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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의 사랑으로 이루는 세계복음의 완성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는 성령시대 구원자이신 안상홍님과 어머니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안상홍님께서는 2000년 전 새언약의 복음과 어머니하나님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땅의 어머니께서 자녀에게 생명을 허락하듯이 어머니하나님을 영접하여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들어가는 말
어
떤 분야에서든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유형별로 나눠보면 순종형, 주도형, 분석형, 맞춤형이 있다고 합니다. 순종형은 상사의 지시
명령을 잘 따르는 유형이고, 주도형은 자신의 의지대로 주위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유형입니다. 분석형은 매사에 일을 잘 분석해서
진행해나가는 사람들이며 맞춤형은 말 그대로 상대방에게 맞춰가며 일을 원활하게 이루어가는 유형을 뜻합니다. 이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것이 바로 맞춤형이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 가운데는 맞춤형이 적지 않은데 그것은 충분한 당위성이 있음에도 결코 명령이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헤아리면서 효과적으로 주위 사람들을 아울러 좋은 결과를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맞춤형 리더들이 가지는 특별한 리더십은 오래된 삶의 원칙 중 하나인 ‘배려’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은 배려하는 사람을 원한다
남을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려고 마음 쓰는 것을 뜻하는 배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많은 경쟁을 치르며 상대를 제치고 자신의 몫을 챙겨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오히려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존중과 배려를 받기 원합니다. 그렇기에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상대에게 특별히 무엇을 강요하거나 권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말과 행동에 동조하며 그의 뒤를 따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일에 있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데, 여기에서 인간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배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든 일단 상대의 말이나 태도로 인해 마음이 상하게 되면 아무리 상대가 정확한 사실을 말한다 해도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느끼면 더 이상 그 어떤 대화도 긍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경 영학을 전공한 2세 경영인들이 기업을 전수 받은 후 대부분 처음에 실패를 맛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일도 결국은 사람의 일이니 먼저는 배려를 통해 서로 간의 신뢰와 상호협력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저 통계나 수치만을 따져 논리적으로만 운영을 해나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영국에서는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는 직원들이 회사에 끼치는 손실을 비용으로 계산하면 연간 75만 달러에 이른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동료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사람은 오히려 조직에 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기업에서 선호하는 직장인의 유형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소위 ‘혼자만 잘하는 형’보다는 더불어 일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화합형’을 원하는 것입니다.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직업에서조차 옆의 동료가 1차 고객임을 생각하여 관심과 배려를 베풀며 화합을 이루고자 노력한다고 합니다.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합니다. 배려는 고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게 하며,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새로운 방향으로 돌파구를 찾는 성공의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한 배려, 나를 위한 선택
사
람들이 선뜻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이유는 배려가 겉보기에 왠지 손해 보는 장사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기쁨을 얻고자 노력할 때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고 할 때 더 큰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끝이 없고
만족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욕심이니 자기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고 해서는 결코 온전한 행복과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카네기와 같은 부호들은 자신이 거대한 부를 쌓았을 때보다 그것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베푸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남을 위한 배려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진정한 행복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인도의 선다싱에 대한 일화는 배려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축복으로 돌아오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눈보라가 무섭게 몰아치는 산길을 걷던 선다싱과 그의 동행자는 눈 속에 쓰러져 있는 한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선다싱의 동행자는 혼자 산을 넘기도 힘겨운 상황에서 이 노인까지 데리고 갈 수 없다며 그 자리를 피해 먼저 떠납니다. 그러나 선다싱은 그 노인을 자신의 등에 업고 산을 넘어갔습니다. 노인의 무게로 인해 힘들어지자 선다싱의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고 노인의 체온도 서서히 회복되어 갔습니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여 산을 무사히 넘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도착한 선다싱은 먼저 떠났던 동행자를 발견합니다. 그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순간의 배려로 인해 생각지 않게 자신의 목숨까지 건진 선다싱의 이야기처럼 누군가에게 베푼 것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빗대어 어떤 이는 배려를 ‘만기가 정해지지 않은 저축’과 같다고 말합니다. 당장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진실되게 꾸준히 행하면 반드시 좋은 결실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분명 배려는 자신과 타인이 서로 발전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과학적 법칙이며 그 결과는 항상 자신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배려는 또 다른 배려를 낳기도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뜻하지 않은 배려를 받게 되면 마음이 넉넉해지며 저절로 자신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려의 마음이 점차 주위로 번져나가면 결국에는 내가 속해있는 단체, 사회까지도 배려의 사랑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작은 것부터, 상대의 입장에서
그
렇다면 진정한 배려는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바로 상대방을 위하는 세심한 마음입니다. 배려의 반대말을 무관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다면 어떤 배려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잘 헤아리고 그 마음을 이해해주며 그
사람의 상황을 기억해두었다가 적절하게 베푸는 배려는 상대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됩니다.
