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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과 존재: 테아이테토스편 /
in 인식과 존재: 테아이테토스편과 소피스트편 .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1: 박홍규전집 2, 민음사, 2007(1995) pp. 176-247(P. 524) .
박홍규(1919-1994), 1986년 12월 28일 강의(녹음),
인식과 존재: 테아이테토스편과 소피스트편은 1986년 강의이다. 우리는 둘로 나눈다. [1] 테아이테토스편(176-217)과 [2] 소피스트편(217-247). - 논리적 명제로서가 아니라 대상(자료)으로서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 있기는 한가? 소크라테스의 이뭣꼬(ti esti)의 궁극적 물음이 물체로서 대상, 인간관계에서 개념으로서 대상, 감각과 감정에서 받아들여지는 표상으로서 대상, 이런 것이 아닌 자기 자신(자체)이 대상이 되는 것이 있다. 영혼이다. 대상이 아닌데, 이를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관 뚜껑을 닫아봐야. 그러면 과거로 사라진 것을 다루게 되는가? .
박선생님의 강의는 인식(epistêmê)에 관한 한 <여럿에 걸친 하나(hen epi toû poloû)>를 찾아야 된다는데 중점을 둔다. 철학사에서는 여럿에 걸친 하나가 존재(on)일 것이고, 이는 파르메니데스 이래로 상층철학의 주제이다. 그런데 테아이테토스편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여럿에 걸친 하나>에서, 즉 신체와 영혼의 관계 속에서, 영혼에 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영혼이 잘 정의 되지 않는 것은 대상으로서 다룰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감정을 일으키는 점, 재인식에서 내부에서 가지고 있는 표상의 역할, 등등이 외부의 대상으로 관계하는 자료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직관을 통해 알려지는 것이 영혼이라고 하는데, 영혼을 존재나 이데아처럼 정의내릴 수 없다.
그러면 추론에 의해서 규정하려고 해도 추론의 범위를 넘어서거나, 존재와 달리 생성되는 부분이 있어서 규정하기도 곤란하다. 그렇다면 명제로 정의나 규정을 내리지 말고, 그저 이름을 붙일 수는 있을까? 아마도 그렇다고 할 것이다.
여기 주제와는 별개로, 나로서는, 이런 이름만이 있는 것은 또 있을 수 있는데, 자연과 신이다. 대상으로서 실험관찰의 자연이 아니라 세계를 총체적으로 담당하는 자연은 정의와 규정을 벗어난다. 이는 마치 지료개념과도 마찬가지로 정의 내리기 곤란하다. 그리고 아마도 갈망 또는 희망의 기호에 가깝고, 미래에 규정 또는 정의 내려야 할 것인 신을 대상화할 수 없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 즉 누구도 명제화할 수 없기 때문에 ‘신만이 안다’고 하듯이 신이라는 상징을 창안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자연도 신도 명제에 속하지 않고, 추론으로 개념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써 이름 뿐일 것이다. 그런데 영혼은 변화과정이고 생성중이기 때문인데, 이런 것은 존재와 달리 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름뿐일 수 있다. 자연은 비결정성의 존재로서 무규정적인 존재이기도 하고 그리고 자연도 생성중이라고 하면, 자연은 영혼과 유비적으로 같은 과정을 걷고 있을 수 있다. 즉 <la nature humaine>는 인간본성은 인간자연이다. 여기에는 온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이며, 그 인간도 자연의 변화와 더불어 변한다는 관점이 가미되어 있다.
이에 비해 여기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신은 이상하게도 무규정적이고 비결정적이면서도 마치 원리인 것처럼 다루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 신을 존재처럼 다룰 수 있다고 여긴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규정성 또는 원리로서, 또는 목적성 또는 완전성으로서 신은 인간의 지성(오성)이 만든 개념, 또는 오만의 표시일 수 있다. 그런데 완전성이 있기는 한가? 긴 시간과 넓은 공간에서 소멸하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우주에 무엇이 있겠는가? ‘아무도 모른다’ 즉 그래도 ‘신만이 안다’고 해야 완전과 영원에 대한 기대(미래)가 상실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51VLE)
# 인식과 존재: 테아이테토스편과 소피스트편
테아이테토스편 176-217.
