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또다시 KTV ‘영상기록 시간 속으로’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오는 11월19일과 26일, 두 차례에 걸쳐
‘서울을 노래한 시대별 서울노래’를 2부작으로 방송합니다.
아울러 제가 진행하고 있는 ‘옛 노래의 재발견’ 코너에서는
1부에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와 ‘배호의 생애를 팬들과 함께 돌아보고,
2부에서는 오기택의 ‘영등포의 밤’ 노래비 현장을 찾아
당시 노래의 시대적 배경과 의미를 되짚어봅니다.
‘영등포의 밤’ 노래비 현장에는 이 노래의 주인공, 오기택 선생도 함께 동행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여기저기 발표했던 방송 관련 자료, 정리를 겸해 올립니다.
참고삼아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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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배호[1]
배호, 그 한 박자 빠른 삶, 반 박자 느린 슬픔
우리나라 최초로 가수 이름을 따 제정된 길이 ‘배호길’이다.
그 주인공 배호가 올해 ‘탄생 70주년, 타계 40주기’를 맞았다.
때문에 어느 때보다 추모열기가 뜨겁다.
현재 그가 잠들어있는 신세계공원묘지에는
해마다 기일이면 수많은 팬들이 몰려와 합동추모제를 지낸다.
배호 팬들에겐 성지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딴 ‘가요제’도 1년에 세 차례, 그 것도 각각 다른 단체에 의해 개최되고 있다.
저간의 사정을 제쳐두고라도 이러한 현상은 분명 한국 대중문화 풍토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이렇듯 타계한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배호는 그가 살았던 기간보다 훨씬 더 오래도록 대중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오랫동안 팬들 가슴에 자리하게 만들었을까.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배호가 남긴 노래, '굿바이'에서 '영시의 이별'까지
우리나라 최초로 가수 이름을 따 제정된 길이 ‘배호길’이다.
서울 용산의 삼각지 로터리에서 400미터에 이르는 길이 ‘배호길’로 명명된 것은 지난 2000년 11월.
1963년, 스물한 살에 데뷔곡 ‘굿바이’를 시작으로 71년, 스물아홉에 ‘마지막 잎새’를 유작으로 타계했던 가수로써
배호의 활동기간은 불과 8년.
서른 문턱을 채 넘기지 못하고 타계한지 올해로 만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악단의 드러머 출신의 ‘북잽이 무명가수’로 출발해서 전성기를 맞을 즈음부터
신장염을 앓아 투병가수로 사투를 반복했던 그의 첫 취입곡 제목은 하필 ‘굿바이’,
그리고 마지막 취입곡 제목은 ‘마지막 잎새’와 ‘영시의 이별’이었다.
우리 대중가요의 주 테마가 ‘사랑과 이별’임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발표곡 중 ‘안녕’이나 ‘또 하나의 이별’ ‘파란 낙엽’ 등의 단어들이 암시하듯,
배호는 활동기간 내내 늘 일찍 닥쳐올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은 인상마저 받게 한다.
그 때문에 그의 노래들이 더욱 팬들의 가슴을 적시는지도 모른다.
그의 남긴 노래들 중 현재 ‘돌아가는 삼각지’를 시작으로
‘두메산골’ ‘파도’ ‘마지막 잎새’ ‘비 내리는 인천항부두’ 노래비가 세워져 있고
또 그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그의 이름을 딴 ‘배호가요제’도 1년에 여러 차례,
그 것도 각각 다른 단체에 의해 개최되고 있다.
저간의 사정을 제쳐두고라도 이러한 현상은 분명 한국 대중문화 풍토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이렇듯 타계한지 40년이 된 현재까지도 배호는 그가 살았던 기간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대중들로부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작곡가 겸 연주인, 막내 외삼촌 김광빈이 회고한 배호
본명 배만금.
1942년 중국 산동성 제남에서 부친 배국민과 모친 김금순 사이의 3대 독자로 태어난 배호의 직계 혈육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는 세살 때 해방이 되면서 귀국 행렬에 합류, 고국 땅을 밟았다.
그의 타고난 음악적 인자는 외가 쪽의 재능을 이어 받은 듯하다.
어머니 형제는 4남2녀로 바이얼리니스트이자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인 김광수는 셋째 외삼촌이고
막내인 넷째 외삼촌이 또한 작곡가 겸 연주인인 김광빈.
배호에게 첫 취입곡 ‘굿바이’를 만들어 건네주기도 했던 김광빈은
특히 배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어린 시절, 만금은 독립운동을 하던 부친을 대신해 막내 외삼촌의 손에 의해 자랐고
그의 등에 업혀 한국 땅에 도착했다.