입지가 그다지 좋지 않거나 규모가 작아도 장사가 잘 되는 가게들을 보면 손님에 대한 주인의 배려가 특별하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것까지 신경 써줄 줄이야’ 할 정도로 세세히 정성을 들이고 또 손님의 사소한 것까지도 잊지 않고 안부를 전하거나 염려를 해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손님들은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배려의 중심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있습니다. 사람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내 자신을 중심으로 일방적인 배려를 하는 것은 아무리 내게 최선이라 할지라도 상대에게 최악이 될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이솝 우화, 사자와 소의 사랑 이야기는 배려의 중요성을 잘 나타낸 적절한 교훈입니다. 사자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풀을 가져다 준 소와, 소에게 자신이 애써 사냥한 고기를 가져다 준 사자는 분명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사랑을 표현했던 그들은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오히려 서로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배려에 반드시 감동이 따르는 것은 받기 전에 먼저 주고, 사소하지만 실천을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배려는 결코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큰 것이 눈에 잘 띄긴 하지만 정작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소소한 일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의외로 작은 일에 상처를 더 잘 받습니다. 바꿔 말하면 아주 사소한 일에도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배려가 작지만 큰 힘을 발휘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배려가 상대에게 거부당할 것이 두려워 배려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에게 우산을 같이 쓰자는 말을 못하고 망설이다가 그 사람이 비를 맞으며 달려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배려를 포기하다 보면 실천할 기회가 없게 됩니다. 진심이 담긴 호의라면 상대방도 반드시 그 진심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진심으로 배려를 베풀어야 할 사람이며,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배려를 행할 기회인 것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배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배려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이 땅에 내려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들의 정해진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삶 속에서 영원한 형벌이 예정된 인생들에게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것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과 구원의 소식이었기에 그것을 전해주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같은 인생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극진한 배려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히 2장 14~15절 “자녀들은 혈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렇듯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친히 오신 자체가 자녀 향한 지극한 배려이지만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약속 안에서도 우리는 세심한 하나님의 배려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눅 22장 19~20절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방법을 좀 더 거창하게 계획하고 허락해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악의 옷을 입은 자녀들을 배려하셔서 지극히 간단한 방법을 택하시고 구원의 사역을 펼쳐가셨습니다. 유월절 떡과 포도주로 허락된 영원한 생명은 구원의 섭리마저 자녀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허락된 배려의 결정체입니다.
구원을 알지도, 바라지도 않았던 우리의 모습이 새 생명으로 거듭나고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직까지 깨달음이 더딘 자녀를 배려하시어 길이 참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온전히 시온에 거하며 구원을 앙망하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촌 전역은 날로 더해가는 기상이변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각에서는 혜성과 지구의 충돌로 인한 엄청난 재앙이 임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재앙들 앞에서 인류의 해결책은 미미하기만 해,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우 리가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배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구원의 기별을 전하여 안정한 처소된 시온을 알리고 그곳으로 도피시키는 것입니다.