박홍규: 테아이테토스편 처음에 인식(epistêmê)이 뭐냐고 질문을 하니까 여러 가지 개개의 인식을 열거했지? 그러니까 그러지 말고 하나, <여럿에 걸친 하나(hen epi toû poloû)>를 찾아야 된다고 했어. 그 뜻이 무엇이야? (176)
박: 여러 인식들이 먼저 있고, 그 인식들의 사상(pragma)은 무엇이냐를 생각해야 돼. <pragma>[프라그마(πρᾶγμα)]는 현대말로 바꾸면 데이터야. 인식의 데이터는 여러 가지의 인식들이야. 그것은 인식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에 대한 인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인식들이 있고, 그 인식들에 대한 하나의 정의(definition)를 내려보자는 것 아냐? (176-177)
윤구병: 그러면 선생님, 대상(pragma)으로서의 인식과 이름(onoma, ὂνομα)으로서의 인식은 어떻게 구별됩니까? / 박: 대상(pragma)이 중심이지만, 여기는 대화니까 이름(onoma)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지. 이름이 대상이라는 것은 소피스트편에 나와. 우리가 인식(epistêmê)이라는 말을 쓰니까 그렇게 나온 거야. 내가 얘기 한 것은 그러니까 여러 가지 인식이 있고 나서 나중에 인식론이 발전하는 것이지, 인식론이 있고나서 나중에 다른 학문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야.(177)
가령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같이 개체 이론을 놓고 나간다면 똑 같은 학문에 대해서도 설명이 달라질 것이고, 또 주체자에 대한 이론, 즉 그 정의나 가설이 달라지면 그것에 대한 설명은 달라지게 돼. 이것은 대단히 중요해.(178)
그리고 지금의 논의는 플라톤의 인식 이론이야. 여기 나온 대상은 플라톤에서 말하는 대상[이데아]이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소리 안해. 왜냐하면 그의 이론은 개체 이론이거든. 또 여기 주체가 영혼인데, 영혼에 대한 플라톤의 정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다르단 말이야. (178)
[벩송의 설명: (소크라테스의) 영혼을 플라톤이 단순하고, 비형체적이고, 불가분할이며,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 영혼은 신체보다 먼저 현존하며, 적어도 보다 나은 어떤 것[최상의 것] 속에서 영혼은 불멸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본질적으로 부피없는(inétendue) 또한 본질적으로 활동적인 원리를 분명하게 정의했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정신(l'esprit)이라 불렀던 것이다. -“영혼론” 제1과 5절 플라톤.]
[이 영혼을 플라톤이 단순하고, 비형체적이고, 불가분할이며,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 영혼은 신체보다 먼저 현존하며, 적어도 보다 나은 어떤 것[최상의 것] 속에서 영혼은 불멸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본질적으로 부피없는(inétendu) 또한 본질적으로 활동적인 원리를 분명하게 정의했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정신(l'esprit)이라 불렀던 것이다. - 벩송: “영혼론” 제2과 아리스토텔레스]
윤구병: 그러면 대상으로서의 인식에 대한 여러 관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까? / 박: 대상(pragma)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면, 그로부터 나오는 결과를 정리한 이론(theory)이 달라질 것 아냐? / 윤: 그런데 왜 가설이 달라집니까? / 박: 물질에 대한 가설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근대 물리학이나 다를 수 있는 것 아니야? 하나가 된다는 게 어디 있어. (178-179)
박: 아냐! 아까 인식[(epistêmê)]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개개의 인식들을 대답으로 들자 <여럿에 걸친 하나(hen epi toû poloû)>를 요구했잖아. 그러니까 개개의 인식들이 이미 존재[인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돼. 만일 이러한 개개의 인식들이 없으며 인식일반에 대한 하나의 정의, 즉 <여럿에 걸친 하나(hen epi toû poloû)>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야. (179-180) [개별인식이 있고 보편 인식이 있다는 주장 같다. 보편 인식은 하나다. 그렇다면 그 인식은 (움직이지 않는 대상이라면) 존재에 대한 인식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움직이는 것을 인식할 수 없는가? 플라톤은 없다고 한다. 그러면 벩송은 움직임 즉 지속도 인식이라고 말할 것이고, 그것을 직관이라 부를 것이다. 이 직관은 플라톤의 하나(존재, on)의 직관과 다르다. 플라톤의 직관은 공간화의 존재(프라그마)이고, 벩송의 직관은 진동하는 흐름의 존재(프쉬케)이라 할 수 있다. (51ULJ)]
박: 여기서 가설이라는 말은 안 나와 있어. 다만 인식들의 예를 들고 있는데, 인식이 이미 있어야 예를 들었을 것 아냐? 그런데 지금 그런 하나하나의 인식을 묻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이나 여러 가지 학문의 공통적인 최고의 성격에 대해서 이론적인 하나의 정의를 해보자, 그런 얘기야. (181) [불교에서 식(識)의 단계를 여러 차원으로 놓는 데, 가장 상위(최고)의 식이 무엇일까? 반야를 통해서 열반으로.]
박: .. 모든 학문은 데이터에 의거하다는 거야. 지금 논하고 있는 인식론은, 사실 이것이 철학적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학문이 취급하는 자기 데이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야. (181) [철학적 심리학, 상층심리학 또는 인지(지식) 심리학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지성(오성)이 조작하는 방식을 다룬다. 이 조작을 현실에서 사회 또는 공동체에서 연결관계를 다룰 때 행동심리학이 나온다. 이상하게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행동심리학에 더 인접하고 있는 것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상층(Surmoi)을 학적 토대로 삼아 서술(해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료(데이터)는 추억의 상징화를 다루는 것이리라.]
