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yamantimā jāti, natthi dāni punabbhavo
<이것이 最後生이고, 이제 再有는 없다.>
위와 같은 표현은 세존께서 태어나실 때 하신 말씀이며
(AN 3.104; 5; AN 7.51; AN 8.64; AN 9.41)을 비롯하여
(MN 26; SN 14:31) 등 여러 경문에서 나타나는
아라한 선언(윤회 해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금생이 마지막 生(태어남, jāti)이며, 더 이상 <puna->반복적인-됨<-bhava>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붇다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등의 질문은 아무런 이익이 없고,
(saṅkhāyati) 헤아릴 수 없는 것을 (saṅkhā) 헤아리려는 헛된 망상이므로 무기하셨습니다.
그런데 無記하셨다는 것을 근거로
그러므로 '(輪回-)태어나지 않음(-解脫)을 목표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붇다의 말씀을 [奉行]하는 것입니까?
so vedanā pariññāya, diṭṭhe dhamme anāsavo.
kāyassa bhedā dhammaṭṭho, saṅkhyaṃ nopeti vedagū”ti.
그 지혜의 달인은 느낌을 철저하게 알아
바로 이생에서 번뇌가 멸진할 것이며
몸이 무너질 때엔 법의 길에 확고하리니
어떤 헤아림으로도 그를 가늠할 길이 없으리.
‘‘Accī yathā vātavegena khittā [khittaṃ (syā.), khitto (pī.)], (upasīvāti bhagavā)
Atthaṃ paleti na upeti saṅkhaṃ;
Evaṃ munī nāmakāyā vimutto,
atthaṃ paleti na upeti saṅkhaṃ’’.
“우빠씨바여, 가령 바람의 힘에 꺼진 불꽃은
소멸되어 헤아려지지 못하듯,
성자는 정신적인 것들에서 해탈하여, <*名 = 名身 = 心行>
소멸되어, 아무도 그를 헤아릴 수 없게 됩니다.”
[so na namati rūpesu, na saddesu, na gandhesu, na rasesu, na phoṭṭhabbesu,
na dhammesu khayā rāgassa khayā dosassa khayā mohassa
그는 탐냄이 그쳤기 때문에, 성냄이 그쳤기 때문에, 어리석음이 그쳤기 때문에
물질현상에 대해, 소리에 대해, 냄새에 대해, 맛에 대해, 감촉에 대해, 법에 대해 기울어지지 않는다.
yena rūpena tathāgataṃ tiṭṭhantaṃ carantaṃ paññāpayamāno paññāpeyya,
tassa rūpassa khayā virāgā nirodhā cāgā paṭinissaggā rūpasaṅkhaye vimutto,
tathāgato atthī ti pi na upeti, natthī ti pi na upeti, atthi n atthī ti pi na upeti,
nev atthi no natthī ti pi na upeti.
그는 머물러 있거나 움직이는 여래를 물질현상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물질현상이 그칠 때 그 물질현상의 그침, 탐냄의 여임, 소멸, 포기, 버림으로 인해 해탈하여,
그는 '여래가 있다.'라고 보지 않는다. '[여래가] 없다.'라고도 보지 않는다.
'[여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라고도 보지 않는다.
'[여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도 보지 않는다.
atha kho gambhīro appameyyo asaṅkheyyo nibbuto ti yeva saṅkhaṃ gacchati
그는 오로지 [여래를] '심오한 이, 무한한 이, 헤아릴 수 없는 이, 불이 꺼진 이'라고 파악한다.
느낌으로, … [중략] … 지각으로 … [중략] … 지음으로 … [중략] …
그는 머물러 있거나 움직이는 여래를 의식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식이 그칠 때 그 의식의 그침, 탐냄의 여임, 소멸, 포기, 버림으로 인해 해탈하여,
그는 '여래가 있다.'라고 보지 않는다. '[여래가] 없다.'라고도 보지 않는다.
'[여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라고도 보지 않는다.
'[여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도 보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여래를] '심오한 이, 무한한 이, 헤아릴 수 없는 이, 불이 꺼진 이'라고 파악한다.]
[“tassa evaṃ ayoniso manasikaroto channaṃ diṭṭhīnaṃ aññatarā diṭṭhi uppajjati.
“이와 같이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할 때
그에게 여섯 가지 견해들 가운데 하나의 견해가 생긴다.
‘atthi me attā’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① '나에게 자아가 있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natthi me attā’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② '나에게 자아란 없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dhammatā esā, bhikkhave, sampatijāto bodhisatto samehi pādehi patiṭṭhahitvā
uttarābhimukho sattapadavītihārena gacchati setamhi chatte anudhāriyamāne,
sabbā ca disā anuviloketi, āsabhiṃ vācaṃ bhāsati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m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ayamettha dhammatā.
1.29. “비구들이여, 이것도 정해진 법칙이다.
즉 보살은 태어나면 두 발로 가지런히 땅에 서서 북쪽을 향해 일곱 발자국을 걸어간다.
하얀 일산이 펴질 때 모든 방향을 굽어 살펴보고
‘나는 세상에서 최상이요, 나는 세상에서 제일 어른이요, 나는 세상에서 으뜸이다.
이것이 마지막 생이다. 더 이상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고 대장부다운 말을 한다.
이것이 여기서 정해진 법칙이다.”
ñāṇañca pana me dassanaṃ udapādi —
‘akuppā me vimutti , ayamantimā jāti, natthi dāni punabbhavo’”ti.
