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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김 동 리
1
석은 사뭇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또 늪가에 왔다. 길에서 늪에 이르는 그 넓은 보리밭 들의 좁은 밭뚝길을, 석은 알 수 없는 야릇한 기대와 호기심에 이끌린 채 키를 넘는 보리를 헤치며 마구 달려 온 것이다.
오늘은 늪을 건널 것이라고? 아니다. 그러한 자신이 새삼 석에게 솟을 리 없다. 그러면서 그 『알 수 없는 야릇한 기대와 호기심』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른다. 다만 그 넓은 보리밭 들을 건너, 검푸른 잡풀을 헤치고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서면, 그리하여 그의 눈이 하늘가에 닿은 듯한 먼 수풀을 바라보면 보는 것은 끝난다. 그렇다. 수풀을 바라보는 소년의 두 눈에는 한순간 이상한 불길이 켜진다. 그리고 그것이 그 『알 수 없는 야릇한 기대와 호기심』의 마지막 불길인 것이다. 소년의 고개는 점점 아래로 수그러진다. 그리하여 눈길은 자기의 발 아래 부글거리는 수렁과 수렁에 이어 있는 늪ㅡ언제나 파란 물파래로 덮여 있는―위에 가 머문다.
『야릇한 기대와 호기심』 대신 절망과 슬픔에 가득 찬 소년의 눈길은 오랜 동안 그 거품이 부글거리는 수렁 과 물파래 위에 떨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다. 다 저쪽도 수렁이요, 수렁에서 산기슭까지는 이쪽보다 더 넓고 거칠은 잡풀밭이다. 잡풀밭을 지나면 산기슭, 산기슭을 오르면 검은 솔밭,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수풀은 얼마나 넓고 먼지 하늘 끝에 닿은 듯하다.
저녁 때마다 불꽃 같은 노을의 이불로 덮여지는 저 수풀, 개인 날이면 솜뭉치 같은 뭉게구름을 끝없이 뿜어내는 저 수풀, 아아, 저 수풀 속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으며 가지각색의 새들이 우짖고 있을까.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달고 신기한 열매들을 바구니에 하나 가득 담아 놓고 계실까.
『석아 먹어라, 하고 할아버지는 그 이름도 모를 여러 가지 과일들을 바구니째 석에게 내민다. 석은 그 가운데서도 그중 붉고 맛있게 익은 과일을 골라 들자 이상한 새스리를 따라 숲속으로 숲속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리고 파란 노란 꽃을 따서 얼굴에 문질러본다. 아아 얼마나 부드럽고 향기로운 꽃들이냐?』
그러나 순간,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제일 붉고 맛있게 익은 과일도, 그리고 그 부드럽고 향기로운 파란 노란 꽃도 다 놓아 버리고 만다. ……늪속에서 그 파란 물파래를 헤치고 무엇이 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찰 모른다. 불쑥 솟아올랐다가는 이내 물속으로 푹 내려가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때 석은 숲속을 헤매느라고 그곳을 똑똑히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
었던 것이다.
늪속엔 무엇이 살고 있을까?
수면(水面)은 언제나 파란 물파래로 덮여 있지만 이따금 불쑥 불쑥 솟아오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하얀 왕방울(수은으로 된) 같은 것이 물속에서부터 쑥 꿰어져 올라와 물파래를 동그랗게 헤치며 팡 소리를 내고는 도로 퐁퐁퐁퐁 아래로 내려가 버리기도 한다. 이것은 아마 늪속에서도 제일 여러 해 묵은 무서운 벌레가 방귀를 뀌는 것이리라. 그리고 저 물 위에 꽉 덮인 물파래는 배암밥이란 말이 있으니 늪속에 얼마나 많은 독사와 구렁이들이 우글거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언젠가는 두꺼비도, 늙어서 아래턱이 축 처지고 두 눈에 금테를 두른 놈이 수렁 위로 엉금엉금 기어 나오더니 불룩불룩 독 뿜는 시늉을 하고는 도로 들어가 버리지 않았는가.
거머리도 지렁이만큼 큰 놈은 예사라고 한다. 만약 이런 놈이 한번 사람의 몸에 붙기만 하면 잠깐 동안에 뼛속까지 파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석은 이 밖에도 더 무서운 벌레들이 늪속에 들어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석은 그것을 아버지에게도 물어 보았지만, 아버지 역시 잘 부른다고 했다. 다만, 거기는 독사와 무서운 벌레들이 많고 수렁이 있어서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라고 누나가 하는 말대로 일러 주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아무도 이 늪가에 오지 않는다.
