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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 참사 속에서도 어려울 때 서로 돕는 미풍양속은 더욱 빛났다. 지난달 27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자원봉사자들이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 프리랜서 오종찬] |
율곡 이이는 말했다. “이웃에 급한 일이 생기면 비록 동약(同約)이 아니라 하더라도 먼저 이를 들어 알게 된 사람이 마땅히 구조해야 한다. 혹
힘이 부족하여 구조할 수 없으면 그를 위해 동약에게 알려 대책을 상의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행을 문서에 기록하고 고을 사람에게 알린다.”(『율곡전서』
권16 ‘해주향약’)
지난달 16일 오전 9시42분 전남 진도군 조도면 일대에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동시에 떴다.
“긴급 상황! 맹골 근처 여객선 침몰 중, 학생 500여 명 승선, 긴급 구조 요청!”
정순배(51) 청년회장이 39개 마을 이장과
청년회원들에게 보낸 긴급구조 출동 전갈이었다. 이를 받은 주민들은 세월호 승객 구조를 위해 뭍에서, 바다에서 앞다퉈 어선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이날 주민들은 60여 명을 구조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신속히 구조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배 안에 구명조끼 입은 사람들을 봤다고 탄식하며…. 사고 발생 25일이 지난 지금도 어민들은 생업을 제쳐두고 수색과
구호 작업에 동참하고 있다.
조도면에서 이렇게 큰 사고가 난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이렇게 빠른 지원이 가능했던 건
평소 어촌계와 청년회(55세 이하 주민 모임) 연락망이 잘
조직돼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청년회는 평소 바다 쓰레기를 수거하고 마을 경로잔치도 여는 등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지역사회의 어려움에 함께 대처하기 위함이라는 청년회의 설립 취지대로 이들은 위기 때
더욱 빛나는 공동체 정신을 보여줬다. 율곡의 뜻이 고스란히 실천으로 옮겨지고 있는 현장이다. 이런 공동체적 상호의존망과 상부상조의 협동정신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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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 년 전인 순조 3년(1803) 진도 송산리. 이
마을 주민 20여 명이 계(契)를 맺고 돈을 모아 토지를 구입했다. 원금을 증식해 후진 양성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기사년(1809)과 경오년(1810) 진도에 유례 없는 흉년이 들었다. 그러자 계원들은 ‘학계(學契)를 운영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지만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어찌 모른체 할 것인가’라면서 학계답(學契畓)을 매매해 마을
주민들을 구호하는 데 모두 사용했다(송산리 『대동학계안(大同學契案)』, 서문). 진도 지방의
공동체적 상호의존망과 상호부조의 협력정신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맥을 이어온 것이었다.
상호부조의 아름다운 전통은 진도 지방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726년 큰 기근이
발생했다. 경상도 고성 지방의 농촌 지식인 구상덕은 그해 일기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1726년 3월 21일. 오촌인 정파총 집에 전염병이 있어서 오늘 우리 집으로 와
머물렀다. 5월 4일. 아침에
갈산 매형 집 노비가 왔다. 내가 그간의 안부를 물으니 노비가 말하기를 부뚜막신(神)이 잘 도와주지 않아 부엌에 불을 때지 못하고 있다 한다. 쌀·보리 다섯 되를 보내 주었다. 11월 5일. 상인(喪人) 허곽이 찾아와 빈궁한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쌀 한 말을 주어 급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했다. 또 쌀 한 말을 주면서 유월에 사는 상인 강씨에게 부조케 했다.”(『승총명록(勝聰明錄)』 권1~2)
구상덕은 은정리(銀亭里) 향약동안(鄕約洞案) 계조목을 자신이 직접 작성했고 계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1726년 2월 21일
일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화재를 진화했다는 내용도 있다. “동풍이 일어나 구름이 하늘에 가득
찼다. 관금산 길에 불이 일어났다. 송전마을 사람들이 모두
힘을 다해 진화했다.”(『승총명록』 권1)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공동체 조직에는 향규(사족), 주현향약(관 주도), 동약(사족
주도, 상하합계), 촌계(서민, 전래 민속)가 있었다. 촌계는 1930년대에 집계된 바에 의하면 480종류의 계가 있었고, 계의 수는 2만9257개, 계원 수는 90만3640명이나
됐다(조선총독부, 『農山漁村に於ける契』).
기능도 다양했다. ▶두레와 같은 공동노동의 기능을 한 농계(農契) ▶경제적 기능이 있는 보계(洑契)·식리계(殖利契)·구우계(購牛契) ▶동리의 공공비용 마련을 위한 정치적 기능을 가진 동계(洞契)·보안계(保安契) ▶계원의 복지 및 상호부조를 위한 복지적 기능이 있는 혼상계(婚喪契)·혼구계(婚具契) ▶조상제사·부락제를
위한 종교적 기능이 있는 종계(宗契)·문중계(門中契)·동제계(洞祭契) ▶자제 교육을 위한 교육적 기능이 있는 학계(學契)·서당계(書堂契) ▶친목·오락
기능이 있는 시계(詩契)·문우계(文友契)·동갑계(同甲契) 등.
