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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존카터코벨 박사가 말하는 신공황후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이전 글에서 가야 묘견 공주가 일본 천왕가의 시조가 되는 야마타이국의 초대 여왕 히미코라는 사실에 대해 알아 봤습니다. 이번에는 존카터코벨 박사가 주장하는 신공황후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존카터코벨 박사는 고대 일본은 한국에서 건너온 부여기마민족 (가야도 부여족으로 인식)이 일본열도를 정벌, 지배하여 성립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입니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김석형의 일본열도 분국설과도 같은 맥락의 내용입니다.
존카터코벨 박사 그녀는 누구 일까요?
그녀는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이며 일본 고대사의 권위자였고 오랫동안 일본 미술사를 연구한 사람입니다. 또한 한국과 일본 고대사의 관계에 대해 많은 연구와 성과를 내었지만 한국과 일본의 학계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당해야 만 했습니다. 왜 한국과 일본에서 무시를 당했을 까요?
그녀의 주장은 일본 극우와 한국 강단 사학에서 지금도 극부 부정하는 고대 일본은 한국에서 건너온 부여 기마민족들이 건너와 통치했다는 주장을 펼친 대표적인 학자였기 때문입니다.
"부여족(扶餘族)은 말을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너 왔으며 창, 칼 등 월등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손쉽게 원주민을 제압하면서 규슈에서 나라 야마토 평원으로 동진(東進)해 나갔다... 이들은 군사집단이었으며 새로이 정착할 신천지를 찾아 일본에 온 것이다. 그 때문에 말을 대동해 갈 필요가 있었다. 일본에는 초기에 말이 없었다."
<존카터코벨 - 부여기마족과 왜>中
코벨교수(1910~1986, 76세) 미국태생, 일본 고대사에 심취해 일본에 건너가 수십년간 머물면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 고대사와 동양미술사에 정통한 학자 중 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중년이된 존카터 코벨 박사는 동양미술사를 공부하던 중 덕수궁 골동품 상에서 청동거울 2점을 발견하고 이를 게기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40세까지 일본에 심취해온 일본문화의 명성을 다 버리고 일본 고대사를 원점에서 부터 다시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2000여년 전으로 밝혀진 한국의 청동 거울이 일본 고대사를 뒤집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 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다시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일본 고대사는 모두 날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특히 일본서기를 장식하고 있는 여성 '신공황후'가 가야를 정벌한것이 아닌 반대로 일본 열도를 정벌한 가야의 여전사이자 무녀였다는 내용을 발표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학계의 반응은 냉담했고 이런 주장이 있은 후에 일본 고대사의 권위자인 코벨은 일본 학계에서 지워지기 지작했고 한국으로 건너왔지만 한국의 학자들에게서도 되외시되었습니다. 이런 주장이 일본과 한국의 학계에 매우 불편하게 받아들여 졌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한일간의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한국이 일본의 원류라는 사실과 부여계 가야의 기마민족들이 왜의 원류이며 그 뿌리는 중앙아시아 대륙에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야 대성동 고분에서는 1600년전 고대 여성의 3명의 시신과 전사를 상징하는 창이 함께 발견됨으로서 가야에는 여성 전사가 존해 했다는 것도 확인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중앙아시아에서 기원전 2000년 전 타클마만카 소하묘 유적에서 여전사로 추정되는 미이라가 발견됨으로 인해 증명되었고 이 소하묘 유적의 배모양의 고분의 형태가 가야 대성동 고분과 일본 큐슈의 쿠보이즈미 마루 야마 고분과도 이어지는 동일한 형태임이 확인 되었습니다.
이런 고대 일본의 기마민족 지배설의 주장은 일본 학계에는 천황제에 대해 폄하하는 식이라는 비판하였고 남한의 학자들은 자신들이 고수한 기존 학설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는 북한학자의 김석형의 일본열도 분국설과 맥을 같이 하는 내용이였기에 한국 정치인들은 북한과 같은 주장을 하면 곤란하다는 식으로 그녀를 비판했습니다. 또한 그녀가 미국에서 역사학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미술사 전공자이지 정통 역사학자가 아니라는 식으로 억지 명분을 들어 한일공동위회회는 코벨의 주장을 매도 폄하였습니다.
