외관과 수많은 문화유산은 그간의 무분별한 훼손에도 불구하고 민족
사 위에 찬연한 광채를 남기고 있다.
3. 화성의 문화유산과 현황
화성성역은 1804년으로 예정되었던 정조의 전위(傳位), 그리고 상왕(上王)으로서의 역할
과 노후 생활에 대비하여 그를 위한 여러 시설을 갖추는 신도시 건설사업으로 추진되었
다. 단순히 장용외영(壯勇外營)이 주둔하는 군사시설인 성곽 건설사업으로만 추진된 것
이 아니라, 상왕의 정치적 영향력과 군사적 경제적 기반이 유지되며, 여기에 신료 군병 백
성이 어울려서 윤택한 생활을 유지해갈 수 있는 자족적이며 계획적인 신도시로서 화성과
화성성곽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화성에는 대도회로서의 행정 군사기능과 소비기능, 생산기능 등이 함께 갖추어졌
으며, 화성의 도시계획은 화성의 특수한 도시적 역할과 기능에 유의하여 입안되었다. 화성
의 모든 시설물은 인공과 자연의 조화, 신기술과 전통기술의 융합, 평상시와 비상시 기능
의 상보적 결합 등을 통하여 기능적이면서도 세련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정조시대의 문
화적 능력은 인공적 시설물들이 지리적 조건과 지형, 자연환경 등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그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외관과 실용적 기능성을 함께 가지도록 하고 있었다.
화성 신도시 건설사업의 결과, 수원에는 정조가 우리나라 성제(城制)의 신기원을 이루었
다고 자부한 화성성곽을 위시하여 수많은 유형의 문화유산이 남게 되었다. 화성성역은 단
순한 성곽만의 건설이 아닌 자족적 신도시의 건설과정이었으므로 화성에는 도시기반시설
과 생산기반시설이 함께 갖추어졌으며, 이들은 각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유물 유적으로
태어났다.
이들 문화유산들은 극점에 이른 진경시대 조선문화의 수준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래적인 것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것을 보다 세련시키고자 하였던 정조시대
문화 변동의 추세를 극명히 반영하고 있어서 그 올바른 이해는 오늘 우리 문화의 방향성
을 모색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이 외에도 화성에는 자료상으로 남은 유형·무형의 수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수원의 춘팔경 추팔경과 같은 도시환경과 경관, 그리고 조선후기 최대의 문화예술
행사였던 1795년 을묘원행(乙卯園幸 - 혜경궁 회갑잔치)에서의 봉수당진찬연(奉壽堂進
饌宴) 낙남헌양로연(洛南軒養老宴) 등 수많은 행사와 여기서 공연되었던 무용, 음악, 그리
고 성조식(城操式) 등 군사훈련의식과 여기에 곁들여졌던 일반 백성들의 농악과 탈춤 등
이 그것이다.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등 상세하고도
방대한 자료 자체가 정조대의 놀라운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거니와, 이들 자료에 낱낱
이 기록됨으로써 언제나 복원이 가능하게된 당시의 문화와 예술, 생활상이 아직은 미지의
엄청난 민족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화성성역의 결과물로서 조선후기 최고의 수준을 발휘한 이 수많은 유·무형의 문화
유산 가운데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은 화성성곽과 몇 채의 건물 등 극히 일
부의 유형문화재에 지나지 않는다. 사적 3호 수원 화성(水原 華城) 외에 보물 402호 팔달
문(八達門), 보물 403호 화서문(華西門), 사적 115호 화녕전(華寧殿), 유형문화재 24호
지지대비(遲遲臺碑), 기념물 19호 노송(老松)지대, 기념물 65호 수원행궁 낙남헌(水原行
宮 洛南軒), 문화재자료 1호 수원향교(水原鄕校) 정도가 지정되어 있는 것이 고작이다. 더
구나 해방 이후 화성에 대한 본격적 연구나 개별 문화유산의 평가작업 없이 일제(日帝)의
문화재 지정을 그대로 답습한 문화재 지정상의 허점, 그리고 후진적 문화의식 때문에 화성
의 문화유산들은 그 200주년되는 해에도 중요성이 망각되거나 심지어 대대적 훼손의 위
기를 맞았던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화성성곽과 일부 시설물만이 문화재로 지정된 까닭에 화성성역의 일환으로 건설된 수많
은 개별 시설물 또는 부대시설물들의 정당한 가치가 매몰되어 버렸으며, 만석거, 축만제라
든지 남수문 터와 같은 부분은 아예 문화재 보호지역 지정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러한 허
점은 화성의 전통문화유산인 수원 춘팔경 추팔경과 같은 아름다운 도시환경의 보존을 외
면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재관리국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수원시가 남수문(南水門)터 위
로 수원천의 복개를 강행하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조선후기 제일의 농업유적으
로서 200년 선진영농의 전통이 서려있는 만석거저수지와 축만제(일명 西湖), 시범농장
인 대유둔과 축만제둔(祝萬堤屯, 일명 西屯) 등이 보호는 커녕 화성건설 200주년이 되던
해에 수백억 원을 들인 매립으로 무분별하게 훼손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를테면 1795년 5월 18일 준공되어 정조대 선진영농의 상징이자 수원추팔경(水原秋八
景) '석거황운(石渠黃雲; 누렇게 익은 벼가 황금물결 이룬 만석거 주변 풍경)'의 장관을 과
시하던 만석거저수지는 수원시가 1989년부터 300억원이 넘는 지방비를 투입하여 전체
