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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虛), 공(空), 무(無) : 무극(無極), 태극(太極)
《중1이 알아야할 수학의 절대지식》이라는 책에서 숫자 “0(零, zero)”의 4가지 의미를
설명합니다. 본 포스트에서는 숫자 “0”의 의미에 대하여 위 책의 내용을 소개한 후
동양에서 “0”과 비슷한 개념인 “공(空)”, “허(虛)”, “무(無)”의 차이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중1이 알아야할 수학의 절대지식》에서 소개하는 “0”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0(零, zero)의 4가지 의미
양수(陽數, positive number)와 음수(陰數, negative number)에서 '0'은 기준역할을 합니다.
첫째. 기준점 : 양수와 음수를 구분하는 0은 “양수(陽數, positive number)”와
“음수(陰數, negative number)”를 구분하는 기준이 됩니다.
또한 한국과 미국은 지면(地面)을 경계로 층수를 정하므로 "0층"이라는 개념이 없지만,
영국은 지상(地上)의 한 개 층을 "ground" 또는 "0층"이라고 부릅니다.
둘째. 빈자리
숫자를 표기할 때 ‘0’은 해당 자릿값이 비어있음을 나타냅니다.
순번대기표 등에서 사용하는 숫자나 소수(小數, decimal)에서 ‘0’은 해당 자리 값이
비어 있음을 표시합니다.
셋째. 아무것도 없다[無]
수수료(手數料, commission)가 "0%"이라는 것은 “수수료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통장의 잔액 이나 수수료 등에서 ‘0’으로 표시하면 하나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넷째. 시작점(始作點 start point), 출발선(出發線, start line, 스타트라인)
달리기에서 출발선은 0m 로 표현합니다.
달리기 등의 체육대회에서 시작하는 지점을 ‘0m’로 표시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 0(零, zero)"의 4가지 의미중 "빈자리", "아무것도 없다(無)"와
비슷한 개념으로 "허(虛)"와 "공(空)"이 있습니다.
이 3개 단어 즉 "허(虛)", "공(空)", "무(無)"는 동양(東洋) 우주론(宇宙論)에서
의미차이를 두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3개의 개념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혼란스러운 이 3개 개념 차이에 대해서 예를 들어 살펴볼까요?
2. 태허도(太虛圖), 선천도(先天圖) 그리고 무극도(無極圖)
중국 명대(明代) 이천(李梴)이 1575년에 지은 《의학입문(醫學入門)》에서 소개하는
선천도(先天圖)입니다. 《국역편주의학입문(國譯編註醫學入門)》에서 선천(先天)을
"음양5행(陰陽五行)의 기적작용(氣的作用)이 있기 전에 충막무짐(冲漠無朕)의 혼연(渾然)한
이치를 들어 선천(先天)이라 한다. 때문에 한 개의 공권(空圈)을 원형으로 모사(模寫)하여
선천도(先天圖)라 함. 또한 복희씨(伏羲氏)의 역(易)을 선천도(先天圖)라고도 함."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충막무짐(冲漠無朕)은 "그윽하고 조용하여 흔적이 없되 징조가 없음"을
뜻하고, 혼연(渾然)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고 고른 모양"라는 뜻입니다.
중국의 명대(明代) 이천(李梴)은 하나의 원(圓)을 그려 "선천도(先天圖)"라 하였고,
장경악(張景岳, 1563-1640)이 《유경도익(類經圖翼)》 에서 태허(太虛)를 그림으로 표현한
태허도(太虛圖)입니다.
아래의 설명글에서 “태허(太虛)는 태극(太極)이니, 태극(太極)은 본래 무극(無極)이므로
천원기대론(天元紀大論)에서 ‘태허(太虛)는 크게 비고 광활하여 끝이 없으며
화원(化元)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명대(明代)의 장경악(張景岳)도 하나의 원(圓)을 그려 "태허도(太虛圖)"라고 하였습니다.
진흠(陳鑫)의 진씨태극권도설(陳氏太極拳圖說)에 소개된 무극도(無極圖)입니다.