그리고 나에게는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이제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는 지와 견이 일어났다.
ahañcānanda, vacchagottassa paribbājakassa ‘atthattā’ti puṭṭho samāno ‘atthattā’ti byākareyyaṃ,
api nu me taṃ, ānanda, anulomaṃ abhavissa ñāṇassa uppādāya — ‘sabbe dhammā anattā’”ti?
“no hetaṃ, bhante”.
7. “아난다여, 왓차곳따 유행승이 '자아는 있습니까?'라고 질문 했을 때
내가 만일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했다면
이것은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법들은 무아[無我].'라는 지혜를 일어나게 하는 것64)과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64) '지혜를 일어나게 하는 것은 Ee: ñāṇassa upādāya 대신에 Be, Se: ñāṇassa uppādāya로 읽어서 옮긴 것이다. uppāda는 일어남(arising)이라는 의미이고 upādā는 파생된 것(derived)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한편 주석서는 여기서 '지혜(ñāṇa)'는 제법무아라는 위빳사나의 지혜(vipassanā-ñāṇa)라고 설명하고 있다.(SA.iii.115)
“ahañcānanda, vacchagottassa paribbājakassa ‘natthattā’ti puṭṭho samāno ‘natthattā’ti byākareyyaṃ,
sammūḷhassa, ānanda, vacchagottassa paribbājakassa bhiyyo sammohāya abhavissa —
‘ahuvā me nūna pubbe attā, so etarahi natthī’”ti.
8. “아난다여, 왓차곳따 유행승이 '자아는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내가 만일 '자아는 없다.'라고 대답했다면 이미 미혹에 빠져있는 왓차곳따 유행승은
'오, 참으로 이전에 있던 나의 자아가 지금은 없구나.'라고 하면서
다시 더 크게 미혹하게 되었을 것이다.”65)
65) 세존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신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① 무아라는 표현은 당시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허무론자들이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이런 부류들과 같은 편이 되는 것을 경계하셨기 때문이다.
② 세존이 설하신 제법무아(sabbe dhammā anattā)는 그 어디에도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제법(諸法)은 모든 유위법들과 무위법을 다 포함한 것이다.(본서 제3권 「찬나 경」(S22:90) §4의 주해 참조)
그러므로 제법무아는 모든 종류의 초월적이거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아이론까지 다 포함하여 무아라고 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왓차곳따는 이미 어떤 식으로든 자아가 있다고 국집하고 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미 자아가 있다는 견해에 굳게 물들어 있는 왓차곳따에게 더 큰 혼란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으신 것이다.
본서 제3권 「무지 경」 1(S33:1) §2의 주해에서 보듯이 왓차곳따 유행승(Vacchagotta paribbājaka)은 『맛지마 니까야』「긴 왓차곳따 경」 (M73)을 통해서 마침내 출가하게 되고 그래서 아라한이 되었다. 이런 아라한이 될 선근이 있는 분에게도 이처럼 자아의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그는 이 문제가 해결되어서 마침내 유행승이기를 거부하고 세존 문하로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아의 문제는 인류를 당혹스럽게 하고 미혹하게 만들어온 중요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첫댓글
<이것이 最後生이고, 이제 再有는 없다.>
왜 두 부분(生, 再有)으로 말씀하셨을까요?
즉 最後生만 말씀하셔도 되는데
<再有는 없다.>는 말씀을 부기하셨을까요?
재유라는 게 있는데
세존에게는 더 이상 적용이 안되니까
그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그런 의미지요?
재유를 꼭 내생의 재유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순간 순간 재유가 일어난다는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오온이라는 현상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과
그것을 있으나 마나 한 현상으로 보는 것과
어느 것이 세존의 법과 부합되는지 봄봄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아님 다른 어떤 견해라도 좋습니다.
제가 보기엔 오온의 사라짐을 해탈이라고 보시는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먼저 봉행님의
//(輪回-)태어나지 않음(-解脫)을 목표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주장이
경문과 일치하는지 먼저 듣고서 나서
그 다음의 문제는 그 다음에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봄봄 제가 뭐라 하든 경문과 안 맞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의구심이 듭니다...
제 질문이 어렵습니까?
어떤 분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봄봄의 생각은 이렇다는 의견을 올리면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없고
다른 부분에 대한 설명에 대한 다른 의견을 말하고
그러면 그 부분에 대해 의견을 말하면
다른 질문을 하고....
대화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인지
말을 돌리고 주제를 바꿀려는 것인지
분간이 않될 때가 많습니다.
자 그럼 봄봄임의 일관된 주장에 따라 오온의 사라짐을 해탈 열반이라고 봄봄님은 생각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그럼 제가 대답하지요.
태어남 특히 봄봄님이 생각하는 생물학적 태어남의 종식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경문과 일치하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저는 일치한다고 봅니다. 같은 경문에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일어나니 어찌하지요?
그 어떤 법(오온)도 내가 아닌데 그들이 태어나건 말건 그게 왜 문제가 돼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생물학적 태어남의 종식//에서 //생물학//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지만
만약 그 //생물학//이 [물질로 이루어진]이라는 의미에 한정된다면
다시 이야기는 되돌아 갑니다.
봉행님과 같은 대화 방식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댓글이 없더라도 양해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봄봄의 의견을 마치는 것은 아닙니다.
댓글은 그만하더라도 본문에서 의견은 드려보겠습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면....
봉행님 생물학적 태어남만 생각하지 마시고 태어남에는 여러 태어남이 있어요.종류도 재료도 계도 다르고
봄봄님은 그러한 경전에 나오는 모든 태어남을 염두에 둔것이고 봉행님은 그런것은 큰의미가 없다 정신적으로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의식에만 촛점을 둔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