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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
누가복음 15장 8-10절 / 8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누가복음 15장은 세 가지 비유가 예수님에 의해서 말씀되고 있습니다. (1)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 비유 또는 양 일백 마리 비유(1-7절) (2)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 또는 열 드라크마 비유(8- 10절) (3) 잃었던 한 아들을 찾은 기쁨 비유 또는 두 아들 비유(11-32절)입니다. 여기서는 이 세 비유 중에서 두 번째 비유인‘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 또는 열 드라크마 비유’(8- 10절)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두 번째 비유‘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 또는 열 드라크마 비유’와 세 번째 비유인‘잃었던 한 아들을 찾은 기쁨 비유 또는 두 아들 비유’(11-32절)는 첫째 비유인‘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 비유’가 마태복음 18장 12-14절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가까이는 앞서의 14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어느 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받아 그 집에 들어가셨을 때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수종병을 앓아 고생하는 자를 고치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안식일에 사단의 매임에서 풀어 생명을 구원하며 그 생명을 보전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이야기 해주시면서, 또한 그 자리에 식사 초대를 받아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잔치의 윗자리에 앉지 말고 아랫자리에 앉을 것과 주인에게는 식사 초대를 할 때는 그에 대한 아무런 갚을 힘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할 것을 통하여 각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도리를 가르치시는 말씀을 주셨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겠습니다.”라고 말할 때‘큰 잔칫집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의 청함을 받음에 있으나 이보다 자기들이 소유한 밭과 소와 가정이 더 큰 기쁨으로 있어 하나님의 나라 잔치의 떡을 먹는 것이 거부에 있는 자들은 한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 잔치 떡을 먹는 기쁨에 있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 나라 잔치에로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것보다 더 우선하여 내세울 기쁨이 되는 것이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따름으로써 오직 이 기쁨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의 떡을 먹을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름에서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자기 목숨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소유한 그 모두를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상위 개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밭과 소, 그리고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그 가치는 그 모두를 아무리 소중히 여기며 존귀히 여겨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부인[부정]에 있어야 할 것에 있습니다.‘망대 비유’와‘한 임금이 치르는 전쟁 비유’에서 말씀되고 있듯이 모든 비용을 들여서라도 성읍을 건축하고 이를 지키는 망대를 완성하듯이, 그리고 한 나라의 왕은 1만의 군사로 2만의 적군을 상대하는 전쟁을 치르듯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부인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밭이나 소, 그리고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가 지니지 못한, 이것으로서는 비교할 수 없는 더욱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존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밭이나 소, 그리고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가 지니지 못한 더 큰 가치인 영원함과 그 영원함에 있는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면 밭과 소와 그리고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에 머무는 것으로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 모두에서는 결코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모두를 팔고 거기에서 떠나서라도 소유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와 인근 지역 온 땅을 다니며 구속 사역을 활동하던 당시에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자는“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 위하여서는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이 주는 기쁨에 머물고 있지, 하나님 나라 잔치의 떡을 먹는 기쁨은 결코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맛을 잃은 소금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겪을 운명을 말씀하십니다. 맛을 지니지 않은 소금은 양념으로도 약용으로도 거름으로도 쓰지를 못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므로 집 밖의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로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듯이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찾아 나와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당시 멸시를 받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하고 식사를 하시곤 하셨는데, 이러한 예수님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비난하며 빈정거렸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친숙한 것인 세 가지를 비유로 들어서 잃었던 것을 찾은 기쁨을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무엇 때문에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는지에 대하여 알게 해 주십니다. 그 첫 번째 비유인‘일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에 이어서 본문에서 두 번째 비유인‘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을 봅니다. 이 비유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여자가 은으로 만든 화폐인 열 개의 드라크마 동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 열 드라크마 중에서 그만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자는 매우 기뻐하면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서는“여러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내가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하고 외쳤습니다.
이와 같이‘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에 있는 여자’를 드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찾아 나온 세리들과 소문난 죄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이‘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 무엇을 알게 해 주고자 하셨는지 그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한 여자가 열 드라크마를 지니고 있는 중에 그 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을 이 여자는 하고 있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그러니까 은으로 만든 동전 한 개를 찾기 위해서 밤새 온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져 찾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전기가 없던 시대이니까 등불을 들고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잃어버렸던 한 드라크마를 찾자 크게 기뻐하며 벗이며 이웃들이랑 모두 불러 놓고는 자신이 잃어버렸던 한 드라크마를 찾았다며 함께 기뻐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에서는 어떤지요. 우리가 사용하는 동전은 1원짜리가 있고, 10원, 100원, 그리고 가장 큰 액수가 500원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액수인 500원으로는 요즘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사과 한 개의 값어치도 안 됩니다. 그러니 사과 한 개조차 사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동전을 우리가 잃어버렸을 때, 자신이 지니고 있던 500원이 어디 갔는지 의아해 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서랍 정도를 열어서 찾아보긴 하지만 못 찾으면 그만 포기하고 말지, 본문의 여인처럼 온 집안을 뒤지고 장롱 밑을 비롯하여서 가재도구를 옮겨가며 찾지는 않습니다.
