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의 낮과 밤
그 무렵의 울산은 우리니라의 중심 핵이었다. 조선소가 들어서기 전 이미 중화학공업이 자리를 잡아 맹렬히 전진을 거듭하던 때다. 당시 서울대 화공과 출신이라면 우리나라 최고의 수재였고 졸업을 하기도 전 큰 회사에 과장이나 공장장으로 발탁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바로 울산이 중화학공업의 메카였고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제1차 기대 목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급속히 발전하기 전 그 시작은 섬유산업이었다. 1960년대 대구지역의 섬유산업발전은 가히 산업혁명에 비유될 만 하다. 경제 개발의 첫 시작점인 대구가 시들해진 것도 같아 나는 무척 아쉽다.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6)에 따라 내수 위주 산업이 수출 위주 산업화 되고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1971)으로 수출전략산업화 됐다. 섬유공업이 전략산업으로 육성되면서 상업 자본이 공업 자본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대구의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직물 도매업자들이 대거 직물 제조업에 손을 대면서 섬유공업 성장에 결정적 기회를 부여했다.1963년도 대구 섬유 수출은 2백34만8천 달러로 대구시 전체 수출 2백57만5천 달러의 92%나 차지했다. 그후 나일론 타프타 수출이 늘면서 1967년 대구 섬유 수출은 2천4백51만 달러를 기록, 천만불대를 뛰어넘게 됐다.대구에 공단이 처음 조성된 곳은 대한방직이 자리한 침산동 일대다. 침산동의 제 1공단만으로는 공장수급이 어려워지자 도심의 상가나 주택가에 공장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게 됐고 이에 건설부가 일종의 복합 공업단지로 조성한 것이 제 3공단이다. 건설부로부터 특별단지 허가를 받아 대구시가 기반을 조성하고 68년 12월 말 완공 됐다.
공단 조성에 따른 원사공장의 증설로 나일론 생산량은 더욱 증가했다. 수입 사용하던 나일론사를 1968년 한국나일론이 7.5톤 증설, 10톤을 생산한 이후 1964년 7월 내가 사는 안양에 한일나일론(이후 동양 나일론이 흡수)과 1968년 동양나일론 울산공장의 7.5톤 생산시설이 증설되면서 국내 충당이 가능해졌다.
당시 나일론 직물의 인기는 나일론처녀 등의 속어까지 등장시킬 정도로 대단했다. 대부분의 부녀자들은 나일론 치마저고리를 입어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고 일제 나일론점퍼를 입으면 상류층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나일론사 1파운드를 사용해 천을 짜면 10파운드의 나일론사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이윤이 좋았던 한편 수출용 나일론사 가격과 내수용 나일론사 가격차이가 4∼5배나 돼 일부 업체들은 수출용 나일론사를 시중에 빼돌리다가 쇠고랑을 차기도 했다.
나일론 타프타로 한몫 보던 대구 섬유업계가 폴리에스터 직물을 본격적으로 생산한 것은 1970년대 초 부터다. 1960년대 후반에도 일본의 테이진과 동양레이온이 영국의 ICI로부터 기술을 도입, 테트론이란 상표의 원사를 조금씩 수입해 와 폴리에스터 직물을 짰지만1969년 선경이 수원에 7톤 규모의 폴리에스터사를 생산하고 난 후부터 조젯직물 등이 나오게 됐다.