석은 언제나 혼자다. 이 늪을 지나서 저 먼 수풀을 가려면 어디로 어떻게 가느냐고 물어 보려도 물어볼 상대가 없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혼자서 늪가를 이리저리 헤매다 돌아가는 것이다.
늪은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까지 나 있는지도 모른다. 북쪽에 험상궂은 산이 있고, 동남쪽에 큰 강물이 바다같이 펼쳐져 있으니까 북쪽 산기슭이나 어느 골짜기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의 큰 강물에 잇닿아 있거니 하고 상상할 따름이다.
그래 어떤 때는 험상궂은 산이 있는 쪽으로, 또 어떤 때는 강물이 바다같이 펼쳐져 있는 쪽으로 길을 찾아보기도 한다. 명아주, 개머루, 달기왕다리, 여뀌풀, 바랭이들이 키를 넘토록 엉켜 있는 속을 헤치며 얼마쯤 나가 보다가는 지쳐 버리기 마련이다. 키를 넘는 검푸른 잡풀 속엔 풀쐐기가 들끓고, 땅은 질척질척해서 지렁이, 개구리들이 제 세상처럼 우글거리고, 게다가 방개와 집게벌레들까지 덤비는 판이다.
그러나 석도 이러한 벌레들쯤이야 그처럼 켕기지 않는다. 도마뱀도 문제가 아니다. 제일 무서운 놈이 독사다. 만약 그놈의 꼬리나 잔등을 밟기라도 하는 날이면 마지막인 것이다.
설령 독사를 밟지 않는다 하더라도 희망은 없다. 끝까지 헤치고 나가 본대도 거기는 험상궂은 산이나 바다같이 넓은 강물이 있을 뿐이니까 말이다. 석이 잡초를 헤쳐보는 것은 그냥 안타까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석이 늪을 찾아오는 것부터가 그처럼 안타까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늪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 야릇한 기대와 호기심은 어디서 온단 말인가.
어제 분이 엄마는 부엌에서,
"제 에미를 따라 뒈질려고 그런다."
밥을 푸면서 말했다. 물론 석이 엿듣는 줄을 모르고 분이에게만 하는 말이었다. 이건 필시 석이 늪에 간다는 얘길 분이에게서 전해 듣고 뇌까리는 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석은 분이가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늪엔 제발 가지 말아 달라고 몇 번이나 붙잡는 것을 기어이 뿌리치고 왔으니까 분이도 화가 났을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도 제딴엔 걱정이 되어서 저의 엄마에게 일러바쳤는지 모른다.
분이는 정말 석이가 늪에 가면 꼭 죽을 줄 알고 있는지 모른다. 그보다도 분이 엄마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석은 분이 엄마가 그렇게 말한 뜻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저 석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리고 죽은 석이 어머니를 미워하기 때문에 악담으로 내뱉는 말이거니 생각할 뿐이다.
2
석이 어머니를 따라 숲속 할아버지를 찾아가 본 것은 꼭 한 번뿐이다. 그의 나이 세 살인가 네 살 났을 때다. 어머니는 석을 업은 채 재를 넘고, 강을 건너고(배를 타고) 하여 겨우 그 수풀 어귀에 이르렀던 것이다.
석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수풀 어귀에 이르렀을 때 맑고 깊은 개울이 그(수풀) 앞을 휘감아 흐르고 그리하여 바다같이 넓은 강물로 간다는 것이었다. 개울 저편에는 몇 아름이 될지 모르는 늙은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 포구나무, 상수리나무들이 가지를 겯고 엉켜 있는 속에 껍질 벗겨진 허연 고목 등걸이 거인(巨人) 의 해골처럼 팔을 벌리고 서 있던 것을…….
석은 어머니의 등에 업힌 채 개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하늘을 가린 울울한 수풀 속엔 찔레가 엉켜 있고 여기저기 무더기로 피어 있는 이름모를 꽃들……. 석은 어머니의 등에서 내렸다. 그리하여 꽃을 꺾으러 가려고 할 때,
"아서, 길 잃어버림 어떡해?"
어머니는 그의 손목을 잡았었다.