진흠은 상기책에서 무극(無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무극(無極)은 일물(一物)도 없는 것이다. 태초(太初) 이상(以上)은 혼혼목목(渾渾穆穆 ; 흐리고
고요하고 엄숙함) 하고 혼혼돈돈(混混沌沌 ; 혼탁하고 어지러우며 조짐이나 형상이 아직 발현
되지 않음) 하니 이른바 대혼돈(大混沌)이 즉 이때이다.
[無極者, 一物未有也. 太初以上, 渾渾穆穆, 混混沌沌, 所謂大混沌者, 即此時也.]"
또 무극도(無極圖)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이전에 하나의 공권(空圈)을 그려
무극도(無極圖)라고 이름하였다. 여기에 또 하나의 공권(空圈)을 그린 것은 무엇인가?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은 모두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난다.
유(有)로 시작한 이후에는 사물(事物)을 낱낱이 들어서 말할 수 없다.
즉, 권법(拳法)을 연마하는 것처럼 한 가지 기술은 처음 무(無)에서 시작하여 술(術)이 되니,
일(一)이 즉 유(有)하고 바야흐로 방해하지 않으면 그 유(有)가 무심(無心)을 만들어 변화하면
거동과 기색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즉 유(有)는 여전히 무(無)로 돌아가게 된다.
소위 색(色)이 곧 공(空)이고, 공(空)이 곧 색(色)이니 공공(空空)이 색색(色色)이고,
색색(色色)이 공공(空空)이다. 내가 또 일권(一圈)을 그려 이것으로 삼겠다.
[前吾畫一空圈, 名曰無極圖. 此又畫一空圈, 何謂也? 天地萬物, 皆自無而生有. 自有以後,
事物不可枚擧. 即如打拳一藝, 起初原無是術, 一即有之, 正不妨即其有, 以造至無心成化, 不著形蹟,
則有者仍歸于無矣. 所謂色即是空, 空即是色, 空空色色, 色色空空,. 吾之又畫一圈者, 盖以此.]"
또한 진흠(陳鑫, 1849-1929)이 지은《진씨태극권도설(陳氏太極拳圖說)》이라는 책에서도
하나의 원(圓)을 그려놓고 무극도(無極圖)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같은 원(圓)으로 표현되는 선천도(先天圖), 태허도(太虛圖), 그리고 무극도(無極圖)는
같은 개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까요? 아니면 서로 다른 개념을 달리 표현한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천(先天), 태허(太虛), 무극(無極)의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의학입문》에서는 “선천(先天)”의 개념설명이 없이 곧바로 “선천(先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유경도익》에서는 “태극(太極)”과 “무극(無極)”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태허(太虛)를
설명하지만, “태극(太極)”과 “무극(無極)”의 설명이 없습니다.
그나마 《진씨태극권도설》에서는 무극(無極)의 개념글과 무극(太極)과 태극(太極)을 구분하는
글[관련 블로그]이 있지만 그 뜻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문헌(文獻)을 통하여 그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개념을 먼저 정의(定義)한 후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에서 설명하는 허(虛), 공(空), 무(無)
또한 3개의 개념차를 구분하기 위하여 사전(辭典)을 참조 하는 것도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에서 허(虛), 공(空), 무(無)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아볼까요?
1) 허(虛)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에서 설명하는 허(虛)의 개념. 허(虛)의 개념을 문자의 구성 원리인
자원(字源)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털보(블로그)의 <범(虍)이 사는 언덕(丘)> 빌허(虛)[원문]라는
글도 참조해 보세요.
허(虛) 조문에서는 "허(虛)"를 "공(空)"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2) 공(空)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에서 설명하는 공(空)의 개념. 공(空)을 문자의 구성 원리인
자원(字源)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털보(블로그)의 <움집(穴)을 만드는 조물주(工)> 텅빌공,
하늘공(空)[원문] 이라는 글을 참조해 보세요.
공(空) 조문에서는 "공(空)"을 "허(虛)"와 같은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3) 무(無)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에서 설명하는 무(無)의 개념.
《대한한사전》의 유(有) 조문에서는 “있을 유(無之對)”라고 설명합니다.
노자 도덕경에서는 무(無)와 유(有)에 대하여 "무(無)는 천지(天地)가 나온 본원(本源)이고,
유(有)는 만물(萬物)을 길러내는 본체(本體)이다(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라고 설명합니다.
