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를 뽑으며
김원배(근직)
giksan@hanmail.net
잡초와 씨름이 시작되면 농장 일이 더 바빠진다. 겨우내 덮어 두었던 마늘과 양파 밭의 보은 덮개를 걷어 보니 마늘은 잘 자랐는데 양파는 얼어 죽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빈 밭에 거름을 내고 검은 비닐로 덮고 구멍을 내어 심은 고구마 모종은 낮에는 여름같이 덥고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을 타고 있다. 도라지, 더덕 같은 다년생 작물 밭에는 잡초가 이보다 먼저 돋아나와 잘도 자란다. 이때부터 잡초 뽑는 것이 주된 농장일이 된다.
이른 봄에 나는 잡초는 주로 쑥, 민들레, 냉이 등으로 먹을 수 있는 나물들이지만 점점 질경이, 비름 등 억센 풀들이 생겨난다. 농작물 밭이 아니고 둑, 도랑, 길가에 나 있으면 뽑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흙이 비에 쓸려내려 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제자리에 났으면 좋은 작물이라 뽑기가 아까운 것도 있고, 야생화가 곱게 피어 웃음을 보내고 있으면 차마 뽑지 못하고 꽃이 질 때까지 두었다가 뽑기도 한다.
주 작물이 잘 자라도록 잡초가 나면 뽑지만 애초에 나지 않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제초제 농약을 써서 잡초가 생기지 않게 하거나 일시에 없애는 방법도 있지만 사람에게 해롭고 토양도 나빠진다. 그래서 일절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뽑고 다시 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마련한다.
작물을 심기 전에 밭을 골라서 덮어둔 검은 비닐에 작은 구멍을 뚫어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심는다. 그러면 비닐 밑에는 잡초가 자라지 않으니 구멍에 난 잡초만 뽑아 주면 된다. 비닐을 칠 수 없는 아로니아, 대추나무 같은 과실수 밑에는 짚이나 낙엽을 두껍게 깔아 준다. 작년 가을에 서울 집 근처의 가로수 낙엽을 끌어 모우고 농장 가는 길 가에 떨어진 낙엽을 쓸어다가 밭에 깔았는데 효과가 꽤 있는 것 같다. 잡초가 나지 않도록 여러 궁리를 해보지만, 잡초는 끊임없이 돋아난다.
밭에서 잡초를 뽑는 일을 하다 보면 나라에서 각종 폐단이나 죄를 지은 사람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잡초는 뽑아도 주위에서 씨가 날라 와 또 돋아나듯이 욕심이 지배하는 인간 사회에 있어서도 계속해서 폐단이 생기고 법을 어기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작물이 다치지 않도록 잡초를 하나하나 정성 드려 뽑듯 나라의 적폐도 신중하게 골라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적폐 청산이란 이름으로 제초제로 잡초를 없애듯 반대파를 일시에 몰아내는 현상이 과거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일어났었다.
이를 생각하면 나의 집안 선조이고 조선 초기 성리학통을 이은 학자고 문필가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떠오른다. 선생은 이조참판, 형조판서의 중책을 역임한 청백리였다. 늙은 어머니를 가까이 모시고자 고향에 가까운 함양 군수와 선산 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함양 백성들에게 세공(歲貢)의 부담을 들어주기 위해 일군 차 밭이 지금도 운영되고 있고, 선산에서는 학문을 일으켜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조선 후기 이중환의 <택리지>에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 때 선생의 제자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신진 사림파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고 훈구파와 대립하고 있었다. 사관으로 있던 한 제자가 선생의 글인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적어 넣었다. 이 글은 중국 역사에서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의 왕인 의제(義帝)를 애도하는 조문(弔文)이었다. 처음 발표 당시인 세조 때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나중에 훈구파에서 이 글을 트집 잡아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를 은근히 비난했다고 왕에게 무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일시에 제거했다. 죄가 있든 없든 선생의 제자라는 이유로 청산의 대상이 되었고 이미 작고한 선생은 무덤을 파서 관을 부수고 시신을 베는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일부 제자들이 이를 피해 청계산에 숨어 있으면서 이수봉에 올라 선생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지금 이수봉 정상의 비석에 새겨져 있다.
정치적 보복 위주의 적폐청산은 억울한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역사는 나중에 누가 충신이었는지를 밝혀 준다. 농부가 생명을 사랑하는 농심으로 정성껏 농사를 짓듯 나라의 위정자는 국민 사랑과 법치로 국정을 공정하게 운영해야 하지 않을까. 보복은 증오를 낳고 사랑과 화합은 번영을 가져 온다지 않는가.
보름 만에 농장에 왔더니 밭 주변에 잡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크게 자란 잡풀을 예초기로 보기 좋게 가지런히 깎았다. 노란 꽃을 한창 피우고 있는 애기똥풀은 꽃이 지면 다음에 베기로 하고 그대로 두었다. 앞으로 두세 번은 예초기 신세를 더 져야 한다. 아직은 잡초 관리가 좀 수월하나 장마가 오면 잡초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해서 그때는 정말 잡초와 싸워야 한다. 그렇지만 조금 고생하다 보면 높은 쪽빛 하늘에서 소슬바람이 불어 와 왕성한 잡초도 스스로 힘을 잃는다.
첫댓글 근산님 잡초가 이렇게 많은 성찰의 계기를 주는군요~ 이마저도 스치듯 지나가는 자연의 순리까지 알게 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