원래 폴리에스터사는 경산 대한화섬에서 방사시설만으로 폴리에스터 SF사를 생산한 것이 국내 효시이지만 선경이 생산한 이후 삼양사 등에서도 생산에 참여하면서 본격화됐다. 대구 섬유업계가 폴리에스터 직물을 대량으로 제직하기 시작한 것은 EXPO '70 이후 부터다. 당시 제일모직이나 효성은 이들의 선두주자였다. 효성물산은 1966년 울산에 동양나이론을 설립했고, 이 회사는 발전을 거듭하여 세계적인 화섬메이커로 자리 잡았다. 효성그룹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에 걸쳐 승승장구하며 동양폴리에스터, 효성중공업 등을 비롯한 20여개의 기업군을 거느린 한국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당시 가난을 탈출하기위한 전략은 치밀했다. 계획이 시원치 않으면 바라는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없다. 인간의 몸 70%가 물이라면, 인간의 소지품 70%는 석유다.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원유 1톤 정제 시, 나프타 0.13톤 나온다. 0.13톤 나프타는 자동차 타이어용 튜브 22개를 만들 수 있으며 셔츠는 153벌, 농업용 필름은 2,023㎡, 운반용 상자 23개 ,TV 15대를 만들 수 있다. 정부가 중화학에 매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유, 유화산업은 소재산업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에 박통은 1960년대 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중점사항으로서 정유공장 건설을 주문했고 1962년 10월 대한석유공사 (현, SK에너지) 설립되었다. 1963년 울산정유공장 준공 (대한석유공사)되고 1969년 럭키(현, LG 칼텍스)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로 선정, 여수에 정유공장 준공이 이루어졌으며 1979년 전남 여천에 제2석유화학단지 (여천석유화학단지) 완공되었다.
그런 바삐 돌아가는 산업경제 시국이라 서로 서로 공고를 가려 하였고 안양공고를 나온 동네 친구들은 졸업을 하기도 전 회사에서 모셔갔다. 그때는 빛나는 공고들이 참 많았다. 수도공고, 서울공고, 용산공고, 금오공고, 부산 기계공고....나중 중공업으로 이어지기 위해 공고 몇은 특성화 고로 지정을 하고 육성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1년, 나 역시 울산에서 산업역군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개인플레이가 제한된 삶이었지만 나름 적응을 해서 그런대로 살만 했다. 군대를 안 갔기에 군대를 간 것쯤으로 생각을 했었다. 퇴근을 해도 마땅한 것이 없어서 사무실에 남아 전공서적을 들춰 보았다. 그 당시 우리나라를 일구어 낸 대표적인 기술은 바로 용접기술이다. 건설현장에서도 배 만드는 현장에서도 모두 긴요하게 쓰이는 게 용접기술이다. 하지만 당시 제작물의 핵이라 할 엔진이라 할지 동력전달 주요 요소들은 거의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아닌 말로 껍데기만 제작한 것이 우리네 실정이었다.
용접도 기능은 알아주는 데 이를 뒷받침 할 기술력이나 검사보증에 대해서는 훨씬 뒤떨어진 것도 부인 할 수 없다. 선진국을 언제 쯤 쫓아가려나 하며 부러움으로 들여다 본 외국 서적들이었는데 어느 참 이를 망라하고 역수출을 할 정도이니 우리의 두뇌와 끈질긴 도전은 알아줄만하다.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다 싶으니 방어진 생활이 나름 대로 흡족하기 까지 했는데 곤혹스런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먹는 음식 중에 내 입과 도저히 맞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화요일하고 목요일,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빨간 고깃국, 보기만 해도 역겨움이 이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배는 고픈데 먹을 수도 없고 나중에는 소시지를 사들고 가 간장을 찍어서 먹곤 했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나는 벌건 육개장은 마다한다. 우리는 왕회장이 언제 방문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식사가 달라지면 아니나 다를까 왕회장이 어김없이 찾아 왔다. 정문 앞에는 새마을 회관아라는 큰 강당이 있었는데 부장급 이상들이 그곳에서 대기를 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그때 들은 대로 옮기자면 그룹사 부사장이나 임원들은 이름만 호명해도 오금을 못 폈다고 한다. 누가 조인트를 까였다는 말이 왕회장이 올 때마다 흘러 나왔다. 새마을회관 앞에는 아주 정중히 모셔둔 링컨 콘티넨탈이라는 차체가 긴 고급 승용차가 있었다. 그 차는 선주들이 명명식을 하러 올 때나 수주가 거의 성사가 되어 선주가 공장을 보러 올 때만 움직였다. 왕회장도 안 타는 신주단지 모시 듯 모셔 둔 그 차가 움직이는 때는 그러니까 방어진 현대가 경사가 난 날이다.
