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 2
오백년 지속 된 왕조의 왕이 자기나라 땅에 있는 궁궐에서도 자신의 신변 안전을 믿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궁궐을 벗어나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한 세계 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여 일본은 경악을 한다.
일본적 상식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일본은 고종에게 뒷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러시아는 종이호랑이 이었던 청국과는 달랐다.
러시아는 무적의 발틱함대를 거느리고 오대양을 누비고 있던 세계 최강국 중 하나였다.
하지만 러시아도 왕조 말기 현상을 보이며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일본은 조금 더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조선을 먹고 중국까지도 넘보고 동아시아를 제패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러시아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기르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일본의 그러한 기간 동안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1년을 머물렀다.
러시아로서는 조선을 자기 지배하에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고종은 러시아에게 신변안전은 보호 받았다.
그리고 친러 내각을 출범시킨다.
그러는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 내각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그리고 나서 각국 열강들에 의해 조선에 대한 이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조선 왕을 확보한 러시아가 가장 큰 이권을 챙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 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탈취 당하였다.
이 밖에도 러시아는 알렉시예프를 조선 정부의 탁지부 고문으로 앉히고 조선의 재정까지 마음대로 휘둘렀다.
일본에 못지 않은 러시아의 횡포가 이어졌다.
러시아는 한 술 더 떠서 러시아 황제 대관식 때 열린 로바노프• 민영환 비밀회담에서 러시아 측은 조선에 5개조의 원조를 약속하는 조건으로 조선으로부터 17개조의 이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제 러시아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도 조선에서 경제적 이권 쟁탈에 열중하였다.
서구 열강은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이권에서는 러시아에게 기회 균등을 요구하였다.
서구 열강들도 전차•철도부설권, 삼림 채벌권, 금광•광산 채굴권 등 시설 투자와 자원 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다.
그 결과 중 하나로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가 경인간 철도 부설권을 얻어냈다.
모스는 본국에서 투자자를 찾다가 실패하자 1899년 그 권리를 일본에게 팔아넘겼다.
그 해 9월 일본은 경인철도주식회사를 통하여 제물포~노량진 사이 33.2km 철도를 완성하였다.
이것이 한국철도의 시초이다.
러시아에 선수를 빼앗겨 다 잡은 고기를 놓친 일본은 이런 식의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 쟁탈에 참가했다.
어쩠든 일본에 의한 철도 부설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화 여명을 알리는 기적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기적소리는 희망의 빛과 절망의 그림자를 갖고 있었다.
그 후 일본은 계속하여 경부선의 부설권도 획득하여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해서 1903년도에는 경인철도주식회사를 흡수하였다.
그런데 이 철도 건설비용은 고스란히 조선의 국가 부채가 되었다.
이 빚은 일본이 우리를 합병할 때 주요한 근거가 된다.
그래서 철도보상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100년 후 1998년 IMF때 금모으기 운동이 이때의 국채보상운동과 비슷했다.
그런데 그때나 이때나 우리 민족의 전통은 변함이 없었다.
고위관료나 부유층들은 이런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가난한 민중들과 심지어 기생들까지도 비녀를 뽑아 참여했지만 부유층들은 나 몰라라 하는 일반 백성들만의 운동이었다.
성실하고 애국적인 백성이 있었고 탐욕스럽고 자기안위만 챙기던 고위층과 부유층이 있는 우리의 모습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아관파천으로 서구열강들인 영국, 독일, 블란서의 이권 쟁탈전에 참여는 물론, 1882년 제물포에서 조선 전권대신 김홍집과 미국 전권 슈펠트 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한 미국도 조선에서 이권쟁탈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아관파천 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조선이권 침탈의 시작이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은 불평등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핑계로 조선을 생각해주는 척 하면서 더 지능적으로 조선 이권 침탈에 나섰다.
그 당시는 모든 나라가 그러한 것을 당연히 여기던 시대였으므로 탓하기는 뭐하다.
공자의 진짜 사상도 아닌 이상한 성리학에 빠져 자기들 안위만 챙기던 조선의 사대부 그 중 노론들의 책임이 아주 크다.
그 결과 조선의 국가 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그나마 간신히 이어 오던 국운이 크게 기울어졌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와 같이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손상되자 국내외적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고종은 궁여지책으로 파천초에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것은 경운궁이 수리중인 관계로 환궁 시기를 늦출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운군 부근에 있는 구미 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
참으로 자기나라 백성들을 믿지 못하고 외국 군대의 힘만 믿으려하는 졸렬한 왕이었다.
고종이 을미사변을 겪은 후 언제 당할지 모르는 인간적 두려움에는 동정심은 느껴지지만 한 나라 왕으로서는 자격이 없는 일이었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론은 정부의 대외 의존 자세를 비난하고 조속한 환궁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고종의 머뭇거림과 친러파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실패한다.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 운동을 개시하는 등 여론이 더욱 거세어지자, 고종은 환궁을 결심하고,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환궁 후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원구단에서 갖고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나서 면목이 없었는지 국가적으로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황제국을 칭했으니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고종은 황제가 되었고 세자는 태자가 되었으며 민비는 명성황후로 후에 승격 되었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했다. 하지만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다. 그리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난국을 당하여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중들의 자주 의식이 각성 되고는 있었으나 왕실과 보수 집권 세력의 반동으로 인하여 자주권 수호는 또 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이어서 '대한제국의 시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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