여러 가지 학문들이 있는데 인식일반의 정의를 구하려면, 만일 그 학문이 물질에 대한 학문이라면, 먼저 물질 일반[좁게는 신체]이 무엇이라고 정의되어야 하고 또 주체자[영혼]는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나와야 돼. 다음에 이 두 개의 정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 속에서 인식이라고 하는 관계[심신관계]는 무엇인지를 찾아야 돼. 그런데 여기에서 주체자는 영혼이야. (181) [데미우르고스 같은 매개자, 조작자, 기술자를 개입시킬 필요없다. 운동하는 능력이 개입하는 물질도 움직이는 흐름인데, 개입하는 방식과 포획(포섭)하는 방식에서 물체(신체)의 준안정성이 규정된다. 그리고 진화의 시간을 거쳐서 신체들(생명체들)이 다양한 계열에서 타협안(포섭)이 이루어진다. (51VKC)]
이런 점에서 인식론은 모든 학문의 시초에 발달하는 학문이 아니라, 모든 학문이 발달한 후에 최후에 나오는 학문이야.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해. 영혼이 무엇이냐를 알려면, 생물학과 심리학이 발달해야 해. 생물학과 심리학이 발달한 뒤에 비로소 인식론이 발달하는 것이지. (181-182) [전통적으로 에피스테메(인식론)은 방법서설의 측면에서 오성론(지식론, 인지론)에 가깝다. 그런데 개별학문 다음에 오는 독사(인식론)는 방법후설의 측면에서 이성론(재인론, 영혼론)에 가깝다. 전자는 수학과 (원의) 천문학을 바탕으로 원리로부터 단계적, 위계적 발달론이라면, 후자는 생물학과 심리학에서 원인을 정초하면서 권능의 발현과정에서 나온 위상론 또는 확장론이라 할 수 있다. (51VKC)]
윤구병: 인식이 가능하다고 플라톤이 주장했잖아요? 영혼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가능하고 또 물질[신체]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고, 그 상호관계에서 생기는 인식이 정확하게 나온다고... / 박: 그래 플라톤 시대에서만 통하는 인식론이야. (182-183) [상층에서 표면으로 자기 분야에 속하는 것만을 인식하는 형상론의 인식론은 플라톤의 것이 맞다.]
박홍규: 아니야, 여기서 내가 하는 이야기는 플라톤의 한계를 분명히 해놓고 읽자는 것이지. (183) [역사적(통시적) 인식론이라기보다, 당대의 여러 인식론(공시적 위계)의 한계를 정해보자는 것이리라. 언어와 기호는 공시태가 우선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단어와 개념은 통시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윤리(Ethique)는 그리스어(du grec ethikos, de éthos mœurs)에서, 도덕(Morale)은 라틴어(du latin mores, mœurs)에서 나왔지만, 사실상 둘 다 풍습(mœurs)의 듯을 지닌다. 그런데 윤리학라면 학적체계를 지닌 학문으로 법률체계 이상으로 규범이라 여기지만, 도덕론이라 하면 법률로 형벌을 규정하기 앞서서 인간관계에서 상벌규약(규범)정도 여기듯이 말이다. 플라톤은 상식적 규범에 앞서서 원리적 법칙이 먼저 있다고 정의하고서 철학하자는 쪽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처음부터 원리가 지상에 적용되는 방향을 택하지 않고, 규범들 사이를 잘 이해하면 원리들이 보인다는 방향으로 대화편을 썼다고들 한다. (51VKC)]
박: 테아이테토스편은 인식론을 알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대화편인데, 이 대화편을 잘 읽으면 근세 인식론이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도 알 수 있지. .. 논리학은 논리학으로서의 그 데이터만 취급해. 그러나 철학은 모든 데이터를 취급해. (184) [그는 물리학, 심리학 등은 각각의 데이터를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박:...요컨대 철학만이 모든 데이터의 총체적인 것을 다뤄, 철학만이. (185)
박: ..어째든 물리학이 전부 수학으로 환원될 수 없어. 환원된다면 수학이라고 하지 뭣 땜에 물리학이라고 해? (185)
박: .. 한 데이터만 떼어내어(isolate)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이터와의 총체적 관계에서 취급하는 것이 철학이야. ... 그럼 여기 인식론은 무슨 얘기냐 하면, 이미 있는 여러 가지 인식에 대해서 하나의 정의를 이론적으로 해보자는 것이다. .. 테아이테토스편에서 인식론은 플라톤의 인식론이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은 또 다르지. (186) [플라톤는 내용(표현, 기호)의 인식론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연(의미)의 인식론일 것이다.]
