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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동(2000). 교육의 개념과 반성적 교육 철학. 박성희 외.『교육학에의 초대』. (pp. 15-62). 서울: 원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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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육과 철학
교육철학 강의를 시작하면서 학생들에게 ‘교육철학이란 어떠한 학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거의 예외 없이 학생들은 굉장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러한 당황스러움은 곧 나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되돌아온다. 교육철학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배우려고 하는데 가르쳐주지도 않고 교육철학의 학문적 성격을 묻는 것은 앞뒤가 바뀌지 않았느냐는 것이 학생들 항변의 골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차 물으면 학생들은 그 동안 자신들이 배웠던 교육학의 여러 학문들의 성격을 떠올리며 교육철학이 어떠한 학문인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철학적 사유와 지식을 교육에 응용하여 교육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교육의 실제를 개선하는 길을 찾는 것이 바로 교육철학이다’라고 대답한다. 교육학은 응용학문이며, 교육학의 한 하위영역인 교육철학 역시 당연히 철학적 지식의 응용을 통하여 교육현상을 이해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맞는 말이다. 교육철학을 응용학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교육철학의 여러 교재들을 살펴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답이다. 아마도 교육철학의 응용학문적 성격을 나타내는 표현 가운데 ‘교육의 철학적 기초’라는 것만큼 명쾌한 구호도 드물 것이다.
나의 교육철학 강의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학생들은 교육철학을 응용학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철학적 지식의 응용을 통하여 교육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설명하면서 학생들에게 새로운 유형의 교육철학을 가르쳐주는 데에 한 학기를 다 보낸다. 교육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철학을 소개하는 이 글에서도 나는 똑같은 일을 하고자 한다. 다만 한 학기 동안 하던 일을 짧은 지면을 통하여 대신해야 된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나는 이 글의 이곳저곳에서 여러분이 나의 말을 이해하기 위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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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아야 하는 자료들을 소개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요구하는 사색과 독서를 여러분이 충실히 수행하리라는 전제하에서 나는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그렇다면 철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교육을 이해한다는 것이 왜 어려운가? 여러분은 나와 함께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떠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또는 그것을 인위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주변의 다른 학문들로부터 지식을 응용하고자 할 때, 우리는 먼저 우리가 이해하거나 개선하려는 현상이 어떠한 종류의 현상이며, 어떠한 내적 질서를 지니고 있는지를 다소나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응용이라는 말은 무엇(A)에다가 다른 무엇(a)을 도입하여 본다는 뜻이다. 이러한 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적어도 머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진행하고 있어야 한다. 즉, ‘A는 어떠어떠한 사태, 또는 현상이며, a는 이러이러한 원리, 또는 규칙이다. 따라서 A는 a를 요구한다.’ 우리의 이러한 추론이 정당하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A란 무엇인가’, 그리고 ‘a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A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그 A에 a를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원리들 a, b, c, d, … z 가운데 어떠한 원리를 도입해야 되는지를 알 수가 없다. 또한 a를 모르면 그것이 A를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사태 A, B, C, D, … Z 가운데 어떠한 사태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를 짐작할 수도 없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특정한 규칙이나 원리를 응용한다는 것은 그 규칙이나 원리의 도입을 요청하는 사태나 현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사태나 현상에 도입하려는 원리나 규칙이 어떠한 것인지를 또한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다소 복잡한 분석이기는 하지만, ‘왜 철학적 지식을 교육에 응용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가’ 라는 우리의 질문을 해결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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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면, 생각하기가 다소 끔찍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고등학교 학생이고 수학수업을 받고 있다고 가정해 보라. 우리 앞에는 수학 선생님이 내준 응용문제가 놓여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수학의 원리나 공식들을 배웠다. 우리가 풀어야 하는 문제는 그 원리나 공식들 가운데 한두 개를 도입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떠한 원리나 공식의 도입을 요구하는가? 우리의 머리 속에는 이러한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도입해야 하는 원리나 공식을 찾으려면, 먼저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가 어떠한 종류의 문제인지를, 그것이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수학공식과 원리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물론 우리가 풀어야 하는 문제의 성격을 파악하고 난 뒤에는 그 문제에 도입해야 하는 원리나 공식 역시 우리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바로 앞의 문단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응용이 성공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응용하려는 원리(a)와 그 원리의 도입을 요청하는 사태(A) 양자를 필요한 만큼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응용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태나 현상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과 ‘우리가 도입하고자 하는 원리나 규칙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하였는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이해하고 있는 다른 동료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가 행한 분석의 결과를 교육철학에 적용하여 보자. 앞서 우리는 교육철학이 ‘철학의 지식을 교육에 응용하는 일’을 한다고 이야기했었다. 만약 이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는 우리가 직면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현상에 해당하는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이며, 둘째는 그러한 교육에 적용될 수 있는 원리, 또는 규칙에 해당하는 ‘철학적 지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그 내용은 무엇인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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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이해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할 때, 우리가 먼저 갖추어야 하는 것은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이다. 우리는 교육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그러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거나 교육의 실제를 개선하는 데에 필요한 철학의 지식을 찾아 이를 도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이 맞다면, 아마도 교육철학자들은 먼저 교육에 대한 이해, 또는 교육의 개념을 정립해 놓고 이에 비추어 교육과 유관하거나 유용한 철학적 지식들을 취사선택하는 길을 걸어왔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교육철학은 이러한 식으로 철학적 지식을 응용하는 데에 철저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교육의 개념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철학적 지식들을 도입하다보니 그것이 교육의 어떠한 부분과 관련을 맺는 것인지, 그것이 교육 실제의 어떠한 부분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가 분명하지 않은 교육철학의 지식들이 종종 나오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말을 할 수가 있다. 교육철학은 응용학문이라는 주장이 성립되려면, 그리고 응용이 건실하게 이루어지려면 먼저 우리는 교육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철학적 지식들을 반성적으로 수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교육철학을 나는 종전의 교육철학, 즉 다소간 무반성적으로 철학적 지식을 응용하는 데에 전력해 왔던 교육철학과 구분하기 위하여 ‘반성적 교육철학(反省的 敎育哲學)’이라 부르고자 한다. 노파심에서 사족처럼 하는 말이지만, 반성적이라는 말은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이를 뉘우친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영어로 reflective에 해당하는 용어로서 자신이 수행하는 활동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그 활동의 성격과 진행의 경로, 그 활동이 따르는 원리 등을 체계적으로 사고함으로써 활동 자체의 개선을 도모한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반성적 교육철학이란 철학적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교육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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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 실제를 개선하는 일과 관련하여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 철학의 지식들을 선별적으로 도입하는 일을 하는 학문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적 수용에 있어 준거가 되는 것은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이다. 이렇게 보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반성적 교육철학의 실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부터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절에서 나는 가능한 만큼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평생에 걸쳐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다. 다음에서 내가 소개하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나의 견해에 불과하다. 여러분도 교육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게 될 것이므로 나의 견해를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교육의 개념을 정립하고자 노력해야 된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나와 함께 교육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여러분 나름대로의 답을 찾는 여행에 나서보자.
2. 교육의 개념적 혼동
현대처럼 교육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시대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그 관심의 정도에 비례하여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의견과 소신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여러분도 교육의 문제를 놓고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토론하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교육학자나 교사는 물론이고 학부모, 학생, 정치인, 종교인, 예술인 등 다양한 성분의 사람들이, 심지어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시청자들까지 전화를 통하여 교육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하며 열띤 토론을 전개한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대개의 경우 토론에서 다루는 주제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라도 의견 수렴을 가져오면서 프로그램이 끝나는 경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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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무슨 흥미 있는 사실인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의 경제와 관련된 특정한 주제, 다른 나라와의 외교 현안, 지진의 발생과 관련된 지질학적 문제 등을 가지고 토론하는 경우 그 모습은 교육 문제에 대한 토론회와는 완전히 다르다. 먼저 아무나 참여할 수가 없다. 이는 경제학자, 국제정치학자, 지질학자 등과 같은 소위 전문가들의 참여를 요청하며, 우리는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감히 일반인이 전문가들의 견해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주제를 중심으로 한 토론회는 많은 경우에 전문가들 간의 의견충돌이 심각하지 않은 이상에는 어떠한 잠정적 결론을 내리면서 끝난다.
왜 교육관련 토론회의 경우에는 전문가라 할 수 있는 교육학자들이나 교사들의 의견이 일반인들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묵살되는가? 일차적인 이유는 교육과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일반인들의 생각을 계도할 수 있는 전문적 식견을 갖추지 못한 교육전문가들에게 있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다른 이유는 교육을 마치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은 교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올바른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일반인들의 잘못된 관점에서도 기인한다. 물론 교육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견들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다양한 의견들 가운데는 고급스러운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또한 교육을 교육 아닌 것과 혼동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육에 대한 고급스러운 의견을 모색해 나가면서 교육이 아닌 것은 배제하는 엄격한 태도를 갖출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먼저 많은 사람들이 교육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교육이 아닌 것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를 분명히 하면서 교육의 실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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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해 보기로 하자.
