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한 자원봉사
신 동 선
십여 전쯤 9월 무렵인 것 같다.
막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 아파트 1층의 게시판에서 주민들에게 봉사하려는 의지가 강한 통장을 선발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마음은 있어도 세 아이를 양육하는 주부로 살아오는 동안 어디에 소속되어 봉사를 해 본 경험이 없었기에 조금 망설여졌지만, 부녀회장이 추천하여 용기를 내었다. 끙끙거리며 간신히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적어서 동사무소에 접수했다.
며칠 뒤에 면접을 보았는데 무슨 질문이었는지, 대답은 어떻게 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흐릿하지만 ‘행정 현장의 모세혈관이 되어서 주민들에게 봉사하는 마음 자세’를 강조하셨던 동장님의 말씀은 또렷이 남아있다.
그렇게 통장이 된 후에 지역 복지관에서 도시락 배달을 시작으로 팀을 이루어서 반찬을 직접 만들어 독거 어르신들께 전달하고, 마을 가꾸기와 학생 상담 봉사 등 봉사 분야가 다양해져 갔다. 그만큼 보람도 커지고 봉사를 통해서 내면이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봉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이들도 봉사한 후로 엄마의 표정이 밝아지고 활기찬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한다. 학교에서 가족 소개 시간에 엄마는 봉사를 많이 하는 착하고 좋은 엄마라고 발표를 했단다.
그렇게 봉사를 계속해오던 몇 년 전, 잦은 가을 태풍으로 동해안 어느 지역이 특히 많은 침수 피해가 발생하였다는 뉴스가 연일 방송되고 있었다. 산사태가 나고, 주택과 농경지가 침수된 곳도 많아서 피해가 갈수록 늘어간다고 했다. TV를 통해서 쓰러진 벼를 묶어서 세우거나, 과수원에서 떨어진 과일을 정리하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봉사하러 가서 도움의 손길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러나 혼자서는 갈 수도 없고, 어찌해 볼 수도 없는 현실이라 안타까움만 커지던 차에 지역의 자원봉사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ㅇㅇ시 봉사단의 이름으로 ‘수해 복구 지원’ 봉사를 진행하려고 하는데, 8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는 상황이라 참여 인원이 부족하다고 했다. 곧장 참여하겠다고 대답하고 나서 튼실한 체격의 아들을 추천했더니 밝은 목소리로 함께 봉사하러 가면 고맙겠다고 했다.
엄마와는 무료급식소에서 서너 번 봉사를 해 본 것이 고작이라 긴 시간 야외에서 힘쓰는 봉사에 은근히 걱정하던 아들이 버스로 이동하는 중에 보게 된 차창 밖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무너진 비닐하우스와 흙을 덮어쓴 채 논바닥에 누워있는 벼, 끊어진 다리, 하천의 나무에 걸려 흉하게 쌓여있는 쓰레기들은 TV로 보던 모습보다 더 심각했다.
어느덧 버스가 멈추고 산 밑의 작은 마을 두 곳을 봉사할 장소로 지정받았다. 할머니 혼자 계시던 집이 산사태로 담장이 쓰러졌고, 창고와 마당까지 흙이 밀려와 쌓여있었다. 장화와 목장갑을 배분받고, 아들은 삽을 들었다. 남자 봉사자들은 자루에 흙을 퍼 담고 밖에서는 긴 줄을 지어 바깥으로 전달하며 한쪽으로 옮겼다. 창고 속에 쌓여있던 낡은 물건들까지 모두 꺼내고 주변까지 물청소를 마쳤더니 주인 할머니께서 고맙다며 울먹이셨다. ‘산사태로 놀란 마음을 먼 곳에서 모르는 이들이 와서 복구를 도와주는 일은 평생 처음 겪는 일’이라며 눈물지으신다. 마을 이장님도 냉커피를 큰 통으로 타 와서는 ‘망연자실하던 어르신의 한숨이 이젠 멈추겠다.’라며 연신 감사하다, 정말 고맙다고 했다.
옆 동네로 이동해서는 과수원의 무너진 곳을 다시 쌓아 올리는 작업과 하수도를 막은 흙을 퍼내어 뚫었고, 쓰러진 담벼락을 정리했다. 어느덧 마무리되고 면사무소에서 나온 공무원이 봉사자 모두 열심히 땀 흘려 일한 덕분에 계획했던 것보다 더 넓게 많이 복구되었다고 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함께 갔던 봉사자들이 한 마디씩 덕담해준다. ‘젊은 청년이 있어서 일이 수월했네.’, ‘꾸준하게 참 잘하더라.’라며 아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주었다. 아이는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에 했다.
어떤 이는 ‘장화를 신은 채로 마당에서 도시락을 먹으니 힘들어서 밥이 까슬하고 입맛이 없었다.’라고 하는데 아들과 나는 마주 보며 갸우뚱거렸다. ‘우리는 꿀맛이었는데……’ 미소를 지으며 잠을 청했다.
곧이어 모두 스르르 잠에 취하여 아침에 모였던 장소에 버스가 도착해서야 일어났다. 힘은 들었지만, 아들과 함께해서 보람은 두 배인 봉사였다. 나 혼자만이 봉사를 통한 감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들도 살아가면서 오늘의 경험이 더 많은 나눔과 봉사를 할 수 있는 추억이 되기를 바랐다. “오늘 어땠니?”라며 물어보았더니, 그저 “괜찮았어요.”라고 짧게 말하는 녀석! “그래, 나쁘지 않았으니 다행이네!”
아들의 팔짱을 끼고 가벼운 걸음으로 주차해 둔 자동차로 가면서 하늘을 보았다. 노을 물든 오렌지빛 하늘이 어깨를 토닥이며 포근하게 감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