이들 계는 마을의 공존·공생과 생존위기 극복을 위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시골에서 농사철이
되면 남정네들은 소소하게 끼리끼리 모여 품앗이로 모내기를 했다. 김매기 때는 풍물굿을 하면서 모두 덤벼서
두레를 했다. 아낙네들은 여럿이 모여 넓은 마당에서 편을 나누어 두레삼 내기를 하며 길쌈을 했다.
향약과 계는 생존을 위한 윤리였다. 향약은 중국 송나라 때 남전 여씨가 ‘여씨향약’을
만들고, 주희가 가감 증보하여 ‘주자증손여씨향약’을 만들었다. 이러한
향약은 조선에 들어와 퇴계 이황의 예안향약, 율곡 이이의 서원향약·해주향약·사창계향약 등 우리 실정에
맞게 더욱 보완됐다. 또 조선 향촌사회의 자생적 결계(結契)와 융합함으로써 유교 교화와 풍속 확립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은
향촌자치와 위기극복을 위한 4대 덕목이었다. 수화(水火)·도적(盜賊)·사상(死喪)·질병(疾病)·고약(孤弱)·무왕(誣枉)·빈핍(貧乏)의 위험에 노출되거나 사고가 발생할 경우 환난상휼의 원칙에 의해
보호받았다.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상호부조 모습은 서양인들도 주목했다. 1874년 프랑스인 클로드
샤를 달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상호부조와 모든 사람에 대한 혼연한 대접은 이 나라 국민성의 특징인데, 솔직히 말해
그런 장점은 조선 사람을 우리 현대 문명의 이기주의에 물든 여러 국민보다 훨씬 우위에 서게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여행 준비를 오래 할 필요가 없다. 지팡이와 담뱃대와 몇 가지 옷을 조그마한 꾸러미에 넣어 어깨에
메고, 그러면 그만이다. 밤이 되어 사랑방을 과객에게 개방해
놓은 어떤 집에 들어가면 먹을 것과 하룻밤 잠자리는 틀림없이 얻는다.”(안응렬·최석우 역, 『한국천주교회사』)
향약은 물론 폐단도 있었다. 선조 6년(1573년) 8월 17일
삼공·대신이 향약을 의논할 때 좌의정 박순이 말했다.
“우리나라의 풍속은 안으로 한성부터 밖으로 촌마을까지 다 동린(洞隣)의 계와 향도(香徒)의
회(會)가 있어 사사로이 약조를 세워서 서로 단속하려 하나
각각 자기 뜻에 따랐기 때문에 엉성하여 질서가 없어 기강을 세우기 위해 의지할 만하지 못하고 또 그 약속이 조정에서 나오지 않고 사사로이 만든
것이므로 강한 자가 깔보고 악한 자가 무너뜨려도 끝내 바로잡지 못하니, 마을의 부로(父老)가 늘 한탄을 품으나 어찌할 수 없습니다.”
향약의 풍속을 악용한 몇몇 사람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옮겨 다니며 주민들을 등쳐먹거나 행패를 부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향약이라는 미풍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를 목도한
영국인 새비지 랜도어는 1895년 이런 기록을 남겼다.
“어떤 예기치 못한 일로 한 사람이 자신의 집과 가구, 막대한 재산을 잃었을 때도 조선
사람들은 좀처럼 재난과 빈곤 앞에서 좌절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 그의 친구들은 그를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진해서 친구가 집을 다시 짓도록 도와주며 그에게 옷가지와 생활에 꼭 필요한
가사용품 등을 빌려준다. … 친구들은 그의 용기를 북돋워주며 모든 면에서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이처럼 어떤 사람의 집이 모조리 불타버렸을 때 친구들은 물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조차도 그를 데리고 가서 그가
다시 보금자리를 꾸밀 때까지 자신의 집에서 부양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신복룡·장우영 역주,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다시 세월호 사고 현장으로 돌아와 보자. 범정부사고대책본부 자원봉사자단체 등록 현황에
따르면 지난달 16일 세월호 침몰 참사 이후 지금까지 전국에서 총
63개 단체가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그중 전남도 내에서 참여하고 있는 단체가 23개다. 개인 자격으로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한 사람도 많다. 그들은 무료급식, 물품 배분, 세탁, 의약품 지원, 환경 정화 등 온갖 궂은 일을 하고 있다. 전통시대 향촌사회의 환난상휼의 자발적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지 않은가.
세월호 참사에서는 관 주도의 구조·수습과 자발적인 민간의 구조·자원봉사 활동이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관은 책임 회피와 무기력으로 얼룩졌다. 반면 민간은 상호부조의 지혜를
묵묵히 실천하는 숨은 노고의 모습을 보였다.
조선은 ‘인심’과 ‘풍속’을 나라의 원기(元氣)로
여겼다. 향약·계 같은 풀뿌리 상호의존망과 윤리규범은 나라의 원기를 지탱하는 도덕적 장치 역할을 했다. 집단 이기주의나 공직자 기강해이, 부정부패의 뉴스가 한시도 끊이지
않는 요즘, 팽목항 현장에서 빛난 상호부조의 모습은 도덕적 장치의 전통이 아직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간 일을 못해 가계에 어려움이 많지 않느냐”는 질문에 정순배 청년회장이 답했다. “돈을
생각했으면 사람 구하러 갔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