1) 교육과 훈련
우리들은 삶을 영위하는 동안 여러 가지 상황에서 다양한 종류의 기능이나 기술을 훈련을 통하여 익히고 있다. 컴퓨터로 문서작업을 신속하게 하려면 자신이 원하는 문자를 자판을 두드려 완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초보자들은 대개의 경우 자판을 익히고 기계적으로 타이핑하는 연습을 한다. 또한 남성들의 경우 군대에서 신병 훈련을 받는 동안 총검술 훈련을 받는다. 다양한 상황에서 상대방의 가상적인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하여 거의 무의식적으로 상황이 요구하는 동작을 취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는다. 이외에도 우리가 다양한 종류의 기능을 익히기 위하여 받는 훈련은 이루 열거하기가 어려울 만큼 많다.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종류의 훈련은 교육이라 할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러한가? 훈련과 교육이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하는 결론을 내리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에 대하여 그 이유를 댈 수 있어야 한다. 옆의 동료들과 서로의 의견을 밝히고 그 이유를 제시해 보라. 나의 의견을 제시한다면, 나는 훈련을 교육이라 볼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컴퓨터 자판을 연습하는 일이나 총검술을 익히는 훈련 등은 의도적으로 노력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즉, 훈련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기능을 습득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의도적이고 체계적이며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학습자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하여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활동이며, 그러한 학습자의 활동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교사가 체계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활동이다. 즉, 교육은 의도성과 체계성, 능동성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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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하는 활동이며, 이 점에서 그것은 훈련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여러분도 교육과 훈련은 같다는 나의 의견에 동조하는가? 내가 밝힌 이유를 납득하는가? 만약 나와 같은 의견을 지니게 되었다면, 다시 한 번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자. 여러분은 아마도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찰스 디킨즈의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이러한 장면이 나온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비롯한 가출소년들이나 동네 꼬마들을 모아 놓고 대장 똘마니 하나가 소매치기 기술을 체계적이고 의도적으로 훈련시킨다. 동네 꼬마들에게 그 훈련은 무척 힘든 것이기는 하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결코 주인에게 발각되지 않고 남의 주머니를 뒤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단순히 훈련 정도가 아니라, ‘대장 똘마니가 소매치기 기술을 가르치고 동네 꼬마들은 그에게서 배운다’고 서술할 수도 있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소매치기 기술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해 보라. 아마도 상대방이 여러분에게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표현이다’라고 항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만큼 어떠한 활동이 의도성과 체계성을 갖추고, 당사자들의 노력을 수반하며 진행되고 있다면, 그것을 훈련이라고 하든 교육이라고 하든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소매치기 훈련 역시 컴퓨터 자판 연습이나 총검술 훈련과 마찬가지로 분명 훈련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자판 연습이나 총검술 훈련과 마찬가지로 교육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이 아닐까? 다시 옆의 동료들과 함께 이 문제를 토론해 보라.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는 소매치기 기술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표현, 즉 소매치기 훈련도 교육이라는 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불편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앞에서 나는 훈련과 교육은 같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부득이 하게 사용한 거짓말이다. 여담으로 이야기하지만, 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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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종류의 거짓말을 나는 앞으로도 빈번히 사용할 것이다. 그러니 항시 여러분은 긴장하면서 이 글을 읽어야 한다.
훈련이란 가치 지향적인 활동이 아니라, 가치중립적인 활동이다. 그것은 그 결과로 우리가 얻게 되는 기능이 가치 있는 것인가, 또는 앞으로 가치 있는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에 구애받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익히도록 하는 데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컴퓨터 자판 연습이나 총검술 훈련, 소매치기 훈련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러나 교육은 가치중립적인 활동이 아니라, 가치 지향적인 활동이다. 그것은 그 결과로 우리가 습득하게 되는 지식이나 정보, 기능 등이 가치 있는 것이며, 가치 있는 방향으로 활용될 것을 기대하는 활동이다. 바로 이 점에서 교육과 훈련은 크게 다르다. 비록 교육과 훈련이 의도적이고 체계적이며 능동적으로 수행되는 활동이라는 공통점을 갖기는 하지만, 그것이 가치 지향적인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에서 이 둘은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엄청난 차이를 갖는 것이다.
내가 짐작하기로 아마도 여러분은 이쯤에서 나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싶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허풍을 떨더니 기껏 교육과 훈련은 가치지향성이라는 측면에서 동일시될 수 없는 활동이라는 말을 하려고 그런 것인가? 아마도 이것이 여러분이 갖는 불만의 골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가 도달한 이 결론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자.
아마도 여러분은 교육심리학 시간에 파블로프(I. Pavlov)의 고전적 조건화 이론을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고기를 보면 무조건적으로 침을 분비하는 개에게 종소리와 고기를 동시에 제시하는 활동을 충분히 반복하면, 개는 고기가 아니라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분비하게 된다. 이 때 고기는 무조건 자극이고 종소리는 조건 자극이며, 고기를 보고 침을 흘리는 행동은 개의 타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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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으로서 무조건 반사이며 종소리를 듣고 침을 흘리는 행동은 개가 후천적으로 습득한 조건 반사이다. 우리는 무조건 자극과 조건 자극의 결합을 통하여 개에게 조건 반사에 속하는 행동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것이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화 이론의 골자이다. 여러분은 몰라도 내가 사범대학에 입학하여 파블로프의 이론을 처음 배웠을 때, 나는 대단히 열광하였다. 한번 생각해보라. 개가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리는 행동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만한 사건이다. 어디 종소리뿐인가? 무조건 자극인 고기와 결합하기에 따라서는 무엇이든 조건 자극이 되어 개의 침 흘리는 활동을 유발하도록 만들 수 있다. 개의 타고난 본능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얼마든지 개를 새로운 존재로 창조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아닌 게 아니라 파블로프는 이 이론으로 인하여 노벨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쏜다이크, 스키너 등으로 이어지는 행동주의 학습이론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 아닌가?
다시 교육심리학 교재를 살펴보라. 이러한 말이 나올 것이다. 파블로프의 조건화 실험의 결과로 ‘개는 종소리를 듣고 침을 흘리는 행동을 학습하게 되었다.’ 종소리를 듣고 침을 흘리는 행동은 사람도 감히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이다. 파블로프의 개는 학습의 결과로 이처럼 어마어마한 행동,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 개가 상상할 수 있다면 - 행동을 익히게 된 것이다. 이를 인간 학습에도 적용한다면, 우리는 어린 학생들, 우리의 후세대를 얼마나 경이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 교육의 힘은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나의 이러한 설명에 마음이 편안한가? 교육심리학 시간에 배운 내용이고, 따라서 의심의 여지없이 타당한 이야기라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대단히 실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교육과 훈련의 차이를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떻게 파블로프식의 학습이론을 마음 편하게 수용할 수 있는가? 고기가 아닌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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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을 하게 되었다면, 그 개는 학습을 했다기보다는 정신 나간 개(狂犬)가 된 것으로 볼 수는 없는가? 도대체 ‘침을 흘리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이상한 행동’을 학습했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가?
심리학과 교육심리학은 학문의 성격상 가치중립적인 경험과학이다. 그것은 외부로 드러난 행동을 분석하여 우리 내부의 심리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할 뿐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자연과학에 가깝다. 가치중립적인 학문으로서 교육심리학에서는 학습자가 이전에 하지 못하던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을 학습의 결과로 간주한다. 그 행동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는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따라서 개가 침을 흘리는 행동을 학습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교육은 가치 지향적인 활동이다. 학습자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했다거나 성장했을 경우에만 우리는 그것을 학습이라고 말해야 한다.
교육심리학을 모함하려는 의도에서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히고 교육심리학 교재에서 자주 거론되는 학습의 사례 하나를 더 거론해 보자. 아마도 여러분은 앨버트 반두라(A. Bandura)의 관찰학습, 또는 모방학습에 대하여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관찰학습은 행동주의 계열의 학습과는 성격이 크게 다르다. 이는 교육심리학 시간에 배울 것으로 보고, 결론만 이야기하자. 반두라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그 행동을 모방할 수 있고, 그 결과로 이전에는 하지 못하던 행동을 학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을 폭력적인 TV 프로그램에 장시간 노출시킬 경우, 아이들은 TV 프로그램 주인공의 폭력적인 행동을 관찰하여 모방 학습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폭력적인 행동’을 학습한다는 것이다. 폭력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다면, 이는 일종의 ‘타락’인데 이것도 학습인가? 이것이 교육인가? 여러분이 판단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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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육과 암기
학교는 교육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러한 학교교육에 문제가 상당히 많은 모양이다. 여기서 학교교육의 문제를 모두 거론할 생각은 없다. [각주 1: 최근 내가 읽은 책 가운데 학교교육의 문제를 가장 실감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학교를 넘어서(1998)』이다. 이 책은 교육학자도 아니고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의 학생도 아닌 법과대학 3학년생이 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의 학생들 가운데 이처럼 교육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문제의식 속에서 교육에 대한 자기 나름의 관점을 정립하고 있을 학생이 몇 명이나 될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인 교육이란 무엇인가, 즉 교육의 개념을 이해하는 일과 관련하여 반드시 다루어야 될 것이 한 가지 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학교에 대하여 갖는 불만은 학교에서 이른바 암기식 교육, 또는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옳다고 하면, 암기나 주입은 적어도 교육의 본질적인 측면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앞에서 교육은 적어도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며, 동시에 가치 지향적인 활동이라고 규정하였다. 의도성, 체계성, 가치지향성이 곧 어떠한 활동을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준거가 된다고 합의한 셈이다. 그러면 암기활동이 이러한 준거를 충족시키는지를 살펴보자. 만약 암기활동이 우리가 합의한 교육활동의 준거를 충족시킨다면, 그것을 교육이 아니라고 말할 이유는 없다.
