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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세이(Cathay)는 중세 시기 서유럽에서 중국을 부르는 이름 중 하나로, 거란어 발음인 "키타이(Kitai)"에서 유래했으며 따라서 키타이라는 말의 유래는 거란(Khitan-키탄)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명칭은 이란식 이름으로 분석되는데 이는 거란의 위치가 이란과 교류가 가능했던 지역에 위치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거란(Kitai- 契丹) 또는 키탄(Khitan)은 4세기 중엽부터 남만주와 내몽골의 시라무렌강(潢水)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동호(東胡) 민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사라진 민족이며, 현재 중국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되는데, 이 다우르족의 이야기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연대기에 매우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74-412)은 거란족 대부분을 복속시켰으며 그로부터 거란족은 오랜 세월 고구려에 동화되었고 이후 거란은 돌궐과 위구르 등지로도 퍼져나가게 되었다.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872-926)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요(遼,916-1125)나라를 세우고 송(宋,960-1279)나라와 대립하였으며,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고려의 거센 항전에 요나라는 패퇴했다. 이후 여진족이 세운 금(金,1115-1234)나라에게 멸망당했고 12세기 이후에는 몽골족과 위구르족에 편입되면서 그 거란이라는 역사의 이정표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거란인이 세운 요(遼)나라는 1125년 여진족의 금(金)나라에 쫓겨나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를 서요(西遼,1124-1218)시대라 하며 이를 카라 키탄 칸국(Kara Khitan Khanate) 또는 카라 키타이(Kara Khitai)라고 부른다.
이로인해 중동 및 유럽인들에게 캐세이라는 말은 중앙아시아에서 북중국에 이르는 지역을 일컬었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1294), 오도릭의 동유기(東遊記,1330)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북중국이란 바로 현 알타이산의 좌우측 즉 카자흐스탄의 북쪽,우랄산의 동쪽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우리는 거란의 역사적 강역을 정확히 추적해 낼 수가 있다.
근세까지만 해도 서양인들은 육상(陸上)으로 가는 ‘캐세이’와 해로(海路)를 통해 가는 ‘지나’를 서로 구분되는 별개의 문화권으로 생각했고, 동아시아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양자를 동일한 중국으로 여기게 되면서 이후 ‘캐세이’는 중국을 문어(文語)적으로 일컫는 표현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통설이다. 하지만 우리는 케세이 즉 거란의 강역을 되짚어보면서 서양인들이 최초 생각했던 케세이와 지나는 완전 다른 별개의 문화권이었다는 기록이 정확한 판단이며 이후 캐세이를 현 중국의 문어적 표현으로 본 것은 후세 만들어진 강제된 이주역사로 인한 오류임을 알아낼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논점으로 유럽과 아랍 여행자들이 몽골제국을 여행한 기록에서 몽골의 지배강역을 캐세이(Cathay)로 묘사하고 있는데, Giovanni da Pian del Carpine(1180–1252)는 <Kitaia>로, William of Rubruck(1220–1293)은 <Cataya 또는 Cathaia>로 표현하고 있으며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의 몽골 여행기에는 "캐세이로 가는 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헨리 율(Henry Yule, 1820-1889 영국)의 <중국으로 가는 길>1866 이라는 책의 원제(原題)는 Cathay and the Way Thither: Being a Collection of Medieval Notices of China(1866) 로 바로 캐세이 즉 알타이산 좌측과 북쪽에 존재헀던 북중국을 그려내고 있다.
라시드 알 딘 하마다니(Rashid-al-Din Hamadani) , 이븐 바투타(ibn Battuta ),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모두 중국 북부를 캐세이(Cathay)라고 불렀고, 송(宋)나라가 통치한 중국 남부지역은 Mangi, Manzi, Chin 또는 Sin 이라고 불렀는데 이 Manzi (蠻子) 또는 Mangi 라는 단어는 중국어로 <남쪽의 야만인>을 의미하는 경멸적인 용어였으며 서양의 중세 지도에서 사용되는 남중국의 이름은 만기(Mangi)로 이 용어는 16세기 지도에서 여전히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 위에 열거한 이들이 방문했던 중국은 바로 캐세이로 조선사오천년의 백두산(白頭山)인 현 알타이산의 좌측 압록강(鴨綠江-현 이리티시강)에 위치했던 원(元)나라의 대도(大都) 칸발리크(汗八里, Khanbaliq, 위대한 칸의 거주지)였던 것이다. (징기스칸, 원의 대도 칸발리크는 어디인가?/ 2019.03.16. 글 참고)
2.
