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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생이 아니에요
증언자 : 김선문(남)
생년월일 : 1961. 5. 12(당시 나이 20세)
직 업 : 재수생(현재 웅변학원경영)
조사일시 : 1989. 2
개 요
1980년 5월 21일 저녁 7시쯤 시청 앞에서 광주역 쪽에서 비상 라이트를 켜고 오던 군용트럭 7대와 마주쳐 그 차에 탔던 계엄군들로부터 전신을 구타당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 시위대 구타하는 공수부대원을 목격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영암에서 광주로 올라와 3월부터 대학입시 공부를 시작했다. 재수생이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지만 떳떳하게 사회적 분위기와 맞춰 생활할 수 없는 처지였다.
1980년에 접어들면서 온 나라가 민주화 열기에 들끓어도 나는 깊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학생들이 내놓은 요구사항이 어떤 것인지를 물어보는 정도였다.
3월, 4월 두 달을 학원에 다니던 나는 5월부터는 집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시청 앞에서 자취하고 있는 친구 필중이 집에서 자고, 밥은 중흥동 교육청 근처에 사는 숙부집에서 먹으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5월 18일이 되자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를 진압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가택수색을 하여 젊은 사람을 연행해 간다는 말도 불안스럽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나는 그런 소문을 들으면서 예비군 동원훈련 때문에 5월 16일부터 영암 고향으로 내려가신 숙부님과 숙모님 대신 집을 지키느라 선뜻 밖에 나가볼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공수부대가 시내에서 젊은 사람들을 잡아 때려 죽인다는 소문이 더욱 극악스럽게 들리자 한편으로 위압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내 상황이 궁금하기도 했다.
19일 저녁에는 밖에 나가볼 요량으로 친구 필중이에게 갔다. 내가 숙부집을 나설 때 주인집 아주머니가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말렸으나 그 말을 뒷전으로 하고 시교육청 입구 쪽쯤 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달걀장수를 한다는 어떤 아저씨가 나서서 '광주일고 앞에서 공수부대원이 여대생의 성기를 대검으로 도려냈다더라', '도청앞 분수대에는 피묻은 여자의 속옷이 널려 있다더라'는 소문을 얘기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시민들이 힘을 합쳐 잔학한 행동을 하는 공수부대원들과 대항하자고 했다.
그런 것을 보면서 필중이 집으로 가 방금 전에 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날은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20일 점심때쯤, 친구집과 가까이에 있는 시외버스공용터미널로 나갔다. 담배 꽁초를 줍기 위해서였다. 재수생인 까닭에 용돈이 넉넉하지 못했던 우리들은 가끔 그런 방법으로 담배를 구해 피우곤 했다.
그날은 웬일인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별 생각 없이 담배꽁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공수부대원 두 명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가면서 열린 문틈으로 보니 화장실 안에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 여러 명이 손을 뒤로 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공수부대원 5명 정도가 착검한 총으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그동안에 들은 소문도 있고 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우리는 후닥닥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밖으로 뛰쳐나왔다.
들어갈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군용트럭 한 대가 금남로 쪽으로 나 있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사거리에 서 있었다. 더욱 놀란 우리는 앞뒤 생각 없이 지하도로 뛰어들었다. 도망하면서 보니까 트럭 앞에 있던 공수부대원 5-6명이 심하게 부상당한 것처럼 보이는 젊은 사람 두 명을 짐짝처럼 트럭에 던져서 싣고 있었다. 한 사람은 교련복인지 예비군복인지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과 우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지만 다행히 우리를 뒤쫓아오지는 않았다.