"엄마, 할아버진 어딨어?"
"자꾸, 들어감 계신다."
어머니는 길도 없는 수풀 속을 잘도 찾아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엄만 할아버지 집 알어?"
"잎 넓은 나무가 많이 있는 데 가믄 계신다."
어머니는 길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 모양을 대중하고 찾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가도 잎 넓은 나무가 많이 있는 데는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새 소리만 곧장 더 야단스러워지는 듯했다. 아마 새들도 낯선 손님이 온다고 저희들끼리 서로 알려주는 모양이었다. 이 넓은 숲속엔 새와 짐승들뿐이라고 생각하자 석은 와락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겁 집어먹은 듯한 눈으로 석이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어머니는 그가 지친 것을 알고 풀 위에 쪼그리고 앉으며,
"석아 업자."
했다.
다시 어머니 등에 업힌 석은 이내 잠이 들어 버렸다.
석이 다시 눈을 떴을 삐는 어느덧 할아버지 집에 와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진 없었다.
"엄마, 할아버진?"
"열매를 얻으려 나가셨다."
"무슨 열매?"
"할아버지 오심 안다."
"어서 얻는데?“
"수풀 속에서……."
"수풀 속엔 무슨 열매든지 많이 있어?"
"그럼."
어머니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어머니도 어릴 때 할아버지가 얻어 온 열매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숲에선 열매만 먹고 살어?"
"아냐, 감자두 있구, 옥수수, 기정, 조, 호박 같은 것두 있단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부엌 (부엌 이자 헛간인 듯한)으로 들어가 나무 함지에 담긴 감자를 집어내다 씻어서 삶을 차비를 했다.
어머니가 옹달샘에서 감자를 씻어 왔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왔다. 시꺼먼 수염이 온 얼굴을 덮은 키가 나지막하고 두 눈이 으끔한 무서운 할아버지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울긋불긋한 오얏과 살구와 능금과 오디가 담긴 바구니를 말없이 석에게 내밀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꺼먼 수염 속에 빨간 입술을 보이며 웃음을 짓는 할아버진 어쩌면 말을 할 줄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할아버지다."
어머니가 말했을 때 할아버지는 또 그 시꺼먼 수염 속에서 빨간 입술을 보이며 바구니에서 잘 익은 살구와 능금을 골라 석의 손에 쥐어 주었다.
할아버지는 이튿날도 아침을 먹자 이내 숲 속으로 들어가더니 저녁 때나 되어 역시 어제와 같은 열매들을 어제보다 더 많이 더 잘 익은 것으로만 바구니에 하나 가득 담아 왔다.
석은 할아버지를 따라 숲속 깊이 가보려고 했으나 어머니가 붙잡아서 가지 못했다. 그 대신 석은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다니며 여러 가지 꽃을 꺾었다. 파랑 꽃, 흰 꽃, 붉은 꽃, 지금껏 보지 못하던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들이었으나 석은 물론, 어머니도 그 이름을 알지는 못했다.
새들도 마을에서 보지 못하던 아름다운 빛깔과 울음소리로 이 나무 저 나무를 날아 다녔으나 꽃같이 손에 잡아 볼 수는 없었다.
"엄마, 저 꼬리가 길고 날개가 붉은 새 한 마리만 잡아 줘."
석이 말했으나 어머니는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내가 새같이 날아다닐 수 있니?"
했다.
석은 자기 힘으로 붉은 새를 잡아 보려고 한나절 동안 숲속을 헤매었으나 허탕을 치고 맥이 풀려서 돌아왔다.
할아버지께 그 얘기를 했더니 할아버지는 또 그 검은 수염 속에서 붉은 입술을 드러내 보이며 밑도 끝도 없이,
"너도 숲속에서 살렴."
했다.
석은 그 붉은 새를 마음대로 잡을 수 있다면 숲속에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세 밤인가 네 밤을 자고 났을 때 이젠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석은 어머니에게 업혀서 숲속을 나오고 말았다.
숲속에서 지낸 사나흘 동안을 석은 언제나 잊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다시 없는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즐거운 시간이 어느덧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슬픔의 씨가 되고 말았다.
