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반지뿐 아니라 일반 반지도 고대 애니미즘(모든 현상·사물에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생각) 신앙에서는 마력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예컨대 신들이나 스카라브, 뱀, 사자, 페니스, 개구리, 오각성형(五角星形) 등의 조각을 새겨 넣은 인장 반지는 바로 그 자체에 신비스러운 힘, 즉 영력이 담겨 있는 것으로 믿었고, 그런 것들로 봉인하면 모든 비밀과 재산이 지켜지는 것으로 여겼다. 특히 부적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습성에 의해 이집트의 불사의 상징으로 태양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마귀를 쫓는 의식이나 장식품에도 사용되는 한편 그리스와 유럽의 풍습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 은반지는 고대로부터 사악한 시선을 피하는 데 효력이 있다든가, 보석이 달린 반지에는 특별한 영력이 깃들어 있다는 구전이 남아있다. 특히 유명한 것은 반지를 돌리면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규게스의 마법의 반지이다. 철학자 플라톤도 언급하고 있는 이 전설은 훗날 문학작품에도 채택된다. 그리하여 반지는 그 모양과 소재 등에 의해 악마라든가 사악한 것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겨져 왔다.
그런데 ‘오를레앙의 소녀’로 유명한 잔 다르크(1412~31년)가 끼고 있던 반지는 재판기록에 의하면 마법의 반지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마녀인지 성녀인지 알 수 없던 잔이 반지를 끼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기적을 바라거나 치료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도 믿지 않았던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당시의 다른 장신구와 마찬가지로 반지도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악령이나 질병에 대한 부적으로서 갖고 다니는 습관이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의 경우 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마녀라는 의심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반지를 둘러싼 민간의 풍습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폴라스에 의하면, 그리스에서는 개구리나 남근 형상을 새긴 반지들을 많이 끼었는데 이런 반지를 끼면 병을 고치는 힘이 생긴다고 믿었다. 이 풍습은 기독교에서도 유입되어 사람들은 예수의 형상, 예수를 나타내는 각종 문자, 천사의 형상 등을 새겨 넣었다. 또 관에 달려있는 쇠장식으로 만든 반지에 예수의 문자를 새겨 넣으면 못된 음모를 물리치는 데에 효과가 있다느니, 죽은사람의 반지나 묘지에서 발견한 반지는 단독(丹毒)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것들은 ‘독을 독으로써 제어한다’는 생각에서 생겨난 발상인 것 같다.
또 반지의 영력은 간질, 어린애의 경풍, 치통, 다래끼, 궤양에도 효능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간질에 효능이 있다는 반지에 관한 15세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주 예수님의 수난과 그 보혈에 의한 가호가 있기를 기도드리면서 32페니히가 모일 때까지 도움을 받아’ 그것으로 반지를 만들도록 한다. 그리고 그 반지를 늘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일에 다섯 번 아베 마리아를 외면 효능이 있다.”
다음으로 반지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서 대대로 가족에게 계승되는 관습이 존속하고 있는 지방이 있다. 예컨대 티롤 지방의 관습(행복의 반지)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반지는 어린애가 태어나면 요람 속에 넣어졌다가 세례, 약혼, 생일 때 끼게 된다. 이때 반지가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데 대한 유래와 조상을 기리는 추억담들이 오가는 등 반지는 가보로서 귀중히 보존되어 왔다. 반지는 끝없이 이어지는 가계(家系)를 나타내는 심벌이며, 가족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으로 믿는다. 전통을 중시하는 유럽에서는 반지뿐 아니라 집과 가구, 기념품 등을 소중하게 보존하는 습관이 현재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며, 잠시 쓰고 버리는 데 익숙한 일부 동양인들과는 큰 대조를 보인다.
반지는 전쟁터에서도 부적으로 귀히 여겨졌다. 특히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면서 가족들이 선물한 반지가 부적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를 들면 로마군 백인대(白人隊 : 군대 편성의 단위)의 것으로 보이는 반지가 로마 근교에서 출토되는데, 그런 반지 중에는 남자의 손가락에는 도저히 낄 수 없을 만큼 작은 반지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그런 작은 반지들은 출정한 병사에게 연인이나 아내가 준 반지이며, 병사들이 그것을 몸에서 떼지 않고 소중히 지니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 이와는 반대되는 케이스이지만 중세에도 십자군 기사가 연인에게 반지를 건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헝가리의 성(聖) 엘리자베드(1207~31년)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내가 죽으면 두동강이 날 것”이라는 반지를 남편 루드비히 4세(1200~27년)로부터 선물받았다고 한다. 14세기경부터 싸움터로 가는 병사들에게 ‘묵주의 기도’라는 로사리오가 달린 묵주 반지가 널리 퍼졌다. 또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이름을 쓴 철판을 반지 속에 끼워 넣어 그것을 전투 전에 이마에 누르면 승리함은 물론 부상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또 젊은이가 어머니의 약혼반지를 끼고 있으면 병역을 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일반 민중이 병역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병역을 피하기 위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반지에 의탁했던 것이다.
반지의 풍습은 농민들의 소박한 일상생활에도 파고 들었다. 바이에른(서독 남부의 주)이나 에스토니아(소련 공화국의 하나)에서는 씨를 뿌리는 사람은 신발 속에 금이나 은반지를 넣어 두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마녀나 요괴들이 밭을 망치지 못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또 아마(亞麻 : 삼의 한 가지)를 희게 하려면 은반지를 낀 손으로 작업해야 된다든가, 농가에서 고용살이하고 있는 처녀가 가축 사료를 만질 때 오른손 집게손가락에 납으로 만든 반지를 끼고 있으면 사료가 풍부해진다든가, 또 그녀가 농가를 떠나게 되었을 때 혹시라도 가축이 그녀가 떠난다고 슬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가축을 기르던 울 안에 반지를 묻어 두고 가야 된다는, 미소짓게 하는 이야기도 있다. 또 우유를 짤 때 결혼반지를 빼고 첫 번째 젖을 짜면 착유량(窄油量)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상과 같은 반지의 풍습은 어떻게 보면 근거 없는 미신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는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던 민중의 간절한 소원이 반지에 담겨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지의 마력은 다음에 설명하는 기독교나 문학에도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 특히 13세기에서 18세기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는 부적의 구실을 하는 반지가 전성기를 맞는다. 그 중에서도 부적은 그 시대의 속신(俗信 : 민간에 행해지는 미신적 신앙), 연금술, 점성술, 민간 의료, 신비주의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지가 부적으로 힘을 발휘하던 역할은 그 후 점차 희미해져가는 한편, 최근 들어 반지가 패션적인 기능을 더해 가고 있음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반지를 둘러싼 전설은 주로 결혼반지와 관련된 것이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장식품으로서의 반지가 선호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반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밖의 액세서리에서도 액세서리가 부적의 역할을 한다는 인식은 희박해지고 있다.
발췌 : 반지의 문화사
* 참고 사진은 문맥상 지장이 없는 한에서 생략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