본문의 여인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았을까요? 여기에는 당시 유대인의 결혼 풍속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드라크마란 은으로 만든 동전은 헬라[그리스]의 은전으로서 가치는 시대마다 달랐지만, 이 동전 한 개가 지닌 가치는 예수님 당시에 로마의 데나리온에 해당하여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므로 우리나라의 경우로 보면 대략 하루 최저임금 약 7,530원x8시간인 60,240원 정도가 됩니다. 드라크마는 3.8879그램에 해당하는 은으로 만든 아주 작은 주화입니다만, 동전의 한 면에는 왕의 형상과 이름 그리고 다른 면에는 글들이 새겨져 있어서 이 돈이 유통되는 곳에서는 왕의 권위를 증명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은으로 만든 동전인 드라크마 하나가 이렇게 화폐로 유통되고 있으며 대략 60,000원 안팎의 가치를 지닌 드라크마 동전 한 개를 찾으려고 온 집안을 뒤지는 소동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까, 그래서 하루는 살아갈 양의 돈의 가치를 지닌 것이니까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본문에서의 여인에게서는 열 드라크마는 매우 특별한 것으로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여인이 결혼할 때 남편이 될 사람에게서 받은 소중한 예물로서 결혼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드라크마는 화폐 이외에도 약혼식이나 결혼식에서 귀하게 사용되었는데 유대 사회에서는 남자가 장가갈 때에 여자에게 사랑의 징표로 이 드라크마를 열 개씩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자는 이 드라크마를 팔찌나 목걸이 또는 머리띠로 만들어서 사용했는데 이것을‘세메디’(Semedi)라고 불렀습니다. 드라크마가 세메디 장식으로 사용되면 이것은 화폐단위 이상의 크고 귀한 가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도둑이나 강도들까지도 이 세메디를 가져가거나 빼앗아 가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채가 있어서 모든 재산을 차압한다고 해도 이 세메디만은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메디는 자기가 잃어버리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열 드라크마를 만일 여인이 한 개라도 잃어버린다면, 곧 열 드라크마를 다 채우지 않고 이 중에서 한 개라도 빠져있거나 빼버린다면, 이것은 결혼을 앞둔 신랑과의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파혼 선언이 됩니다.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한 개라도 없다는 것은 신랑과의 결혼 언약을 깨뜨리겠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중한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으니, 그 여인은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으며, 등불을 켜고 밤을 새서라도 온 집안을 뒤져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찾는데도 찾지 못하면, 그래서 열 드라크마 채워져 있지 않으면 여인은 결혼이 깨지는 불행을 맞게 됩니다. 그러니 한 드라크마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는 것에서 여인이 이 드라크마를 밤새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중요하고 큰 가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신랑으로부터 받은 결혼예물이었고, 신랑을 맞이하는 결혼증표였습니다.
여인이 드라크마를 찾는 광경이 소개되고 있는데, 팔레스타인 농가는 직경 18인치(약45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원형창문 하나로만 빛이 들어오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안은 대단히 어둡습니다. 그리고 마루는 다듬은 흙바닥에 마른 갈대와 풀을 깔았습니다. 이와 같은 곳에 열 드라크마 중 한 개를 잃어버렸기에 눈에 잘 띄지 않아 이 동전을 찾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의 여인은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뒤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여인은 마침내 그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곧 신랑에게서 잃어버려진 자신이 찾아진 것을 뜻해서, 그래서 신랑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것을 포기할 수가 없었으며, 그렇게 해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마침내 찾았을 때 찾은 여인의 기쁨은 이 동전이 지닌 돈의 가치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찾음으로써 여인은 비로소 벗과 온 이웃을 불러 혼인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한 드라크마를 찾자 크게 기뻐하며 벗과 이웃을 불러“내가 잃어버렸던 한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라고 말하며,“다 같이 저의 혼인을 기뻐해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결혼 풍속을 비유로 사용하여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을 하십니다.“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비난하고 멸시하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자리 같이 하며 식사하고 하는데요. 예수님은 이들을 비유로 들고 있는 열 드라크마에서 잃어버려졌다가 찾아진 한 드라크마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 잔치 떡을 먹게 하십니다. 이 떡을 먹을 수 있는 자는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으며,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는 채움에 있게 됩니다. 이들 중에는 사람들이 비난하고 멸시하는 세리들과 죄인들도 있습니다. 즉, 세리들과 죄인들도 하나님 나라 백성 중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세리가 당시 로마의 관리 노릇을 하는 하수인이 되어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부당한 행동을 한다고 여겨 좋지 않게 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저런 소문에 있는 죄인들을 멀리하였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가까이 하는 것은 곧 이들의 부정에 자신들도 오염되어 부패하는 것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리에 있지 않으며 이런 저런 소문이 나도는 죄인들에 있지 않은, 그 모두와는 상관이 없는 자들의 나라, 그래서 세리에서 보는 부정함이 없고 죄인들에게서 보는 불결함이 없는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인가 할 때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는 세리에 있으며 이런 저런 좋지 않은 소문에 있는 죄인들에게는 상관이 없는 나라, 그래서 부정하고 불결하게 취급되는 그들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인가 할 때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하고는 세리와 죄인들로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못하는 요인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것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만수(滿數)에 채우시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하나님이 정하신 자기 백성의 만수에 있을 때 그 수에서 영영 잃어버린 자로 있지 않게 하십니다. 그래서 찾아 그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채우십니다. 이를 하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으로 있는 그들을 자기 부정에 있게 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를 바라봄에서 세리와 죄인으로 있는 것에 있는 죄에 대한 부인[부정]은 필연적으로 다시는 정죄에 있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지배에 있는 것에서 자기 부인에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름에서 시작되는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에 자기도 함께 하는‘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십니다. 세리들과 그리고 죄인들과 같지 않은 자들은 말이죠. 이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달리 버릴 것이 없는 자들인가요. 아닙니다. 밭과 소, 그리고 자기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함에 있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시며, 자기 의보다 더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한 것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이 조상 대대로 소유하고 있어왔던 장로들의 전통을 내던지고 예수님에게서 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하나님, 우리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심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자비를 보고 그 자비가 자기들과도 함께 함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것처럼 또한 자신들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따름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에서 보는 하나님의 찾음에 있는 자들이요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여 떡을 먹는 기쁨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는 우리를 향한‘열 드라크마 비유’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