숲속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모진 매를 맞고 끝없는 구박을 받아야 했다. 그때 겨우 네 살밖에 되지 않았던 석으로서는 아버지의 노여움이 무엇 때문인지를 전혀 알길 없었다. 아버지의 허락없이 어머니는 숲속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으나 그 까닭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들려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너무나 예뻐서 잠시 떠나 있기가 싫어서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분이가 즈네 엄마한테 들었다면서 늬네 엄마 아는 사람 저 먼 산너머 있었다나봐, 늬네 외할아버지 사는 큰수풀 있잖아, 거기도 찾아왔었다나봐. 하고 몇 마디 뚱기다만 그 사람 때문일까. 그나 그 사람은 엄마의 외사촌인가 된다고 했었는데…….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답고 착한 어머니가 왜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가혹한 명령을 받아야 했었는지 석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석은 요즘도 늪가에 오면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왜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야 했으며 구박을 받아야 했을까. 그렇게도 아름답고 착한 어머니가 처음부터 왜 숲속에서 외할아버지와 그냥 살지 않고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을까. 아버지는 그 깊은 숲 속에 살고 있는 어머니를 어떻게 알고 찾아가 장가를 들었을까. 할아버진 그 외로운 숲속에서 어쩔라고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주어서 따라가게 했을까? 그렇게도 아름답고 착한 어머니를 아버지는 어쩌면 그렇게도 미워하고 집에서 내쫓으려고 했을까? 어머니는 왜 아버지에게 대들지도 않고 그냥 울기만 하다 집에서 나가버리고 말았을까…….
어머니는 집을 나가던 전날 밤 석을 무릎에 안은 채 밤새도록 느껴 울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내쫓기 위하여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있었다.) 새벽녘이나 되어 석이 잠든 사이에 어머니는 집을 빠져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사람들은 어머니를 찾으려고 어디론지 떼를 지어 나갔으나 아무도 어찌 되었는지를 그에게 들려주는 이는 없었다, 누구의 입에선지 중질을 갔다는 말이 새어 나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했다..
석은 작년(그러니까 여섯 살 때) 봄에 십 리 길이나 되는 극락사(極樂寺)까지 어머니를 찾아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절에서도 누구 하나 어머니에 대하여 아는 이는 없었다.
그때부터 석은 어머니가 절에 중질을 갔다는 말도 어쩌면 터무니 없이 꾸며 내어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석은 극락사에도 어머니가 없더라는 말을 아버지에게 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 말을 들으면 필시 화를 내어 매를 때릴지도 모른다고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석이 어머니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지 이내 무서운 얼굴이 되며 호통을 치거나 매를 때리는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석이까지도 미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석이 언제나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3
아버지가 새엄마를 데려온 것은 지난 해 가을이다. 이태 동안이나 아버지는 석과 단둘이서 살아왔던 것이다.
새엄마는 분이(粉伊)란 딸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다. 석이보다 네 살이나 위인 열한 살이라고 했다. 그래서 석한테 누나가 된다고 새엄마는 석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석은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지 않고 분이라고만 부른다.
새엄마는 화를 내며,
"쬐꼬만 녀석이 깡지가 세서 무슨 짝에 쓰겠담?"
하고 눈을 홀기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새엄마가 석을 미워하는 까닭은 또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새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분이 엄마라고 부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건 이웃 집 할머니도 석에게 타일러주었지만 석의 입에서는 엄마란 말이 나오지 않으니까 하는 수 없다. 석의 생각으론 분이 엄마는 자기의 없어진 엄마보다 너무나 망칙스럽게 생겼기 때문인 것이다.
"조막막한 녀석이 청승만 꽉 차서, 쯔쯔.……"
새엄마는 걸핏하면 눈을 흘기고 혀를 차고 때로는 주먹으로 머리를 떼밀기도 한다.
그러나 분이는 다르다. 분이는 제 엄마처럼 석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 증거로 분이는 저의 엄마가 몰래 쥐어주는 누룽지나 감자나, 작년 겨울에는 홍시와 콩강정과 그런 것을 결코 제 혼자 먹는 일이 없다. 가만히 석을 불러서 쥐키어 주거나 어떤 때는 아주 석에게 몽땅 주어버리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나 분이 엄마에게 석이 야단 맞을 일은 결코 일러바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석은 아버지가 분이를 미워하는 것도 분이 엄마가 석을 미워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생각될 뿐이다. 아버지는 물론 분이 엄마가 석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대신 분이를 미워하는 겐지 모르지만, 석이 넉넉히 할 만한 일도 꼭 분이에게만 시키는 아버지가 어쩌면 분이 엄마를 닮은 것 같기만 하다.