무(無)의 조문에서는 "유(有)의 반대"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을 통해서 이 3개의 개념차이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4. 《음양이 뭐지》에서 설명하는 공(空), 무(無)의 차이.
《음양이 뭐지》라는 책에서 공(空)과 무(無)의 차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
1. 空이란? 구멍(穴) 속에 장인(工:천지를 빚어내는 장인)이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고요하나
보이지 않는 내부에서는 우주의 설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2. 무(無)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뜻입니다. 무(無)는 본체가 없어 겉으로 작용만 진행되는 것이고
[무극無極], 공(空)은 작용이 없어 고요해 보이나 내부의 본체는 생동하고 있습니다.
[태극太極] "본체가 없어 겉으로 작용만 진행"되는 것과 "작용이 없어 고요해 보이나
내부의 본체는 생동"의 차이를 구분해보기 위하여 계란찜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의 계란찜 : 보통 뚝배기 용기에 계란을 넣고 처음에는 강한 불을 사용합니다.
이때 강한불의 열기는 계란찜 겉면에 주로 작용합니다.
일본의 차왕무시(茶碗蒸し) : 일반 주방그릇에 계란을 넣고 찜통을 사용하여 쪄서 만듭니다.
중간불의 열기가 계란찜의 속까지 작용합니다.
좋은 비유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겉으로만 진행” 되는 무극(無極)은 용기(容器)와 접한 계란찜
겉면에 주로 열기가 전해지는 한국의 계란찜에 비유할 수 있고, “내부의 본체가 생동” 되는
태극(太極)은 계란찜의 내부까지 열기가 전해지는 일본식 계란찜인 차왕무시(茶碗蒸し)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양이 뭐지》를 통해서도 허(虛), 공(空), 무(無)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5. “나 아닌 내(블로그)”에서 설명하는 허(虛), 공(空), 무(無)의 차이
그런데 “나 아닌 내”라는 블로그의 “허(虛), 공(空), 무(無)라는 말의 뜻을 구별해 본다.
"[원문]라는 글이 이제까지 접한 글 중에서 제일 이해하기 쉽고 그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아쉬운 것은 문헌적인 근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 아닌 내”의 글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허(虛)
인간이 5감(五感)을 통하여 인지할 수 있는 ‘존재(存在, being)’가 있으려면 먼저 그 바탕이
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바탕을 "허(虛)"라고 합니다. “(5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라는 것은 “허(虛 ; 바탕) 조차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허(虛)조차 없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허(虛)는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 불변(不變) : 허(虛)에 무엇이 존재하더라도 허(虛)는 변하지 않습니다.
- 불생불멸(不生不滅) : 허(虛)는 새로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 부증불감(不增不減) : 허(虛) 안에서 무엇이 생기고, 변하고, 없어지더라도
허(虛)는 줄어들거나 늘어나지 않습니다.
- 불구부정(不咎不淨) : 허(虛) 안에서 무엇이 생기고. 변하고. 없어지더라도
더러워지거나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 무시무공(無時無空) : 무한(無限), 절대(絶對), 본래(本來), 불변(不變)인 허(虛)의 차원에는
시간(時間)도 공간(空間)도 없습니다.
2) 공(空)
허(虛) 안에 지극히 미세(微細)하여 없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을 공(空)이라고 합니다.
이 공(空)이 모여 커지면 물체[기체, 액체, 고체]가 되고, 흩어져 작아지면 공기(空氣)가 됩니다.
3) 무(無)
허(虛) 안에 있는 공(空)의 일부를 한정하여 “(그것의) 유(有)”라 하고, “(그것의) 유(有)”가 없는
것을 “(그것의) 무(無)”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有)”와 “무(無)”는 반드시 특정한 “무엇”을 전제로
할 때만 구체적인 뜻이 있습니다.
4) 기타
- 허(虛)는 공(空) 이하의 차원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아, “영원히 그대로”라는 의미로
태허(太虛)라고도 합니다.
- 공(空)의 차원에서 생(生)과 멸(滅)이 있는지 여부는 사람의 5감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허(虛)와 공(空)의 관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공(空)이 절대적 차원이라면 그 아래 차원인 체(體)는 상대적 차원입니다.
