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상空思想
공(空)이란 용어는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인도에서는 이 말이 일찍이 원시불교시대에도 사용되고 있었으나, 서력기원 전후에 일어난 대승불교는 그 근본적 입장을 표시하는 중요한 개념으로서 공을 내세우게 되었는데, 특히 <반야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 강조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이 말은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 dravya), 본성(本性, prakti), 자아(自我, atman) 등과 같이 인간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직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공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취급하여 사상적인 관점에서 논의한 것을 공사상이라 하며 특히 대승불교에서 이러한 공사상을 강조한 사람들을 공론자空論者라 부르고, 그들의 주장을 공론空論이라 한다. 이러한 공론자는 용수 이후 중관학파中觀學派를 형성하여 공사상을 전개해 가며 그들은 스스로를 공성론자空性論者라 불렀다.
공의 어원과 의미
일반적으로 ‘공’의 산스크리트 원어라고 간주되는 슌야는 '부풀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가운데가 텅 비게 된 것을 의미한다. 즉 외견상으로는 사물이 형성되어 부풀어 오르더라도 내면적으로는 공허하여 내실이 수반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소위 제로(0)를 발견했던 인도 수학에서 그 제로를 '슌야'라고 불렀으나, 이 제로도 단순히 비존재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가 이 말을 끌어들여 사용할 때도 그것은 강한 부정의 표현인 동시에 구극의 진실성을 적극적으로 시사하는 것으로서, 소위 부정을 통한 긍정, 상대를 부정함으로써 절대 직관을 의도하고 있다. 그것은 우파니샤드 철학 이래 절대는 '아니다 아니다'(neti neti)에 의해서만 인식된다고 하는 사상과도 통할 것이다.
초기 경전(中阿含의 〈소공경 小空經〉)에서 '공'의 정의라고 할 만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어떠한 것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떠한 것이라는 그것은 공인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 거기에 무언가 남겨진 것이 존재할 때, 그것은 바로 실재한다고 안다." 이는 곧 결여, 존재하지 않음이 공인 동시에 그 공에서 구극적인 실재가 발견된다는 의미이다. 후세의 문헌에서는 이 문장 전체가 공의 정의로서 종종 인용되고 있다. 공이 부정과 함께 긍정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사상가들 중에는 이것을 '공'보다는 '이理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이것을 공허를 의미하는 void·empty·vacant 등으로 영역하는 것이 반드시 적절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absolute'(절대)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인도불교에서 ‘공’의 원어는 형용사로서의 '슌야'인 동시에 추상명사로서의 '슌야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개념이 애초부터 '부정을 통한 긍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부처가 깨달은 경지를 표현하고 그에 도달하려는 일련의 과정에서 발전되고 변용을 거쳐나온 결과이다. 공이라는 말 자체는 무엇인가가 없어진 상태,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산스크리트의 '슌야'는 예를 들면 '인기척이 없는 적막한 장소', 사람이 없는 '빈' 집, 의식의 '상실' 상태, 대통령이 '공석'인 국가와 같은 일반적인 용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없어진 상태를 표시하고, 어감으로도 소극적인 인상을 수반한다. 또 번역할 경우에 형용사 '슌야'와 추상명사 '슌야타'의 구별을 명확히 하고 싶으면, 전자를 '공(즉 無)인 것', '공성'空性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적절하지만, 한역어漢譯語 '공'의 경우에는 적어도 문자상으로는 이렇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A는 B가 슌야인 것이다", 즉 "A는 B가 공인 것이다. A는 B를 결여하고 있다. A에 B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슌야'라는 말이 개입된 기본적이면서도 일반적인 구문이다. "이 큰 방은 코끼리가 공인 것이다", 즉 우리말의 어법으로는 "이 방에 코끼리는 없다"는 구문이 그것이다. '빈 집'의 경우엔 "이 집은 사람이 공인 것이다"는 구문을 예상하여, 있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머물러야 할 '집'과의 의미연관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지만, 그것을 명시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불교, 적어도 인도불교에서 '공', '공성'이라고 표현된 경우에는 항상 이렇게 구문과 의미연관을 예상하고 있다. 마음에 탐욕이 없어 그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마음은 탐욕이 공인 것이다"로 표현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어인 A와 그것에 있지 않은 B와의 관계에 불교도는 강한 관심을 갖고 '공'의 의미론적인 범위를 초월하여, 삼매三昧와 연기緣起를 직관하는 것을 중요시함으로써 소위 존재론·인식론·수행론 속에서 그 관계를 명확히 하고자 했다. 