그런데도 분이는 한번도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욕을 한 적이 없다. 또 석이 분이 엄마라고 부르듯이 석이 아버지라고 아버지를 부른 적도 없다. 언제나 그냥 아버지라고만 불렀다.
그걸 보면 분이는 정말 누나 같기도 했다. 그래서,
"분이, 넌 너이 엄마 안 밉니?"
물어 보면 분이는 고개를 흔들며,
"엄만데 왜?"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도리어 석에게,
"넌 너이 엄마가 밉데?"
하고 따지려 든다.
석은 엄마란 말에 덮어 놓고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늘 생각하는 어머니요,혼자 속으로 몇 만 번이고 불러보는 어머니인데도 남에게서 『너이 엄마』하고 불리워졌을 때 그 순간, 웬지 눈물이 불끈 솟아진 것이다.
석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한 것을 본 분이는 자기 손의 보리피리를 석에게 쥐어주며,
"너 이제 늪에 가지 마."
했다.
여러 번 들어왔지만 지금 이렇게 말하는 분이의 눈빛과 목소리는 어딘지 그전과 달랐다. 그것은 하나뿐인 친누나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요, 목소리 같았다.
분이는 결심한 듯이,
"늪에 안가지? 안 간다고 그래."
다짐을 받으려 든다.
"왜, 독사 땜에?"
"……."
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수렁이 있다고?"
"……."
분이는 또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무서운 벌레?"
"아냐, 그런 건 나두 다 들었어."'
"그럼 뭐?"
"너이 엄마가 어쩜……."
분이는 말끝을 맺지 않는다. 차마 늪에 빠져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석은 분이가 말하려는 뜻을 잘 모르고 있었다. 다만, 어머니가 참혹하게 없어진 일을 말하고 있거니 했다.
"울 엄만 어쩜 할아버지한테 가 있을 거야. 늪에 가면 수풀이 보여…… 할아버지가 사시는……. 울 엄마 중질 갔다는 건 거짓말야."
분이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석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4
사홀 뒤다.
석은 분이를 뿌리치고 또 늪을 향해 달아나 버렸다.
이날 따라 분이도 웬지 석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석의 뒤를 따라 보리밭 사잇길을 달렸다.
늪이 보였다. 아니 늪가에 서 있는 석의 뒷모습이 보였다.
분이는 달려가 석을 붙잡으려다 주춤했다. 만약 석이 잡풀밭 속으로 숨어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분이는 보릿대를 꺾어 석이 좋아하는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피리 소리를 들으면 석이 그녀 곁으로 다가오리라 믿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석은 피리 소리를 들었을 때 뒤를 돌아보았을 뿐 거기서(잡풀 속) 분이를 발견하자 그냥 고개를 돌이키고 말았다. 그녀의 신나는 피리 소리도 그를 늪에서 돌이켜 세우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분이는 더욱 신나게 피리를 불며 점점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석은 그녀의 피리 소리가 자기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도 먼 수풀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바로 곁에까지 다가선 분이는 입에 물었던 피리를 석에게 내밀며,
"이거 너 줄께."
했다.
“…….”
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분이는 피리를 늪에 던져버리고 가만히 석 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자!"
분이가 그의 팔을 끌기 시작하자 석이 마주 힘을 쓰려는(버티느라고) 순간 언덕 끝의 흙이 무너지며 석의 한쪽 발이 수렁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그때 분이는 엉겁결에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으나 석의 남은 발이 마저 힘을 쓰려다 도리어 수렁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것을 보자 한쪽 발을 언덕 아래로 내려디디며 팔을 뻗쳐 그의 손끝을 잡았다. 석을 수렁 속에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머리 수렁으로 뭉개어져 들어가는 언덕 끝의 흙이 그녀로 하여금 석을 끌어 올리도록 버티어 주었을 리 없었다. 그녀의 한쪽 발이 흙과 함께 수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을 때 석은 이미 머리까지 수렁 속에 잠겨지고 있었다.
석을 끌어올리려던 전신의 힘으로 그의 손끝을 굳게 잡은 채 부글거리는 흙탕 속으로 그녀도 잠겨 들고 있었다.
-끝-
2016년 11월 1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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