그녀는 일본과 남한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한 주장이 이미 코벨 이전에도 같은 주장은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 게리레쟈드, 샘존슨 등의 여러 학자들도 같은 주장이였으며 즉 한국에 의해 일본 왕조가 수립되었고 일본의 조장의 대륙의 기마 민족이라는 주장은 동일하였습니다. 총균쇠로 알려진 제럴드 다이아몬드도 고대 일본인은 한국인이였다는 같은 주장을 하게 됩니다.
https://youtu.be/WYFQL_JBWqs
이런 코벨박사은 369년에 일본 열도를 점령한 가야 기마민족이 신공황후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일본서기를 제외한 어느 역사에도 신공황후는 존재하지 못하였기에 그녀가 누구인지는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의 이유는 주갑제로 신공황후의 활동 시기를 잘못 비정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존카터코벨박사는 신공황후에 대한 문헌적인 증거를 찾아 보았습니다.
1. 신공황후가 한국의 무녀(巫女, 神女)라는 문헌 증거
김해김씨 족보와 중국정사에는 묘견공주가 신녀(神女)나 주술사로 묘사되고 동생(묘견)이 있다고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김해김씨 세보의 내용의 문헌 근거
묘견공주에 대해 신녀(神女)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견 왕자와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로왕과 왕후 허씨 사이에는 十子가 있었다. 長子는 太子(거등왕居登王)요 二子는 왕후의 姓을 따라 許氏가 되고 七子는 염세상계(厭世上界)하고 一子 거칠(居柒)은 군(君)에 봉해져 거칠군(居漆君)으로 칭했다. 거등왕의 아들 선(仙)은 진세(塵世)가 쇠함을 보고 신녀(神女)와 함꼐 승운이거(乘雲離去)하였다.」
김해김씨 선원보략(金海金氏 璿源譜略:1914년 金龍奎편)
諱登 建安庚辰立以世孫冊封太子己卯子諱仙見塵世哀葬與神女乘雲離去 王歎遂登都江石島巖招仙銘影子是以俗傳
거등왕(가야2대왕) 휘는 등이다. 건안 경진(200)년에 왕위에 올라 세손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기묘(199)년에 아들인 선 견(仙見)이 어지러운 세상과 애처로운 (수로왕)장례식을 보고 신녀(神女)와 같이 구름을 타고 떠나 버렸다. 왕이 탄식하고 도읍에 있는 강의 석도암에 올라 선을 부르고 아들의 형상을 새겼다. 이로서 속설에 전하기를 초선대라 한다.
『김해김씨 시조선원세계, 子居登王 (자, 거등왕)』
2) 히미코(비미호)가 무녀로 기록된 삼국지, 후한서 내용
히미코가 귀신의 도를 섬긴다는 내용(事鬼道)는 신녀라는 내용이고 남동생(男弟)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壻, 有男弟佐治國
그 나라도 본래 남자를 왕으로 삼았으나, 70년~80년이 지나자 왜국에서 난리가 일어나서 서로 공벌(攻伐)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마침내 모두 함께 한 여자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이름은 비미호(卑彌呼)라고 한다.[그녀는] 귀도(鬼道)를 섬겨서, 능히 무리를 미혹하며, 나이가 이미 많았음에도 지아비가 없고, 남동생[男弟]이 있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三國志 魏志 卷30 魏志 烏丸鮮卑東夷 왜(倭)』
桓·靈間, 倭國大亂, 更相攻伐, 歷年無主. 有一女子名曰卑彌呼, 年長不嫁, 事鬼神道, 能以妖惑衆, 於是共立爲王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치세에 왜국(倭國)에서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서로 공격하고 치니 오랫동안 군주(君主)가 없었다. 이름이 비미호(卑彌呼)라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었지만 시집을 가지 않고 귀신의 도(鬼神道)를 섬기면서 괴이한 술수[妖]로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녀를] 공동으로 세워[共立]왕으로 삼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3) 일본서기에 샤먼 주술 행위를 하는 신공황후 기록
일본서기에 보면 신공황후가 청동칼과 청동 거울로 신에게 기도하는 샤먼 행위를 하는 내용과 상투를 틀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皇后召武內宿禰 捧劒鏡令禱祈神祇 而求通溝
황후가 武內宿禰를 불러 칼과 거울을 받들고 하늘과 땅의 신에게 기도하여 도랑이 통하기를 구하게 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氣長足姬尊 神功皇后 (200년)』
令頭滌海水 若有驗者 髮自分爲兩 卽入海洗之 髮自分也 皇后便結分髮 而爲髻
머리를 바닷물에 씻는데 만약 영험이 있다면 머리카락이 저절로 양쪽으로 나뉘도록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곧 바다에 들어가 씻었더니 머리카락이 저절로 나뉘어졌다. 황후는 나뉘어진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氣長足姬尊 神功皇后 (200년)』
2. 활동 연대에 대한 비교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과 백제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조작된 허구의 내용이라면 오히려 주갑제에 의해 120년을 더해 연도를 억지로 맞추어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서기의 내용들의 왜곡들을 인정하고 오히려 주갑제를 적용하지 않고 원래의 연도로 서로 비교하게 되면 3명의 활동 연대는 3세기로 거의 일치합니다.