6. 무극(無極) / 태극(太劇) 과 허(虛) / 공(空)
“나 아닌 내”라는 블로그 설명글을 기준으로 한다면 허(虛)는 무극(無極)의 개념에,
공(空)은 태극(太極)의 개념에 해당됩니다. 무극(無極)과 태극(太極)관계 설정은 조선시대
선인들의 논쟁거리였으며, 성리학에서는 "무극(無極) = 태극(太極)"의 입장을 고수한 반면
도교(道敎)에서는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을 낳는다"는 입장을 주장하였습니다.
아래는 한국고전 종합DB의 퇴계선생문집 제39권 "이공호(李公浩)의 문목에 답하다"에서
성리학의 관점으로 태극과 무극이 같음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퇴계선생문집 시작>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에 대해, 의심하건대 극(極) 자의 뜻을 비록 지(至) 자로 풀었지만
그런 명칭을 갖게 된 원인을 따져 보면 실은 형상(形狀)과 방소(方所)가 있다는 점을 취하여
말한 것으로, 지극히 높은 데 있어서 사방(四方)의 표준이 되어 여기가 끝이어서 더 이상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태극(太極)의 경우 실로 모든 이치의 근본이며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이
되어 한 데 모여 귀결된다는 뜻이 극(極)과 유사한 점이 있어 극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극(太極)이라고 이름한 것이 비록 형상(形狀)과 방소(方所)로 인한 것이지만
유(有)로 무(無)를 비유하고 실(實)로 허(虛)를 비유한 것이지 애초에 찾을 수 있는 형상(形狀)과
방소(方所)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다만 다른 책에 옥량(屋樑)을 옥극(屋極)이라 하거나
북신(北辰)을 북극(北極)이라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형상(形狀)이 있는 극이기 때문에
주자(周子)는 사람들이 이러한 극(極)의 예(例)로써 태극(太極)을 이해하려 들면 혹시 그것이
어떤 물질인 양 여기어 형상(形狀)에 구애되어 성인(聖人)이 비유를 취한 본뜻을 잃게 될까
염려하여 다시 무극(無極)이란 두 자(字)를 더한 것입니다.
이는 대개 저것을 빌어서 이것을 비유하여, 이 이(理)가 형상(形狀)도 없고 방소(方所)도 없지만
거기에 지극한 유(有)가 있고 지극한 실(實)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저의 뜻으로는 이와
같이 보았기 때문에 '극(極)이 없되'로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만약 '무(無)한 극(極)이로되'로 하여 무(無)라는 한 글자를 형상(形狀)과 방소(方所)가 없다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고 두 개의 극(極) 자는 모두 지극한 이(理)로 본다면 '무극(無極)'이란
두 글자로도 충분하여 다시 이른바 '태극'이란 글자는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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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과 도교의 해석차이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도교에서는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이 나오고 태극에서,,, (중략) 사람이 만들어지므로, 결국 사람이 돌아갈 곳은
무극(無極) 즉, 허(虛 ; 혹은 절대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허(虛 ; 무극)와 공(空 ; 태극)을 같은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인간 개개는 그 내면에 절대자를 갖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7. 현대물리학 : 소멸(消滅, annihilation)과 생성(生成, production)
위키백과에서 파인먼 도형(Feynman diagram)을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위키백과에서 위 그림에
대하여 "전자(電子, electron)와 양전자(陽電子, positron)가 소멸하여 광자(光子, photon ; 파란
색 사인 곡선으로 표시)를 생성한 후 쿼크-반쿼크쌍(quark–antiquark pair)을 이루고, 그 후에
다시 그 중 하나는 글루온(gluon ; 녹색 나선형으로 표시)을 방출한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림출처 : 위키백과(생략)
입자(粒子, particle)는 물질의 원자핵을 이루는 질량(質量, mass)을 갖는 아주 작은 알맹이를
말하는데 이것이 에너지의 형태로 바뀔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입자물리학에서는 "질량(mass)을 갖는 입자가 에너지의 형태로 변환되는 것을 쌍소멸(雙消滅,
pair annihilation)이라 하고, 그 반대를 쌍생성(雙生成, pair production)"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소멸과 생성을 주관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때 "소멸"과 "생성"이란 동양학의
"허(虛)", "공(空)", "무(無)" 개념 중 어느 것에 해당될까요?