엉겁결에 지하도 안으로 들어갔으나 어느 쪽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우리를 잡으려고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몹시 불안했다. 그래서 한참을 망설이다 신평회관 쪽으로 나가 조심스럽게 동태를 살펴보니 방금 전에 본 트럭과 공수대들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때부터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시청을 가자면 큰 길말고도 작은 샛길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그 길을 통해 시청 앞으로 갔다. 시청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앞장 서서 이끄는 사람은 없었으나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하는 구호나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나와 친구는 방금 전에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 보고 온 사실을 사람들에게 얘기해 주었다. 그러자 시민들 또한 서로의 목격 사실을 얘기하면서 공수부대와 싸우자면 시민들이 힘을 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때 누군가가 공수부대 1개 사단이 광주에 투입되었다고 하더란 얘기를 했다. 그러자 겁에 질린 시민 다수가 그들과 맞서 싸우자고 하기보다는 서로 눈치만 보면서 슬금슬금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살상이 자행되고 있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맨손으로 최정예부대인 공수부대와 싸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모두들 공수부대의 만행에 치를 떨었지만 어떻게 해 할지를 몰랐다. 나도 친구와 함께 숙부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도청 앞에 가보 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내로 나가는 차도 끊기고, 인적조차 거의 없는 분위기 때문에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저녁에 집 옥상에서 보니 광주고속 앞에서 무엇인가 활활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날 임동파출소가 탔고, 경상도 번호판을 단 8톤 트럭이 불 탔다고 했다.
다음날(21일) 나와 필중이는 시내상황도 궁금하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상의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만나러 집을 나섰다. 산수교회 뒤에 사는 동민, 문철을 불러내어 계림동 동원예식장 부근에 사는 신이억이 집으로 갔다. 이억이는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다.
이억이 집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어떤 여자가 처절한 목소리로 '우리들의 형제가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으로 가두방송하는 소리를 들었다. 살벌한 분위기인 데다 그 소리를 들으니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억이 집에 모여앉은 우리는 그간에 체험했던 일과 소문들을 이야기했다. 이억이의 말에 의하면 19일쯤에 집 부근에서 총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까 광주고 앞에서 고등학생이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았다고 했다. 전후상황을 살펴보아 시골로 피신해 있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런데 교통이 마비되어 집에까지 가자면 광주시내를 벗어나는 게 문제였다. 밤을 이용해 조선대 뒷산을 넘어 남평까지 나가보자는 의견이 그럴 듯해 다시 만날 것을 약속 하고 신분증 등 몇 가지 소지품을 가지러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돌아온 시간이 오후 4-5시경 된다. 나는 숙부집에 주민등록증이 있었던 까닭에 혼자서 숙부집으로 갔다. 내가 시골에 내려간다는 말을 하자 옆방 아주머니는 극구 만류했다. 차라리 집에 가만히 숨어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옆방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어 서둘러 집을 나와 시청 앞에 사는 친구집으로 향했다.
시청 앞에서 공수부대원에게 전신 구타당하고
집을 나설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으레히 시청 쪽으로 나가는 샛길을 통해 시청 옆 현재의 광주은행 경양지점 부근에 막 당도했다. 그때 광주역 쪽에서 똑같이 비상 라이트를 켠 군용트럭 몇 대가 행렬을 지어 오는 것이 보였다.
어느 부대가 이동하는 것 같았다. 잠시 머뭇거리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던 나는 바로 길 건너에 있는 친구집으로 빨리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고 재빨리 길을 가로질러 갔다. 그 순간 어느새 다가온 맨 앞 트럭이 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췄다.
차가 멈추기가 무섭게 공수부대원 한 명이 욕을 퍼부으며 내게로 달려들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총을 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차도를 벗어나 인도에 몸을 굴렸다.
"저놈 죽여라."
이렇게 소리치며 내게 달려온 공수부대원이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곧이어 다른 두 명이 더 합세하더니 그야말로 매타작을 시작했다.
"폭도 새끼들, 개 간나구 새끼들, 죽여버려."
그들이 나를 짓밟으면서 지껄이는 말이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죽여버리라"는 소리만 들렸다. 순간적으로 학생이 아니라고 하면 살려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무조건 빌기 시작했다.
"나는 학생이 아니에요. 살려주세요."