나를 비롯하여 여러분 모두는 초·중·고등학교 시절 무엇인가를 암기하는 데에 애를 먹은 기억이 있다. 구구단 암기, 원소주기율표 암기, 수많은 수학공식들의 암기 등등 이루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암기활동을 해 온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암기활동은, 내가 보기에 훈련이 그러한 것처럼,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구구단이나 원소주기율표를 좀 더 쉽게 기억하면서도 좀처럼 망각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 경험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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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솔직히 말하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암기활동 가운데 의도성과 체계성이 없는 것은 거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암기활동은 교육활동의 준거를 만족시킨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준거, 즉 가치지향성을 암기활동은 만족시키는가? 훈련이나 모방은 바로 이 가치지향성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교육이 될 수 없다고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했다. 암기는 어떠한가? 대단히 사소하고 잘못된 경우를 제외하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암기하도록 요구하는 것들은 대단히 가치 있는 것들이다. 구구단, 원소주기율표, 수학공식 등등이 가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보면, 암기란 결국 가치 있는 내용을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을 통하여 우리의 머리 속 기억의 저장고에 입력하는 활동이 된다.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교육의 개념적 준거를 훌륭히 만족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일반인들의 불만과는 달리 학교에서 요구하는 암기는 교육의 활동이며, 그것이 교육인 이상 학교가 암기를 강조하는 현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암기식 교육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듯이 어쨌든 암기는 교육 아닌가?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 이러한 우리의 결론에 여러분은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암기를 교육이라고 본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잘못된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러한 질문이 여러분 머리 속에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왜 암기를 교육이라고 부를 수 없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라.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에 대하여 배운 적이 있다. 그의 그림의 특징이 무엇이며, 그의 그림이 이전의 사실주의나 인상주의의 평면적 회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입체파 회화를 창시하였다든지, 그리고 그의 대표작들 가운데 아비뇽의 여인이나, 게르니카 등이 있다는 사실 등등. 웬만한 교양인이라면,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며, 여러분은 아마도 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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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피카소의 그림을 ‘안다.’ 우리는 모두 피카소의 그림을 ‘배웠다.’ 내가 대학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더운 여름날 심심했던 나는 친구들과 함께 덕수궁 현대미술관으로 나들이를 갔다. 미술관에 들어서자 예쁜 정물화며, 풍경화, 미인도 등이 우리를 맞이했고 나와 친구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그림들을 예찬하며 미술관을 누비고 다녔다. 미술관을 나올 때쯤 친구 한 명이 기념으로 그림엽서 몇 장을 구입했다. 우리는 그것을 돌려보면서 나름대로 그림을 평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누가 보더라도 무엇을 그린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색채도 아름답지 못한 그림 몇 장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그 그림들을 혹평하면서 조용히 맥주나 한 잔할 생각으로 덕수궁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 그 그림의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아 볼 셈으로 엽서 뒤쪽에 깨알같이 작은 크기로 적혀 있는 작품 및 작가 소개의 글을 들여다보았다. <세 명의 악사: 파블로 피카소 작>, <나의 아름다운 여인: 파블로 피카소 작>이라고 적힌 글을 본 순간 나와 친구들 사이에는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자신의 무지를 들킨 순간 느끼는 불편함이란 것이 있다면, 그 날 나와 친구들이 경험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중·고등학교 시절 많은 것을 배웠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E=mc²,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한 위대한 철학자 칸트, 퇴계 이황의 주리론과 율곡 이이의 주기론,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음악의 아버지는 바흐, 교향곡의 아버지는 하이든 등등. 그러나 무엇인가를 배웠다거나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피카소를 배웠고 알았지만 정작 그의 작품을 대했을 때,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지도 못하지 않는가?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도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는 피카소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생각하기로는 암기와 교육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교육을 받았다면, 우리는 우리가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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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것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그것에 비추어 세상을 이해하고 시를 감상하며, 음악을 듣고 미술 작품을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시험에 나올 만한 몇 가지 사실들을 중심으로 학문적인 이론과 예술작품과 시작품 등을 암기했을 뿐이다.
이해했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 그 의미에 공감하고 그것에 비추어 사고하고 행동할 줄 안다는 뜻이다. 암기했다는 것은 그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 의미에 공감하지도 못하며 따라서 그것에 일관되도록 사고하고 행동할 줄도 모른다는 뜻이다. 교육은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며, 가치 지향적인 활동이고, 학생들의 이해를 도모하는 활동이다. 암기는 바로 ‘이해의 도모’라는 준거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따라서 교육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여러분의 마음이 좀 편안해 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마음이 편치를 못하다. 그것은 암기식 교육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암기한다는 것은 이해를 져버린다는 뜻이며, 교육이 이해를 도모하는 활동인 만큼, 그것은 곧 교육에서부터 교육 아닌 활동으로 이탈한다는 의미이다. 무엇인가가 암기라면 그것은 곧 교육이 아닌 것이며, 무엇이 교육이라면 그것은 결코 암기일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가 ‘못생긴 미인’, ‘허위 투성이의 진리’, ‘악한 도덕’ 등과 같은 말을 하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정신이 나갔거나 아니면 말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암기식 교육, 주입식 교육이라는 말은 스스럼없이 사용하는가? 우리는 정신이 나간 사람들인가? 교육과 암기의 차이를 알게 된 지금부터는 절대로 암기식 교육이니 주입식 교육이니 하는 말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의 학생, 또는 장래의 교사들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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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육과 인독트리네이션
교육의 개념과 혼동되고 있는 것 가운데 인독트리네이션(indoctrination)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많은 경우에 교화(敎化)로 번역된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교화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인독트리네이션이라고 발음되는 그대로 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교화란 원래 부처님이 중생을 가르쳐 그들을 깨우침으로 인도하는 중생제도(衆生濟度)의 활동을 가리킨다. 깨우침이란 중생이 진실을 이해함으로써 그에 추심으로 따르게 되는 상태이다. 그러나 인독트리네이션이란 상대방의 진정한 이해를 수반하지 않은 채, 특정한 내용과 주장을 그가 믿도록 만들려는 의도에서 수행되는 활동을 의미한다(Snook, 1972). 교화가 이해를 도모하는 활동이라면, 인독트리네이션은 의도적으로 이해를 배제하려는 활동이다. 따라서 교화와 인독트리네이션은 그 의미하는 바가 정반대이다. 따라서 인독트리네이션을 교화라 번역하는 것은 엄청난 잘못이 된다.
한 때 교육철학계에서는 교육과 인독트리네이션을 개념적으로 구분하려는 노력이 행해진 적이 있다. 아마도 여러분은 내가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교육과 인독트리네이션의 차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독트리네이션이 아무리 가치 있는 내용을 체계적이고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해도 그것이 상대방의 이해를 수반하지 않는 이상, 이는 단순한 주입(注入) 이상의 활동이 될 수 없다.
4) 교육과 사회화
아마도 여러분은 ‘교육은 사회화(socialization)다’ 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교육=사회화’라는 생각은 사회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에밀 뒤르껨(E. Durkheim)이 제안한 것이며, 그 이후 교육의 개념을 규정하는 한 가지 강력한 사고의 틀이 되어 왔다. 아닌 게 아니라 사회화라는 것은 미성숙한 어린아이들을 그 사회가 지니고 있는 전통과 규범, 행위의 양식, 가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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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체계 등을 내면화한 성숙한 사회성원으로 기르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사회적 제도로서 운영되는 교육은 해당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을 육성하는 일을 담당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한 인간은 성격상 사회화를 통하여 우리가 내면화해야 되는 해당 사회의 가치관과 규범, 행위의 양식, 전통 등을 습득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사회화와 교육은 상당히 유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사회화는 교육뿐만이 아니라, 정치, 종교, 문화, 예술 등 다양한 사회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지지만, 교육은 사회화의 강력한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여러분은 교육을 사회화로 보는 관점에 상당히 공감하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나는 ‘교육=사회화’라는 관점에는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극복해야 되는 맹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제국의 학교는 자민족중심주의라는 사회이념을 토대로 사회성원들을 거의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화했다. 사회화가 곧 교육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독일과 일본제국의 학교는 상당히 성공적인 교육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완벽한 사회화 덕분에 독일과 일본의 시민들은 다른 민족의 전통과 존재의의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사회이념을 다른 민족들에게 강요하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당시 독일과 일본제국의 시민들이 얼마나 맹목적인 이념의 광신자들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이념이 얼마나 파괴적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들 독일과 일본제국의 사회화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지만, 그것이 성공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인류는 굉장한 불행을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독일과 일본제국의 사회화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독일과 일본제국의 교육도 성공적이었는가? 교육이 다른 민족의 불행에 둔감하고 자신들의 사회이념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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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하는 그러한 인간을 육성하는 활동인가? 만약 그들 사회의 교육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면, 사회화가 잘된다는 것과 교육이 잘된다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사회화는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라 볼 수 있으며, 그 사회가 가치 있다고 간주하는 것들을 내용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화는 우리가 지금까지 제안했던 교육의 개념적 준거를 만족시킨다. 2차 대전 당시의 독일과 일본제국의 사회화 역시 이러한 교육의 개념적 준거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회화를 교육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 그런가?
여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교육의 특징적인 면모가 존재한다. 교육은 단순히 한 사회의 가치관과 전통, 표준 등을 내면화하여 살아가는 인간을 기르는 활동이 아니다. 인류의 발전은 교육을 통하여 가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가 아들과 딸의 세대에게 자신들이 이룩한 업적을 가르치는 활동이 없었다면, 그리고 아들과 딸의 세대가 아버지와 어미니 세대의 업적을 배우는 활동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현대인들의 문화적인 발전과 진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의 과정은 단순히 기존의 업적을 후세대에게 사회화시키는 활동으로 점철되지는 않는다. 사회화는 기존 업적에 후세대가 일치되는 현상일 뿐이다. 교육은 후세대가 이전 세대의 업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잘된 부분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것을 추가하여 그들 나름의 고유한 업적을 재창조하는 활동이다. 만약 이러한 교육이 독일과 일본제국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독일과 일본제국의 자라나는 세대들은 그들 부모 세대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념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재정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교육이 성공했다면 독일과 일본제국의 사회화는 실패했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 독일과 일본제국의 교육이 이러한 일에 실패하고 사회화가 성공했다는 이 사실로 인하여 인류는 불행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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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교육과 사회화를 성급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각주 2: 사회화와 교육의 차이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조용환의 『사회화와 교육(1997)』과 D. Nyberg와 K. Egan의 『교육의 잠식(1996)』을 참고하라.]