오직 남을 위한 희생의 삶을 사신 하늘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낌없는 배려를 받고 또 배운 우리들이 이제는 그 배려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해야겠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아직까지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베푼 작은 배려의 사랑이 영혼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결국 자신의 것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들어가는 말
어
떤 분야에서든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유형별로 나눠보면 순종형, 주도형, 분석형, 맞춤형이 있다고 합니다. 순종형은 상사의 지시
명령을 잘 따르는 유형이고, 주도형은 자신의 의지대로 주위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유형입니다. 분석형은 매사에 일을 잘 분석해서
진행해나가는 사람들이며 맞춤형은 말 그대로 상대방에게 맞춰가며 일을 원활하게 이루어가는 유형을 뜻합니다. 이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것이 바로 맞춤형이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 가운데는 맞춤형이 적지 않은데 그것은 충분한 당위성이 있음에도 결코 명령이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헤아리면서 효과적으로 주위 사람들을 아울러 좋은 결과를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맞춤형 리더들이 가지는 특별한 리더십은 오래된 삶의 원칙 중 하나인 ‘배려’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은 배려하는 사람을 원한다
남을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려고 마음 쓰는 것을 뜻하는 배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많은 경쟁을 치르며 상대를 제치고 자신의 몫을 챙겨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오히려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존중과 배려를 받기 원합니다. 그렇기에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상대에게 특별히 무엇을 강요하거나 권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말과 행동에 동조하며 그의 뒤를 따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일에 있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데, 여기에서 인간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배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든 일단 상대의 말이나 태도로 인해 마음이 상하게 되면 아무리 상대가 정확한 사실을 말한다 해도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느끼면 더 이상 그 어떤 대화도 긍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경 영학을 전공한 2세 경영인들이 기업을 전수 받은 후 대부분 처음에 실패를 맛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일도 결국은 사람의 일이니 먼저는 배려를 통해 서로 간의 신뢰와 상호협력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저 통계나 수치만을 따져 논리적으로만 운영을 해나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영국에서는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는 직원들이 회사에 끼치는 손실을 비용으로 계산하면 연간 75만 달러에 이른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동료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사람은 오히려 조직에 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기업에서 선호하는 직장인의 유형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소위 ‘혼자만 잘하는 형’보다는 더불어 일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화합형’을 원하는 것입니다.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직업에서조차 옆의 동료가 1차 고객임을 생각하여 관심과 배려를 베풀며 화합을 이루고자 노력한다고 합니다.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합니다. 배려는 고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게 하며,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새로운 방향으로 돌파구를 찾는 성공의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한 배려, 나를 위한 선택
사
람들이 선뜻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이유는 배려가 겉보기에 왠지 손해 보는 장사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기쁨을 얻고자 노력할 때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고 할 때 더 큰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끝이 없고
만족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욕심이니 자기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고 해서는 결코 온전한 행복과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카네기와 같은 부호들은 자신이 거대한 부를 쌓았을 때보다 그것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베푸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남을 위한 배려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진정한 행복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인도의 선다싱에 대한 일화는 배려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축복으로 돌아오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눈보라가 무섭게 몰아치는 산길을 걷던 선다싱과 그의 동행자는 눈 속에 쓰러져 있는 한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선다싱의 동행자는 혼자 산을 넘기도 힘겨운 상황에서 이 노인까지 데리고 갈 수 없다며 그 자리를 피해 먼저 떠납니다. 그러나 선다싱은 그 노인을 자신의 등에 업고 산을 넘어갔습니다. 노인의 무게로 인해 힘들어지자 선다싱의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고 노인의 체온도 서서히 회복되어 갔습니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여 산을 무사히 넘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도착한 선다싱은 먼저 떠났던 동행자를 발견합니다. 그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순간의 배려로 인해 생각지 않게 자신의 목숨까지 건진 선다싱의 이야기처럼 누군가에게 베푼 것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빗대어 어떤 이는 배려를 ‘만기가 정해지지 않은 저축’과 같다고 말합니다. 당장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진실되게 꾸준히 행하면 반드시 좋은 결실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분명 배려는 자신과 타인이 서로 발전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과학적 법칙이며 그 결과는 항상 자신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배려는 또 다른 배려를 낳기도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뜻하지 않은 배려를 받게 되면 마음이 넉넉해지며 저절로 자신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려의 마음이 점차 주위로 번져나가면 결국에는 내가 속해있는 단체, 사회까지도 배려의 사랑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작은 것부터, 상대의 입장에서
그
렇다면 진정한 배려는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바로 상대방을 위하는 세심한 마음입니다. 배려의 반대말을 무관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다면 어떤 배려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잘 헤아리고 그 마음을 이해해주며 그
사람의 상황을 기억해두었다가 적절하게 베푸는 배려는 상대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됩니다.