그러자 어떤 놈이 또다시 나를 걷어찼다. 다른 한 놈이 내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우더니 1미터 정도를 질질 끌고 갔다.
"나도 전라도 놈인데 너희 폭도 새끼들 때문에 사서 고생한다."
나를 끌고 간 공수부대원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내팽개쳐버렸다. 정신이 없는 중에도 전라도 사람이란 말을 듣고 이젠 살았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살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일어나 계속 학생이 아니니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다른 놈들이 쫓아와 죽인다며 닥치는대로 때리고 짓밟았다. 초죽음이 다 된 상태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학생이 아니라는 말만 되뇌었다.
내가 학생이 아니란 것만 확인되면 죽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는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생각뿐 아프다는 감각조차 느껴지 못했다. 어느 순간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어떻게 하다 의식이 깨었는데 내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내 자신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움직여 몸을 꼬집어보았다. 꼬집힌 감각이 전해져 왔다. 그래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이 천당이나 지옥의 어느 곳으로만 여겨졌다. 나는 가만히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살아 있소?"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내게 다가오며 반갑게 외쳤다.
"저 사람 의식이 깨어났네."
스포츠 머리를 한 고3 아니면 방위병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당신 운 좋은 줄 아시오. 왕대포집 아주머니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이오."
내가 두들겨맞는 것을 보다못해 근처에서 왕대포집을 하던 한 아주머니가 대성통곡하며 뛰어나왔다고 한다.
"오메 내 자식 죽이네. 군인들이 사람 죽이네."
나를 감싸안으며 어찌나 소리를 치던지 공수부대원들이 더 이상 행패부리지 않고 철수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가고 나자 마침 그곳을 지나던 스포츠 머리를 한 남자가 나를 업고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 남자는 처음 광주고교 앞에 있는 노준채 의원에 데려가려 하자 내가 '거기 들어가면 죽는다'며 버티더라고 했다. 나는 전혀 기억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시 김정형 외과로 옮겨 놓았고, 내가 정신이 든 곳이 바로 그 병원 엑스레이실이었다.
내가 깨어나자 의사가 엑스레이를 찍자고 했다. 몇 번 찍으면 바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자꾸 몸을 뒤척이며 엑스레이를 여러 번 찍어댔다. 그렇지 않아도 몸 전체가 결리고 쑤시는데 자꾸 몸을 움직이자 나는 짜증을 냈다.
"지금 엑스레이 기사가 퇴근하고 없어서 보일러실 기사가 대신 찍으니까 좀 서툴러도 참아주시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병실로 옮겨와 보니 나를 업고 왔다는 남자가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 가고 없었다. 지금도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 너무나 고마운 생각에 지금이라도 찾으면 꼭 보답을 하고 싶다. 또한 왕대포집 아주머니도 지금은 소식을 알 수 없다. 1980년 이후 그 왕대포집이 없어지고 무슨 채권 사무실이 들어섰다. 나를 구해준 아주머니는 어느 시골인가로 이사갔다는 말만 들었지 사는 곳을 전혀 몰라 안타깝다.
내가 입원한 병실은 256호였다. 그 방에는 나말고도 아주머니 한 분이 있었는데 내가 들어가자 곧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병실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환자들은 서로 비슷한 처지일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눈치만 보지 부상당한 경위에 대해서는 쉬쉬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군인들이 병원을 수색해 부상자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나돌았다. 공수부대원들이 병원을 수색한다는 말이 나돌자 모두들 입을 다문 채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오니 이젠 수색까지 해서 잡아간다는 말을 듣고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들에게 잡히면 꼼짝없이 죽는다는 생각에 병원을 탈출하기로 했다. 밤 10시가 통금이라고 했는데 무심하게도 시간은 이미 밤 10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나를 담당한 간호원은 몸이 좀 뚱뚱한 편인 정양이라는 아가씨였다. 나는 정양에게 식구들 소식과 친구들이 걱정되어 집에 가보아야겠다고 했다. 내 말을 들은 정양은 깜짝 놀라며 이미 통행금지 시간도 지났고 분위기도 좋지 않아 보이니 꼼짝 말고 누워 있으라고 말했다.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병원과 공수부대가 짜고서 부상자들을 잡아가려는 것 같았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아도 놀란다고 병원을 수색한다는 소문이 떠도는데도 한사코 잡아두려 하는 것이 의심스럽게만 보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밤 안으로 병원으로 빠져나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나는 허리와 다리의 통증은 차치하고 갈비뼈 2개가 금이가 가슴이 몹시 결렸음에도 불구하고 탈출을 시도했다.