박: .. 영혼(psychê)을 낳게 한다(maieusthai)고 했어. 그러니까 산파술의 대상은 영혼이야. .. 그러면 <epistêmê(인식)>에서 <epistasthai(안다)>라는 말을 이해해야 돼. 스넬(B. Snell, 1896-1986)의 논문집에 밝혀져 있어. 본래 이 <epistasthai(안다)>는 <technê(기술)>이라는 말과 비슷해. .. <technê(기술)>와는 그 지적인 측면이 달라. (187)
<technê(기술)>는 실제 목표에 도달하느냐 아니냐를 보는 것이고, 지적인 과정은 나중에 분리되어 <epistasthai(안다)>가 돼. 감성적이든 이성적이든 <epistasthai(안다)>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어. 첫째 능력을 의미하고, 둘째 과정(progress)를, 셋째 그 결과를 의미해. 스넬에 의하면 아티카 지방에서 쓰던 이 말이 가장 종합적이라는 거야. ... <eidenai(보다, 알다)>나 <gignôskein(분별하다)> 같은 말이 있지. 그러나 <eidenai(보다, 알다)>에는 <과정>의 의미가 없다는 거야.(187)
그러면 이제 산파술이란 무엇이냐? 사람의 영혼은 본성(physis)으로서 본래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옆에서 도와준다는 이야기야. .. 그 능력이 나타난다는 보증이 없어.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야. (188) [우선 있는지도 잘 몰라.. 살아가다보면 있는 것 같아, 오마니가 자식이 살아가게 하는 것은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 [영혼은 초월적이지도 한순간에 창조적이지도 않다. 과정을 거쳐 노력하여 만들어진 능력(faculté)이다. 이점에서 유물론이다. 필연적으로 나타날 운명이 없기에 교육과 노력이 필요하다. 점수 점수 돈점오. 돈오(頓悟)는 없다. (51VLE)]
따라서 구체적인 개별자, 제1실체(proté ousia)가 나타나려면, 그 조건으로 <덧붙어 다니는 것(symbebekota)이 나타나야 하며, <덧붙어 다니는 것>이 나타나려면 또 어떤 조건이 있어야 되느냐가 하는 문제가 제기돼. (188) [과정의 부분과 총체로서 추억과 기억이 필요하겠지]
그러니까 잠재적인 것에서는 어떤 때 성립하는지 철학적으로 생각해봐야 해. (188) [소크라테스는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노력을 해야하고 그리고 잘 나오도록 성실하게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산파술.]
박:.. 그런데 영혼(psychê)이 가지고 있는 능력(dynamis)은 그런 것이 아니야. .. 조건이 주어진다고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했어. 충족률이 성립 안 돼. (189)
박: .. 1+1=2라는 것은 딱 정해진 것이니까 어떤 경우에 있어서의 충족률이야. 딱 정해진 것이거든. 그러니까 수 자체 전체가 어떤 능력(dynamis) 속에서 성립하느냐의 문제겠지.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서 이해해야 할 것은 영혼의 기능에는 충족률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야. 그러니까 여기에 영혼에 대한 가설 하나가 나왔어. (189-190)) [산파술의 법칙이 충족율이 아니라, 분석적 명제가 충족률이라 보이지만 그렇지 않고 기하학의 원리가 충족률일 것이다. 즉 직선은 눈 있는 생명체는 다 같은데, 물리적으로 빛이 직선이기 때문이다.] / [ 1(사과), 1(배), 1(감) .. 단위(l’unité)이란 기호도 있고, 1(하나), 2(둘), 3(셋), 세어서 계속나아가는 것은 감각(sensation)인데 추상하여 관념을 추론으로 단계를 넘어간다. 1, 12, 33, 666(양666)처럼 단위를 종합적으로 인식하는 경우에 33은 한 단위이자 기호이며, 반성하여 나온 표상이다. 이때 이 수들은 모두 하나(l’un)이다. (51VLE)]
윤구병: 그러면 영혼이 능력(dynamis)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결핍의 요소가 영혼에 있다는 말이지요? 박: 그렇지. 있지. (190) [벩송과 들뢰즈는 결핍이 아니라 욕망(갈망)이 있고, 결핍은 만들다가(생성) 잘 안 만들어진 측면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결과론에서 나오는 것이지 능력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달리 생성할 수도 있으니깐 말이다. - 향연에는 결핍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욕망(갈망)은 들뢰즈 표현으로 결핍을 모르는 생성이다. ]
박: .. 영혼의 능력에 대해서는 충족률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가설이 나왔는데, .. (190)
<따라서 감각은 언제나 있는 것에 관한 것이며 인식인 한 거짓되지 않는다(Aisthêsis ara tou onto aei estin kai apeseudes hôs epistêmê ousia(테아이테토스 125c5-6). 이게 가장 중요한 말이야. (191)
박:.. <여럿에 걸친 하나(hen epi toû poloû)>를 찾는 것이 이론이니까, 존재의 공통치는 뭐냐를 찾아야지. (191)
윤구병: 만약에 감각과 관련시켜서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지속이나 반복과 연관시켜서 이야기해야겠지요? / 박: 그렇지, 지속과 반복을 보고 생각해야지. (1920
지속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지속해? 이 대화편에서는 뭐라고 말해? 그것이 나에게 나타나서(phainetai) 상(phantasia)으로 들어오고, 나의 표상(doxa)이 되어서 다시 재인(anagnôrisis)될 때까지 그대로 있어야 돼. (192)
가령 색깔이 내 마음 속에 들어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색깔은 외부에 남아있나? 존재라는 것은 내가 그걸 인식하든 안 하든 거기에 남아 있어야 존재일 것 아냐? 그렇지? .. 존재란 작용함(poiein)과 작용받음(paschein)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읾을 알 수 있지? (192) [존재(l’ëtre)는 현존재자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와 같은 의미이다. 토대로서 있는 것이다.]
박:.. 여기 [감각적] 인식은 환상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지만 참(true)이라는 거야. /... 여기 [감각적]인식은 나타남(phainetai)하고 비슷하지만 거짓되지 않아(apeseudes), 허의가 아니야. (193) [바깥의 색깔이 있고, 나의 재인에서 그 색깔을 인식해, 허위가 아니야.]
