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법궤에 손 댄 웃사의 죽음
사무엘하 6장 1-10절 / 1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2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3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5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6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사무엘하 6장 1-10절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있은 내용과 연계해서 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삼하 5:1-3) 이 소문을 들은 블레셋 족속은 군대를 동원하여서 다윗을 붙잡아 가려고 이스라엘 영토를 침범하였습니다(삼하 5:17). 그러나 다윗이 그 사실을 미리 알고 먼저 안전하게 피신하였는데 블레셋 족속이 힌놈 골짜기에서 가까운 르바임 골짜기의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는 다윗은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여호와여, 제가 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다윗의 이 물음은 자신이 블레셋 족속을 공격하면 여호와께서 저들을 멸하여 승리하도록 도와주시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일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에 다윗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출전하여 블레셋 족속을 쳐서 이겼습니다. 이러한 다윗은 그 승리가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뜻은 강 또는 둑을 '무너뜨리시는 주님'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패하여 도망쳤던 블레셋 족속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대를 모아 다시 다윗을 치러 올라와 르바임 골짜기를 또 가득 메웠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치도록 도와주실 것인지를 물었으며, 하나님은 그러한 다윗에게 이번에는 바로 올라가 그들을 치지 말고 그들의 뒤로 돌아가서 뽕나무[바카향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숨어 있다가 뽕나무 숲 위에서 적들의 발자국 소리가 나면 그때 나가서 싸우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아의 명령대로 움직여 예루살렘 북쪽의 기브온 근처에 있는 게바에서부터 욥바의 남쪽으로 블레셋 국경에 있는 게셀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족속을 쫓아 쳐부쉈습니다.
사무엘하 6장은 이렇게 다윗이 블레셋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배경 속에서 이제 이스라엘 영토에서 블레셋 족속을 다 몰아내고 그들의 지배 아래 있던 국경지대의 마을에서 예전에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겼다가 찾았으나 원래 있던 실로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기럇여아림에 머물며 사울의 통치 기간 동안 방치되었던(삼상 4장-7장 1절) 여호와의 법궤를 다시 찾아오게 되는 것으로 기록이 시작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뛰어난 정예군사 3만명을 모아 그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2km쯤 나가서 유다 지파의 바알레[후에 기럇여아림으로 불림] 마을에 이르러 이곳에 그동안 보관되었던 하나님의 법궤를 이스라엘의 새수도로 삼은 예루살렘으로 운반해 가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의 새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법궤는 그룹 첨사들의 보좌 위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서 그 궤 위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윗 성으로서 이곳에 하나님의 법궤가 모셔짐으로 해서 다윗은 명실공히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가 되도록 한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여 오고자 합니다. 이 법궤는 산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맡겨 놓고 그에게 지키게 하였던 것인데 그는 이미 나이 들어서 늙고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그 임무를 계승하여 법궤를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의 법궤를 운반하려고 하는데 다른 일에 쓰던 낡은 수레를 쓸수 없기 때문에 이제까지 한번도 사용한 일이 없는 새 수레[우마차]에 하나님의 법궤를 싣고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웃사는 여호와의 법궤 곁에 붙어서 따라가고 아효는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행진하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연주하여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곤이라는 사람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는 바람에 그만 하나님의 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곁에 붙어 따라가던 웃사가 얼른 궤를 손으로 붙잡아 땅에 떨어지려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웃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를 당하였습니다. 웃사가 맨손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만지지 못하게 한 규칙을 어기고 함부로 하나님의 궤를 만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셔서 그를 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를 본 다윗은 못내 이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가리켜 '베레스웃사'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웃사가 찢겨 죽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날부터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여 "이래서야 내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궤를 옮겨 모실 수가 있단 말인가?"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처음과는 달리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있는 성으로 모셔가지 않고 단 지파의 영역에 있는 레위족의 마을 가드로 보내 그 마을에 사는 오벧에돔의 집에 맡겼습니다.
사무엘하 6장 1-10절의 내용은 이런데, 이제 본 내용에서 다윗이 법궤를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 올 때에 웃사가 수레에서 떨어지는 법궤에 손을 댔다가 즉사한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웃사를 죽이신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웃사는 고핫 족속의 일원인데 하나님의 법궤[언약궤]를 나르는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고핫 족속은 원래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막을 이동할 때 이곳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나르는 방법에 대해서만 배우고 알도록 양육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나르는 방법은 민수기 4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고핫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할 때 만져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았고, 만일 만질 경우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웃사는 하나님의 법궤를 만져서는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궤 옆에 커다란 고리들이 달려 있는데 그 고리들에 막대기를 넣어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고 나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로 이동하거나 궤를 나를 때는 항상 고핫 자손들이 이런 방식으로 궤를 나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웃사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규칙을 어기고 제멋대로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실어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聽從)하지 않는, 그러니까 불순종하는 큰 악을 행하는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멋대로 임의로 다룰 수 없는 거룩한 언약궤를 아무리 좋은 의도와 선한 마음으로 다루었다 하더라도 웃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지 않는 큰 악을 행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수레에 실어올려져 운반될 때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었던 것은 단지 여러 악기들이 연주하는 소리에 놀라서 소들이 미쳐 날뛰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함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임의로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웃사가 다급한 나머지 엉겁결에 그만 하나님의 법궤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궤를 손으로 붙들었습니다. 웃사는 하나님의 법궤를 만지지 말 것에 대해 일생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만 그만 그것을 잊고 하나님의 법궤를 손으로 만지는 잘못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웃사가 고의적으로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땅에 떨어지면 파손될 것이기에 하나님의 법궤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급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웃사의 행동은 아무리 봐도 선의적인 것이었지 결코 악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웃사가 비록 아무리 악의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닐지라도, 다시 말해서 웃사가 비록 아무리 선의적으로 손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만진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규칙을 침해하였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삼하 6:6-7).
이 당시에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자들을 말씀하신 대로 처벌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지키면 "너희가 살 것이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아 지키지 않으면 "너희가 죽을 것이다"는 사실에서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는가 하면, 당시 이스라엘의 생명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생명의 주이십니다.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섬기는 자는 "살리라"는 것이 약속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주로 모시지 않는 자는 "죽으리라"는 것이 약속입니다. 곧 하나님은 '복'과 '화'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주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 사는 자에게는 생명으로 이끌어가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자에게는 죽음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이 누구로 말미암아서, 그리고 무엇으로 말미암아 사는가?를 알게 하십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다만 하나님에게 있으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하는 것입니다.
고핫 자손인 웃사가, 하나님이 주신 규칙을 좇아서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웃사가 비록 아무리 선의에 의한 마음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손으로 만졌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악으로 다루어지는 죄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를 죽음에 처하신 것은 의아하며 이상한 일이 아니며 따라서 그렇게 하신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 라거나 결코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하는 문제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은 사람이 임의로 다룰 것이 아닌 생명의 복과 죽음의 화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원리로 분명히 하여서 세워나가시는 때였기 때문에 이러한 차원에서 웃사의 죽음도 다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는 사건으로 웃사의 죽음을 다루어 가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을 들어서 그리스도인이 혹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잘못한 것을 내세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심판 운운하며 죽음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다루어진 구원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