5) 교육의 재개념화
우리는 지금까지 교육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하여 교육과 훈련, 교육과 암기, 교육과 인독트리네이션, 교육과 사회화 사이의 차이를 다소간 긴 지면을 할애하여 살펴보았다. 우리가 이러한 작업을 진행한 이유는 많은 경우 교육에 대한 논의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교육을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훈련이나 암기, 또는 인독트리네이션이나 사회화를 교육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즉, 교육의 개념에 대하여 다소간의 합의도 없이 각기 상이한 것을 교육이라 주장하는 개념적 혼란으로 인하여 교육에 대한 논의는 비생산적인 논란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교육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교육을 잘하기 위해서는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올바른 관점을 갖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앞에서 우리는 교육이란 이러한 것이다 라고 밝히는 적극적인 방법이 아니라,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 아니다 라고 논의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교육의 실체에 접근해 왔다. 따라서 충분히 만족할 만큼 교육의 실체를 규정하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어떠한 활동이 교육이 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몇 가지 준거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첫째로 교육은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다. 무의식적으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얻게 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육의 결과가 아니다. 예를 들면 자연적인 성숙의 결과로 우리가 얻게 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육을 통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활동을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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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말할 수는 없다.
둘째로 교육은 가치 지향적인 활동이다. 비록 자연적 성숙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치 있는 방향으로의 우리의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 이상, 그것은 교육이라고 볼 수가 없다. 훈련이나 모방 등은 이러한 점에서 교육이 아니다.
셋째로 교육은 학습자의 이해를 겨냥하는 활동이다. 우리가 가치 있는 내용을 기억하고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우리의 것으로 체득(體得)되거나 내면화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육의 결과가 아니다. 교육은 학습자가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이해함으로써 그것에 비추어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하려는 활동이다. 이러한 점에서 학습자의 이해를 보장하지 못하거나 이를 배제하려는 암기나 인독트리네이션은 교육이 될 수가 없다.
넷째로 교육은 당대의 가치에 일치되는 과정이 아니라, 이를 초월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물론 창조는 기존의 것을 내면화하여 이를 디딤돌로 삼아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화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화 과정은 주어진 것으로의 일치라는 특징이 강하며, 주어진 것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등을 따지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화를 교육과 동일시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그것이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통하여 가치 있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이다’라는 단순한 개념적 정의 이상의 구체적인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도달한 결론에 근거하여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교육이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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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이다고 교육을 완전히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도달한 결론, 즉, ‘교육은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통하여 가치 있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이라는 이해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이러한 이해를 갖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고급스러운 교육의 개념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할 길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이제 막 한 걸음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토대로 삼아 교육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다시 제기함으로써 종전과는 다른 좀 더 개선된 교육의 개념을 가져야 한다. 즉, 교육의 재개념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과제는 거의 책 몇 권을 필요로 할 정도로 방대한 작업이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이를 본격적으로 시도할 수가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교육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체계적인 관점들, 이른바 교육관이라 할 만한 것들을 소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나는 필요한 만큼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이해를 여러분에게 제공하고자 한다.
3. 세 가지 유형의 교육관
교육은 훈련과는 달리 가치 지향적 활동이라든지, 암기나 인독트리네이션과는 달리 이해를 도모하는 활동이라든지, 아니면 사회화와는 달리 새로운 가치의 적극적 창출을 도모하는 활동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교육을 정의하는 것은 교육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하나의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관점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다소간 단편적인 개념적 정의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교육에 대한 하나의 포괄적인 관점을 형성하고 교육을 설명하는 체계적인 논의의 틀로 구체화될 때, 우리는 그것을 교육관이라 부를 수 있게 된다. 나는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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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유형의 교육관을 소개하고 이를 평가하는 가운데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좀 더 포괄적인 전망을 여러분에게 제공하고자 한다. 이 부분을 읽기 전에 나는 여러분에게 ‘교육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을 포함해서 인간은 왜 교육을 받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하여 여러분 자신의 답을 먼저 마련하도록 부탁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여러분의 생각이 어떠한 교육관에 해당하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갖는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는 가운데 좀 더 고급스러운 교육관을 형성하라고 당부하고자 한다.
1) 실용주의적 교육관
‘당신은 왜 교육을 받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다양한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아마도 가장 강력한 이유가 있다면, ‘학습자들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라는 대답일 것이다. 사회적 필요란 무엇인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그것은 장차 학습자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그리고 직업인으로 살아간다고 할 때, 그들이 갖추어야 하는 지식과 기술과 기능을 습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차원, 또는 국가적 수준에서 이야기한다면 국가 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지식인들과 기능인들을 양성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러한 교육관을 실용주의적 교육관이라 부를 수 있다. 실용주의적이라는 말은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들이 장차 사회적 삶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가 현재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수요자인 학습자 중심의 교육을 행해야 된다는 시대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현재 우리 교육은 거의 완전히 실용주의적 교육관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순수 이론적인 내용을 강의하는 강좌는 잇따라 폐강이 되고, 이른바 취업에 유용한 인기강좌에는 학생들이 발 디딜 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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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몰리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이나 순수 자연과학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급속히 줄어들고, 공학계열이나 응용학문에 대한 지원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교육은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여 고부가가치(高附加價値)를 산출할 수 있는 이른바 ‘신지식인’을 양성해야 한다.
교육은 하나의 사회적 제도이다. 우리는 그러한 제도를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를 기대하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그것을 운영하는 데에 재정적 지원을 행하고 있는 개인과 사회에 대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 되는 책무성을 지닌다. 이러한 책무성을 외면하는 교육은 사회적 제도로서 유지될 수가 없다. 교육은 학습자들이 장차 취업을 하는 데에 있어, 사회·경제적 지위를 획득하는 데에 있어 유용한 기여를 해야 되는 책무를 지닌다. 더 나아가 교육은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에 있어서도 소정의 책무를 완수해야 된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상당수는 이러한 실용주의적 교육관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교육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교육관과 관련하여 우리가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실용주의적 교육관에 따르면, 교육은 취직을 위한, 사회적 출세를 위한, 사회발전을 위한 일종의 수단, 또는 도구이다. 어떠한 활동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활동의 바깥에 있는 다른 것들을 위한 도구로 봉사하기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을 때, 우리는 그것을 외재적 가치(extrinsic value)를 갖는다고 말한다. 외재적 가치와 구분되는 것이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이다. 어떠한 것이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하고 희망하는 바가 될 때 우리는 그것이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고 말한다. 수단이나 도구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 있는 것은 수단이나 도구가 실현해야 되는 목적에 있다. 도구로서의 교육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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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다. 즉, 내재적 가치를 갖지 않는다. 가치 있는 것은 교육이 실현해야 되는 목적, 예를 들면 취직, 출세, 국가발전 등이다.
여러분은 교육이 수단이나 도구라는 말에 동의하는가? 동의한다면, 나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장차 여러분은 교사로서 교육에 종사하고자 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종사해야 되는 교육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물질적 풍요에 해당하는 인간의 소망을 실현시켜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도 좋은가? 만약 교육이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점에 자부심을 갖고자 하는 예비교사들이 아직도 있다면, 지금부터 나는 ‘수단, 또는 도구의 피할 수 없는 불행한 운명’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망치는 못을 박는 도구이다. 우리는 책상을 만들고 싶다. 책상은 목적이다. 망치는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도구이다. 만약 망치가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만사를 제쳐두고 망치를 찾는 데에 혈안이 될 것이다. 망치를 찾게 되면 흥분하여 환호성도 지를 것이고, 망치가 심하게 마모가 되어 사용할 수 없다면 기꺼이 돈을 들여 새 망치도 구입할 것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망치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던 책상을 완성했다고 생각하자. 그 순간 망치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목적을 실현시켜준 고마운 도구이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진열장에 모셔두는가? 정상적인 경우라면, 망치는 어두컴컴한 창고에 처박히게 된다. 도구는 그것이 목적을 실현시켜주는 순간 더 이상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된다. 또한 도구는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실현하는 일과 관련하여 더욱 강력한 도구가 나타나는 순간 폐기 처분되고 만다. 못을 박는 데에 더욱 편리한 도구, 예를 들어 못 박는 기계가 발명되었다고 하자. 망치는 더 이상 도구조차 되지 못하고 우리의 기억 밖으로 떠 밀려나서 박물관 진열장에나 놓여 있게 된다. 도구는 슬픈 운명을 갖고 있다. 목적이 실현되는 순간에 곧 바로 용도 폐기되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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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보다 더욱 강력한 도구가 나타날 경우 역시 용도 폐기된다.
도구로서의 교육 역시 다른 도구들과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하고 만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 즉 취직을 하거나 출세하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에 교육받고자 하고 또 나름대로 열심히 배운다. 그러나 일단 취직을 하게 되면,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출세를 하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교육받고자 하지 않으며 배움과도 거의 영원히 작별을 고한다. 한 사회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한다. 그러나 사회 성원들이 만족할 만큼 경제가 발전하게 되면, 교육은 어떻게 되는가? 투자의 우선순위는 교육이 아닌 다른 부문을 향하게 되며,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점차 소멸되고 만다. 우리가 경제발전에 여념이 없었을 때 학교는 국가로부터 많은 재정 지원을 받았고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학교의 시설이나 교사에 대한 대우는 다른 사회부문보다도 뛰어났다. 그러나 이제 먹고 살만하게 된 지금 사회의 관심은 스포츠나 건강, 여가, 환경 등으로 옮겨갔고, 학교는 모든 사회시설 가운데 가장 낙후된 곳이 되어 버렸다. 도구로서의 교육은 이러한 운명을 피할 길이 없다. 또한 지금까지는 교육이 취직을 하는 데에 있어서나 출세를 하는 데에 있어, 그리고 국가발전을 가져오는 데에 있어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만약 취직과 출세와 경제발전 등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에 교육보다 더 강력한 도구가 있다면, 이 경우에도 교육은 용도 폐기되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도구로서의 교육은 그것 자체의 내재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다른 열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행해야 되고 투자해야 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실용주의적 교육관의 실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는 교육의 존속과 발전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적어도 장래의 예비교사들이 절대 빠져들어서는 안 되는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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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문중심적 교육관
교육사를 살펴보면, 한 때 실용주의적 교육관이 득세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그것과는 구분되는 다른 유형의 교육관이 출현하는 양상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학문 중심적 교육관이다. 실용주의적 교육관에서는 우리가 학문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이유를 그 학문이 가져다주는 실용성, 즉 실제 생활에서의 유용성에서 찾는다.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자신들의 직업적 책무를 다하는 데에,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의 발전을 가져오는 데에 실제로 쓸모가 있는 지식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한 때 19세기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실용적인 지식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이 득세하였다. 산업혁명을 완수하여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교육이 운영된 것이다. 또한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생활적응교육과 진보주의 교육의 이름으로 학생들이 장래 필요로 하게 될 직업적이거나 사회적인 기능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 행해졌다.