박홍규: 그러니까 대상[명사와 신체]하고 영혼 사이에 순간적으로 작용과 작용받음 사이에서 성립하는데, 그 내용이 불규칙한(irregular) 것은 아니라는 얘기야. 즉 규칙성(regularity)이 있다는 거야. (194) [흄이 규칙(the rule, la règle)을 말할 때, 재인에서 표상의 규칙적 등장으로 관념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
박홍규: .. 그러면 가령 내가 색깔을 파악했으면, 왜 내 속에 그대로 있어? 그걸 뭐라고 설명했어? 도장(ekmageion)을 찍는다고 했지? .. 티마이오스편에 나오는 공간 이론이야. / ... 밀랍에 몇 번을 찍어도 동장은 그대로 있어. / 윤구병: 그 경우 영혼(psychê)이 밀납 같다는 이야긴데요. 이 이야기는 또 영혼의 결핍을 이야기하는 말이에요. 무규정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195) [영혼을 수동성으로 본다면, 신체와 더불어 감응되는 측면이고, 영혼이 능동성이라면 다른 생성을 향한 감화의 방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자에서 결핍이며 후자에서 갈망(욕망)의 생성이다. ]
박: ... 밀납에 도장이 찍히듯이 찍혀 있으면, 언제나 나에게 표상되어야지? 그런데 우리의 기억은 항상 표상되는 것이 아니지. 밀랍이 변하면, 내가 회상하려고 해도 회상이 되지 않지. 기억 현상에는 망각과 회상이 있어. 또 우리 기억은 항상 표상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것을 우리가 항상 갖고 다녀? 밀랍에 찍힌 것 같이 항상 보고 다녀? 그건 아니지? (195-196) [추억의 무의식 속에 잔존과 추억의 현실화는 다른 과정이다. 전자는 수동적 수용이고 후자는 능동적 발생이다. 두 방향의 회로는 동일한 회로가 아니다. 벩송의 MM에서]
박홍규: 여기서는 작용함-작용받음이 성립하려면 두 사물이 서로 연결이 되어야 하고, 작용하는 것의 성격이 작용 받는 것으로 넘어가야 작용 받는다고 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 이것이 작용함-작용받음 이론이야. (197)
윤구병: ...가령 작용받는 것 자체가 순수 수동성, 즉 무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작용하는 것이 존재의 측면을 가지고 있을 때, 무가 존재에 작용을 미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끊임없이 작용하더라도 자기 동일성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지요. (197) [윤은 존재와 무라는 이항대립의 관점이다. 우리는 들뢰즈처럼 작용받는 것도 아니고 작용할 권능을 지닌 (비)존재가 자기 생성을 갈망하며, 그리고 모델로서 존재도 없고 이데아도 없다. 그럼에도 만들어진 것들을 가늠하여(recouper) 끊임없이 창조(생성)의 길로 나아간다. 형상도 목적도 설정하지 않는다. (51VLE)]
박홍규: 해석이 아니라 작용함-작용받음 이론이야. 도장 찍는다는 것을 물질적 현상이야. .. 지금의 경우[감각적 사실의 경우에서] 도장 찍으면 도장이 가지고 있는 질이 작용받는 것에게로 넘어가고 자신은 변해. 그런데 변한다면 어떻게 해서 존재(on)가 성립한다고 하느냐, 이게 문제야. 내말 하나도 안틀려. 원문에 대해서 정확해. (198) [박선생님은 감각적 사실에 대해 능산성-소산성을 이야기하는데, 제자들은 이데아와 무규정자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감각성에 관한한 이데아가 문제가 아니라 신체(밀납)와 영혼의 작용(인상, 표상) 사이의 관계가 아닌가? 신체와 함께 있는 영혼도 (이데아 영혼과 달리) 변하는데, 이 영혼 신체의 수동성과 달리 수동-능동(작용받음-작용함)이 이중적으로(과정상으로서)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같다. 플라톤의 고민이었을까?] [영혼의 이중성의 사유가 신체의 이중성의 사고 다음에 나올 것 같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에 신체가 존속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의 영혼(생명)이 있으나 오래지 않고, 전자의 경우에 신체의 존속보다 영혼의 존속(사후포함)이 더 길다는 가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박홍규: 요컨대 문제는 밀랍 이론이 유물론적인, 물질적인 작용함-작용받음 이론이라는데 있어. 요점은 그것이야. 밀랍이론이 엠페도클레스 이론보다 존재(on)의 자기 동일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문제로 떠올리기에 더 좋단 말이야.(199) [플라톤이 심층의 연관을 상층의 추론의 관계로 올려놓는 것인데, 국가편에서도 티마이오스편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연관(생성 계열)과 관계(추론 규칙)는 별개의 “차히”이라 보여진다.]
