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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좀 살아본 고부장이 말하는 형벌과 수감 생활
책 <판사유감>의 저자인 문유석 판사는 책 벌레 기질 탓인지 글쓰기를 좋아하여 10여 년간 서울행정법원,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 해외연수과정인 하버드 로스쿨(석사), 법원행정처, 서울고등법원, 광주지방법원 등 다양한 근무지에서 다양한 재판을 경험하면서 느낀 점들을 글로 써서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려 왔고, 이 책은 그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중 일부인 '파산이 뭐길래', '서울 법대와 하버드 로스쿨', '초임부장일기'는 언론에 소개된 바 있다. 현재는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하고 있다. 저자는 판사유감의 두 가지 의미로서 판사로서 재판을 하면서 인간으로서 느껴지는 감정과 판사로서 고민하고 반성한다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제목인 '판사유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의미는 '判事有感'. 판사로서 재판을 하면서 느낀 것들이 있다. 판사에게도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서 느껴지는 감정들이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 의미는 '判事遺憾'. 이 사회의 많은 분들이 판사에 대하여 느끼는 아쉬움과 불만을 잘 알기에 이를 고민하고 반성한다는 뜻, 즉 판사에 대한 유감의 의미다. 그래도 글이란 무겁지 않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는지라 독자들이 책을 읽은 후에 '이 판사 느낌있네?'라는 의미의 판사유감(判事有感)'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넉살 좋은 욕심을 품고 있다."
이 책은 1부 판사, 사람을 배우다, 2부 판사, 세상을 배우다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글들은 오랫동안 법원 내부 게시판에서 동료 판사들과 나누어 온 이야기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저자는 판사라는 직업으로 일하는 자신이 조금씩 세상을 발견해 가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그는 판사의 일을 하면서 왜 판사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이 책의 프롤로그를 시작한다.
저자가 법원의 파산부에서 일하면서 느꼈던 글들이 인상적이다. 그는 개인파산, 개인회상사건 한 건 한 건은 한 사람을, 한 가정을, 한 아이를 되살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한 회사가 살아나면 주주도, 근로자도, 협력업체 사람들도 살아난다. 따라서 파산부는 회생부이기도 한 것이다.
"야근이 생활화된 파산부에서 일하다 보면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도 돌려막기를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돌려서, 건강을 위해 운동할 시간을 돌려서, 아름다운 음악과 책을 즐길 시간을 돌려서, 그저 몰려드는 일을 막아 내는 데 쓰며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일만 하다 보면 어느새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누구를 위해서 하고 있는지를 잊기 쉽습니다. 그게 진짜 중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저자는 징역 1년의 무게라는 제목의 글에서 '엄벌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도 평소에 우리나라 법원은 너무 온정주의적이여서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집중하며 읽었다. 저자는 결국 가치생대주의에 기반한 현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엄벌주의'와 '필벌주의'는 모두 형사정책적 수단에 불과하지 목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범죄를 절멸하려는 시도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또 다른 위험을 낳기에 적정한 선을 넘지 않도록 범죄를 관리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다만 국민의 법감정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엄벌주의로 일관하는 양형은 당연히 경계해야 하지만 최소한 시민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 의식과 결보된 범죄(살인, 성범죄, 장애인에 대한 범죄 등)에 대한 양형이 국민의 법감정과 괴리되면 심각한 사회적 분노와 사법 불신을 야기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판사로서는 징역 1년의 무게를 함부로 가벼이 여길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의견에 공감한다. 범죄가 피해자에 미치는 고통에 대하여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범죄자에 대한 징역 1년이 엄한 벌인지 아닌지 역시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라는 저자의 말이 판사로서 형량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문제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엄벌주의'가 범죄율을 낮추는 특효약이라는 증거는 없다는 점입니다. 만약 '엄벌주의'로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 형사정책적으로 입증되었다면 지금도 대다수의 문명국가들에서 빵 하나는 훔쳐도 평생 감옥에 가두는 식의 형벌체계를 유지하고 있겠죠. 하지만 선진국 중 우리나라보다 전반적인 형벌 수준이 높은 나라는 미국과 싱가포르 정도뿐입니다.
