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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책의 실시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했다. 아버지 장헌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고 자신도 당쟁의 직접적 피해를 입음으로써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자기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하는 등 당색에 구애되지 않고 인물 본위로 관리를 등용하려 했다. 정조의 탕평은 준론(峻論)의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이었다. 영조대의 탕평책인 완론탕평(緩論蕩平)은 척신과 권력을 장악한 간신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남을 억누르는 방편이 되었으며, 왕권에만 영합하여 권력유지에 부심하여 '세상에서는 탕평당이 옛날의 붕당보다도 심하다고 하는 말이 퍼지는' 정도가 되었다고 인식하고, 초기부터 홍국영·유언호(兪彦鎬)·김종수(金種秀) 등 노론 중에서 청론(淸論)을 표방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실시했다. 준론탕평은 완론탕평과는 달리 충역(忠逆)·시비(是非)·의리(義理)를 분명히 하는 탕평으로서, 임금의 은혜를 강조하고 각 당에서 군자를 뽑아서 쓰는 '붕당을 없애되 명절(名節)을 숭상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영조대의 탕평이 세가대족(世家大族)의 화합에 우선하고 사대부의 화합에는 소극적이었던 데 대한 반성에서 의리의 탕평을 주장하고, 산림(山林)·궁중 세력과의 연결을 끊음으로써 청명(淸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즉위초 김귀주(金龜柱)와 홍인한의 외척당을 와해시켰으며, 홍국영도 제거했다. 1788년에는 남인 채제공 정조의 준론탕평은 결국 사림세력에 의한 공론정치의 방향보다는 관료제의 정점이 되는 재상권의 강화를 통한 사림정치 이념의 실현이라는 방향에서 왕권강화를 지향했다. 탕평의 강화를 위해 문풍(文風) 진작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규장각은 이제까지의 여러 관각(館閣)들의 기능을 병합(倂合)하여 권력을 일원화하려는 시도에서 만들어졌으며, 이를 통해 사기(士氣)·명절을 존중하는 청론을 강조함으로써 준론탕평을 달성할 수 있는 청류(淸流)의 인재를 키우겠다는 또 하나의 청요직(淸要職)으로서 기능했으며, 초계문신(抄啓文臣)은 새로운 인재양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개혁정치의 지향 정치체제를 정비하면서 정조가 의도했던 개혁은 1777년 반포된 대고(大誥)에 "민산(民産)을 만든다, 인재를 무성하게 한다, 군사를 다스린다, 재정을 풍족하게 한다"는 4개 항목으로 집약되어 있다. 민산의 문제는 경계(經界)에서 시작한다고 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전제(田制)의 개혁으로 파악하고, 조선 초기의 제도였던 직전법(職田法)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이는 정조 치세 동안에 실시되지는 못했다. 상공업은 말업(末業)으로 파악했으나, 농민의 이농현상에 따른 도시 소상인의 증가에 대해서는 1791년 신해통공 군사문제는 군문(軍門)의 혼란을 지적하여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이를 점차 확대하여 모든 군문의 기능을 병합, 장악하려는 시도를 했다. 재정의 문제는 축적에서 시작한다고 보고, 전통적인 주자학자들의 주장인 절약과 검소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라고 보았다. 재화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서 생산력 발달을 강조하는 북학파를 중시하고, 응지진농서(應旨進農書)를 받는 등 농업생산력 발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재정확립을 위한 기초 조사로서 중앙 각 관서와 군영의 보유양곡수를 조사한 〈곡부합록 穀簿合錄〉, 전국에 걸친 환곡의 현황을 조사한 〈곡총편고 穀總便攷〉, 전세 징수의 기본상황을 파악한 〈탁지전부고 度支田賦考〉 등을 간행했으나, 구체적 방안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밖에 1776년 궁방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세금을 거두던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금지했다. 1777년 서얼들의 허통요청으로 〈서류허통절목 庶類許通節目〉을 정했다. 1778년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기 위해 형구(刑具)의 규격과 품제를 정한 〈흠휼전칙 欽恤典則〉을 발포하고, 도망노비를 추쇄(推刷)하는 노비추쇄법을 폐지했다. 1782년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역(曆)을 미리 계산하여 〈천세력 千歲曆〉을 편찬·간행했다. 1783년에는 〈자휼전칙 字恤典則〉을 반포하여 흉년에 버려지거나 굶주린 아이들을 구하는 법을 정했다. 재위중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어 사회문제가 되었으나, 서학의 발흥은 정학(正學)인 주자학이 융성하면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보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리하여 1791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신주를 불지르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 또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장헌세자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그 묘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했으며, 묘호(廟號)를 경모궁(景慕宮)이라 하고, 1789년 18만 냥을 들여 경기도 양주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이듬해 용주사(龍珠寺)를 개수·확장해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게 했다. 1800년 6월 개혁의 의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현륭원 동쪽 언덕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1821년 효의왕후가 죽자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