영국의 경우에는 산업혁명이 어느 정도 완수되었을 때,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목적은 실용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학문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가치, 즉 내재적 가치에 있다는 주장이 대두하였다. 이는 희랍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가 깊은 서양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자유교육이란 인간이 무지와 미신, 편견 등에서 해방되어, 또는 자유롭게 되어 이성의 힘을 기르는 데에 교육의 목적이 있다고 보는 교육론이다. 이러한 교육론은 순수 이론적인 학문들을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이성이 계발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자유교육은 실용주의적 교육관과는 달리 우리의 이성을 계발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교과를 가르치고 배워야 하며, 이들 교과는 실용성이라는 외재적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계발이라는 학문 본연의 목적을 내재적 가치로서 지닌다고 주장한다(Peters,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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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우에는 브루너(J. S. Bruner)가 학문중심 교육과정을 제창하면서 교육이 실용적인 지식이나 기능보다는 학문의 근본적인 원리를 가르치는 활동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Bruner, 1960).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학문중심 교육과정은 소련이 세계 최초로 스푸트닉이라는 인공위성을 발사함으로써 미국이 소련과의 우주경쟁에서 패배했다는 위기감과 그러한 패배가 진보주의 교육에서 비롯되었다는 자각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이 때 우리가 조심할 것은 흔히 존 듀이(J. Dewey)의 교육을 진보주의 교육(progressive education)이라 부르지만, 실제로 듀이의 교육론과 진보주의 교육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항존주의, 본질주의, 재건주의 등과 함께 20세기 초중반 미국의 교육사조를 형성했던 진보주의는 듀이가 말하는 아동의 흥미를 비학문적인 실제적 관심으로 해석함으로써 아동에게 실제적 유용성을 지닌 것들을 가르치는 운동으로 변질되었다. 듀이는 아동의 흥미를 무시하고 전통적인 교과를 언어적으로 교수하는 전통적인 교육과 함께 이러한 진보주의 교육 모두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각주 3: 이에 관해서는 듀이의 『Experience and Education(1938)』을 참고하라.] 어찌되었든 진보주의로 대표되는 일종의 생활적응교육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학문의 내재적 가치를 존중하는 입장이 브루너를 중심으로 미국에서도 대두하였다.
내가 보기에 학문중심 교육관은 실용주의적 교육관이 지니고 있던 난점, 즉 교육의 가치와 목적을 실제적인 유용성으로 파악하는 문제점을 해소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우리가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는 단순히 실제적으로 유용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실제적인 유용성과는 무관하게 학문이 제공하는 인지적인 호기심과 세계에 대한 이해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학문중심 교육관은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를 실제적인 유용성이라는 외재적 가치의 차원이 아니라, 학문 그 자체가 지니는 내재적 가치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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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강점을 지닌다. 이러한 이유로 학문중심 교육관은 교육의 가치를 외재적 가치가 아닐, 내재적 가치에서 찾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이홍우, 1991).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점이 있다. 그것은 학문의 가치와 교육의 가치가 과연 동일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학문중심 교육론자들은 학문의 가치와 교육의 가치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며, 실용주의적 교육론자들이 학문의 가치를 실제적 유용성이라는 외재적 가치에서 구하는 점을 비판하고, 이를 학문의 내재적 가치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학문의 가치는 곧 교육의 가치이므로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바로 교육의 가치를 외재적인 것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에서 구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맞다면, 교육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은 수단, 또는 도구에 처하게 되는 슬픈 운명에서 벗어나는 셈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먼저 학문의 가치가 무엇인가부터 생각해 보자.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학문은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이다. 그런데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불변의 인식이나 지식을 말한다. 이러한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이 가능한가에 대하여 긍정적인 답을 하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답을 하느냐에 따라 근대철학과 현대철학이 구분된다.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인식을 추구한 데카르트(R. Descartes) 이래로 근대철학은 확실한 인식을 정립할 수 있다고 보고, 그러한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한 현대철학은 인간적인 인식은 언제나 가변적인 것으로서 결코 확실한 인식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모더니즘이 말하는 그러한 진리란 없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학문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좀더 개선된 인식을 정립해 오기는 하였지만 그 가운데 어느 것도 확실한 인식, 즉 진리는 아니었으며, 이는 앞으로도 그러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는 이러한 포스트 모던한 사고를 수용하여 논의를 전개하도록 하자. 하나의 방편으로서 우리는 진리를 당대의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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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인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절대적인 진리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인식들보다는 진리에 더 근접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학문이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인 이상 학문의 가치는 최고 수준의 지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학문중심 교육에서는 최고수준의 지식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이를 중시하기 마련이다. 물론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최고수준의 지식을 가르칠 수는 없다. 따라서 최고수준의 지식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하위지식들을 선별하여 이를 쉬운 것에서부터 어려운 것까지 계열화시키게 된다. 흔히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이러한 계열화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우리는 초등교육보다는 중등교육에서, 그리고 중등교육보다는 고등교육에서 좀 더 진리에 가까이 접근하게 되며, 따라서 학문의 가치인 진리를 좀 더 고급 수준에서 체험하게 된다. 학문중심 교육관에 따르면, 진리란 곧 교육의 내재적 가치이므로 우리는 초등교육보다는 중등교육에서, 그리고 중등교육보다는 고등교육에서 교육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무엇의 가치를 실감하고 이를 체험한다는 것은 그 무엇을 소중히 생각하고 이에 헌신(獻身)하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초등학생보다는 중학생이, 중학생보다는 고등학생이, 그리고 고등학생보다는 대학생이 교육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생각을 멈추고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자.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상급학교에 진학하면 할수록 교육을 좀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느끼면서 세상 다른 모든 일보다 교육, 학생의 입장에서는 배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보람을 느껴왔는가?
여러분은 어떨지 몰라도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에서는 재미있게 배우다가 중학교로 가면 배우는 일이 지루해지고 고등학교에서는 아예 세상 그 어떠한 일보다 더 지겨운 일이 되며, 대학교에 진학하면 배움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게 되지는 않는가? 물론 이러한 역설적인 현상이 생겨나는 데에는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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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까지도 진정한 교육이 아니라 암기나 훈련, 인독트리네이션과 같은 교육 아닌 활동이 교육의 자리를 대신하여 마치 교육인 것처럼 행해지고 있는 현실이 중요한 원인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초등학교에서는 학문적인 수준에서 보면 말 그대로 초급의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지만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도 초등교사와 초등학생들은 재미있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학문적인 수준에서 보면 고급의 지식을 가르치고 배운다 하더라도 그런 지식을 대학교수들과 대학생들은 아무런 재미나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가르치고 배울 수도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초등학교의 교과지식은 초급의 수준에 있지만, 그 교육의 질이나 수준은 고급이라고 말해야 한다. 반대로 대학교의 교과지식은 고급스러운 수준에 있지만, 그 교육의 질이나 수준은 초급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초등교육이란 교육의 질이나 수준이 초급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교과지식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초급이라는 의미이다. 고등교육이란 교육의 질이나 수준이 고급이라는 뜻이 아니라 교과지식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고급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교과지식의 수준에서 평가할 때 초등교육에 해당되는 곳에서도 교육의 질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고급스러운 교육, 즉 고등교육이 가능하며, 교과지식의 수준에서는 고등교육기관이라 평가되는 곳에서도 교육의 질적 측면에서는 저급한 교육, 곧 초등교육이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학문의 기준으로 볼 때 가치 있는 것은 초등교육기관보다는 중등교육기관, 중등교육기관보다는 고등교육기관이다. 상급학교일수록 좀 더 수준이 높은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의 기준으로 보면, 비록 ‘1+2=3’이라는 수준 낮은 지식이라 하더라도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 초등교사와 초등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암기하고 주입하는 상급학교의 교사나 학생들보다 좀더 충실한 교육을 하고 있는 셈이며, 따라서 가르치고 배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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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와 보람, 즉 교육의 가치를 좀 더 높은 수준에서 체험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문의 기준으로 볼 때 수준 높은 지식이 반드시 양질의 교육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의 기준으로 볼 때는 교과지식의 수준이 높으냐 낮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충실히 가르치고 배우냐가 중요하며, 충실히 가르치고 배우는 것만큼 우리는 교육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다. 따라서 학문의 가치와 교육의 가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이는 학문의 가치와 교육의 가치가 서로 구분되는 별개의 가치라는 점을 의미한다. 만약 이러한 생각이 옳다면, 학문이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논증한다고 해서 반드시 교육이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학문 중심적 교육관 역시 실용주의적 교육관이 그러한 것처럼 교육의 가치를 보여주는 교육관은 아닌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학문 중심적 교육관과는 다른 유형의 교육관에서 교육의 가치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교육 중심적 교육관이다.