의 반 이상을 매립, 공원의 주차장과 테니스장을 만드는 등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수원성
200주년 기념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 중이던 1996년 원형을 완전히 잃고 황폐한 모습
만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항미정(杭眉亭)과 함께 수원팔경(水原八景) '서호낙조(西湖落
照)'의 경관을 자랑하던 조선후기 최대의 농업유적 축만제 역시 그간 엄청난 공사비로 매
립사업이 진행되어 아름다운 원형을 잃었고, 유적의 역사적 의미는 아랑곳 없이 매립된 위
에서는 '수원성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계연날리기대회'가 진행되었다. 그런가
하면 만석거와 축만제(서호) 곁에 제대로 자리잡았던 서울대학교 농생대는 만석거가 200
주년을 맞은 1995년, 200년 선진영농의 전통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무작정 유서깊은 터
전을 내버리고 서울로 캠퍼스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화성 신도시에는 장차 정조의 전위 후 거주까지도 대비하며 상왕(上王) 주도의 행사 및 화
성유수부의 행정을 위한 시설로서 전체 6백칸에 달하는 대규모 행궁(行宮)도 건설되었
다. 일제의 철거로 현재는 낙남헌(洛南軒) 단 한 채만이 남았지만, 건물을 생활과 문화의
공간으로 차원높게 이해하지 못하여 우리는 일제의 무차별적 파괴의 뒤를 이어 그나마 남
은 낙남헌을 유린하는 상황에 있다. 한편에서는 행궁을 복원한다고 공사를 벌이면서 혜경
궁 회갑연과 양로연, 화성낙성연(華城落成宴) 등 온갖 중요행사가 열렸던 낙남헌 앞뜰에
정조대의 자취는 찾아볼 길 없고, 세종대왕 동상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이승복 어린
이 동상만이 세워진 채로 방치되는 데서도 오늘 우리의 문화유산 인식과 보존의 수준이 얼
마나 파행적인가를 알 수 있다.
4. 맺음말
선인들은 세련된 문화적 역량과 차원높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화성을 건설하였다. 화성성
곽과 화성행궁, 기타 부대시설들에 그대로 남아있는 역사와 전통의 자취는 오늘 우리가 새
로운 역사창조를 기도할 때 출발점이 된다. 그러기에 화성성역 2백주년은 그 역사적 의의
를 기리고 화성의 원형과 여기에 실린 선인들의 뜻을 되새겨봄으로써 현재를 극복하여 미
래를 건설하여갈 지혜를 얻어내는 계기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착실한 연구를 외면한 채 주먹구구식으로 2백주년 기념사업이 진행되는 이면에서
추진된 남수문 자리 수원천의 복개와 만석거, 축만제의 매립 훼손, 그리고 수많은 유·무형
문화유산의 망각은 우리의 파행적 문화의식과 역사의식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더구나 한
쪽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그 훼손을 자행하면서, 이제는 그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다
고 '서양과 동양의 과학을 통합하여 발전시킨 군사건축' 운운하며 화성의 원형을 일개 성
곽으로 축소 왜곡하여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록하기에 이른 것은 우리가 처한 문화
적 후진성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 일이었다.
화성건설 2백주년을 헛되이 보내고 난 지금, 화성의 문화유산을 위하여 어떤 일보다 시급
한 것은 화성의 역사와 전통을 올바로 인식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를 토대로 화성의 자족적 도시로서의 전모를 파악하고, 여기에 구현된 선인들의 차원높은
구상을 이해하며, 그에 따라 유·무형 문화유산의 원형을 되찾는 일이다. 화성이 단순한 지
방적 문화유산이 아니라 국가적, 그리고 세계적 문화유산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이 일에는
수원 지역사회만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적극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화성 신도시 건설과정에서는 부실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그리고 유사시 언제라도
복원이 가능하도록 상세하고도 풍부한 자료를 남겨놓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화성과
관련된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은 대부분 연구만 한다면 완벽한 복원이 가능하다. 남겨진 자
료들을 활용하여 화성의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일은 전통문화의 재현을 통해 그를 올바로
평가하고 계승하는 일이 되며, 나아가 부실과 졸속으로 얼룩진 오늘 우리시대의 문화적 후
진성을 반성하여 그를 지양하는 토대가 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문적 연구기관
의 설립과 연구에 대한 지원이 긴요하다. 이와 함께 지난 날의 오류를 솔직히 반성하고 그
를 시정하는 과감한 조치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孫禎睦, 1977 {朝鮮時代 都市社會硏究} (일지사)
金東旭, 1996 {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발언)
유봉학, 1996 {꿈의 문화유산, 화성 -정조대 역사 문화 재조명-} (신구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