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중앙동, 구멍 뚫린 옛 도심 중앙동 사람들이 말하는 중앙동
|
 |
|
중앙동 전경. 사진/육성준 기자 | 중앙동(中央洞) 사람들은 한 때 ‘중앙’에 살았지만, 지금은 ‘변방’에 살고 있다. 구도심의 전시장 같은 곳, 중앙동은 한 때 모든 것을 소유한 동네였다. 20년대 청주역이 있었고, 60년대만 해도 중앙동 주 간선도로에 시내버스가 거리를 가로질렀다.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증권시장의 열풍과 함께 객장으로 몰려온 사람들로 붐볐고, 금융기관들이 즐비했다. 이들은 위한 음식점 거리와 상점가가 형성됐다. 이즈음 중앙시장엔 청주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섰다. 중앙동의 번영의 역사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97년 IMF가 터졌다. 외곽엔 아파트가 솟아올랐다. 빠른 속도로 모든 게 옮겨가고 있었다. 그렇게 중앙동 대탈출기가 시작됐다. 대거 밀집했던 금융기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한 때 회식장소 1순위였던 유토피아 나이트는 가경동에 대형나이트가 생기자 몇 달 뒤 문을 닫았다. 단일 영화관으로선 최대 규모였던 중앙극장마저 영화 <친구>를 마지막으로 2001년 문을 닫았다. 멀티플렉스에 밀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자본의 속도는 삶의 속도를 늘 앞질렀다. 청주중, 주성중, 주성초 등 한 때의 명문학교들은 학생 수가 십분의 일로 줄었다. 더 이상 사람들이 오지 않고, 살지 않는다는 것을 빈 책상이 대신 말해주었다.
중앙동엔 대를 이어 살아온 건물주나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만이 남았다. 떠나지 못한 사람들을 보고 “굼뜬 사람들”이라고 놀렸다. 하지만 청춘을 바친 곳, 떠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때 교통, 행정, 경제, 교육,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구도심의 종착역이 됐다.
3대째 살고 있는 권순택 씨
“아직도 안 떠났어?” 지인들이 기어코 말렸다. 권순택(50)씨는 2000년 중앙동에 일식집 ‘아카사카’를 냈다. 일식집이 인근에 없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해방이후 할아버지가 청주에 정착해 3대째 삶의 터전인지라 중앙동을 붙잡고 싶었다. 태어나서 자란 곳, 70년 째 이어진 삶에 중년의 사내는 다시 들어왔다.
|
 |
|
▲ 3대째 살아온 권순택 중앙동 상가번영회장은 동네의 흥망성쇠를 지켜봤다. 그는 중앙동을 역사문화의 거리로 특화시킨다면 경쟁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육성준 기자 | 지금 중앙동 상가번영회장과 주민자치위원장을 맡으며 동네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곳엔 너무나 오랜 역사와 토착민이 살고 있어요. 청주시는 이곳을 돌봐야 해요. 청주청원 통합으로 마지막 남은 청주시청마저 떠난다면 여기는 죽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그의 목소리가 절절했다.
그는 청주청원 통합으로 모두가 들떠있지만, 정작 구도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며 아쉬운 속내를 비친다. 권씨는 중앙동의 역사를 오롯이 지켜봤다. 유토피아 나이트가 가경동에 대형 나이트클럽이 생기자 그 다음날 절반도 오지 않은 것을 보았다. 현대백화점 또한 성안길 상권에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을 예견한다. 물론 중앙동도 예외는 아니다. “예전엔 골목마다 대리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문을 닫았죠. 로드샵 및 골목 상권들이 다 죽고 있어요.”
권씨가 중앙동에 들어왔을 때 건물은 평당 1000만원이었지만 지금은 그 가격의 60%도 받지 못한다. 그나마 최근 몇 년 사이 달라졌다. 곤두박질치던 공시지가도 지난해부터 조금 올랐다. 중앙동은 도심 재생사업이 국비와 시비를 들여 진행되고 있고, 그 성과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2005년 중앙동에 ‘차 없는 거리’가 조성됐고, 지난해 20m에 달하는 키 큰 소나무가 심겨지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러자 빈 건물에 새 주인이 들어와 활기를 띄게 됐다. 중앙동은 일 년 내내 공사 중이다.
“오죽하면 ‘재생’이라는 개념을 꺼낼까요. 다 쓴 물건, 버린 물건을 고쳐 쓰자는 얘기인데 서글프기도 해요. 역사와 문화를 다시 꺼내 경쟁력을 갖춰 나가야죠. 시멘트로 만든 거주지역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봐요.” 중앙동은 도심재생사업의 일환으로 2015년까지 청주역 복원 및 광장조성 사업이 진행된다.
권씨는 중앙동이 현대적인 행정문화복합공간으로 제2의 도약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는 모두 바닥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제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요. 패자의 프레임을 멋지게 벗어날 것입니다. 꼭 그렇게 써주세요.”
50년 된 헌책방 ‘대성서점’
9평짜리 가게. 5만권의 책과 함께 사는 대성서점의 주인 박봉순(75)씨는 다리를 제대로 펴지 못한다. 책이 쌓이면서 책방에는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만한 길이 생겼고, 주인이 쉴 수 있는 작은 공간엔 사람 대신 오래된 라디오가 볼륨을 높이고 있었다. 그는 수첩을 꺼내 보여준다. 단골손님들이 부탁한 책의 목록이 적혀있다. 하루에 오는 손님은 5명 남짓, 그는 인근 고물상 및 헌책방을 돌며 손님이 부탁한 책을 구해온다. 예전처럼 책을 내다파는 사람은 거의 없다.
|
 |
|
▲ 5만권의 책에 파묻혀 50여년의 세월을 보낸 대성서점의 주인 박봉순씨. 새 책이 누렇게 될 때까지 중앙동을 지켰다. 사진/육성준 기자 | 박씨는 중앙동에서 50년 가까이 서점을 열었다. 중앙동에서 3번의 이사 끝에 지금의 1층 서점과 3층 가정집을 사게 됐다. “70년부터 90년까지는 장사가 잘 됐어요. 90년 이후론 사양길이었죠. 여기 있는 책은 다 읽기는 했어요. 그래야 손님이 물어보면 바로 찾아줄 수 있죠.” 9평짜리 가게에도 질서는 있다. 의학, 건강, 고전. 사주, 성씨 등 5만권의 책은 그만의 방법으로 분류돼있다.