박홍규: 나는 지금 개애의 부분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인식론 전체의 윤곽을 얘기하려는 거야. 이때 핵심적인 문제는 존재인데, 이것이 영혼 안에 들어와서 변하지 않고 존재로서 지속하여 다시 재인되어야 돼. 그런데 이러한 과정이 성립할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게 문제라는 거야. ... 그러면 이 뒤에 곧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적 이론이나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동설 등이 나오는데 그것들을 통털어서 존재를 규정하는 대목이 있어. 그것이 어떤 규정이냐, 그걸 찾아야지. (200) [추억이 추억으로 남아있지 않고, 기억은 활동성으로 추억을 혼합하여 끌어낼 수도 있고.. 추억들이 종합적인 것은 총체적이 아니며, 추억에서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외적 관계에 적합성(유용성)에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박: <움직이는 존재(pheromênen ousia)>란 말이 나와.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야. 그것은 그러니까 움직이는 존재를 존재 측면에서 보면 인식(epistêmê)이 성립한다는 얘기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존재(ousia)는 뭐야? (200)
박: 진정한 존재(ontôs on)야, 진정한 존재는 단일 형상(mia idea)같은 것을 생각하면 좋아. 단일 형상이란 어떤 조건 없이 항상 자기 동일성(identity)을 갖는 것이야. 그런데 움직이는 존재는 움직이는 측면도 있고 존재의 측면도 있고, 양면이 있어. 그러니까 그 존재에서 보면 인식이 성립해. 단일 형상처럼 절대적인 자기 동일성을 갖는 것은 아닐지라도 상대적으로 항상 되풀이 되는 것이 있다[재인]는 거야. (201)
영혼(psychê)도 자체적인 것(kath’hauto)이 있고, 신체(sôma) 속에 들어가는 것이 있잖아. 신체 속에 들어가는 한에서는 움직이는 측면이 있고, 또 영혼으로서 움직이지 않는 측면도 있어. 그것이 합쳐져서 감각(aisthêsis)이 성립하거든. 그러니까 신체가 무엇이냐는 것도 복잡해. 여기서는 거기에 대한 자세한 논의가 없어. 요컨대 감각이 존재에 대한 것이었을 때 인식이 되는데, 그 때 절대적인 단일 형상으로서 언제든지 자기 동일성을 가는 지식은 아니지만, 항상 되풀이 되는(repeat) 부분이 있어. (201) [인식은 자기 동일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의 되풀이(반복)되는 부분, 즉 재인되는 부분이 인식이다. 영혼에게 인식이 있고, 신체에게는 현실적 양태가 있다.]
그러니까 간단히 얘기하면, 연속성의 성격을 가진 작용함-작용받음 이론을 가지고는 영혼의 기능은 설명될 수 없다는 거야. 플라톤은 이런 말을 안 하지만, 요점은 그것이야. 물직적인 작용함-작용받음과 생명현상[영혼]이 가지고 있는 지적 기능, 그 동적(dynamic)인 능력을 혼동하고 있다는 거야. (202) [신체의 작용-반작용(독사)으로 영혼의 작용-활동(에피스테메)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독사가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긴 것은 신체에서는 물체처럼 능동적 능력(기능)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진화론과 심리학이 나오기 전에는 반박하기 쉽지 않다.]
기종석: 그런데 테아이테토스편에서는 감각의 성립을 작용함-작용받음 이론으로 설명하고, 또 그 설명 모델은 물질적인 연속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고 하겠는데, .. (203)
박: .. 밀랍이론으로는 주체자의 자기 동일성이 파괴돼. / 윤구병: 그래도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하하. 그러니까 마치 맷돌이 닳아도 그 기능이 장시간 유지되고, 조금 닮는다고 해서 기능이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박선생은 영혼 측면에서 윤구병은 신체측면에서 자기 동일성 유지를 이야기 한다. ]
박홍규: 작용함-작용받음 이론 가지고는, 주체자가 자꾸 작용을 받아 변하는 것은 분명해. /../ 그래도 자기 동일성[정체성]이 있을 때 성장한다고 하지. [기억이론이 첨가되어야 한다.]
박: .. 이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예를 봐. 작년에 보아서 가지고 있는 표상(doxa)과 이제 저 밖에 있는 소크라테스와 맞춰본다고 해봐. 그때 기준은 바깥에 있는[현실의] 소크라테스야. 하나의 형상(mia idea)이 감성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냐? 그것도 하나의 직관이야. 그러니까 표상(doxa)이 참 어렵다는 거야. 잘 들어봐. 내가 의도하는 것은 벌써 내표상을 벗어나서 저쪽에 있는 소크라테스를 기준으로 해. [추억상과 현실상 사이에 우선권은 현실이지. 그럼에도 추억상들을 결합시켜보아야 정확성이 높아지지.. 플라톤이 독사를 버린 이유는 상들의 총체에 대한 기준(규정)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이었을 것 같다.]
박: 표상(doxa)은 가깝고 대상은 더 먼데, 어째서 먼데 것을 기준으로 해서 내 표상(doxa)을 거기에 대고 맞춰볼 수 있느냐, 그 말이야. 그것이 물질 현상으로 설명돼? / 윤구병: 거꾸로 설명할 수 있지요. 내가 이미 소크라테스에 대한 표상을 가지고 있는데, 저 사람을 이것과 비교해 보니까 맞더라, 하고요. (205-206) [감각적으로는 대상에게, 추론적으로 표상에게 우선권을 줄 수 있다. 박선생은 테아이테토스편에서 다룬 감각적 사실 즉 색깔 맛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 재인은 독사를 동원하지만 우선권은 사물(감각)에 있지 않는가 말이다.]