고려 초기, 현 카자흐스탄 북부이면서 알타이산의 좌측 초원지대를 기반으로 흥기한 거란(契丹)은 세 번에 걸쳐 고려(高麗)를 침공한다. 역사통설은 대륙전체를 지배할 야욕을 갖고 있는 거란이 후일 고려가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공격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통설에 동의한다면 역사적 안목(眼目)이 매우 저열(低劣)하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거란(契丹)의 1차 침입은 성종(成宗,961-997) 때인 993년 10월에 이루어졌는데 이때 서희(徐熙,942-998)는 거란 장수 소손녕(蕭遜寧, ?-996)과의 협상에서 고려가 고구려의 뒤를 이어 세워진 나라임을 밝히는 외교 담판(993)으로 강동(江東)6주를 얻었고 거란은 순순히 물러났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으며 그 이유로 고려왕의 입조(入朝)와 거란 연호의 사용조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고려(高麗)의 강역이 대륙 장강(長江)을 남북으로 아우르는 땅과 황하(黃河)이북의 땅까지 보유한 거대한 제국이었음을 안다면, 거란이 물러간 이유라는 것들이 후세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의해 날조된 말들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분석해 낼 수 있다.
당시 서희(徐熙)가 담판으로 얻어냈다고 하는 강동6주(흥화진·용주·통주·철주·귀주·곽주)의 위치는 현 대륙 신강(新彊))자치구 북쪽 알타이산의 아래쪽 동에서 서쪽으로 흘러 의주(義州-현 부얼진,布爾津)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청천강(淸川江)줄기를 따라 형성되었던 강역을 말하며, 이 땅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조선민족의 시원강역터전으로, 동호(東湖)로 알려진 조선민족의 분파(分派)에서 갈려나간 거란(契丹)은 고구려의 후예 고려(高麗)를 인정하고 그들 자신 또한 고구려에서 분파된 세력이었기에 고구려의 강역이었던 강동6주를 순순히 내주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후 거란은 다시 4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려에 대한 2차 침입(1010)을 감행하는데 이때 거란왕 성종은 직접 군사를 이끌었고, 현 의주(義州)인 흥화진(興化鎭,995년 축조)을 수비하던 양규(楊規, ?~1011)장군에 막혀 길을 우회하여, 후금(後金)군이 조선을 공격하던 방식과 같은 전격전(電擊戰)을 구사해 고려의 개경(開京)이었던 현 대륙 서안(西安)을 공격했고, 이에 당시 임금 현종(顯宗, 991~1031)은 전라도 나주(羅州)가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역사기록은 고려왕이 거란에 신하의 예을 올리겠다는 약속을 함에 따라 거란이 순순히 물러갔고 고려왕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또한 우스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즉 후손에 극심한 모멸감과 자괴감을 남기기 위한 교열된 기록들임을 정확히 간파해 내야겠다
거란의 3차침입은 1018년의 일로 소배압(蕭排押)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 침공 이유는 고려왕이 거란에 신하의 예로 조공(朝貢)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역사통설은 기록하고 있다.
당시 고려는 강감찬(姜邯贊, 948~1031)으로 방어케 하고, 슬기로운 강감찬 장군은 흥화진 상류에 강물을 쇠가죽으로 막은 후 거란군을 유인해 강을 건널 때 쇠가죽 둑을 터서 거란군을 수장(水葬)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살아남은 거란군이 개경(開京)근처 까지 이동해 전투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록을 보면 거란의 장수 소배압은 아주 멍청하거나 무식한 장수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세계 전사(戰史)에 전쟁초반 주력군을 상실하고 전쟁을 계속한 역사는 전무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사(高麗史)를 심각하게 왜곡하면서 거대한 대륙고려의 역사를 왜소한 반도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웃지못할 억지 전쟁사(戰爭史)의 오류정도로 보아야 할 사항으로 보여진다.
3차 침입의 대미를 장식한 귀주대첩(龜州大捷.1019) 역시 알타이산 아래 현 신강지구 북부에서 일어난 일이며, 바로 이 귀주가 구성(龜城)으로 김소월(1902-1934)이 태어난 고향이 되겠다.
김소월의 시 삭주구성(朔州龜城)-1923년발표-은 소월이 대륙 한양에 유학할 당시 만들어진 시로 시에 나오는 6천리길은 3,000km로 대륙한양에서 알타이산 아래 구성(龜城)까지의 거리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3.