가야시대 초기 일본 규슈(九州)남부지방에는 여러 왜국(倭國)가운데 야마대라는 나라가 있었으며 가락국 제2대 거등왕때 중국사료에는 야마대는 히미코라는 여왕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역사 기록이 나옵니다.
수로왕(首露王, 42년(임인년) ~ 199년, 재위: 42년 ~ 199년)
거등왕(居登王, ? ~ 253년: 가락국의 제2대 국왕, 재위: 199년 ~ 253년)
묘견공주의 일본 열도로 본격 진출한 시기는 수로왕 사망 이후의 사건이므로 200년 이후의 3세기이다.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활동 년도는 201년 ~269년으로 묘견 공주의 시기와 같이 3세기이다.
중국기록의 히미코 (卑彌呼, ひみこ, ~ 248년)도 생년은 언제 부터 인지는 알수 없으나 활동 기간은 묘견 공주와 같은 3세기이다.
그녀에 대한 주변국의 기록 중에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서기 173년 비미호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라는 점이며, 중국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243년보다 70년이나 앞선 연대입니다. 비미호가 세웠다는 국가인 야마타이국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공식적 외교 이상으로 밀접한 관련성을 시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二十年 夏五月 倭女王卑彌乎 遣使來聘
(아달라 이사금) 20년(173) 여름 5월에 왜의 여왕 히미코(卑彌呼: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삼국사기』 아달라 이사금 본기
또한 후한서의 내용에는 히미코가 환제와 영제 사이 난이 있은 후에 왜국의 여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에서는 아달라 이사금 시기 173년 히미코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고 하고 있습니다. (* 桓帝: 후한의 제11대 황제이다.치세는 146~167년의 21년간, 靈帝: 후한의 제12대 황제이다. 치세는 167~189년의 22년간이다)
추정해보면 환영제 시기에 히미코가 태어나고 173년 이전에 왜의 여왕이 되었으며 선견과 함께 본격적으로 가야를 떠난 시기가 서기 199년 김수로왕 사망 이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연대 면에서도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데 한국과 중국 기록에 나오는 연대를 종합해보면 비미호는 173년 이전에 왜국의 여왕이었고 248년 사망했으니, 그녀가 여왕으로 살았던 기간은 75년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일본 기록에 의하면 묘켄(묘견)은 야쯔시로에서 70~80년간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일본서기에는 신공왕후, 삼국지에는 히미코(卑彌呼:비미호)로 표기되어 있다. 일본의 『古事記』에는 난생녀(卵生女)로 기록되어 있고 히미코가 서기 148년부터 서기 248년까지 100년 동안 살면서 서기 179년에 야마대국의 여왕에 올라 69년간 왕의 자리에 있었으며 무녀(巫女)로서 그녀의 곁에는 항상 남동생이 있어 국사(國事)를 보좌하였다고 『魏志』 「倭人傳」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신공황후, 비미호(히미코), 묘견공주는 같은 인물이다.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비미호(히미코),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왕후(神功王后)와 『고사기』의 난생녀(卵生女), 우리나라에서는 「김해김씨왕세계」의 묘견공주로 추정되는 신녀(神女) 기록이 생존연대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은 이들이 동일인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해김씨왕세계」에서는 「위지왜인전」의 기록을 뒷받침하듯, 「신녀」가 남자동생과 함께 어디론가 건너갔음을 묘사하는 구절도 동일하며 3세기 일본 규슈 야마태국은 가야와 같은 2모작을 했고, 철기공방이 있는 점 등으로 미뤄 이는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민들이라는 증거입니다.
또 가야 김수로왕 왕족들이 규슈로 이주, 건국의 토대를 이루기도 하였으며, 특히 우리 한반도에는 가야를 포함한 4국이 정립하여 전성기를 이루고 있을때 일본 열도에는 1백여개의 부족이 난립하여 국가로서의 기능을 갖추지 못하고 군소지역으로 분할된 단위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있었고 가야인들은 쓰시마를 거쳐 규슈로 대거 이주, 선주(先住)세력을 흡수한 후 규슈전역을 장악하여 고대 일본 국가형성의 주역이 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 문헌의 내용들을 확인해 본 결과 신공황후, 히미코, 묘견공주는 동일 인물로 추정되며 즉 존카터코벨 박사의 주장처럼 <일본서기 日本書記>의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라 정벌은 부여족(가야)의 왜 정복 내용을 거꾸로 기술한 역사 왜곡의 내용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영상]
https://youtu.be/nTgJIR0j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