11시쯤 되어 병원이 조용해지자 나는 링게르를 빼고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몸을 지탱하며 병실을 나섰다. 1층에 내려와서 정양과 부딪히고 말았다.
"아직 피도 멈추지 않은 몸으로 어디를 간다고 그러세요. 정말 죽고 싶어 이러세요?"
"정양, 난 정말 살고 싶어서 나가려고 합니다."
내가 간곡하게 말하자 정양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기왕에 가려면 치료비나 주고 가라고 했다. 나는 내 주머니를 몽땅 털어 치료비의 절반도 안 되는 1만 2천 원을 주고 병원을 나섰다.
시내나 시청 쪽은 위험하리라 생각하고 되도록 큰길을 피하면서 하동정 씨 빌딩 옆 골목을 따라 집으로 갈 작정을 했다. 좁은 골목만을 누비다 보니 번번이 막다른 골목이 나왔다. 3번째 막다른 골목을 만나자 나는 아무 집에나 들어가 하룻밤 몸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느 집 대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소리가 나면 누가 쫓아와 잡아갈까봐 조심스럽게 대문만 두드렸다. 아무도 나와보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작은 소리로 외쳤다.
"살려주세요. 사람 좀 살려주세요."
집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순간 한 곳에 너무 오래 있으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골목을 빠져나왔다. 큰길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쥐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앞뒤를 잘 살피면서 큰길을 건너 간신히 세들어 사는 숙부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밤중에 불쑥 찾아든 나를 보고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게다가 내 몰골이 말아니었고 상처가 난 다리에서는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가 어느 고등학교 서무과장인 주인집에는 조선대를 다니는 대학생이 2명에다 고등학생까지 있었다. 5월 18일 직후에 그 집에서는 자개농을 약간 앞으로 끌어내어 그 뒤에다 아들 셋을 숨겨두고 있었다.
그런 상태라 늘 조마조마하며 지내던 터에 내가 부상까지 당한 몸으로 한밤중에 들이닥치자 나를 곱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아주머니의 그런 태도는 몹시 서운하게 생각되었다.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숙부집으로 들어간 나는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신발도 방에다 놓고 방문을 꼭꼭 잠갔다. 더 이상 몸을 숨길 곳도 없고 이제 누가 잡으러 오면 죽거나 죽이거나 해야 할 판국이었다. 방안에 있는 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나는 다락으로 올라가 숨었다. 가택수색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을 졸이며 통증도 잊은 채 꼬박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어 방으로 내려왔다. 전화로 친구들 소식을 알아보려고 해도 전화가 불통이었다. 병원에서 나올 때 준 약을 먹으며 27일까지 밤에는 다락, 낮에는 방을 오가면서 지냈다.
주인 아주머니는 내가 밥을 먹었는지 어쩌는지 통 관심을 쓰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오직 죽느냐 사느냐라는 생각만 했다. 가끔씩 부상부위를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두다가 나중에 병신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것도 잠시였다. 오직 불안함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었다. 다리의 상처는 점점 썩어갔다.
27일 새벽에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날로 광주항쟁이 끝났다고 했다. 그제야 한시름 놓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아무하고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혹시 죽지나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나만 제외하고 다른 친구들은 모두 시골에 내려가 있었다고 했다.
