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잠/김겨리
고수레로 남겨 둔 홍시의 밀린 잠이 붉은 저녁이다
마당을 쓸던 노인이 허리를 굽히자 짧은 옷단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등골
그 깊은 계곡까지 노을이 들었다
무너지는 한쪽 벽에 봉창 달빛을 빚어 얽는 거미가
바람이 들지 않도록 거미줄을 암팡지게 엮는다
명아주 이파리 스적거림으로 창문을 단 집
구절초 꽃대로 세운 베흘림기둥에선 풍경(風磬)소리가 향긋하다
노인이 굽혔던 허리를 펴면 가울 볕이 어리광처럼 달려든다
도돌이표만 있는 가을볕은 노인의 십팔변이다
음정은 새털구름이고 박자는 떨어지는 은행잎,
아무나 풍월로 읊어도 징양조 장단*
지붕엔 말표고무신 한 짝이 노을로 배꼽만 덮고 누워 있다
갈기털 다 빠진 목덜미에 솟대 그림자를 괴고 잠든 말굽은
아직도 따스한 발걸음을 기억하며
지붕에 올라가 누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긴 한숨을 쉬는 노인의 호흡이 가늘게 떨린다
허공에 써 놓은 점자로 되짚어 가는 길에도
과속방지턱이 있는지 바람도 잠시 주춤하는 법인데
어느새 성성해진 백발과 그믐달만 뜨는 눈썹
슬하에 노을 닮은 은행나무 한 그루만 달랑 둔 노인의 가계(家系)
입술이 허옇게 일어나는 각질을 옷소매로 쓱 훔치니
노을이 찍 묻어난다
노인의 등뒤로 달이 뜬다 어쩌면, 오늘밤
은행잎 한꺼번에 다 떨어질지도 모든다는 쓷
노을의 끄나풀이 길다
*진양조 장단:판소리에서 가장 느린 박자
첫댓글 푸른 시간을 지나온 생명들이 잠들어야 할 시간...
잠들기 전의 색깔들은 붉다
오늘 밤은 꿈속에서 노을이 비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