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한 1909년과 순국한 1910년은 한국의 운명(명운)과 관련되는 일(사건)이 잇따랐다. 1909년 1월 15일 나철(羅喆, 1863~1916)이 조국의 비참한 운명을 내다보고 새로운 출발을 예견이나 하는 듯이 단군을 신앙하는 대종교를 창건했다. 나철은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을사오적 처단에 나서고, 나라가 더욱 어려워지자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정신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종교가 필요하다고 믿고, 서일, 신규식 등과 함께 대종교를 창건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단체가 되었다.
2월 23일 조선통감부는 이른바 출판법을 공포하여 출판물의 사전검열과 배일 출판물을 압수하고, 7월 6일에는 일본 각의에서 '조선합병 실행에 관한 건'을 의결하여 본격적인 병탄에 나섰다. 일제는 물론 한국의 일부 학자 중에도 안중근의 이토 처단으로 일제의 한국병탄이 이루어지게 되는 빌미를 주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일제는 이미 비밀 각의에서 7월 6일 조선병탄을 결정했었다. 7월 12일 통감부는 기유각서를 통해 조선의 사법과 감옥 사무를 장악했다. 그리고 9월초부터 10월까지 두 달 동안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란 이름의 의병학살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의병과 일반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해 9월 4일에는 청국과 안봉선 철도 부설권과 교환 조건으로 하는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한국 고대국가의 발상지이고 전통적으로 한국 영토인 간도지역을 청국에 불법적으로 넘겨주었다. 이런 시점에 안중근 의거가 일어나 동양 천지에 큰 충격을 일으켰다. 일제는 이해 11월 1일 창경궁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만들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꿨다. 남의 나라 황궁을 동물원, 식물원으로 만든 사례는 일찍이 유례가 없는 만행이었다. 한국인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적인 행위였다.
11월 26일 한성부민회에서 성대한 이토 추도회가 열리고, 12월 4일 일진회 무리들이 합방 요구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매국노들의 망동이 서울 장안을 누비고 다녔다. 12월 22일 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했으나 상처만 입히고 죽이지는 못했다. 1910년 1월 29일 평안도 순천에서 민중 3천여 명이 경찰서, 군청, 일본인 점포를 습격하는 대대적인 항쟁이 일어났다.
1910년 3월, 2천만 조선인과 3천리 강토와 4천년 역사가 일제의 폭압에 무너져가고 있었다. 대장부 안중근이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 이토를 처단했으나 무너져가는 나라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동안 조선이란 나라는 너무 낡고 썩고 백성들은 나약해져 있었다.
일제의 지침에 따라 재판장 마나베가 "피고가 이토 공을 살해한 행위는 그 결의가 개인적인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치밀한 계획 끝에 감행한 것이므로 살인죄에 대한 극형을 과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믿고, 피고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라는 선고, 그리고 항소 포기에 따라 사형집행일이 3월 26일로 결정되었다.
3월 25일 지바가 "내일 오전 중에 형 집행이 있을 것 같다"고 귀띔 해 주었다. 안중근은 25일에 형을 집행해 줄 것을 감옥 당국에 요청하였다. 천주교 신도로서 예수님의 수난일에 형을 받고 주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잡힌 날이 3월 26일이었다. 26일은 달(月)은 달라도 이토가 죽은 날이었다. 일제는 굳이 이날을 택해 안중근의 처형의 날로 삼았다. 이토를 죽인 보복의 심리에서였다.
집행 전야인 3월 25일에 그동안 미루어졌던 두 동생을 만났다. 입회한 미조부치가 "오늘은 최후가 될 터이니 서로 손을 잡아도 좋다."고 생색의 말을 했다. 3형제는 그동안 철창 너머로 얼굴만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마주 잡고자 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침착하고 경건한 자세로 먼저 무릎을 꿇었다.
"천주여, 들어주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몸을 돕는 분이신 주여, 이 우리의 슬픈 울음을 춤으로 바꾸소서. 내 천주여, 영원히 당신을 찬미하오리다. 아멘."(주석 9)
기도를 마친 안중근은 두 동생과 손을 마주잡았다. 혈육의 뜨거운 정이 전류처럼 삼형제에게 동시에 흘렀다. 안중근은 전날부터 쓴 6통의 편지를 동생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아내 김아려가 긴 밤들을 지새우며 지은 조선의 한복 바지, 저고리를 전달받았다. 안중근의 이 수의는 어머니가 지었다는 설도 있다. 누가 지었으면 어떠랴.
이날 안중근이 동생들을 통해 전달한 편지는 어머니에게 쓴 <모주전상서(母主前上書)>, 두 동생에게 주는 <정근.공근에 여하는 서 형서(定根 ․ 恭根에 與하는 書 兄書)>, 사촌동생 명근에게 주는 <(明根 賢弟에게 奇 하는 書)>, 뭬텔주교에게 <민주교전상서 죄인 안다묵 배 (閔主敎前 上書 罪人 安多黙 拜)>, 홍신부께 주는 <홍신부전상서 죄인 안다묵>, 숙부께 <첨위숙부전에 답하는 서질 다묵 배(僉位 叔父前 書侄 多黙 拜)> 등 유서나 다름없는 편지를 보내 이승과 하직하고, 자신의 뜻을 남겼다.(표기의 일자는 음력이다)
'유서'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또 전날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남긴 '동포에게 고함'도 함께 싣는다.
정근․공근에게 보내는 글
형이 씀
동봉하는 편지 여섯 통은 각기 보낼 곳에 전하여라.