3) 교육중심적 교육관
어떠한 활동이든 그것이 인간이 종사하고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우리가 앞에서 분류한 바에 따르면, 그 가치는 외재적인 가치와 내재적인 가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어떠한 활동이든 그것은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가치를 모두 지닌다. 교육도 다른 모든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를 동시에 지닌다. 이러한 점에서 교육이 외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교육이 오직 외재적 가치만 지닌다고 생각하고 교육이 지닐 수 있는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 이럴 경우 앞에서 보았듯이 도구나 수단으로서의 교육은 자체의 발전과 존속을 도모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에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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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찾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먼저 교육의 안과 밖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교육의 내재적 가치가 교육의 밖이 아니라 교육의 안에 있다면, 먼저 우리는 교육의 안을 규정하고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탐색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교육의 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육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그것이 없다면 교육이 성립되지 않는 어떤 것임에 분명하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라. 무엇이 교육의 본질적인 요소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육의 본질적 요소로서 ‘무엇’과 ‘가르침, 그리고 ’배움‘을 생각할 수 있다. 무엇이란 흔히 교육의 내용이라 일컬어지는 교과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교과와 가르침, 배움이 교육의 본질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과의 가치가 곧 교육의 가치는 아니다. 우리는 앞에서 대표적인 교과라 할 수 있는 학문의 가치가 교육의 가치일 수는 없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교과에 포함될 수 있는 것에는 학문 이외에도 예술, 체육, 도덕, 종교, 태권도, 바둑 등 다양하다. 이 모든 것들은 그 나름의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교과는 교육의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한 필요조건이기는 해도 그것이 곧 교육은 아니다. 그것은 교육의 소재(素材)이다. 흔히 교과를 교육의 내용이라 말하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교육은 모름에서 앎으로 움직여나가는 과정적 활동이다. 소재로서의 교과는 그러한 운동과 과정을 이어주는 소재일 뿐이다. 예를 들어 등산과 같은 과정적 활동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등산이 이루어지려면 산이 있어야 한다. 등산은 산의 아래에서 산의 위로 진행되는 활동이다. 이 경우 우리는 산을 등산의 내용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산은 등산의 소재로서 우리는 등산의 활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등산능력에 맞는 산을 선택하여 오를 뿐이다. 미술과 같은 활동을 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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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수도 있다. 미술가는 아름다운 여인을 그릴 수 있다. 아름다운 여인과 같은 대상은 미술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미술은 그러한 여인의 미를 색채와 형태로 묘사하는 활동이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여인이 미술의 내용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미술의 소재일 뿐이다. 산이 등산의 소재이고 여인이 미술의 소재인 것처럼 교과 역시 교육의 소재이다. 만약 교육에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앞서 찾아냈던 교육의 본질적 요소 가운데 교과를 제외한 가르침과 배움일 수밖에 없다.
만약 교육의 내용, 즉 교육의 안에 있는 것이 가르침과 배움의 활동이라면, 우리는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가르침과 배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과연 가르침과 배움에는 외재적 가치, 즉 그것이 다른 것의 수단이 되는 가치, 예를 들면 월급을 받기 위하여 가르친다든지, 출세하기 위하여 배운다든지, 최선의 지식이 지니는 학문적 가치를 체험하기 위하여 배운다든지 하는 외재적 가치 이외에 그것만이 고유하게 지니는 내재적 가치가 있을까? 아마도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 그 자체가 재미있고 보람이 있어서 가르치고 배운 경험이 별반 없는 우리들에게 이는 공허한 질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는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각급 학교 교실에서 교육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들 경험이 있을 터이지만, 각종 고사가 끝난 뒤에 교사는 학생들의 점수를 알려 주고는 다음과 같은 상벌을 내린다.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운동장에 나가서 놀고, 성적이 나쁜 사람들은 방과 후에 나머지 공부한다.’ 이러한 교사의 조치를 들은 학생들의 얼굴에는 희비가 엇갈린다. 운동장에 나가서 놀라는 말을 들은 이른바 성적 우수자들은 희희낙락하고, 나머지 공부를 지시받은 학생들은 얼굴이 사색(死色)이 된다. 이러한 광경은 지금도 각급 학교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장면에서 혹 충격을 느끼지 못하는가? 만약 여러분이 아무런 충격을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그러한 여러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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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들이 교사가 되려는 꿈이 있는지, 교육에 종사하려는 열정이 있는지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위의 예화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충격을 받아야만 한다. 이 장면에서 운동장에 나가 노는 것은 상이다. 반면 나머지 공부를 하는 것은 벌이다. 나머지 공부란 무엇인가? 그것이 학생들에게 주는 심리적인 부담감(이 경우에는 창피)을 논외로 하면 나머지 공부란 공부, 즉 배우는 활동을 벌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배움은 곧 벌이며, 그것이 벌인 이상 우리가 피해야만 하는 일종의 혐오자극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배움이란 교육의 본질적 요소이다. 그런데 배움이 혐오자극이라면, 교육 역시 혐오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배움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가르치는 교사 역시 교직의 매력을 방학에 있다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방학이 되면, 가르치는 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가르치는 활동 역시 교사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고역인 것이다. 이처럼 교육이 부담스럽고 회피하고 싶은 혐오자극처럼 취급되는 것이 요즈음의 현실이다.
우리의 선조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논어(論語)를 보면 ‘학이불염 회인불권(學而不厭 誨人不倦)’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배우는 일이 염증나지 않으며, 가르치는 일이 권태롭지 않다’는 말로서 배움과 가르침이 가치 있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공자님은 요즈음의 우리와는 달리 세상 다른 모든 일보다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활동이 보람 있고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던 모양이다. 서양에서 비슷한 사람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현혹시킨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사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재판관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면 방면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가르치는 일을 안 하고 산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보고,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채, 독배(毒杯)를 마셨다. 순교자(殉敎者)라는 말이 있다. 이는 흔히 종교적인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희생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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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을 가리킨다. 목숨하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종교적인 믿음이 소중하고 가치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순교자란 말 그대로 가르침과 목숨을 맞바꾼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소크라테스가 바로 이러한 뜻에서의 순교자라고 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가르치는 일의 가치가 너무나도 소중하여 목숨하고도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님의 발언이나 소크라테스의 순교는 교육을 혐오자극처럼 대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교육을 회피해야 되는 혐오자극 정도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을 오히려 공자님이나 소크라테스는 가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편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경험을 반추해 볼 때, 우리는 우리를 사로잡는 어떠한 호기심에 이끌려 다른 모든 일을 잊은 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애써본 적이 몇 번씩은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모른 채 어리석은 사고나 행동을 하는 주위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잘못을 시정해 주고 싶은 심정에 빠져 본 적이 몇 번씩은 있을 것이다. 소박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바로 배움의 가치이고 가르침의 가치에 해당된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하여 그것에 몰입할 수 있다면, 우리는 나름대로 배움의 가치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기 위하여 애를 쓰고 거기에서 보람을 느낀다면, 그 순간 우리는 가르침의 가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교육의 가치는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도 없을 만큼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언제든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교육의 내재적 가치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는 취직이나 출세를 위해서, 또는 국가발전을 위해서, 또는 학문적 가치를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르치고 배우는 일 자체에서 비롯되는 재미와 보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육의 외재적 가치에 해당하는 것들은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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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내재적 가치가 충족되고 난 후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들이 된다. 만약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보람을 만끽하면서 동시에 취직이나 출세도 하고 국가발전에도 기여하며 학문적 가치도 체험할 수 있다면, 이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교육의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가 충돌하여 이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다면, 우리가 장차 교육에 종사할 사람들인 이상에는 일차적으로 교육의 내재적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에서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교육과 교육 아닌 것들을 혼동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혼동은 교육의 내재적 가치에 주목하기보다는 외재적 가치에 주목함으로써 실용주의적 교육관이나 학문 중심적 교육관을 토대로 교육을 이해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만약 우리가 취직이나 출세를 위해서, 또는 국가발전을 위해서 교육에 종사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보다는 훈련이나 모방, 암기나 주입, 인독트리네이션이나 사회화 등에 의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여러분들도 경험했을 터이지만, 취직이나 출세를 위해서는 각종 입시나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좋은 성적은 우리가 가르침과 배움의 보람을 체험하면서 이해를 도모하는 방법보다는 출제 빈도가 높은 특정한 사항들을 암기하거나 주입하고 훈련을 통하여 기계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통하여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국가발전을 위하여 교육에 종사하는 경우 역시 국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식이나 기능들을 훈련이나 암기를 통하여 습득하고 국가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사회화나 인독트리네이션을 통하여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아마도 학교가 실용주의적 교육관을 수용하여 운영되는 이상에는 교육보다는 암기와 훈련, 사회화나 인독트리네이션 등이 득세하는 현상은 당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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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중심적 교육관을 수용하여 교육에 종사하는 경우 역시 학문적인 소질과 적성을 지닌 몇몇 학생들에 맞도록 최고 수준의 지식을 교과의 내용으로 삼아 최단 시간 내에 이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배출된 몇몇 학문적 소양을 지닌 학생들이 장차 해당 학문의 지식을 새롭게 창출해 낼 수만 있다면, 대다수 학생들이 학교 교과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수학이나 과학 올림피아드에서 우리나라 고등학생들 몇몇이 수상(受賞)을 하게 되면, 그 성적이 곧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수학이나 과학 분야의 성취수준으로 간주되고 만다. 모든 학생들이 자신들의 소질과 수준에 맞는 교과의 내용들을 교육의 소재로 삼아 그들 나름대로 배움의 보람을 체험하면서 학습한다는 것은 이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뛰어난 학생들 몇몇을 제외하면 나머지 학생들은 그들의 수준에 맞지 않아서 흥미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내용을 암기하거나 기억하면서 따라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의 가치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계속 탐구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 가지 이에 관하여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야만 체험될 수 있는 가치라는 점이다. 교육 대신에 훈련이나 모방, 암기나 주입, 인독트리네이션이나 사회화 등을 수행하면서 교육의 가치를 체험할 수는 없다. 교육의 가치는 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통하여 가치 있는 방향으로의 성장을 도모하는 가운데 새로운 교과의 내용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그러한 노력을 조력하는 가운데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교육의 가치는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는 경우에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실용주의적 교육관과 학문 중심적 교육관, 그리고 교육 중심적 교육관의 차이를 좀 더 알기 위해서는 이들 각각의 교육관이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을 규제할 경우, 우리가 무엇을 교육의 소재로 삼아 가르치고 배우게 되는지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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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먼저 실용주의적 교육관의 경우 우리가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교육의 소재, 즉 교과의 내용은 취직이나 출세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능, 또는 국가 발전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이나 기능은 많은 경우에 교육보다는 훈련이나 암기, 인독트리네이션이나 사회화를 통하여 전달되고 습득된다. 만약 우리가 학문 중심적 교육관을 수용하게 되면, 당연히 교과의 내용은 학문적인 기준에서 볼 때, 가장 최신의 지식, 가장 수준이 높은 지식들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들은 그것이 가져오는 실용적인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 자체의 가치 때문에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최선의 지식은 사람들이 모두 다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수의 능력 있는 학생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이해되기 어렵고 따라서 훈련과 암기를 통하여 머리 속에 담아 두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진리로운 지식이라 하더라도 이해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암기의 대상이 될 때, 우리는 이것을 암기하면서 학문의 내재적 가치를 체험할 수는 없다.