당시 나같은 총각이 울산 방어진에 들어서면 소속부서장은 업무 말고도 또 하나 챙겨야 할 것이 있다. 3개월 버티면 1년 1년 버티면 3년 3년 버티면 10년이라는 말이 있었다. 서울 쪽에서 온 친구들은 3년이 지나면 반 이상이 빠져 나갔다고 했다.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지만 신입사원에게 당장의 성과를 기대하기란 무리다. 2년 정도 되어야 뭘 좀 아는 것 같고 3년은 되어야 제 몫을 해낸다 싶어진다. 그러니 3년 지난 대리 급쯤 된 사람이 이직을 하면 손실은 엄청난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부서장이 경우에 따라 중매도 서고 어쩌든 묶어 둘 궁리를 한다. 일단 직원이 그만둔다 하면 부서장은 임원에게 불려가 혼이 났다. 당시 옥포에 조선소가 1981년도에 생기면서 집단속은 더 해졌다. 왕회장이 대우에 김우중회장을 사업가가 아니고 장사꾼이라고 한 데는 유독 현대가 하는 것만 쫓아 하기에 이른 말이다. 당시 정문 앞에서 옥포 조선소 사람들이 반장 급들은 9만원 더 얹으며 포섭을 하였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 당시 나는 안양 본가를 두달에 한 번 꼴로 다녀갔다. 토요일도 5시 근무니 퇴근 후에 동대구 까지 나와서 기차를 타면 새벽 3시 반에 수원 도착을 하게 된다. 오자마자 식구들을 만나면 어느 새 2시 반 나는 고속버스 터미날로 또 가야 한다. 3시 45분 막차를 타기위해서다. 그렇게 서둘러 돌아서도 울산에서는 밤 10시가 넘는다. 가는 것도 쉽지 않지만 빠져 나가기도 어렵다. 부산에서 미팅을 한다고 거짓말을 치고 외출증을 받아 안양을 향하는 짧지만 달콤한 외출이었다.
아마 지금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 할 것이다. 나는 그래도 달콤함이라고 했다. 스치며 힐끗 보던 서울 아가씨들이 왜 그리 예쁘던지. 내려가서 일주일 정도는 ‘울산 큰애기’들이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단 일주일 뿐 희소성의 논리는 다시 적용된다. 코끼리 다리든 무우 다리든 젊은 여자들은 누구든 마냥 예쁘고 침을 질질 흘렸다. 당시 장가가려면 마산엘 가고 시집가려면 울산으로 오라는 말이 있었다.
내 상관들은 울산이 처가집인 경우가 많았다. 조선소 초창기 시절 숙소가 없던 시절에 하숙집 주인 딸이 자연 안방마님이 된 것이다. 제일 흔한 말이 처제 소개시켜 준다는 말인데 총각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울산큰애기를 얕잡아 보고 한 말이 아니고 소개를 받으면 때로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 동네 처자들은 매사 적극적이었다. 특히 서울 말씨라 하면 호감부터 갖고 마음에 들면 먼저 소문을 내기도 한다.
10년이 지난 후 그곳에 들른 적이 있는데 입사동기 한 사람은 당시 소문이 자자한 그대로 울산이 처가집이 되고 말았다. 아마 나도 조금 더 그곳에 있었다면 울산 큰애기들 틈에 끼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도 인기가 제법 있었다. 처자들은 아니고 부서 내 대리급 선배님들이었다. 봉급날은 매달 말일 부터 일주일은 퇴근 길 정문 앞은 난리가 난다.
