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나는 열네 살이었고 친할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다. 한 때는 점성가였던 그 노(老)비구가 내게 물었다.
"나는 직업이 점성가였고 취미로 손금도 봤다고 하지만 대체 너는 내가 산야신이 될 줄을 어떻게 알았지? 나는 그전까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네가 내 안에 씨앗을 뿌렸다. 너를 만난 이후로 나는 오직 산야스만을 생각했다. 너는 어떻게 알았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약 오늘도 누군가 나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어깨를 으쓱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히 있는 그대로를 허용했을 뿐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대가 어떤 일을 경영했다고 생각하게 하려면 그대는 일을 앞서가는 기술만 배우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경영이란 것은 없다. 특히 내가 관여한 세계에는 경영이라는 것이 없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그냥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눈은 너무 순수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당신이 산야신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당신은 벌써 산야신이 되었어야 합니다. 이미 너무 늦었어요."
어떤 의미에서 산야스는 항상 너무 늦다. 한편 다른 의미에서 산야스는 항상 너무 이르다... 그리고 둘 다 옳다.
이번에는 그 노비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너는 나를 당혹시키는구나. 어떻게 내 눈을 보고 그런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니?"
내가 대답했다. "만약 눈이 그런 실마리를 줄 수 없다면, 점성술은 전혀 불가능할 겁니다."
점성술이라는 말은 분명히 눈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별에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장님이 별을 볼 수 있는가? 별을 보기 위해서는 눈이 필요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점성술은 별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별을 보는 과학, 환한 대낮에도 별을 보는 과학입니다."
간혹 그런 일이 일어난다... 바로 스승이 제자의 머리를 칠 때이다. 오늘 아침에 아슈, 그대가 시계를 보았을 때 내가 캐나다 드라이 소다 병으로 그대의 머리를 친 것을 기억하는가? 이제 기억나는가? 바로 그 순간 그대는 놓쳤다. 바로 그것이 점성술을 안다는 의미이다. 그녀는 오늘 아침에 약간 그 맛을 보았다. 그녀는 다시는 시계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발 계속해서 시계를 보라. 그래야 내가 계속 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대가 내면으로 뛰어들겠는가? 나를 용서하라. 그러나 항상 내가 그대를 치도록 허용하라. 나는 항상 그대에게 용서를 빌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다시는 치지 않겠다는 말은 절대 안하겠다. 사실, 처음 친 것은 다음 번에 더 깊이 치기 위한 준비 작업일 뿐이다.
여기 이 모임은 이상하다. 나는 늙은 유대인이다.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
"한 번 유대인이면 영원한 유대인이다."
그런데 나는 유대인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속담이 진실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아직도 유대인이다. 그리고 내 오른쪽에는 100퍼센트 유대인인 데바기트가 있다. 그리고 내 발치에는 데바라지가 있는데 그도 반은 유대인이다. 그의 코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어디서 그렇게 아름다운 코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구디아, 만약 그녀가 아직도 이 자리에 있다면 그녀도 영국인이 아니다. 그녀 역시 유대인이었던 적이 있었다. 이것은 처음으로 밝히는 사실인데 구디아는 다름 아닌 막달레나였다! 그녀는 예수를 사랑했다. 그러나 예수를 놓쳤다. 그는 너무 일찍 십자가에 못 박혔다. 여자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도 필요하다. 그는 겨우 서른 셋이었다. 그 나이에는 축구를 할 나이다. 만약 그대가 조숙하다면 축구 시합을 보러 갈 나이다.
예수는 너무 일찍 죽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너무 잔인하지 않았다... 아니 내 말은 그에게 잔인했다는 말이다. 나는 그들이 잔인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반대로 말한 것이다.
구디아, 그대는 이번에는 놓칠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나는 예수가 아니다. 나는 서른 셋에 쉽게 십자가에 못 박혀 버린 예수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인내심이 많다. 심지어 여자도 잘 참는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잘 안다. 때로는 힘들다. 아주 아주 힘들다. 여자는 정말 목에 가시가 될 수 있다!
나는 한 번도 목에 통증을 느낀 적이 없다. 다행이다! 그러나 나는 척추의 통증은 안다. 만약 척추의 통증이 그렇게 아픈 것이라면 목의 통증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목은 척추의 최정점이다. 그러나 그대가 목의 통증이든 척추의 통증이든 상관없다. 이번에 그대는 놓칠 수 없다. 만약 이번에도 놓친다면, 다시는 나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예수는 아주 쉽게 다시 찾을 수 있다. 깨달은 사람은 언제나 있다. 그러나 나처럼 수만 가지의 길을 여행하고 수만 생을 살고 꿀벌처럼 수만 개의 꽃에서 향기를 모은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약 나를 놓친다면 아마 영원히 놓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 가운데 누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대들의 교활함, 경직성, 영리함을 자르는 방법을 모두 알고 있다. 나는 세상 전체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나의 사람들, 정말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이 있다.
바로 오늘 독일에서 출판될 새 책의 번역본을 받았다. 나는 독일어를 모르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에 관련된 부분을 번역해 주었다. 지금까지 어떤 농담도 나를 그렇게 웃긴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농담도 아니다. 그것은 심각한 책이다.