21일부터 27일까지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는 병원에서 탈출하려고 기회를 엿보던 때와 다락에서 칼자루를 쥐고 앉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던 때다. 금방이라도 누가 죽이러 올 것만 같은 공포감은 죽음의 순간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는 느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내게는 몇 년을 살아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28일이 되자 나는 다시 김정형 외과로 갔다. 간호원 정양이 몹시 반겼다. 3층에 입원을 하여 그때야 치료하지 못해 썩고 있는 부상부위와 금이 간 갈비뼈 등을 치료받기 시작했다. 병원에는 서로 말은 안 해도 20여 명 정도의 부상자가 입원해 있었다. 나중에는 너무 많은 환자를 감당할 수 없어서 일부는 전남대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내 몸에서 제일 통증이 심한 곳은 금이 간 갈비뼈였다. 그때 찢긴 다리의 상처나 가슴 치료가 제때에 안 된 까닭에 현재까지도 그 후유증이 남아 있다. 다리에 생긴 흉터는 괜찮지만 아직까지도 가슴이 답답한 증세와 허리의 통증은 남아 있다.
24일 동안 김정형 외과에서 치료를 받았다. 숙부님 내외분이 나의 입원비를 대 주고 병간호를 해주었다. 나는 완쾌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5·18 부상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퇴원했다. 숙부님이 공무원이었으므로 더욱 앞장 서서 나를 퇴원시켰다. 퇴원 후 나는 서울에 가서도 한의원에 다니면서 침을 맞았다. 한번 치료하러 갈 때마다 온몸에 40개가 넘는 침을 맞는 일은 아픔보다 차라리 두렵기까지 했다. 한 달 가량을 치료받고 영암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고향집에서는 농삿일로 한창 바쁜 때라 제대로 요양하지 못하고 오히려 농삿일을 도와야 했다. 겉으로는 별다르게 아파 보이지 않는데 젊은 사람이 빈둥거릴 수가 없어서 아픔을 참아가며 농삿일을 거들었다. 그러다 보니 몸이 더 좋지 않아 영암보건소에 가서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영암 제중의원에 의뢰를 부탁했다.
제중의원에서 내 엑스레이 사진을 보더니 누구와 크게 싸웠냐고 했다. 5·18 부상자라고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심하게 맞은 것 같은 내 몸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의사는 내게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말고 쉬라고 했다. 그때부터 별다른 치료는 받지 않은 채 보건소에서 약만 지어다 먹었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약을 거르지 않고 먹는 편이다. 가슴 결리는 것은 참더라도 허리 때문에 무척 고생을 했다. 운동을 하면 좋아질까 하여 체육관에 다녀 보기도 하면서 건강을 되찾으려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결과는 최근에 컴퓨터 촬영을 해보니 '만성디스크'라는 것이었다. 잠을 자고 나면 자식들이 두들겨 주고 밟아주어야 일어날 수 있고, 세수하느라 허리를 굽혔다가 다시 펴기가 힘들 때가 많다.
광주는 정권찬탈을 노리는 정치군인의 희생물이었다. 1980년 당시에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내가 5월 14, 15, 16일에 시내 도청 앞 광장에서 있었던 시위를 보고 친구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한 채 '애국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를 때만 해도 그저 가슴 뿌듯한 감동만 있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 씨의 연설을 들을 때도,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과 함께 우레와 같는 박수를 치면서도 광주바닥 어디를 가든 그런 비극이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에 와서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한동안은 5·18에 대해 입도 뻥긋하기 어려웠는데 87년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이 전개되면서 조금씩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나는 광주민중항쟁이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정치군인들이 12·12를 통해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미리 계획한 학살극에 항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엄을 확대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전국적으로 계엄을 확대 선포했으며, 잠잠하게 있는 광주에 전쟁시 적진에 침투되어야 할 공수부대를 파견한 것은 순전히 의도적인 행위라 아니 할 수 없다. 김대중 씨나 재야민주인사들을 탄압하는 방편으로 광주가 특별히 선택(?)되었으며, 공수부대를 보내 유혈사태를 유발시켜 군부정권의 정당성을 모색해 보려는 얕은 수작에서 또한 광주가 희생제물이 되었다.