외상 값 받으러 온 밤의 야화들과 다른 데로 새지 못하게 하는 본처들. 직원 한 분은 외상값이 8개월 째 밀렸는데 잘도 피해 다녔다. 그는 월급 때는 굳이 돌아서 미포조선 쪽으로 빠져 나갔다. 잡상인 출입 금지에 샛문이 그를 보살폈다. 깡패를 동원해도 소용이 없다. 술값을 안 냈다고 맞기라도 한다면 그 술집은 그 날로 끝이 난다. 소문이 나면 절대 그 집은 안찾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인기가 좋았던 것은 현금 동원 능력에 있었다.
대리들은 버스표 두 장에 담배값 천 원을 휴대하고 다니는 게 태반이었다. 퇴근을 하면 바로 앞 술집에 들러 스트레스를 날려야 하는 데 내가 그 안내자였던 것이다. 술값을 먼저 내고 월급날 회람을 하여 충당을 하는 식으로 우리는 살았다. 나는 12숙소라 하는 정문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지금의 다이아몬드 호텔 바로 앞에 머물렀다. 퇴근을 해도 행동반경이 정문에서 2백미터 안쪽이니 노는 재미는 없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그런 그곳은 대졸 이상이 머문 곳이고 5숙소라는 곳은 작업자들의 숙소였다.
내가 울산에 오기 전 방어진에 큰 폭동이 한 번 났었다고 들었다. 아마 80년도 정국이 혼란 할 때 이곳에도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대우에 대한 불만이 쌓인 5숙소 사람들이 거의 폭동 수준으로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그때 정회장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당당히 연단에 올랐다고 했다. 누군가 돌팔매질을 하자 왕회장은 얻어 맞은 상태로 피를 흘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이크를 잡으며 말을 시작하자 장내는 일순 조용해지고 그로 평정이 되었다는 전설아닌 전설이 있다. 당시 12숙소는 개별 욕실에 화장실을 갖추었지만 5숙소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경우가 없겠지만 그때만 해도 차별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때이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대졸초임 25만원으로 조업단축이 빈번했다. 일 할 게 적어서 그렇게 해서 임금을 줄이기도 했다. 지금은 전국 최고의 평균 임금을 받는 곳이 울산 지역이고 그중 자동차는 1억 가까이 봉급을 받는 잘 나가는 곳으로 알고 있다. 이는 세상이 달리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로 세상을 바꾼 것이다. 왕회장의 뚝심과 그들의 근면 성실이 언젠가는 큰 일을 낼 것이라고 나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우리가 밤낮으로 쉴새 없이 방어진에 불을 지핀 게 벌써 햇수로 몇 해인가.
최근의 조선소 불황,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 입사동기였던 현대중공업 모 임원도 이번에 그만 두었다. 하지만 이만한 조선소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현대그룹은 그룹 선전을 할 때 아무런 시설도 구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박수주를 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내보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신화가 바로 현대다. 그러면서 배경음악으로 체코의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몰다우란 교향시를 배경으로 선 보인다. 바로 조국을 위해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는 의미를 담고자 한 것이다. 나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 현대는 누구보다 조국 수호에 앞장서 달렸다.
현재 부침이 있지만 재도약을 위한 고통으로 생각해두자. 당시 재계를 누볐던 제일모직의 삼성 나일론의 효성, 폴리에스터의 선경, GS칼텍스의 럭키...그들은 지금도 재계를 이끌고 있다. 탐존스의 keep on running. 이 노래는 딜라일라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빅히트를 쳤다. 작은 나라가 괄목만한 성장을 해서 탐존스가 이 노래를 부르고 우리나라에 헌정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진실은 나는 잘 모른다. 아무튼 그 중단없는 전진. 그 시대 늘 들어왔던 말이다. 수지맞은 땅 방어진 또한 재도약하리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 혹시 이글 보고 현대에서 표창장 안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