그 책의 저자는 내가 깨달은 것(enlighten)이 아니라 계몽되었을 뿐(illuminate)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55페이지나 할애했다. 대단하다!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단지 계몽되었다니 대단할 뿐이다! 놀라지 마라. 바로 며칠 전에 같은 범주에 속하는 멍청이 네덜란드 교수로부터 비슷한 책을 받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은 같은 범주에 속한다.
구제프(Gurdjieff)는 모든 사람을 일정한 계획에 따라 나누었다. 거기에는 몇몇 백치들의 범주도 있었다. 이제 이 독일 친구와 네덜란드 친구는 바보... 아니 바보가 아니다. 바보라는 말은 나의 유대인 제자 데바기트를 위해 남겨 두었다. 그들은 백치들의 첫번째 범주에 속한다. 그 네덜란드 백치는 자신의 논문에서 내가 계몽된 것이 아니라 단지 깨달았다고 증명했다. 아니 증명하려고 애썼다. 이제 이 두 백치는 만나서 싸우고 논쟁하고 책으로 서로의 머리를 때려야 할 것이다.
이 기회에 분명하게 나에 대하여 선언하겠다. 나는 계몽되지도 않았고 깨닫지도 않았다. 나는 단지 매우 평범하고 단순한 사람이다. 내게는 어떤 형용사도 없고 어떤 학위도 없다. 나는 증명서를 모두 태워 버렸다.
백치들은 항상 똑같은 질문을 한다. 차이가 없다. 이것은 기적이다. 인도, 영국, 캐나다, 미국, 독일 사이에는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러나 백치는 보편적이다. 백치는 어디나 같다. 어느 곳에서 맛을 보든지 같을 것이다. 아마 붓다도 내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사실 붓다도 말했다.
"바닷물은 어디서 맛보아도 짠 것처럼 붓다는 어디서 맛보아도 같은 맛이다."
아마 붓다들이 같은 맛이 나는 것처럼 부두(buddhu:힌디어로 백치를 뜻함)들도 같은 맛이 나는가 보다. 부두라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오직 힌디어로만 그렇다. "붓다(buddha)"와 부두는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그래서 거의 같은 말이다.
그대가 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든 말든 나는 전혀 상관이 없다.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이 사람은 내가 깨달았는지에 대해 너무 관심이 많아 작은 책 가운데서 50페이지나 그 의문에 할애했다.
이것은 확실히 한가지를 증명해 준다. 즉 그는 첫 번째 계급의 백치라는 것이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이다. 왜 내가 깨닫거나 계몽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학식인가! 계몽은 깨달음과 다른가? 전기가 있으면 깨달은 것이고 촛불만 있으면 계몽된 것인가?
나는 그 차이를 모르겠다.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나는 스스로가 빛이다. 깨닫지도 않았고 계몽되지도 않았다. 나는 이런 말들을 저 멀리 뒤에 두고 떠나왔다. 그 말들은 내가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길 위에서 먼지처럼 흩날리고 있다.
소위 교수, 철학자, 심리학자라는 사람들이 왜 나 같은 하찮은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일까? 나는 그들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 나는 내 인생을 산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내 자유이다. 왜 그들은 나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인가? 나에 관해 55페이지를 쓸 동안 차라리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 불쌍한 교수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밤을 낭비했을까? 그는 그 시간에 계몽되던가 아니면 적어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네덜란드 교수는 그 시간에 깨달았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계몽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풀었을 것이다.
그 때는 오직 침묵만이 있을 것이다.
할 말이 없다
노래를 부를까
아니면 춤을 출까
아니면 앉아서 차나 끓이고
조용히 마실까...
첫댓글지금 우리네 인생에서 백치의 삶을 산다는 것은 깨달음을 느낀 자만이 알 수 있을것 같아요..우리 동네에 백치 아저씨가 있어요.항상 즐겁고 웃어요..제가 느끼는것은 번뇌의 인생들 이 아저씨처럼 차라리 백치가 되어 모르고 살면 좋겠다 싶더라구요..얼마전에 결혼 햇다고 좋아하시던데..
이 분은 자기가 백치인지도 몰라요 항상 즐겁거든요..그런데 요즘 꼬맹이들 하고 놀더니 열심히 뛰어 다니십니다 왜냐구요.놀리는 애들 웃으면서 잡을려고 뛰어 다녀요 그런데 쫓김을 당하는 아이는 사색이 되어 있지요..좇겨 다니는 아이들 아저씨가 쫒아 다니는 덕분에 겸손을 배우겟지요 참고로 나이가 저와 같아
첫댓글 지금 우리네 인생에서 백치의 삶을 산다는 것은 깨달음을 느낀 자만이 알 수 있을것 같아요..우리 동네에 백치 아저씨가 있어요.항상 즐겁고 웃어요..제가 느끼는것은 번뇌의 인생들 이 아저씨처럼 차라리 백치가 되어 모르고 살면 좋겠다 싶더라구요..얼마전에 결혼 햇다고 좋아하시던데..
이 분은 자기가 백치인지도 몰라요 항상 즐겁거든요..그런데 요즘 꼬맹이들 하고 놀더니 열심히 뛰어 다니십니다 왜냐구요.놀리는 애들 웃으면서 잡을려고 뛰어 다녀요 그런데 쫓김을 당하는 아이는 사색이 되어 있지요..좇겨 다니는 아이들 아저씨가 쫒아 다니는 덕분에 겸손을 배우겟지요 참고로 나이가 저와 같아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