수원에서 了凡
인용하고 참고한 도서와 사이트
1. 《중1이 알아야 할 수학의 절대지식》, 나숙자, 북스토리
2. 《음양이 뭐지》전창선, 어윤형, 세기
3.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 삼영출판사
4. 나 아닌 내 블로그
- 허(虛), 공(空), 무(無)라는 말의 뜻을 구별해 본다.[원문]
- 허(虛) -라는 글자로 상징하는- 뜻.[원문]
[출처] 허(虛), 공(空), 무(無) : 무극(無極), 태극(太極)|작성자 햇님달님
없을 무(𣠮)
사람(大)이 풀(艹)이 무성한 숲속(林)으로 들어갔는데
어디로 숨었는지(兦) 보이지 않음이다.
존재(存在)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다.
무(𣠮)는 유(有)의 상대개념이다.
𣠮가 있어 有가 있고, 有가 없으면 𣠮도 없
【노자(老子) 1】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사람이 이름을 붙이기 전에 이미 천지가 있었고
사람이 명명(命名)하면서 만물이 분류되기 시작하였다.
곧, 무(無)는 천지(天地)가 나온 본원(本源)이고,
유(有)는 만물(萬物)을 길러내는 모체(母體)다.
명가명 비항명(名可名 非恆名) 【노자(老子) 1】
사람이 명명(命名)한 이름은 본래의 이름이 아니다.
생지소이연자위지성(生之所以然者謂之性) 【순자(荀子) 정명(正名)】
나면서부터 그대로인 것을 성이라 한다.
性之和所生 精合感應 성은 음양 화기에서 나오며, 정밀하게 합하고 느껴서 응한다.
不事而自然謂之性 일을 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되는 것을 성(性),
性之好惡喜怒哀樂謂之情 성의 호오(好惡)ㆍ희로(喜怒)ㆍ애락(哀樂)을 정(情)이라 한다.
情然而心爲之擇謂之慮 정이 그러한데 마음이 선택하는 것을 려(慮 : 생각),
心慮而能爲之動謂僞 마음이 생각하여 능히 움직이는 것을 바로잡음(僞)라 한다.
慮積焉能習焉而後成謂之僞 생각이 쌓여 학습한 후에 이루는 것을
인위적으로 바로잡음(僞)이라 한다.
正利而爲謂之事 정당한 이로움을 추구하는 것을 사업(事業),
正義而爲謂之行 정당한 義를 추구하는 것을 行이라 한다.
所以知之在人者謂之知 앎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지식(知),
知有所合謂之智 앎이 사물과 합하는 것을 지혜(智)라 한다.
智所以能之在人者謂之能 지혜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재능(能),
能有所合謂之能 사물이 사물과 합하는 것을 능력(能)이라 한다.
性傷謂之病 하늘로부터 받은 성(性)이 손상된 것을 병(病),
節遇謂之命 제 때를 만난 것을 천명(命)이라 한다.
시산명지재인자야(是散名之在人者也) 그 밖의 무질서한 여러 이름은
시후왕지성명야(是後王之成名也) 후세 왕들이 지어낸 것이다.
빌 허(虛)
자형(字形)은 언덕(丘)에 호랑이(虎)가 있어 모두 도망가고 없음이다.
그러나 철학적으로는 무엇이 "존재(being)하는 바탕"이다.
무엇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바탕이 있어야 한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곳이라 해서 바탕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바탕은 사유(思惟) 존재와 인식의 시작이다.
천지사방(天地四方)의 우(宇 : 공간)와 고왕금래(古往今來)의 주(宙 : 시간),
태극(太極)ㆍ태초의 혼돈(混沌)일 수도 있다.
허(虛)의 속성(屬性)
ㆍ불생불멸(不𤯓不滅) : 생장염장(𤯓長斂藏 : Birth, Growth, Harvest and Rest)이 없다.
ㆍ부증불감(不增不減) : 질량(質量)의 수축(收縮)과 팽창(膨脹)이 없다.
ㆍ무시무공(𣠮時𣠮空) : 시간(時閒)과 공간(空閒)이 없다.
정확히는 "없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다.
빌 공(空)
사람(工)이 외출하여 "굴(穴)이 비어있음"이다.