입지가 그다지 좋지 않거나 규모가 작아도 장사가 잘 되는 가게들을 보면 손님에 대한 주인의 배려가 특별하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것까지 신경 써줄 줄이야’ 할 정도로 세세히 정성을 들이고 또 손님의 사소한 것까지도 잊지 않고 안부를 전하거나 염려를 해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손님들은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배려의 중심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있습니다. 사람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내 자신을 중심으로 일방적인 배려를 하는 것은 아무리 내게 최선이라 할지라도 상대에게 최악이 될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이솝 우화, 사자와 소의 사랑 이야기는 배려의 중요성을 잘 나타낸 적절한 교훈입니다. 사자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풀을 가져다 준 소와, 소에게 자신이 애써 사냥한 고기를 가져다 준 사자는 분명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사랑을 표현했던 그들은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오히려 서로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배려에 반드시 감동이 따르는 것은 받기 전에 먼저 주고, 사소하지만 실천을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배려는 결코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큰 것이 눈에 잘 띄긴 하지만 정작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소소한 일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의외로 작은 일에 상처를 더 잘 받습니다. 바꿔 말하면 아주 사소한 일에도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배려가 작지만 큰 힘을 발휘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배려가 상대에게 거부당할 것이 두려워 배려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에게 우산을 같이 쓰자는 말을 못하고 망설이다가 그 사람이 비를 맞으며 달려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배려를 포기하다 보면 실천할 기회가 없게 됩니다. 진심이 담긴 호의라면 상대방도 반드시 그 진심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진심으로 배려를 베풀어야 할 사람이며,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배려를 행할 기회인 것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배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배려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이 땅에 내려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들의 정해진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삶 속에서 영원한 형벌이 예정된 인생들에게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것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과 구원의 소식이었기에 그것을 전해주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같은 인생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극진한 배려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히 2장 14~15절 “자녀들은 혈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렇듯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친히 오신 자체가 자녀 향한 지극한 배려이지만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약속 안에서도 우리는 세심한 하나님의 배려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눅 22장 19~20절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방법을 좀 더 거창하게 계획하고 허락해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악의 옷을 입은 자녀들을 배려하셔서 지극히 간단한 방법을 택하시고 구원의 사역을 펼쳐가셨습니다. 유월절 떡과 포도주로 허락된 영원한 생명은 구원의 섭리마저 자녀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허락된 배려의 결정체입니다.
구원을 알지도, 바라지도 않았던 우리의 모습이 새 생명으로 거듭나고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직까지 깨달음이 더딘 자녀를 배려하시어 길이 참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온전히 시온에 거하며 구원을 앙망하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촌 전역은 날로 더해가는 기상이변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각에서는 혜성과 지구의 충돌로 인한 엄청난 재앙이 임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재앙들 앞에서 인류의 해결책은 미미하기만 해,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우 리가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배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구원의 기별을 전하여 안정한 처소된 시온을 알리고 그곳으로 도피시키는 것입니다.
오직 남을 위한 희생의 삶을 사신 하늘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낌없는
배려를 받고 또 배운 우리들이 이제는 그 배려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해야겠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아직까지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베푼 작은 배려의 사랑이 영혼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결국 자신의 것으로 돌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