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8:11-22
찬송가 334장 ‘위대하신 주를’
제게는 아주 심한 지적 장애를 가진 사촌동생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스무 살이 넘었지만, 아직 ‘엄마, 아빠’라는 말조차 할 줄 모릅니다. 그저 좋으면 허허 웃고, 무언가 짜증이 나면 울기만 할 뿐입니다.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교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교수님, 만약에 입으로 시인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교수님의 대답은 단호하였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으로 시인하지 못했다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제게 이 사건은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교수님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무언가 속에서 답답함과 아쉬움이 가득하였습니다. 얼마 후, 다른 교수님께 전후 사정을 말씀드리고,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그 교수님은 밀알이라는 단체에서 장애인 사역을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답변은 이러하였습니다. “구원이라는 영역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기 때문에, 인간인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저 사랑의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요?” 교수님께서 그 아이는 “구원 받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하나님께 긍휼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그 말이 참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사역을 하며 심방을 다니고 기도 제목을 나눌 때, 진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교우님들을 만날 때면 이렇게 위로하곤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의 긍휼에 기대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이 하는 말이 100%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욥에게 조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지금 이 문제에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이야기에 어떻게 쉽사리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친구는 강한 질책으로, 또 어떤 친구는 나름의 칭찬과 함께 욥에게 다가갑니다. 오늘 본문의 빌닷은 시작부터 욥을 향하여 강하게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욥이 하나님을 져버렸다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이 어떠한지 비유를 통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11-19)
(11-12)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왕골에 해당하는 단어는 애굽 강변이나 습지에서 발견되는 파피루스를 의미하고, 진펄은 늪이나 습지를 의미합니다. 당연한 이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대도 물이 있어야 크게 자라납니다. 당연한 질문을 하며 답을 이끌어 내는 이런 방식을 수사의문문이라고 합니다. 고대 지혜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왕골이나 갈대처럼 속이 빈 것은 물이 가득할 때는 흥왕하고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기가 마르거나 건기가 오면 다른 풀보다도 더 일찍이 말라 죽는다는 것입니다. 빌닷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악인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잠깐이고 분명한 인과응보가 곧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욥을 향해서 악인과 같이 말라 죽기 전에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이제는 욥에게 어떤 ‘죄’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지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라고 스스럼없이 표현합니다. 소위 친구라는 사람인데 욥이 처한 고난의 정황이나 그 심각성에 대하여 위로하고 같이 울기보다는 인과응보를 들이밀며 욥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욥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소리 질러 울며, 겉옷을 찢고 티끌을 날려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함께 앉아서 욥에게 말도 걸지 못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계속 그랬다면 참 좋았을텐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그냥 계속 같이 울어주었더라면 욥기의 기록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말은 욥의 속을 뒤집어 놓았고, 욥을 마치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로, 그래서 희망이 다 무너져버린 자로 만들어버립니다.
(14-15)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빌닷은 계속해서 왕골과 갈대에 이어 거미줄을 예로 듭니다. 거미줄이 튼튼하고 안전해서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끊어져 버리고 마는 것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결국도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의지하는 무언가 어떤 대단한 것, 예컨대 돈이나 명예, 혹은 어떤 유력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그것이 그 사람을 보존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미 가족과 재물과 종, 그리고 친구들까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빌닷은 욥에게 이런 것을 의지하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닷이 왕골과 갈대, 거미줄을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는 마침내는 결국 다 망해 없어져 버린다는 인과응보로서의 결과를 말합니다. 이 말이 절대로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빌닷은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우라고 하며, 전통적인 지혜의 교훈을 말하였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결국 다 망한다는 것, 우리의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왜 틀린 말이겠습니까? 한 가지, 빌닷은 그 대상을 잘못하였습니다. 지금 욥은 그저 함께 울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꾸짖고 닦달하고 야단칠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닷은 이 비유를 통하여 욥에게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욥이 다른 어떤 물질을 의지하지 않았으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고, 소망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힘써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힘써 알기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창문은 하나님을 향하여 늘 활짝 열려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욥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져 내렸겠습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이 친구들 때문에 오히려 희망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빌닷으로 왕골과 거미줄에 이어 한 가지 예화를 더 듭니다.
(16-19)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16절에서 그는 식물의 한 종류를 의미합니다. 식물이 잘 자라는 것은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서입니다. 그렇게 동산에까지 뻗어 올라 돌무더기에 서리어, 돌 가운데 뿌리를 내린다고 할지라도 뿌리가 뽑히면 금방 말라 비틀어져 없어져 버리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영화로워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그라드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앞선 예화들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악한 자의 형통함이 계속될 것 같아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욥에게는 참 무의미한 이야기입니다.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20-22)
(20-22)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악한 자를 결코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당연히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마침내 악인의 장막은 없어질 것이며 의인에게는 복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빌닷은 욥을 향해 진심으로 회개하고, 악에서 떠나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심판의 결과를 맞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울 수밖에 없지만, 마침내 즐거움으로 욥의 입을 채우실 것이라고 축복까지 해줍니다.
오늘 빌닷의 이 말은 옛 성현의 가르침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승으로 보입니다. 귀한 말씀이고, 자기 자신에게 뼈아프게 적용하며 살아간다면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가슴 아픈 심판의 결과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에게는 복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 사실을 내게 적용해야 합니다. 타인의 고난 앞에서 지적하고 손가락질 하며 가르치기 보다는, 나와 우리 인생의 절대적인 주권자 되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하여 적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이의 창문이 열려 있지 않다고 지적하기보다, 우리의 창문을 먼저 활짝 여는 모범을 보이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바른 지식이 하루 하루 쌓여가는 매일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멸망뿐이라는 사실을 욥도 그리고 저희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살지 않기를 다짐하며, 오늘도 하나님을 향한 바른 앎을 추구하며 우리의 창문을 엽니다. 절대 주권자되신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 가운데 이 땅을 살게 하여 주옵시고, 하루 하루 숨쉬는 모든 순간마다 우리 주님을 향한 소망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순전한 이에게 복과 웃음을 주시는 하나님. 저희가 날마다 순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옵시고, 이 하루의 삶 가운데도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왕골과 거미줄, 한 식물은 처음에 겉보기에는 무성하고 잘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악인의 삶이 형통해 보인다고 생각하십니까?
2. 빌닷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결과는 어떻다고 말합니까? 욥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였다고 생각하십니까?
3. 악한 자도 얼마든지 부하고 또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선한 자도 얼마든지 가난하고 병든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부와 건강이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전모가 드러날 때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4.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창문을 여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작성: 김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