음악을 하고 싶어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막내 외삼촌을 찾아 상경한 배호는
열여섯 살 때 ‘김광빈 악단’에서 드러머로 첫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배호’라는 예명도 그가 지어준 이름이다.
지난 2008년 12월1일에 타계한 작곡가 김광빈 선생은 생전에 본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배호란 이름의 ‘호’자가 늪 ‘호(湖)‘자로 운명이 그 이름을 따라간 것 같아 늘 마음이 아픕니다.”
이름을 호랑이 ‘호(虎)자로 쓰지 못했던 것이 내내 아쉽고 마음에 걸렸다는 김광빈 선생은
배호의 가수로써 숨어있는 재질을 찾아내 노래를 지도했고 본인의 창법 또한 전수시켰다.
“배호는 음폭이 매우 넓은 가수였습니다.
보통 18음을 넘어 19음까지 구사했는데 저음은 물론 고음도 일반 여성보다 세 음이나 더 올라갔지요.”
배호의 발성은 악보의 오선지 밖을 지나 ‘솔’ 음까지 구사할 정도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배호의 트레이드 마크인 중절모와 검은 뿔테안경도 나이가 들어보이게 하기 위해 그가 권유한 것이고
현재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배호의 묘에 세워진 노래비 ‘두메산골(반야월 작사)’ 또한 그의 작품이다.
즉흥 애드립을 구사, 노래를 잘하고 또 잘 만드는 가수
배호는 악단 시절 취입한 첫 노래 ‘굿바이’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가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김인배 작곡의 영화주제가 ‘황금의 눈’을 발표했던 66년도부터다.
이 노래가 제법 방송을 타기 시작하면서 그가 오랜 무명 생활을 벗어나고 있을 때
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나타난 인물이 당시 월간 ‘아리랑’의 연예기자였던 유명작사가 전우(본명 전승우)다.
이후 배호의 후견인 역할까지 맡아준 인물로 그는 곧바로
당시 MBC PD로 있던 작곡가 라규호와 콤비를 이뤄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과 ‘누가 울어’를 비롯한 노래들을 만들어 취입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 무렵 배호는 신장염이 더욱 악화되어 두 달 간 무대를 떠나 있어야 했다.
이 무렵 그를 찾아온 또 한 사람이 바로 ‘돌아가는 삼각지’의 작곡가 배상태다.
그가 만든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는,
현재 가수로써 보다 매니저로 더 잘 알려진 당시 아세아 전속가수 김호성에 의해 먼저 녹음되었다.
얼마 전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당시 마스터 취입기록카드에는 녹음날짜가 1967년 3월12일,
그리고 그 옆에 ‘NG’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때문에 음반으로까지 제작되지는 않았다.
작곡가 배상태(76)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이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를 불러줄 가수로 배호를 수소문해 찾아갔을 때
배호는 청량리에 있는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더군요.
한 눈에 보기에도 병세가 심해 거동은 물론, 호흡조차 가빠 보였습니다.“
결국 취입을 만류하는 배호의 어머니를 설득해 ‘돌아가는 삼각지’를 취입하기로 결정을 내린 배호.
이들은 인근 여관에서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연습을 했고
며칠 뒤 장충스튜디오에서 이 노래를 취입했다.
이 때가 67년 3월16일로 당시 이 노래의 배경이 되는 서울 삼각지에는
67년 2월부터 착공된 원형 입체고가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배호는 처음 녹음에 들어가기 전부터 매우 힘들어보였으며 노래가 끝날 즈음에는 아예 앉아서 취입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장충녹음실에 근무하던 최길순(63, 현 수창녹음실 대표)은
그 이후에도 녹음날짜가 결정되었음에도 배호는 때때로 나타나지 않았다며 그 때를 회고했다.
다음달 4월 2일, 배호는 또한 전우-라규호 콤비의 새 노래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과 ‘누가 울어’를 비롯한 13곡을
대도스튜디오에서 취입한 뒤 뉴스타레코드사를 통해 그의 첫 독집음반을 발표한다.
몇몇 가수들에게 취입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는
1967년 후반, 예상을 뒤엎고 각종 인기차트 상위에 랭크되기 시작한다.
“배호가 급부상하자 아세아레코드사 측은 서둘러 전속금 30만원에 월 1천5백 원을 주고 그를 전속가수로 영입했고
이 전속금으로 배호는 비로소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잇달아 발표하는 그의 두 번째 히트곡 ‘안개 낀 장충단공원’은 이 때 병실에서 연습했던 곡입니다.”
이 ‘안개...’가 취입된 것은 그 해 7월14일이었다.