훗날 영원한 복지에서 다시 기쁘게 만나기를 기대하며
이제 마지막 말을 남길 뿐이다.
/
어머님 전 상서
아들 도마 올림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
저녁 문안 인사 못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
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
니 마음을 평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기를 희망하오며, 후
일에도 잊지 마옵시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 주십시오.
이상이 대요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
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
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장부 안도마 드림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
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
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 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
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
께 바치어 후세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많고 많은 말은 후일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
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경술 2월 14일 /
홍 신부 전 상서
죄인 안도마 올림
예수를 찬미하옵니다.
자애로우신 신부님이시여. 저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주시고 또 최후의 그러한 장소에 수많은 노고를 불구하
고 특히 와 주시어 친히 모든 성사를 베풀어 주신 그
은혜야말로 어찌 다 사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다시 바라옵건대 죄인을 잊지 마시고 주님 앞에
기도를 바쳐 주시옵고, 또 죄인이 욕되게 하는 여러 신
부님과 여러 교우들에게 문안드려 주시어 모쪼록 우리
가 속히 천당 영복의 땅에서 흔연히 만날 기회를 기다
린다는 뜻을 전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교께도 상서하였사오니 그리 아시기를 바랍
니다.
끝으로 자애로우신 신부님이 저를 잊지 마시기를 바
라오며, 저 또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 /
명근 아우에게 보내는 글
도마 보냄
예수를 찬미한다.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떠나니 꿈속의 꿈이라 할까.
다시 깊은 꿈속의 날을 끝내고 영원히 복된 땅에서
기쁘게 만나고, 더불어 영원히 태평한 안락을 받을 것
을 바랄 뿐이다. /
민주교 전 상서
죄인 안도마 올림
예수를 찬미합니다.
인자하신 주교께옵서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죄인의 일에 관해서는
주교께 허다한 배려를 번거롭게 하여 황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를 입고 고백, 영성체의 비적 등
모든 성사를 받은 결과 심신이 모두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성모의 홍은, 주교의 은혜는 감사할 말씀이 없아오며,
감히 다시 바라옵건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주님 앞
에 기도를 바쳐 속히 승천의 은혜를 얻게 하시옵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동시에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께옵서는 다같이 일체가
되어 천주교를 위해 진력하시어 그 덕화가 날로 융성하
여 머지 않아 우리 한국의 허다한 외국인과 기독교인들
이 일제히 천주교로 귀의하여 우리 주 예수의 자애로우
신 아들이 되게 할 것을 믿고 또 축원할 따름입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 /
작은 아버님 전에 답하는 글
조카 도마 올림
아멘!
보내주신 글을 받아보고 기쁘기 끝이 없었습니다. 불
초 조카의 신상에 대해서는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세상에서 화와 복을 불문하고 무슨
일이나 모두 주님의 뜻이오라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바이므로 다만 성모의 바다와 같은 은혜만
을 믿고 또 축원하면서 기도할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번 은혜로 모든 성사를 받을 수
있었음은 구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께서 저를 버리지 않
으시고 그 분의 품 속으로 구해 올려주셨음이라고 믿으
며 자연 심신의 평안을 느꼈습니다.
숙부님을 비롯하여 일가 친척께서는 어느 분이시고
마음 쓰지 마시고 성모의 은혜에 대해 저를 대신하여
사례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바라옵건대 가내가
서로 일생을 화목하게 평안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큰아버지께옵서는 아직 입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듣
고 참으로 유감된 마음을 견디기 어려운 바, 그러한 마
음씨로는 성모의 가르침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신 것일
까요. 마음과 몸을 다하여 속히 귀화하시기를 권유하여
마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을 떠남에 있어 일
생의 권고임을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교우에게는 일일이 서신을 내지 못하오니 그 분
들에게 다음의 취지로 문안을 전해 주시기 바라는 바,
반드시 여러 교우가 다 신앙하고 열심히 전에 종사하
시어 우리나라를 천주교의 나라가 되도록 권면 진력하
시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머지 않아 우리들의 고향인
영복의 천당, 우리 주 예수의 앞에서 기쁘게 만날 것을
바라오니 여러 교우께서도 저를 대신하여 주께 감사 기
도하시기를 천만번 엎드려 바라마지 않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이만 마치옵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 오후 4시 30분 /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
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
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
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은 면회 온 안병찬 변호사를 통하여 동포에세 전한 것이다.) /
주석
9 - 박노연, <안중근과 평화>, 301쪽, 을지출판공사, 2000.
엮인글 주소 ::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qorforxm/185445
요즘 김구선생님의 백범일지를 읽고 있습니다. 뉴라이트에서 김구, 안중근은 테러범이다. 라고 말한것에 자극받아서 읽어보마 했는데 이제 어느덧 하권을 끝내가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이렇게 가슴넘치는 열정으로 나라를 사랑해 자기일생을 바친사람이 있는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백범일지에서 간간히 보는 안명근, 안중근 그리고 김구선생을 많이 도와주었던 안진사(안중근 아버지) 이야기를 접하면서 언젠가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글도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좋은글을 발견하게 되었네요.
천주교신자입니다.오늘 비로소 안중근의사가 천주교신자인지 알게되었어요.유서에 구구절절이 담긴신앙고백에 숙연해집니다. 목숨과함께 주님께 봉헌한 그분의 고결한 신앙심에 다시 고개 숙입니다.
이렇게 감격적인글 너무 감사히 읽고 갑니다.
안의사님의 나라사랑 우리 후손들 머리숙여 감사하며
닮아가는 저희가 되어야 하지않을까 깊이깊이 반성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