박: 재인한다는 것은 심리적 사실(psychological fact)이야. 그런데 이 심리적 사실이 여기서 말하는 물질적 작용함-작용받음 이론을 가지고 설명이 되느냐 그말이야. 지금 하나는 물질[신체]이고 하나는 영혼이야. 그러니까 두 개의 기능이 무엇이냐에 대한 가설이 나와야 된다는 것이야. (207) [박선생님 인식을 하나의 방식으로 풀려고 하는 것 같다. 즉 <여럿에 걸친 하나(hen epi toû poloû)> 말이다. 인식론은 존재론의 하부라고 하고 싶은 신 걱 같다. .. ]
윤구병: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on)는 영혼과 관계를 맺는다고 봐야겠지요. (208) [표상으로서 명사는 기호체제로서 지성의 추론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존재는 추론의 추상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박: ... 저기서 소크라테스의 상이 나에게 들어왔는데, 그것은 나에게 들어오면 타자이기 때문에 <doxa(표상)>라고 해. 그러면 그것은 허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거든. 따라서 이것이 허위인지 아닌지는 다시 저기다가 조회해(refer) 봐야 된다는 얘기야. 그것이 재인이야. ... 들어온 것은 벌써 <doxa(표상)>라고 해. 왜냐하면 그것은 외부 대상에 있는 질이 아니라, 자연(physis)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신체를 통해서 타자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타자라고 해. (209)
박홍규: 거꾸로 가. 자네를 내가 재인한다는 것은 현재 거기에 있는 자네를 기준으로 해서 재인하는 것이지. 내 인식 속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냐. (209-210)
박홍규: 엇바뀜(allodoxa)도 재인이 안 맞는 것, 재인이 어긋난 것이야. (210)
박:.. [문제는 영혼과 신체가 따로 떨어져 있는데] 떨어져 있는 것이 어떻게 연속되느냐 말이야. (210) [서양철학사의 고민, 데카르트도 고민했고, 벩송은 기억이론으로 해소하려고 했다. ]
박홍규: 엇바뀜(allodoxa) 때도 하나는 참된 견해(alêthês doxa)이고 하나는 거짓된(false)[(pseudes)] 것 아냐? 그 때의 참의 기준은 재인이 들어가서 그것과 합치 안 맞는하는 것이야. (211) <거짓 아니다(apseudes)>
박홍규: 여기서는 접촉(thigein)하고도 다르고, 단일 형상(mia idea)하고도 달라[매개적]. 감성적인 직관이니까[무매개적]. 그렇더라도 참여(metechein)를 하고 있어. 건강한 사람이 설탕을 먹을 때 항상 달아. 거기에 참여해. (212)
박: .. 물질[신체]의 작용함-작용받음은 무엇이고, 영혼의 작용함-작용받음은 무엇인가를 찾아야 돼. .. 처음에 내가 <여럿에 걸친 하나(hen epi toû poloû)>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그 때문이야. 모든 인식이 이미 다 대상(pragma)으로서 존재하는데, 그것들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자는 것이거든. 인식의 두 항이 있는데, 두 항에 대한 가설(hypothesis)이 각각 나와야지. 즉 영혼의 기능은 무엇이며, 물질[신체]의 기능은 무엇이고, 영혼과 물질의 작용함-작용받음은 무엇인가가 나와야지. (212) [근세 철학의 이원론도 이 문제이다.]
양문흠: 선생님, 이렇게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럿에 걸친 하나(hen epi toû poloû)>라 할 때, 여럿 속에는 착각이나 환각 또는 표상(doxa)들도 있거든요. ... / 박: 이봐. <여럿에 걸친 하나>를 보라는 것은 하나의 정의, <ti esti(무엇임)>를 찾는 것이야. (214) [소크라테스의 주제가 영혼이고 서양철학사 주제가 영혼이다 라는 나의 생각이 맞을 것 같다, 사키야무니(석가, 釋迦)의 주제도 영혼이며, 영혼 불멸이 추구가 아니라 되돌아오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곧 해탈이다. 후회없는 삶 즉 존엄사하는 스토아 사상이 타당한 것 같다. - 오만하지 마라, 또 염려하지 마라.]
