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은 무쇠솥 안에서 제 살을 다 녹였다. 하얀 씨앗과 주황색 껍질을 남기고 범벅이 되어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작은 호박 씨앗 하나가 싹을 틔우고 자라 호박잎과 그 열매들을 먹게 하였다. 호박은 그 어떤 장소를 탓하지 않고 자유롭게 나름의 성장을 즐겼다. 그러면서도 꽃과 열매를 맺는 열정만은 어떤 식물보다도 대단했다. 그리고 호박범벅이 되어 우리의 몸을 이롭게 할 때까지 겸손하리만치 뽐내는 법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호박범벅을 먹으면 호박의 애틋한 사랑이 내 마음을 녹였다. 그전에는 영글어 굴러 들어온 덩어리이거니 했지 호박이 우리들에게 하고픈 말들을 알알이 씨앗에 써놓으리라고는 생각조차 없었다. 호박범벅을 떠먹으며 호박의 달달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려는 내 가슴은 저절로 따뜻해졌다.•흑구문학상, 대구수필문학상, 영남아동문학상(동화) 등 수상
엄마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탱자나무 담장 아래 구덩이를 여러 개 팠다. 그 안에 마른풀과 깻묵 그리고 아궁이의 재를 섞어 넣었다. 이듬해 잘 숙성된 양질의 거름이 호박 씨앗들을 살찌게 할 것이란 바람을 하며 삽으로 흙을 덮었다. 겨울은 모든 것을 얼게 하였다. 사람들의 마음도 냉기에 움츠러들었다. 혹독한 추위일수록 마음속에서 불러보는 봄은 애절하기만 하였다. 봄은 아기의 걸음마처럼 걷다가 넘어지기를 반복하였다. 하지만 한번 커튼을 걷어올리고 나온 봄은 그리 멀리 달아나지 못했다. 미지근한 바람은 언 땅을 녹였고, 봄볕에 흙은 기지개를 켰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은 경이롭기만 하였다.
그즈음 엄마는 늦가을에 밑거름 해 둔 흙구덩이를 호미로 팠다. 그 안에 호박씨 한 움큼 넣고 흙을 끌어 묻었다. 그 위에 물조리개로 살포시 흙을 적셔주면 물을 머금은 호박씨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출발하였다. 엄마는 연한 미소로 호박씨의 출발을 축복하였다. 봄이라지만 샛바람이 한 번씩 불어와 봄을 시샘할 때는 아궁이에 올려놓은 더운물을 미지근하게 하여 호박 심은 흙구덩이마다 가볍게 뿌려주던 엄마였다. 싹이 돋고 떡잎 벌어지면 옮겨심기를 해 주었다. 호박 모종들은 햇볕을 쬐며 나날이 훌쩍 자라났다. 호박순이 생기더니 점점 벋어 탱자나무 가시 사이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드디어 호박순들의 행진은 탱자나무를 감쌌으며 호박꽃 하나, 둘 피워 내기 시작했다. 호박꽃은 밭의 중심이 아닌 모퉁이나 빈터, 담장 위에서도 즐거이 화관무를 추었다. 화려한 꽃들에 비하면 호박꽃은 크기만 했지 색도 모양도 유혹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너무나 순박한 모습이었다. 질 좋은 밭에는 토마토와 오이, 고추와 가지들이 심어졌지만 호박은 뒷담이나 밭둑에서도 자라났다. 자신이 커 올라오는 몸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언덕을 올라가기도 하고, 담장에 의지하며 초롱초롱 커 올랐다.
호박꽃들은 당당하게 꽃을 피우며 자신을 내보였지만 사람들은 그다지 환호하며 호박꽃을 바라보지 않았다. 호박꽃은 제 매무새를 매만지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지없이 발휘하였다. 어여쁜 꽃이라고 찬양해 주지 않아도 한 해 동안 충실한 식물이 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꼈다. 유월의 장마는 호박순들을 더욱 벋어 나아가게 하더니 줄기마다 엷은 초록 잎을 많이 달리게 하였다. 엄마는 연한 호박잎을 따다가 밥솥에 쪄서 쌈밥을 차려 주었다. 양철지붕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쌈을 싸서 먹던 엄마와 나의 입이 활짝 벌어졌다가 오므라졌다. 그것이 마치 호박꽃이 피었다가 오므라들었다 다시 피는 모습과도 같았다.
