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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누가복음 강해(52)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2022.07.02 토)
본문 : 누가복음 8:49-56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갈릴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에 가셨다가
‘군대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고쳐주시고..
다시 돌아오신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그들 중에는 자신의 딸이 병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는
회당장 야이로도 있었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의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체면을 고려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아래 바짝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딸이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말하면서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회당장을 본 예수님은
그의 초청에 응하셨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가시던 길을 멈추시더니,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느끼셨기에 물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자신이 예수님의 옷을 대었고...
그 순간 치유되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향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체하시는 예수님>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가장 초초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지금 시급을 다투는 상황입니다.
자신의 딸이 곧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여인이 방해꾼으로 끼어든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엠블런스를 타고 한시가
급하게 가고 있는데,...
다른 차가 일부로 앞에서 진로를 방해하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행동은 그를 더욱
초초하게 했을 것입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어간다는데,
좀 빨리 가주면 안 됩니까?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지금 시간이 가고 있습니다. 아마 회당장은 초조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재촉하려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회당장이 염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49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회당장의 외동딸이 결국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라고 말합니다.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치 않다는 뜻입니다.
이 순간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모르기는 해도 자신의 집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길에
난데없이 세치기를 하듯 끼어든 혈루증을 앓는
여인에 대한 원망.....
그리고 한 그 여인과 대화하는데 시간을
소비하신 예수님께 대한 원망 등.....
그 심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편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조급한 마음을 모르고 계셨을까요?
어쩌면 그의 딸이 죽기를 기다리며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 예수님은 중요한 가르침을 위해 일부로
지체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나사로의 죽음’ 때였습니다(요11장).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늘 곁에서 돕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들 남매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 계실 때에
나사로가 중한 병이 들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속히 오시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듣고 바로 귀환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하시면서
이틀을 그곳에서 지체하셨습니다.
일부로 지체하신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틀 후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아셨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알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돌아오신 것은 본 마르다는 예수님께
원망어린 말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면서 마르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요11:25-26>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신
것을 알게 하시려고...
그리고 믿게 하시려고 일부러 지체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말씀이 나사로의 죽은 몸을 다시
살리시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육신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죽을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단순한 육신의 회복이 아닌, 영원한 부활(영생)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은 비록 몸은
죽어도 다시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 것을 의미하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은
영생의 은혜를 누리며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가르침을
목적으로 행동하신 것입니다.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보면....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가족의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 송강호가 아들을 향해......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하는 대사가 나옵니다.
그 대사처럼 예수님은 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기를 기다리며,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셨던 것입니다.<51-53절>
51절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절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절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계속해서 그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그의 집에 도착해보니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한 예수님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여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확한 상황 판단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죽은 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일부로 “잔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예수님이 성도의 죽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시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나사로의 죽음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육신의 죽음이
영원한 죽음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치 저녁에 자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과 같은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근간입니다.
이후 이 ‘잔다’는 표현은 초대교회에서 사용 되었습니다.
<행 7:59-60(스데반의 순교)
59절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 바울도 이 부활 신앙이 있었기에 다시 깨어남을
전제로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살전4:13-14>
13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슬퍼합니다.
사람이 서로 헤어질 때 슬퍼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요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슬픔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절망 가운데 슬퍼합니다.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의 슬픔은
소망이 있는 슬픔입니다.
육신적인 사랑과 정으로 일시적인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것일 뿐,...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절망적인 슬픔이 아니라 소망이 있는 슬픔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소망의 근거’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14절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 즉 ‘부활의 첫 열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신 것이 그 근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죽은 자의 부활도
기대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성도들의 부활 역시
가능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확실한 근거입니다.
<요5:28-29>
28절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주안에서 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시는 그날에 생명의 부활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예수님은 이 아이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소리를 치셨습니다.<54-55절>
54절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어(아람어) 그대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이의 영이 돌아와’
그 아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 아이가 육체적으로 살아났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리신 사건은 몇 번 있었습니다.
눅 7장에서 ‘나인성의 과부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요 11장에서는 ‘죽은 나사로’를 장사 지낸 후(
나흘 만에) 무덤에서 불러 살려내셨습니다.
모두 확실하게 죽었다가 확실하게
다시 살아난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은 모두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인 것을.....
그리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시 부활할 것임을
예시하는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픈 내용은 무엇입니까?
2천 년 전 유대 땅에 살아계실 때,
단순히 병자가 고치셨다.....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전하시고자
이런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단지 죽었던 아이가 ‘일시적으로 생명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단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믿는 자에게
영생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영생을 얻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56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비슷한 이야기가 마 8장에 나오는데,
거기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 한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는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마 8:4).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제사장에게 가서
알리고 확인 받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은
알리지 마라는 뜻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아직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님을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만
믿게 될 위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살리러 방에 들어가셨을 때도
인원을 최소화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이 일이 훗날 전해져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예수님의 사역에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는데,
이런 일이 알려진다면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와(죽은 자들까지 데려와) 중요한 말씀
사역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씀 –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딸의 죽음을 듣고
절망에 빠져있던 회당장 야이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5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절망에 빠진 회당장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믿음의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앞서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두려워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두려워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예수님이신 것을 믿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생명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저와 성도님들에게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물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은혜를 맛보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오직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