군대에서 진압작전 훈련 때 곤봉 쓰는 요령을 배우는데 절대로 곤봉으로 직접 사람을 때리게 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5·18 당시의 공수부대원들은 사람을 직접 내리쳤을 뿐 아니라 돌과 최루탄을 집어 시민들에게 던졌다. 그들은 또한 많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학생들을 발로 차고,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팼다. 도덕적으로만 보아도 광주 시민은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폭도'가 아니고 군부독재에 대해 당연한 저항권을 행사했을 뿐이다.
계속된 민주화 바람에도 불구하고 5월 문제는 아직 제대로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후의 민주화운동의 초석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1987년 6월 항쟁은 온갖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 있는 5월 항쟁정신이 계승되어, 잠자던 국민의식을 개선시키는 계기가 된 좋은 본보기다.
우리는 5월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이 땅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앞장 서야 하고, 나아가 전세계 인류의 평화도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나라나 자생적인 문화와 역사,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미국에게 군사 지휘권을 뺏기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부분이 미국에 예속되어 있어 마치 식민지나 다름 없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민주화란 있을 수 없고, 또한 민주화 노력마저 올바로 되기 어렵게 된다. 미국이 군사지휘권과 내정간섭 등 우리나라를 식민지처럼 구속하는 것을 하루빨리 그만두어야 민주주의 실현과 조국통일은 앞당겨질 것이다.
내가 1980년 당시에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면 잘 몰랐을 사실들을 더욱 관심있게 보면서 그동안 많은 의식의 변화가 있었다. 1988년 이전에는 부상자회 등 유관단체가 있다는 것을 잘 몰랐기 때문에 나 혼자서 나름대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왔다.
집이 월산동이라 1987년 6월 항쟁 때에는 빠짐없이 서현교회 앞에서 싸우는 학생들과 함께 행동했다. 내가 나타나면 구경나온 시민들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알은체 했다. 매일 거리에 나서다 보니 나도 모르게 유명해져 버린 것이었다.
8주기 5·18 추모행사 때를 전후로 해서 5·18 부상자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부상자 신고도 이번에야 했다. 그 전에는 부상자 명단에 있지 않아 사찰이나 기타 탄압이 없더니만 현재는 동사무소에서 동장이 가끔씩 확인 전화를 해오고, 서부경찰서, 안기부에서도 가끔씩 사찰이 들어온다.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오부동과 다른 유관단체들과 함께 열심히 싸우고 있다. 서울까지 올라가 광주문제의 국회 거론과 진상규명을 촉구하다 연행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올(1988년) 8월에 일어난 일이다. 각 유관단체 회원들과 연합해서 서울로 올라갔다가 분산되어 연행, 수용되어 버리자 나 혼자 단독으로 성명서를 작성하여 낭독하였다. 내가 연행되어 간 강남경찰서에서는 내 소지품을 뒤져 마스크, 장갑, 손수건이 나오자 나를 '작전사령관'이라 불렀다. 나는 노태우 사진이 들어 있는 사진틀을 끌어내 박살내 버렸다. 그때가 올림픽을 앞두고 평화구역을 두는 등 한참 올림픽에 열을 올리던 때라 나는 그런 행동들을 하면서 구속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유가족 아주머니들이 집에 있는 식구들은 어쩌라고 가둬두느냐며 항의하고, 모두가 단식을 하면서까지 석방을 요구해서인지 다행히도 구속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이 일이 잘 마무리 되었다. 각 도 경계선마다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도경 호송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우리 일행은 유유히 광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매년 망월묘지에 다니면서도 단체가입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 일을 겪고 난 후 힘을 합치면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부동은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다.
(조사정리 임금옥)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