위에서 고려(高麗)에 대한 거란(契丹)의 침입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이 전쟁과 관련하여 대한민국의 강단사학에서 분석하는 역사통설은 그 전쟁의 강역과 관련하여 현 몽고지역을 중심으로 흥기한 거란이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 반도의 작은 나라 고려(高麗)를 세 번에 걸쳐 공격해 실패했다는 내용일 뿐, 전쟁의 목적인 경제(經濟)와 재화(財貨)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없다. 즉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실익없는 단순한 헤게모니 싸움으로 폄하되어 기술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전쟁의 강역이 풍부한 물산이 생산되고 천혜의 보물과 같은 남만주(南滿洲) 즉 현 천산(天山)이북 신강(新彊)북부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전투로 바뀔 때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최근의 중앙아시아 연구서들은 북방 초원로의 존재를 매우 중요히 다루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연대기들은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른바 북중국의 강역과 제민족들의 이합집산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타이산(백두산,장백산)이북의 수천리 강변(江邊)에서는 담비 모피와 천연민물진주가 엄청나게 생산되었고 이는 중앙아시아의 북쪽 초원로와 남쪽 실크로드를 통해 중동과 유럽에 교역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재의 카자흐스탄 북쪽이면서 우랄산의 동쪽 그리고 알타이산 좌측의 거대한 초원지대가 북방 유목민족의 생거터전이며, 이곳에서 거란(契丹)과 몽고(蒙古)가 흥기했고, 이들은 풍부한 산림에서 생산되는 모피와 진주 교역 그리고 우수한 말(馬)을 통해 부(富)를 쌓고 서유럽 정벌의 자금을 마련했던 것이다. 하지만 발해(渤海)가 거란에 의해 무너지고 고려(高麗)가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며 세력을 키워가고 북방 초원로를 통한 막대한 부의 창출을 추진함에 따라 거란은 미리 그 예단(豫斷)을 꺽고자 고려를 공격하게 되었음을 얼마든지 유추해 낼 수 있다.
이러한 엄청난 기록을 반도로 축소해 변조하고자 하니, 엉뚱하고도 수준낮은 전사(戰史)로 엮어 버리게 되었고, 이제 우리는 그 역사의 강역을 복원해 냄으로써 참과 거짓의 역사를 올바로 파악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북방 초원지역은 남만주의 관개수(灌漑水)로 생산해 내는 과일등 풍부한 식료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또한 알타이산 북부에서 생산되는 모피와 민물진주의 안정적 교역을 위해 북방초원로와 남쪽 비단길의 헤게모니가 인정되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이 있는 지역이었으며, 이에 대한 경쟁자는 거란(契丹)에게 있어 대륙고려가 유일한 존재였다.
곤륜산(崑崙山)의 우측 광대한 터전에 존재한 제국 고려(高麗)는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Al Gore, Albert Arnold Gore Jr, 1948-현재)가 2005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서울 디지털 포럼에서 증언했듯이, 서양의 신부(神父)들이 끊임없이 들어와 교류하고 인류최고의 발명품인 금속인쇄술(金屬印刷術)을 독일의 구텐베르크에 전수해 준 대륙의 엄청난 제국(帝國)이었다.
이러한 강역의 모습과 천연자원 및 생산물산의 상황등을 놓고 분석해 보면 거란과 고려의 전쟁은 역사적인 남만주(南滿洲)인 현 신강(新彊)자치구 천산(天山)이북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일차목적과 북방초원로와 남쪽비단길의 교역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두 강대국의 경쟁으로 분석해 내야 그 역사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4.
아래 지도는 1610년 혼디우스(Jodocus Hondius, 1563-1612)라는 네덜란드의 지도제작자가 제작한 것으로 역사적인 거란(契丹)의 강역위치를 알려주고 있으며 또한 원(元)의 대도(大都) 칸발리크의 위치 또한 알려주고 있다. 바로 조선의 압록강(鴨綠江)인 오비강가에 칸발리크가 위치해 있고 동시에 거란을 의미하는 키타이가 표시되어 있다. 그 아래쪽 현 중앙아시아 타쉬겐트 위쪽으로 서요(西遼) 즉 Kara Kithay가 위치하고 있다.
현 역사통설의 거란이 현 몽고강역에 위치했다는 내용은 1926년 거대한 대륙의 조선이 반도로 옮겨진 후 일제와 중국공산당 사이에 만들어진 교열된 가짜 역사의 모습들이다. 역사의 진실을 정확히 알아야 겠다.
2024.03.26.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정혜님 항상 건강하세요
귀한 연구자료 감사합니다.
응원 감사드립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거란이 고작 한반도를 집어삼키려고 80만명을 끌고 왔다가 다시 돌아갔다는 얘기는 최소한의 상식만으로도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SF소설만도 못한 쓰레기교과서에서 벗어나서 하루빨리 정신차리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리마인드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상식만 가져도 충분히 잘못된 점을 의심할수 있는데 우리 역사는 그런 비판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항상 의심하고 반론하는 의식을 가지고 과거사를 재조명하면서 하나씩 얽힌 역사의 실타래를 풀어나가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거란족도 몽골족의 한 갈래가 아닌가요?
순서가 잘못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