내친 김에 아세아 측은 아예 뉴스타에서 발매된 그의 독집음반의 판권마저 사들여 아세아 레벨로 바꿔
다시 음반을 찍어내기 시작했고 1968년 1월, 수록 곡들을 새로 편곡해 재취입한다.
이렇게 해서 재탄생한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과 ‘누가 울어’를 비롯해
그가 발표하는 대부분의 노래들은 대히트를 기록하며 배호는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병마에 시달리던 그의 호흡은 늘 불안했다.
때문에 그는 무대에서 그때그때 감정과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으로 싱커페이션(syncopation)과 앤티시페이션 (anticpation)을 적절히 구사해 불안한 호흡을 스스로 조절했다.
드러머 출신가수답게 리듬 감각은 탁월했던 그는 당겼다, 놓았다하는 애드립으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 그
만의 독특한 매력을 창조해 멋진 창법을 한껏 구사했다. (계속)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Copyrights ⓒ 2007-02-16일자, 서울신문
첫댓글 1착으로 추천 찍고 갑니다. 대단한 자료,
잘 읽고 갑니다. 저와 같이 근무 하시는 팀장님이 배호의 열열 펜으로,
배호 음반은 거의 다 소장 하고 계시고 한데, 꼭 보도록 애기 해야 겠습니다..
제 글이
올해 '배호 40주기 추모행사'는 오는 6일(일요일), 경기도 장
전국 배호팬클럽 회원들이 모여 낮 12시부터 합동추모제를 갖습니다.
팀장님께도 이 소식을 전해주시죠...^^
저두추천합니다 귀한자료감사합니다 담아갑니다
늘 좋은 글과 세심한 자료들을 주시는 데 답글도 제대로 못고..크으..(요건 죄송해서 내는 의성어.)
지금은 두분 다 세상에 안 계시지만 예전에 울 엄니 편찮으실 때 아부지가 배호 시디 사 오셔서 들려주시던 생각이 납니다.
그 덕분에 저도 배호 노래를 더 알게 되었는데 그래서 배호 노래만 들으면 가슴이 찡합니다. 그 중에 '당신'이란 노래 참 좋아요.
감사. 지난 일요일, 40주기 합동추모제는 전국의 많은 팬들이 참석한 가운데 잘 마쳤습니다.
내년 4월이 탄생 70주년, 올해보다 더 의미있는 행사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들꽃님의 말처럼 저 지금 당신이란곡과 두메산골 이 두곡을
계속 번갈라 가면서 감상해보고 있어요..
평소에 거의 접해보지 못했는데 손인호님에 이어서
많은 관심과 애정으로 함께하는 시간 보냅니다..
박선생님께 감사 드려요..지금 헤드폰 사이로 흐르는 곡이 당신..
보내야 할 당신 마음 괴롭더라도.. 어린시절 라디오에서 많이 들어 귀에 많이 익었죠..
ㅎㅎ못부르는 노래지만 흥얼거려봅니당!^^
언젠가 직접 들을 수 있는 날도 오리라, 기대합니당.
배호 선생님 노래는 우리 어릴때 대단한 인기를 가지고 있었지요 동네에서 한가락 하신다는 분들은 모두 배호 선생님 노래 한가락씩 할줄 알아야 했고요 그리고 당겻다 놓았다 하는 선생님의 노래 특성은 지금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겻다 놓았다 하는 창법에 다 그런 아픈 사연이 있었구만요 우리가요계에 박성서님 만큼 많은 보물을 가지신 분은 없는것 같습니다. 궁금 했던 좋은 가요계 fact 항상, 또 기대 하겠습니다.
다들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의 감성을 대신했기에 그의 목소리와 노래가 지금까지도 오래 기억되는 가수가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가수가 앞으로도 많았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지난번 11월7일 가요무대 `배호특집` 보면서 정말 위대한 가수를 너무 일찍 떠나보낸 아쉬움에 맨정신으로 못보구 쐬주한잔 꺽으며 봤더랬습니다.그날이 마침 40년전 배호선생님이 세상을 떠난날이기도 했구요,`파도`는 저의 노래방 일순위 애창곡이기도 합니다.
이번 추모제에서 만난 배호 어린시절의 친구는 말하더군요.
'배호 노래를 부르다보면 처음엔 눈물이 나다가 나중에는 신이 난다고..'
실제로 그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능금빛 순정'을 부르는데 보는 순간 뭉클했습니다.
참 좋은 노래 많지요, '파도', '능금빛 순정' 등등...
박선생님의 배호 스토리 넘 잘 읽었습니다. 배호님의 그 쉼표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어 정말 고맙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