굴에는 일하러 나간 식구들만 없지 다른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 중심으로 보니까 아무리 살림살이가 많이 있어도 빈 집인 것이다.
그러면 가구를 모두 빼내면 아무 것도 없는 공간(空閒)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 안에 각종 원소, 홀씨, 세균, 먼지, 포자(胞子), 수증기 등이 가득하다.
방문을 모두 닫고 포도를 먹어도 포도껍질에 금방 초파리가 생긴다.
그것은 초파리 알이 밖에서 귀신처럼 알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미 방 안에서 인간과 공생(共生) 공존(共存)하고 있음의 증거이다.
인간이 오감(五感)으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허(虛)와 공(空)의 관계
虛는 공간 둘레(圍위), 空은 공간 안쪽ㆍ중심이다.
허공(虛空)은 중앙(中央)의 관계와 유사하다.
中은 국경(國境)이고 央은 사람이 들어가 있는 국경 안쪽인 점에서 그러하다.
2. 허(虛)/무(無)와 공(空)
『노자』에서 ‘하나’는 도를 뜻한다. 그런데 정작 도의 본체는 허(虛)와 무(無)다.
<노자>의 도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잘 풀이한 왕필은 이렇게 말한다.
“천지가 비록 넓을지라도 무(無)로써 마음을 삼고(以無爲心), 성왕이 비록 위대할지라도
허(虛)로써 주(主)를 삼는다(以虛爲主).”
우주의 모체로서의 도의 모습은 이처럼 무와 허를 중심으로 한다.
그것은 형태도 없고(無形), 소리도 없고(無聲), 성질도 없다(無質).
예컨대, “도는 비어 있지만 작용이 있다(道沖而用之, 4장).”
마치 천지 사이가 텅 비어 있는 것이 풀무나 피리와 같아서(天地之間, 其猶??), 비어 있지만
작용이 그치지 않아서(虛而不屈), 흔들수록 더욱 넘쳐흐르는 것(動而愈出, 5장)과 같다.
도의 작용은 그치지 않지만, 도의 본 모습은 무(無)다. 무는 천지의 시작으로서(無名天地之始),
만물의 순환작용을 일으키지만 결국 “아무것도 없는 데로 돌아가게 한다(復歸於無物, 14장).”
이것을 “형상 없는 형상(無狀之狀)으로서, 황홀(惚恍)이라 한다.”고 했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설명에 가깝다.
노자가 도의 본체를 허/무에 비유 한 것은 석가가 세계의 실상을 공(空)이라고 파악한 것에
비유 할 수 있다. 석가의 도는 해탈에 이르는 ‘길’로서의 도(道, marga)다. 해탈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이 있는 데, ‘공(空, ??nyat?)’, ‘무상(無相, ?nimitta)’, ‘무원(無願, apra?ihita)’이다.
이 가운데서 공은 무아(無我)와 동일시된다. 노자가 말하는 허/무는 불교가 말하는
차원의 존재론적 차원의 자성(自性, svabh?va)이 없어서 공이라고 하는 개념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노자가 말하는 허/무도 존재론적 차원의 자성이 있음(有)을 부정한 결과적 개념도
아니다. 불교가 말하는 공이 ‘절대적’ 성격을 띤다면, 노자의 허/무는 유와 관련된
상대적/유비적 성격을 띠고 있다.
텅 빈 공간으로서의 허/무라든가 심리적 차원의 허심(虛心)이나 무욕(無欲)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같은 양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허/무나 석가의 공은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른바 ‘집착으로부터의 해방’ 곧 ‘비움’이라는 실천적 행위를 끌어냄으로써
우리를 ‘해방’ 또는 ‘해탈’의 자유로 인도해 주는 길(道)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의 형용사인 ‘순야(??nya)’라는 말은 ‘결핍이 발견된’이라는 뜻이지만,
명사가 될 때의 ‘순야탸(??nyat?, 空)’는 내적인 ‘자유’를 뜻한다.
바로 이 ‘자유’의 개념이 노자가 말하는 허/무가 이끄는 ‘자유’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른바 ‘생-해탈’이라는 것이다.
<빙혼>
너무 길어서 읽다가 무슨 말인지를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