교육 중심적 교육관을 근거로 하여 가르치고 배울 때, 교과의 내용은 그 종류와 수준에 있어서 획일적일 수가 없다.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소질과 적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과 수준이 다르다. 교육은 우리의 이러한 다양한 적성과 수준에 맞는 교과의 내용들을 동원하여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의 교과를 능동적으로 학습하는 가운데 이를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교육의 가치를 체험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교육은, 언뜻 보기에는, 학습자들이 각기 다른 수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학교가 학습자들의 적성을 고려하여 좀 더 다양한 교과를 시간표상에 배정해야 된다는 이유 때문에 현실성이 없거나 대단히 비효율적인 것으로 평가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가 않다. 특정한 활동이 그 자체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과 그 활동이 가져다주는 다른 외재적 가치 때문에 억지로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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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처음에는 후자가 좀 더 빨리 나아갈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전자가 더 높은 수준에 오르게 된다. 후자의 경우 교육은 언제든 중단될 수 있는 불안한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이해를 도모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이나 기능을 창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교육은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활동이며 평생에 걸쳐 지속될 수 있는 것으로서 종국에는 새로운 지식과 기능의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교육중심 교육관에 근거하여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취직이나 출세, 국가 발전, 학문적 가치의 체험 등도 가능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4. 교육의 원리와 반성적 교육철학
우리는 앞에서 교육이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가치 지향적 활동으로서 교육 고유의 내재적 가치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가르치고 배우면서 이러한 교육의 실현을 꿈꿀 수는 없다. 교육의 가치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까다로운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이 원칙은 교육이 원활히 진행되기 위하여 요구되는 교육의 원리에 해당한다. 나는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준수되어야 하는 몇 가지 교육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이와 관련된 철학자들의 사상이나 철학적 지식을 거론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맨 처음 이야기했던 것처럼 반성적 교육철학을 하는 한 가지 시범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러분들은 최소한 내가 여기서 언급하는 철학자들의 사상은 교육 중심적 교육관에 근거한 교육, 내가 보기에는 올바른 의미의 교육을 이해하는 데에 유용한 것임을 기억하고 앞으로 이들 사상가들의 저작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교육의 원리는 논자에 따라 다양한 것들을 거론할 수 있고, 그 논자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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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그것들은 상충될 수도 있다. 여기서 내가 제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아이디어이며, 여러분들의 이해수준을 고려하여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단순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나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반성적인 태도를 지니면서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될 것이다. 한 가지 양해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 교육의 원리는 배움의 원리와 가르침의 원리로 구성되며, 따라서 양자는 별도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를 함께 논의하고자 하며, 이는 제한된 지면에서 양자의 상호작용을 좀 더 분명히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수준을 고려하여 우리가 배울 수 있을 만한 수준의 것, 우리에게 호기심과 도전감을 불러일으키는 적정한 수준의 학습과제를 선정할 수 있어야 한다. 원칙상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아 배울 수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의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것, 지나치게 어려운 것은 우리의 호기심이나 관심을 끌지 못하며, 따라서 배움을 유발하지 못한다. 우리의 경험을 반추해 보더라도 지나치게 어려운 내용은 우리를 소극적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종국에 가서는 우리를 그러한 내용을 배우는 활동으로부터 이탈하게 한다. 이 점을 강조한 대표적인 교육학자가 존 듀이(J. Dewey)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아동의 흥미를 존중해야 된다고 말하며, 이러한 점에서 그의 교육론을 ‘아동중심교육’이라고도 부른다. 아동중심교육이란 흔히 진보주의 교육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양자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각주 4: 이에 관해서는 엄태동의 『로티의 네오 프래그마티즘과 교육(1999)』을 참고하라. 듀이의 교육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그의 주저인 『민주주의와 교육(1916)』을 읽을 필요가 있다.] 듀이가 말하는 흥미란 아동의 수준, 또는 경험에 비추어 알쏭달쏭한 것, 수수께끼가 될 만한 것을 문제로 대면하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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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관심이나 호기심을 말한다. 듀이가 보기에 전통적인 교육은 아동의 수준보다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교과를 가르치려 함으로써 아동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지 못하고, 그 결과 아동을 학습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결국 듀이가 말하는 아동중심 교육, 또는 아동의 흥미를 존중하는 교육이란 아동의 수준과 교과의 수준을 매개하는 중간수준들을 점진적으로 제시하여 아동들이 과제에 대하여 흥미를 지니고 능동적으로 학습하도록 이끄는 교육을 말한다. 이 점에서 듀이가 말하는 진보주의 교육이란 아동의 수준과 교과의 수준 사이에 아동이 흥미를 지니고 학습할 만한 중간수준들을 계열화하여 제시한다는 아이디어이며, 우리말로 ‘징검다리 교육’이라 번역하는 것이 원래의 의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만약 학습자가 능동적인 학습을 하기 위하여 그의 수준에서 도전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학습과제, 또는 학습자의 내부에 흥미와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을 만한 문제를 찾아야 한다고 하면, 그러한 학습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교사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조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교사가 자신의 수준에서 학습자의 수준으로 하강(下降)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친다기보다는 학습자가 모르고 있는 것, 그 가운데서도 학습자가 흥미와 관심을 지니고 배울 수 있을 만한 수준의 것을 가르쳐야 한다. 교사가 그러한 것을 가르치려면, 그는 불가피하게 학습자의 수준으로 하강하여 그의 수준을 진단하고 학습자가 흥미를 지니고 배울 수 있을 만한 학습과제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철학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이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질적으로 상이한 수준에서 세계를 이해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수준들은 구조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으로서 상이한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의사소통하기가 어렵다. 그들은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되는 것들을 각기 올바르고 아름다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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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다고 믿고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것만을 이해할 뿐 그들의 것보다 상위수준의 삶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상위수준에 있는 사람이 하위수준에 있는 사람을 가르치려면, 자신의 수준을 직접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방의 수준으로 하강하여 그 수준에서 도전할 수 있을 만한 것, 일종의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것을 제공함으로써 상대방의 성장을 간접적으로 유도해야 한다(Kierkegaard, 1941, 1962a, 1962b). [각주 5: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교육방법을 흔히 ‘간접전달(indirect communication)’이라 부른다. 간접전달은 내가 여기서 제시하려는 교육의 원리를 상당한 정도로 반영하고 있다. 이 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우리가 공부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저작들이 국내에서 체계적으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지는 않다. 다만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가운데 『철학적 단편』은 국내에 여러 가지 번역서가 나와 있어서 참고하기가 쉬울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간접전달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엄태동의 『교육적 인식론 탐구(1998)』를 참고하라.]