호박꽃은 자신의 속을 감추었다가 펴 보이며 바람이 지어주는 교향곡에 흠뻑 젖었다. 꿀벌들이 지상을 날아다니며 달콤한 먹잇감을 찾아 나설 때였다. 호박꽃의 향기는 상큼한 풀의 향이었지만 그 속으로 들어간 벌은 좀체 나오질 않았다. 긴 꽃술 안에서 달달함을 누렸다. 벌들은 호박꽃 문으로 들어가 한참 동안 꽃술을 흔들어 놓았다. 벌은 호박 수꽃에 먼저 몸을 비비고 나와 암꽃 속으로 다시 들어가 암술을 흔들어 놓으면 그 안 가득 주황빛 분들이 가득했다. 벌들은 호박꽃 깊은 곳에서 밀애를 즐겼다. 호박꽃 안은 벌들이 사랑을 속삭이기에 은밀하고도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였다. 진한 애무로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장차 충실한 열매로 답할 것이므로. 호박꽃처럼 진한 사랑을 받아본 꽃이 얼마나 될까. 호박꽃은 연둣빛 애호박들이 꽃대궁에 붙어 자라나면 그것들을 보호하느라 그다지 큰 몸놀림은 하지 않았다. 호박꽃에 매달린 애호박들은 엄마의 젖을 먹는 아기처럼 그렇게 꽃에 의지하며 자라났다.
엄마는 호박꽃이 피면 애호박 딸 날을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애호박에 핀 호박꽃은 누렇게 시들어 버리고 튼실한 애호박만이 자라고 있었다. 애호박을 따다가 여름 반찬거리로 여러 가지를 만들어 먹었다. 국수를 삶을 때 채로 썰어 넣던 연둣빛 애호박이 아직도 고운 색으로 눈에 선하다. 호박꽃이 춤추는 동안, 그 몸짓을 보고 누구도 가야금을 튕겨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호박꽃은 가을 무서리가 내릴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피고 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호박꽃은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에게 잎과 열매를 선물하였던 것이다.
여름 내내 호박잎과 애호박을 먹다가도 누런 둥이 호박을 기다리기도 했다. 가을은 어린 호박들을 누렇게 물들이며 생각 깊은 호박을 만들었다. 바람은 하루가 다르게 서늘하였고, 물 많고 푸르던 연한 호박 줄기는 스스로 말라 단단한 줄기로 변해 갔다. 누런 호박들은 말라가는 줄기의 고통을 알기라도 한 듯, 몸의 수분을 조금씩 줄여갔다. 누런 호박들이 마른 줄기에 매달려 깊은 사색을 뿜어낼 때, 끈질긴 생명으로 이어온 것에 대한 감사의 노래가 종처럼 울렸다.
엄마는 늦가을부터 툇마루에 쌓아놓은 호박들을 하나씩 꺼내 전도 부치고 범벅도 해서 우리에게 먹였다. 누런 호박은 자르면 씨도 토실하였다. 호박씨를 씻어 말려 망사 천에 돌돌 싸서 처마에 매달았다. 내년에 심을 씨앗종자였다. 그리고 남은 호박씨는 겨울 내내 심심풀이로 까먹을 간식거리라서 채반에 그대로 말렸다. 그렇듯,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호박의 생애이건만 그 꽃만은 그리 어여삐 보아주는 이는 드물었다. 호박처럼 버릴 게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해 보았다.
누런 호박을 칼로 푹 질러 자른다. 봄부터 싹을 틔워냈고, 여름에는 많은 꽃과 잎과 열매들을 건네주고, 가을엔 둥실한 누런 호박으로 범벅이 되어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한 해의 열정을 오롯이 선물하는 호박이다. 늙은 호박의 주름을 보니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작은 씨앗 하나가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아낌없이 전부를 바쳤다. 호박이 준 아낌없는 사랑을 먹었음에도 누군가에게 넉넉한 사랑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산 날들이 흐느적거린다. 호박꽃은 자신이 사랑한 날들을 씨앗에 하얗게 적어 두었다. 주황빛 둥근 함 속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한 해를 마감했다. 그 호박씨가 싹을 틔울 봄날을 기다린다. 그리고 호박꽃이 피어 다시금 들려줄, 세상을 사랑한 날들에 대한 편지를 전해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