그리고 '엄벌'은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평균적인 형벌 수준이 높아 많은 수감자 수를 유지해야 한다면 교도소나 소년원과 같은 교정시설을 엄청나게 증설해야 하고, 세금으로 그 많은 수감자들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동시에 수감 인원 증가는 사회적으로 노동력 감소를 의미하기도 하죠. 물론 그런 사회적 비용을 투입해야 할 만큼 범죄로 인한 사회적 손실과 위험이 큰 상태라면 이를 감수해야 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성범죄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비교적 치안이 안전한 나라 중의 하나로 꼽히곤 합니다.
또한 '엄벌' 여부를 판단할 때는 징역을 하루도 받아 본 적 없는 일만 시민들이 막연히 영화에서 본 것만 가지고 추측하는 것과 실제 형을 복역하는 사람들이 복역 기간이나 그 후의 사회생활에서 받게 되는 고통이나 불이익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사법연수생 시절 국선변호를 위한 교도소 접견, 검찰시보 시절 인권 보호를 위한 유치장 감찰, 형사단독판사 시설 관내 교도소 시찰을 할 기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형사재판 업무를 할 때는 피고인이 교도소에서 써 내는 엄청난 양의 편지, 탄원소 등을 읽고 법정에서 대화도 하게 되지요. 그런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해 동물처럼 '우리'에 갇혀 자유를 박탈당하고 처벌받는 것은 막연히 생각하는 것 이상의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평생 처음으로 자유를 구속당하여 남들이 쳐다보는 쇠창살속에 수감된 사람들은 그 기간이 단 하루, 아니 몇 시간만 되어도 엄청난 공포와 좌절감, 자기모멸과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정치범, 양심범, 장기수 등이 상대적으로 수감생활을 잘 견디는 것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최대 요소의 하나인 '자기모멸'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저자는 지성과 반지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좌우 와, 보수와 진보 등의 편 가르기는 다 본질과 직결되지 않는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고, 진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지성과 반지성이라는 것이라고.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 또한 지성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아는 것과 혼동하는 것, 더 나아가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는 바라는 것에 저촉되는 것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갈릴레이를 법정에 세웠던 바로 그 반지성 아닐까요."
"생각할수록 저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행히 재판 제도라는 것은 이러한 인간 인식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고안된 것이기에 법에 의해 부여된 '입증책임'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답을 모르겠으면 입증책임을 지는 측이 재판에서 지게 됩니다. 형사소송에서는 검사가 유죄의 입증책임을 지는 것이기에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이 입증하지 못하면-즉 모르겠으면-무죄인 것이고요. 하지만 사회에서의 문제들은 모르겠으면 아직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매사에 꼭 선명한 결론을 내리려고 무리하는 것은 오만인 동시에 무지입니다. 근거 없는 확신을 유포하는 것은 무지를 범어선 범죄일 수 있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무지한 대중들은 전문가 집단이 하는 일에 감히 토 달지 말고 순종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견을 피력하되 자신의 의견과 지식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전제로 자기 검증을 되풀이하며 자기가 말할 수 있는 부분까지 말하자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으면 스스로 단정하지 말고 의문만 제기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결론을 사실상 내려놓고 반문하는 의문이 아니라, 진실에의 열린 가능성을 열어 둔 순수한 의문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이처럼 까다로운 자기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라면 최소한 자신이 지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교육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도 먼저 이렇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소영웅주의와 귀차니즘이 판치는 사회는 어떤 면에서 독재국가보다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후자에 존재하던 자생적인 비판적 지성이라는 희망이 전자에는 고사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법관이 흔히 빠질 수 있는 함정이 자기의 철학과 가치관을 멋있게 판결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당 이슈에 대한 영미, 유럽 등 선진국에서의 논의를 잘 알고 있는 법관이라면,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자칫하면 너무 과감한 자기 논리를 펴기 쉬운데, 그런 판결은 같은 입장의 식자층에서는 열광과 환호를 받기 쉬우나 다수 대중에서는 심정적인 공감을 얻지 못할 위험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판사인 저자가 '반대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중요성을 말하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논리'나 '당위'로 절대로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공감'해야 비로소 변화하지요. 사람들은 '이게 선진국에서는 당연한 상식이고, 인류 진보의 방향이다'는 식의 논리에 대하여 그 말이 맞든 틀리든 일단 반감을 가지기 쉽습니다. 