모든 것에는 불변하고 독자적인 존재성[我]이 없다고 하는 무아의 이념은 대승불교 속에서 보다 철저해져 사물은 연기하고 있는 원인, 조건이 맞아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런 자성自性이나 실체성을 지니지 않는, 무자성無自性의 것이라는 공사상을 낳았다. A와 B가 별개의 존재인 경우는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A의 자성에 집착해 있을 때, 사람들은 A와 A의 자성을 동일시하여 "A는 A이다", "A는 A가 공인 것이 아니다"고 흔히 말하며 집착을 강화한다. 그러나 연기의 개념을 매개로 하여 "A는 A의 자성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라고 관찰하면, A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A는 A의 자성이 공인 것이다", "A는 A가 공인 것이다", 더 생략하여 "A는 공이다[一切皆空]"라고 직관할 수 있다면, 그 인식 본연의 상태야말로 반야바라밀(지혜의 완전한 상태)이고, 깨달음[菩提]으로 통하는 길이 된다. 이와 같은 '공', '공성'을 주축으로 하는 공사상은 초기 대승경전인 일련의 반야경般若經과 용수(龍樹)의 〈중론송 中論頌〉 등에서 명확하게 되고, 그 이후 대승불교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공사상은 대승불교의 기본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양상을 드러내면서, '사실은 중생과 보살이 왜,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여 공이라고 깨닫는가' 라는 수행론을 항상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원시·부파불교의 공
공이 무엇보다도 먼저 부정을 의미한다는 점은 이 말의 일반적인 용법으로 알 수 있는데, 원시불교경전에서는 공이 단지 비존재非存在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부파불교시대 아비달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공', '공성'이라는 용어, 혹은 그것을 기본 축으로 삼아 나중에 대승불교에서 발전된 공사상은 원시불교에서는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용어의 불교적인 의미는 이미 여기서 부여되어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공사상의 연원을 원시불교에서 구하는 것도 반드시 빗나간 것은 아니다.
원시경전에서는 모든 것을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고 깨달을 것을 권하는데, 아함경에서는 이들 세 개념과 '공'이 병렬되는 경우가 있어 "모든 것은 공인 것이다"라고 깨달을 것도 설해져 있다. 또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방법으로서 중요시되는 삼매 혹은 정신통일은, 인기척이 없는 적막한 장소나 사람이 없는 '빈 집'에서 실천해야 할 것이라는 기술이 종종 보인다. 그러한 장소에서 얻게 되는 삼매는 사물을 공인 것[空], 개념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것[無相], 인간의 기대나 바람과는 무관한 것[無願]이라고 보는 공·무상·무원의 3삼매로서 정리되고, 이것들은 해탈에 이르는 방법이기도 하므로 3해탈문으로 정착한다. 이들 셋은 어느 것이나 부정이라는 계기가 그 중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존재론적으로 고찰하도록 의도되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애욕이나 집착을 단절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수행자에게 명상의 대상으로 공이 교시되었다.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들이 종종 실천하고 있는 청정한 정신상태는 공주空住 즉 '공인 상태'로 간주되고, 그것을 얻는 방법이나 그것을 얻는 상황을 설하는 것으로서 〈소공경 小空經〉·〈대공경 大空經〉이 현존한다. 다시 일상적 진리[世俗諦]와 궁극적 진리[勝義諦]라는 이제二諦의 사고를 도입하여 약간 발달한 것으로 〈제일의공경 第一義空經〉이 있다. 이들 경전에서는 '공'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기본적인 구문에 따라 내적 성찰을 심화하는 방법이 제시되며, 부분적으로는 연기관緣起觀과 공관空觀을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고 추정된다.
부파불교에 이르면, 원시경전을 배경으로 삼아 법法에 대한 연구가 부파에서마다 추진되는데, 모든 것을 '무상·고·공·무아'라고 깨닫는 것, 그중에서도 무아를 깨닫는 것이 필수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그 무아관은 부파에 따라 다른데 그 대표적인 예를 설일체유부에서 볼 수 있다. 즉 어떤 것을 구성 요소로 분해하여 그 실체성을 부정하고, 요소 자체의 존재성은 시인하였던 것이다. 원시불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삼매를 포함한 3삼매 혹은 3해탈문을 설하지만, 그것들을 이론적으로 추구하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공성을 주축으로 하는 삼매가 여러 가지여서 그 깊이에 차이가 있음을 주목하여, 공성을 분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6공(〈사리불아비담론 舍利弗阿毘曇論〉)·9공(〈잡아비담심론 雜阿毘曇心論〉)·10공(〈대비바사론 大毘婆沙論〉)이 그것인데, 이들은 반야경 기술과 맥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