박홍규: 그러니까 그때 진리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대한 반성이 나와야 될 것 아냐? 그 반성의 결과 재인이 나오는 것이지 괜히 재인이 나와? /../ 그러면 그 거짓이 아니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냐는 거야. 지금 우리가 하려는 것은 원문 그대로 다시 이야기(narration)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연역적(deductive)으로 생각해 보자는 거야. 그래야 그 내용들의 상호관계가 밝혀지지. 요컨대 재인(anagnôrisis)은 물질[신체]적인 기능이 아니야. (214) [재인은 영혼의 기능이라기 보다 능력(facult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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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그리고 그 다음에 명제(logos) 문제로 나오지. 꿈 이야기 말이야. 나도 그게 뭔지 몰라. 도대체 왜 꿈이 등장했는지 몰라. 그런데 그리로 넘어가는 데를 보면, 분명히 재인의 입장은 직관이론이야. 단일 형상(mia idea)의 생성(genesis), 즉<움직이는 존재(pheromênen ousia)>[영혼]가 어떻게 성립하고 어떻게 교란되느냐 하는 얘기야. 간단히 말하면, 그런데 명제가 없으면 이름을 붙일 수(onomazein) 수 있을 뿐이지. (215) [신을 이름 붙일 수 없듯이 영혼도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표현으로 “혼”(자연)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영혼은 술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제가 없다. 그래서 이름을 붙일 수 밖에 없다. 영혼은 불멸이다, 영원하다는 명제는 영혼의 진정한 설명(참된 견해, alêthês doxa)이 아니게 된다. 움직이며 생성하며 욕망하며 자기 변용을 하는 존재 즉 영혼이 있다. / 꿈 이야기는 국가편에서 에르 신화와 연결 또는 유비로 등장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51VLE)]
박홍규: 사물이 나에게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 즉 존재(on)라는 것은 그 자체의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저항을 한다는 의미야. 그래서 라틴어로는 <objecere>, 독일어로는 <Gegenstand>라고 해. (215)
박: 영혼이 사물[신체]의 변화하는 측면하고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작용[작동]한다(poiein)>한다는 말을 써. (215-216)
티마이오스편에서 제작자(dêmiourgos)가 형상(에이도스eidos)을 보고 <제작(poiein)>했다고 하는데, 제작의 대상은 형상이 아니라 무질서한 운동(ataktos genesis), 즉 무한정자(apeiron)야. 그러니까 순수한 운동은 순수한 생성에서만 성립하고, 순수한 인식(epistêmê)은 생성이 절대로 없는 단일 형상(mia idea)에서 성립하는 것인데, .. (216) [벩송이 인식의 발생이라고 하는 것은 순수 운동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며, 하나의 형상을 찾아가는 목적과 방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생성으로 자기 정체성을 만들면서 가기 때문에 열려진 것이다.]
플라톤은 <무엇임(ti esti)>을 찾을 때 본질(ousia)와 생성[genesis, γένεσις]을 나누고, 본질(ousia)에 대해서 존재[on]가 있고, 그것에 대해서는 형상이 성립하며, 이것의 극한치가 단일 형상(mia idea)이라고 말하거든. 그렇다면 여기서 취급한 생성에 대한 직관은 성립할 수 있어? 생성의 실재성을 어떻게 말해? 그것을 어떻게 확립하느냐 말이야. 존재만 인식되고 동사 자체[영혼자체]는 인식이 안 되기 때문에, 만약에 그 실재성이 확립 안 되면 움직이는 동사들이 들어가 있는 명제들은 사용하지 못하지. (216) [퀴니코스 학파의 고민이 명제가 실재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 대화편[테아이테토스]에서는 <사람> 등의 이름(onoma)만 독립되어서 나타난다고 하고, 뒤에는 또 명제(logos)의 보통 의미는 명사와 동사를 같이 복합시킨(symplochein)거라고 나와 있거든. 그러면 명제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어? 단적으로 말해서 테아이테토스편은 직관이론이니까 명제가 성립할 수 없어. (216-217)
그러니까 소피스트편으로 가. 그러면 소피스트편이 뭐냐? 모든 사물에 대해 소피스트는 명제(logos)로 허상[simulacre? fantom?]을 만들어서 사람을 속인다고 했어. (217) [이름에서 명제로 가는가? 여기서 명제(logos)는 추론인가? 시간적으로 나중에(한 세대가 지나) 도래할 기하학원론과 논리학처럼 말이다. ]
(11:17, 51V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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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넬(Bruno Snell, 1896-1986) 독일철학자, 문헌연구, 언어학자. 대학교수. B. Snell, Die Entdeckung des Geistes. Studien zur Entstehung des Europäischen Denkens bei den Griechen, Hamburg, Classen, 1946. (The Discovery of the Mind, New York: Dover, 1982)
첫댓글 행동 대신에 꿈꾸어 보자. 우리의 자아는 단번에 흩어진다. 그 때까지 우리에게 전달해 준 불가분적 충력(impulsion) 속에서 그 자체[자아] 위에 모아져 있던 우리의 과거는 수천의 추억들로 분해되고, 이 서로서로 외재화 한다. 추억들은 침투하기를 거부하고 더욱더 응고된다. 우리의 인격은 이렇게 해서 공간의 방향으로 다시 내려온다. (EC 202)
공간의 방향으로 내려오면, 모든 추억의 자료들은 명제화 되는 것이 아닐까? 하나의 총체일 경우에,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명제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명사로 대답할 것이다. 이 뭣꼬? 라고 물으면, la vie, la nature, la psyche 라고 할 것이다. 그것에 술어를 붙이는 순간에 공간화의 양태로 빠질 것이다. 여기에서 공간화 시키지 않으려고 le dieu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모르겠으면, 캥거루라고 하듯이 Dieu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51V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