한순간에 상식이 없고, 진보의 방향을 거스르는 반동으로 비난받는 느낌을 받게 되거든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결국 인간의 방어 본능에 관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대다수의 인간은 옳은 비판이라도 비판을 받으면 우선 방어 본능이 발동하여 반발하거나 변명하게 되죠. '당신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이런 측면도 배려하여 주시면 좋겠어요'라는 스탠스로 설득하면 상대는 비판받는 수동적 지위가 아니라 관용을 베푸는 능동적 지위로 격상되기 때문에 훨씬 관대해지지요. 정치, 사회 어느 영역에서든 세상을 정말 의미 있게 바꾸기 위해서는 원래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의 열광보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수긍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주장을 펴야 한다고 봅니다. 판결도 마찬가지지요. 항상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대립된 양측이 있기 마련인데 모두가 박수치는 판결이란 있을 수 없다고 봐요. 판결에 불만족하는 쪽에서도 '마음에는 안 들지만 잃어 보니 판사가 잘못했다고까지는 하지 못하겠네' 정도의 반응을 보인다면 성공적인 판결문이 아닐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편적인 논리와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근거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사회적인 관심을 받는 사건에서 법리적인 이유로 일반 상식과는 다소 다를 수 있는 결론이 선고될 경우, 법이 그러니 당연한 일이라는 식으로 쉽게 생각하지 말고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생각이 들 만큼 친절하게, 표현도 심사숙고하여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잘 설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심각한 사법 불신을 낳은 이유 중 상당수가 이런 문제에 대한 오해인데, 언론이나 대중들이 법에 무지하여 오해한다고 억울해할 것이 아니라, 법원이 먼저 오해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의무가 있는 것 아닐까요. 판결문의 독자를 상급심 법원이나 변호사라고 생각하지 말고 일반 국민이라고 생각하면서 설득하려는 자세로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자가 쓴 '재판하기 위해서는 야근할 시간이 없다'는 글에서 판사라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에 대해 느껴진다.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 재판을 바라고, 공감하려면 먼저 소통을 해야 하고, 소통하려면 노력해야 한다. 이 복잡다단한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동시대인들이 어떤 고통과 고민,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지 알고자 노력해야 하며, 그들과 소통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고민하여야 한다.
"어떻게 보면 참 판사하기 힘든 세상입니다. 국민들의 눈높이가 너무나 높아졌어요. 눈높이에 맞게 재판을 하려면 역설적이지만 야근할 시간이 없습니다. TV를 10년간 안 보기는커녕 가능만 하다면 신문도 편향하지 않게 서로 다른 입장의 신문을 같이 보고, 인터넷 여론의 흐름도 살피고, 세계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관심을 갖고,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각 분야에 관한 시대정신을 담은 좋은 책들도 읽고, 무엇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를 갖고 고민해야 겨우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회인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게다가 평생 법관으로 살아가려면 심신 모두 건강해야 하고, 이 또한 부단한 노력을 요합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 관리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판사도 감정노동자이기 때문이지요. 판사의 일이라는 것이 분노, 절망, 의심 등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대면하며 자신의 감정은 절제하고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 일인데, 그로 인한 후유증이 없겠습니까. 이를 해소할 시간도 없이 바로 또 일에 파묻히고 집에는 잠시 자러 다녀오는 생활을 반복하는 감동노동자가 있다면, 정상적인 직장에서는 그 노동자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제대로 일을 수행할 수 없어 고객이 불만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삶을 당연히하고 더 나아가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칭찬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불성실하다고 평가하는 직장이 있다면 서비스업의 경영 전문가들은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그리고 원만한 가족 관계 없이 롱런하는 직장인은 어디든 없습니다. 법원의 후견적 기능, 치유적 사법을 말하기 전에 먼저 판사들 스스로 자신의 가정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지요."
저자는 판사의 일이라는 것이 응급실 의사처럼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피맺힌 하소연을 매일 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냉소적으로 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라는 미드 <캘리포니케이션>의 대사를 이야기하면서 에필로그를 끝마친다. 책 <판사유감>은 현직 부장판사가 말하는 법과 사람 그리고 정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판사 문유석이 자신이 경험했던 사건에 대한 솔직한 심정과 판사가 가져야할 태도와 직업의식에 대한 판사 개인에 대한 고백이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이 지녀야 할 법과 정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한다.
"이제 사람들은 가정도, 취미도, 친구도 다 포기한 채 고독한 수도승처럼 의무의 감옥에 홀로 갇혀 있는 법관이 넓은 세상 속에서 펄떡펄떡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법리라는 잣대로 재단하는 것을 칭송하지 않는다. 행복한 법관은 더 참고 들을 여유가 있고, 더 긍휼이 여길 줄 알며, 더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알며, 동시대인과 공감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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