셋째로 그러나 교사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수준이 아니라, 학습자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것을 가르쳐야 한다면, 이 경우 교사는 하나의 곤경에 처하게 된다. 학습자가 흥미를 갖고 배울 수 있을 만한 학습과제들을 찾아 이를 계열화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습자에게 흥미가 있는 것이지 교사에게는 흥밋거리가 될 수 없다.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학습자의 흥밋거리란 수준이 낮고 유치한 것에 불과하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교사는 교과의 모든 내용들을 이미 알고 있는 전문가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가르쳐야 하는 내용이 학습자에게는 흥미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과 흥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각주 6: 초등학생들에게 더하기, 빼기를 가르치면서 교사가 그러한 연산법칙에 인지적인 호기심과 흥미를 갖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가? 도대체 더하기와 빼기가 교사에게 지적인 도전감을 주는 과제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자신이 가르쳐야 하는 내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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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여 별다른 관심과 열정을 보이지 못한 채 학습자들을 가르치면, 그러한 교사의 냉랭함은 학습자들이 그들에 적합한 학습과제에 대하여 갖게 되는 흥미와 관심마저 소멸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 교사의 어려움이 있다. 교사는 비록 자신이 가르쳐야 하는 내용이 자신에게는 어떠한 흥미와 호기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마치 이를 자신에게도 흥미 있는 것인 양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교사가 아동들에게 가감승제를 가르치면서 마치 이를 유치하고 사소한 것인 양 다룬다면 아동들이 어떻게 가감승제에 대하여 흥미를 지속하면서 배울 수 있겠는가? 교사가 자신에게는 이미 유치하고 사소하며 익숙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학습자의 배움을 조력하기 위하여 마치 그것을 대단하고 새로우며 신기한 것인 양 취급하면서 가르쳐야 되는 것을 동양에서는 방편(方便)이라 한다(엄태동, 1998, 1999). 방편은 불교의 용어로서 부처가 중생의 수준에 맞는 것을 찾아 제공하면서 마치 이를 진실된 것인 양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방편은 일종의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는 교사가 방편을 구사해야 되고 이 방편은 거짓말에 해당한다는 말에 흥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교사는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존재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는 거짓말은 ‘교육적 거짓말’이다. 우리가 비난해야 되는 거짓말은 자신이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상대방을 가급적 영원히 속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방편이나 교육적 거짓말은 상대방의 이익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으로서 상대방이 주체적으로 그것이 거짓말이었음을 알아차리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우리가 비난해야 되는 비도덕적인 행위로서의 거짓말과는 구분된다. 아마도 방편의 구사는 교사가 학생들의 수준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 교사 자신과 학생들의 수준이 일치되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 경우에는 교사가 학생들의 배움을 조력하기 위하여 자신에게는 유치한 하위수준을 그럴듯한 것인 양 가르치기보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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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직접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편이 사라지고 수준의 일치가 생겨나는 순간 교사와 학생은 동등한 수준에 있게 되며, 그들 사이에는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이 종결된다고 보아야 한다. 교육의 활동은 조금이라도 수준의 차이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발생하여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교사와 학생들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배울 때, 언어에 대한 지나친 맹신을 버려야 한다. 흔히 우리는 교육활동이 언어를 통하여 특정한 내용을 설명하고, 이를 언어적으로 재생하는 활동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교육활동은 언어적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언어를 통하여 있는 그대로 표상(表象)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언어를 통하여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은 언어를 수용함으로써 전달자가 의도한 내용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앎을 그대로 담을 수가 없다. 폴라니에 따르면, 우리의 앎 가운데는 언어로 드러낼 수 없는 암묵적인 앎(tacit knowing)이 존재하며, 이것이 없이는 언어로 드러낼 수 있는 앎조차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Polanyi, 1958, 1967). 간단한 예를 들면, 우리가 요리책을 보고 책에 적힌 그대로 요리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만든 요리는 요리책을 쓴 사람이 의도한 요리는 되지 못한다. 요리책에는 담을 수 없었던 요리 만드는 일과 관련된 암묵적인 앎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요리 만드는 일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재료를 배합하는 능력, 음식의 색을 보고 가열상태를 파악하는 능력, 음식의 형태를 구미를 돋우도록 만드는 능력 등은 요리 만드는 일과 관련된 중요한 앎이면서도 성격상 언어나 문자로 전달될 수도 없고 습득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언어적인 앎과 함께 암묵적인 앎을 균형 있게 습득하려고 하면 우리는 언어적 실천 이상의 실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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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해야 한다. 폴라니는 도제적(徒弟的)인 실천을 권고하며, 듀이는 ‘행위를 통한 배움’(learning by doing)을 제안한다. [각주 7: 폴라니의 인식론과 그에 근거한 교육론에 대해서는 장상호의 『인격적 지식의 확장(1994)』과 엄태동의 『교육적 인식론 탐구(1998)』을 참고하라.] 이러한 것들은 모두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이 언어적인 실천 이상의 것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려면, 특정한 앎에 도달하는 데에 필요한 실천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문제해결의 활동, 학문적인 탐구의 활동, 과학실험 활동, 음악 및 미술의 실기 활동 등을 경유하지 않고는 제대로 가르치고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가르침과 배움의 초언어적 실천의 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르침과 배움이 초언어적 실천이라고 해서 언어의 사용을 완전히 거부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언어는 단순히 특정한 내용을 설명하고 요약하여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교사가 학생들에게 그들이 특정한 내용을 이해하기 위하여 수행할 필요가 있는 활동들을 처방하는 매체가 된다. 즉, ‘이러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라’, ‘그 문제와 관련하여 이러한 자료들을 읽어보라’, ‘그러한 결론이 타당한지를 검증하는 실험을 설계해 보라’ 등과 같이 학습자의 학습활동을 처방하고 지시하는 언어가 사용된다.
다섯째로 교사가 언어적으로 처방하는 활동들을 수행하면서 학습자가 무엇인가를 배웠다고 하면, 학습자는 배움 이전의 상태와는 질적으로 다른 앎을 습득하게 된다. 배우기 이전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배움 이후에는 그럴듯하고 타당한 이야기로 변모된다. 반면에 배움 이전에는 당연하고 옳은 듯 했던 것이 배움 이후에는 유치하고 그릇된 것으로 바뀌게 된다. 예를 들면 지동설을 배우기 이전에는 천동설이 올바른 것이며 지동설은 황당한 이야기로 비쳐진다. 그러나 우리가 오랜 시간 배움으로써 지동설을 습득하게 되면, 세상의 운행은 지동설에 부합하는 것으로 비쳐지며 그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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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우리가 신봉해 왔던 천동설은 그릇된 것으로 기각되고 만다. 배움은 이처럼 우리의 앎을 구조적으로 일신하는 활동이며, 가르침은 그러한 배움을 조력함으로서 학습자의 인지구조를 질적으로 쇄신시키는 활동인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제대로 가르치고 배웠는지는 별도의 시간을 할애하여 평가, 소위 시험이라는 것을 실시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인지구조가 질적으로 쇄신되는 경험을 통하여, 또는 상대방을 질적으로 전혀 상이한 존재로 변모시키는 활동을 통하여 우리의 가르침과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당사자적(當事者的)으로 알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들의 가르침과 배움이 제대로 수행된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스스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셈이다. 내가 애써 배운 결과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식을 습득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배움 이전의 것보다 개선된 것으로 판단되는가 등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의 배움 활동이 충실히 수행되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설사 시험에서는 좋은 성적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자신의 배움 활동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다면, 사실상 우리에게 성적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최근 강의 평가제가 유행처럼 시행되고 있지만 자신이 잘 가르쳤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는 가르치는 당사자가 가장 잘 알 수 있다. 이를 우리는 가르침과 배움의 주체적 평가의 원리라 할 수 있다. 가르침과 배움의 주체적 평가의 원리는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찾으려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가치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체험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체험하여 그것이 좋은 것임을 확인해야 된다. [각주 8: 사랑이란 대단히 소망스러운 가치이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추구해야지 누구에게 부탁하여 대행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소망하는 사람과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대행하도록 부탁할 정신 나간 사람이 있는가? 모든 가치란 그처럼 주체적이고 당사자적인 추구의 대상이며, 교육의 가치 역시 그러하다.]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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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이 가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가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스스로 직접 체험하고 이에 헌신해야 된다. 자신이 제대로 가르치고 배웠으며, 그 과정에서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체험했어야만, 성적이나 출세나 국가발전 등과 같은 외재적 가치도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대략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거론한 교육의 원리에 근거하여 우리는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이다. 배움의 활동은 학습자가 자신의 수준에 근거하여 자신이 배울 수 있을 만한 수준의 과제, 즉 그의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는 문제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을 전개하는 가운데 자신의 인지구조나 수준을 질적으로 쇄신하는 활동이다. 가르침의 활동은 학습자의 수준으로 하강하여 그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을 만한 문제들을 단계적으로 제시하는 가운데 마치 그 문제가 대단한 것인 양 가장하여 학습자의 흥미를 지속시키고 학습자에게 문제 해결에 필요한 활동들을 지시하고 처방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배움과 가르침이 조화를 이루어 원만히 상호 작용하게 된다면, 학습자는 좀 더 진실 되고 올바른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사고하며 행동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교사는 학습자를 좀 더 개선된 인간 존재로 재창조하는 데에 성공하게 될 것이다.
만약 가르침과 배움이 위에서 거론한 원리들을 충족시키면서 수행된다면, 교사와 학습자는 각기 가르침과 배움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폴라니는 발견의 활동을 통하여 우리가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변모되는 과정에서 누구나 ‘발견의 열정’(heuristic passion)을 체험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그는 자신과 전혀 다른 인식을 지니고 있던 상대방을 가르쳐 자신과 동질적인 존재로 변모시킴으로써 자신의 인식이 더 올바른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설득의 열정’(persuasive passion)을 체험할 수 있다고 본다(Polanyi, 1958, pp. 142-160). 내가 보기에 이러한 열정은 곧 배움과 가르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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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적인 가치체험에 해당한다. 위에서 소개된 것들은 비록 불완전한 교육의 원리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러한 원리를 따르면서 가르치고 배울 경우 우리는 나름대로 발견의 열정과 설득의 열정, 즉 배움의 가치와 가르침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곧 교육의 내재적 가치에 해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목적, 즉 교육의 목적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가운데 학습자는 성정하고 교사는 그러한 성장을 조력함으로써 그들이 수행하는 교육활동에서 비롯되는 고유한 보람, 즉 교육의 가치를 체험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이다. 개인적인 성공이나 국가적인 발전, 학문적인 가치의 체험 등은 어디까지나 이차적인 것이다. 이것이 전도(顚倒)되어서는 안 된다. 반성적 교육철학은 그러한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충족시키려면,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미 있는 시사를 끌어내는 학문이어야 한다. 즉,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충족시킨다는 교육의 목적을 실현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미 있는 답변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보면,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키에르케고르와 듀이, 폴라니 등은 반성적 교육철학을 하고자 할 때, 경청할 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기서 멈추지 말고 여러분 나름대로 교육을 이해하는 데에 유용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인물들을 찾을 필요가 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남의 것을 무반성적으로 수용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주체적으로 모색해야 된다. 여기서 내가 소개한 인물들이나 내가 논의한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여러분이 각자의 관점을 정립하는 데에 도움을 주려는 참고 자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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