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이 주목한 시집|임재정
임재정
1963년 충남 연기 출생.
2009 《진주신문》 가을문예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
『아돌프, 내가 해롭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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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대표시
밤의 아돌프 외 4편
심약한 밤이야
성냥만으로도 찢어지는 새벽, 자신을 의심하며 부러지는 연필심
나를 해하려 골몰하며 손가락을 깎는 기분을
훅-불어 끄면서
창밖으로 쏟아질 생각만 하는
나는 너무 묽은 피, 내외가 불분명한 가장 사사로운 상대
웃기지?
창밖, 제 아랫도리를 빤히 훔쳐보는 가로등
겨드랑이에 코 박고 다리 사이에 취한 개의 미간
우린 왜 일그러진 데를 좀 더 일그러뜨리며 자신을 쓰다듬을까
모두들 쪼그리고 앉아 목을 꺾고
어머, 꽃 좀 봐
사타구니에 얼비치는 자신을 훔쳐보며
민감하고 부끄러운 막대기를 직신거리다가 체온 재고 심박에 끌려다니는 자신을 잔에 따르고
우린 너무 안 맞아서 짝인가 봐
정말이야, 독재자일수록 자기를 갸우뚱해한대
난 경험하지 못한 나로 태어날 권리가 있다고 믿어
이런 몹쓸 경향을 위해 세 알의 사과를 시계 속에 던져놓고
조금 울기로 해
유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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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
빠삐용, 우리말로는 나비랍니다
한 덩이 봄을 움켜쥘 때의 텅 빈 손이나
벗어놓은 옷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몸이 꾸는 꿈을 대리합니다
감쪽같이 무지개가 스패너로 바뀌는 이야기
스패너로는 죌 수 없는 너트로 꽉 찬 무지개 이야기
미안하다는 거짓말을 뭉뚱그리면 국경이 되고
빠삐용이 되고, 우린 나비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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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센트
종일
덤덤한 벽에 얼굴을 달아줍니다
조금씩 일그러진 표정, 떠나간 얼굴들 모두
세 가닥의 전선 두 개의 나사에 묶이죠
면벽은 구도적이에요 무표정하려는 경향입니다
평면의 사원에 플롯을 재구성 합니다 단다와 달다
그리고 달 것이다, 는 시점의 문제
콘센트마다 한 사람이 꽂혀 충전되기를 바라는 것이 종교가 될 수 있을까요
밤새 시효 지난 꿈을 고정하는
두 개 무표정한 나사를 알고 있어요
낯익은 설비공이 변기를 놓고 물소리를 흘려봅니다
버릴 것들이 많은 수도승처럼
모두를 대표해 울어주는 수도꼭지처럼
나는 멀었습니다 면벽 뒤엔 신발을 고쳐 신고
플러그에 딸린 티브이처럼 채널이 많습니다
전체이자 부분, 면벽은
끄고 켤 수 없어야 하며
누구에게서나 벽이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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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의 서사
한강 둔치 너머
하늘엔 타다만 연탄 한 장 떠 있어요
눈도 입도 다 지운 누이는 창백할 뿐, 아무 감흥도 더할 것 뺄 것도 없이
1973년 이후, 강물에 세상 저녁을 불빛과 봉합하며
재봉틀이 돕니다
누이 마름질은 손톱을 박아 잠시 붉고
이슬은 눈가에 고인 뒤 풀잎에 맺혔다 야트막히 별로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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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팬티’
팬티 얘기라고는 말 못해요
볼록하니 무언가를 숨긴 저 안쪽의 일이죠
동네 제일 큰 목청이
건널목을 막고 온몸이 바퀴인 기차와 연애한 얘기로 오해하셨다면
이렇게 말할 게요
N과 S의 무대, 팬티는 간이역도 회의장도 된답니다
문은 지혜로운 곰이었다죠 김은 미역처럼 미끄러웠을까요
다른 배역들도 있어요 큰소리치는 상반신과
갈 곳 많은 하반신이 공을 차거나 삐라를 다툽니다
내외하지만 악다구니 끝엔
대체로 간절한 커튼콜, 서로의 그림자를 부둥키고 어긋난 미래를 손질 하죠
울음은 기적이 되고 획기적인 내일에 닿기를
팬티 속 녹슬어가는 38량의 기차가
넌더리나는 정중동을 견딥니다
치킨게임이냐고요? 팬티는 주방으로 바뀌고
먹고 합시다! 키친은 어떤 음식이든 꺼내 놓을 거에요
아, 편향적이랄까 봐 귀띔 하는데요
우린 기적을
믿어요 미래를 꾸리는 중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