강원도가 고향인 그가 청주 중앙동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단순했다. 70년대 청주가 교육도시로 불렸고, 또 채소를 시장에서 파는 데 인심이 후했다. 교육도시에는 학생이 많고, 학생이 많으면 책을 많이 볼 것이라 생각했다. 한 때는 중앙동에만 30여개의 헌책방점이 있어 거리를 형성했다. 지금은 대성서점을 포함해 보문서점, 중앙서점 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박씨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조기축구를 한 뒤 8시쯤 서점 문을 열어 7시에 퇴근한다. 서점에만 있다 보면 몸을 잘 쓰지 않아 축구를 빼놓지 않고 한다. “책이 좋아서 문을 못 닫고 있어요. 딱히 할 것도 없고, 90년 이후론 그냥 문을 열어놓았어요.”
최고 시장과 주상복합아파트
“중앙시장이 1등이었지, 청주시내 최고 고급시장이었으니까요. 수동에 육군병원이 있었고, 부자들이 이곳에 몰려 살았죠. 시장은 노점이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고, 장사도 잘 됐죠. 지금은 그냥 놀기 뭣해서 심심해서 나와요. 생활비는 숫제 안돼요.” 36년 전부터 노점을 편 김모(75)씨는 중앙동의 화려했던 시절을 잠시 추억했다. 옆에 있던 중앙기름집 박모(64)씨가 말을 거든다. “30년 전에 번 돈으로 그냥 근근이 먹고 살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그래요.”
|
 |
|
▲ 80년대 최고급 아파트와 상가는 지금 청주시내에서 가장 저렴한 몸값을 자랑한다. 사진/육성준 기자 | 중앙시장엔, 80년대 청주시내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라고 할 수 있는 중앙상가아파트가 들어섰다. 중앙상가아파트는 17평, 15평, 24평이 있다. 24평의 경우 현재 매매가가 7500만원이다. 경비원 김진만(67)씨는 “없어서 못 팔아요.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요. 청주에서 이렇게 싼 아파트가 어디 있나요”라고 말했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는 중앙상가아파트에는 인근 상가 주민들이 여전히 많이 살고 있다.
하지만 상가는 텅 빈 곳이 많다. 낡은 간판들은 여전히 2자리 국번을 달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중년 나이트인 한국관 마저 지난해 12월 31일 문을 닫았다. 상가 문을 열자 사람들이 멀뚱멀뚱 쳐다본다. 손님이 낯설어 보이는 모양새다.
중앙시장에는 오래된 볼링장이 있다. 볼링장이 생긴 지는 20년 가까이 됐다. 중앙상가를 연결하는 다리에는 대형 볼링핀이 서 있다. 5년 전 볼링장을 인수한 고용성(37)씨는 “시내에 와도 놀만한 데가 없으니까 20대 초반 젊은층이 많이 와요”라고 말했다. 1게임에 2000원, 다른 볼링장보다 30%저렴하다. 동호인들은 대개 이곳에서 연습을 한 뒤 실력을 갖추면 시설 좋은 곳으로 옮겨간다고. 오후에 찾아갔지만 게임을 하는 팀은 아무도 없었다. “90%가 저녁 때 와요. 그냥 연인들이 재미로 오죠. 직장생활 할 때보다 수입은 나은 편이에요.” 260평 최대 규모라지만 그날따라 사람은 없고,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노래만 반복됐다.
청주역사(驛舍) 재현, 영화도 재현?
중앙동 만춘관은 50년 된 중국집이다. 대를 이어 화교출신 손무후씨가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청주시가 추진하는 청주 역사(驛舍)복원 사업에 관심이 많다. 바로 이곳이 과거 청주 역사 자리였기 때문이다. 만약 시가 계획대로 건물을 매입해 재현 사업을 시작한다면 반평생 해온 일을 접을까 고민 중이다. 하지만 아직 통보받은 게 없으니까, 지금으로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동네 사람마다 얘기하는 게 다 다르다.
|
 |
|
▲ 북문로 신한은행 앞 중국집 만춘관은 과거 청주역사(驛舍)가 있던 곳이다. 시는 이곳을 매입해 청주 역사를 재현하고, 인근 환경정비사업에 나선다. 최근 이 일대에 모형 기관차를 놓고, 꽃을 심어 이곳이 청주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렸다. 사진/육성준 기자 | 아내 박정분씨는 “예전에 번 돈으로 먹고 사는 거죠. 90년대 이후로 매출이 많이 떨어졌어요. 또 지금은 모임을 많이 하는 시대잖아요. 우리집은 보다시피 홀이 없으니까 잘 오지 않죠. 배달도 이제 안 해요. 이곳에 추억이 있는 분들이 오죠”라고 말했다.
최근 청주시 공원녹지과가 만춘관 앞 도로에 쌈지 공원을 조성했다. 시가 1억 9000만원을 들여 꽃이 심겨진 ‘녹색기관차’를 놓았고, 소나무 등 조경수 900여 그루와 야생화 7000여 그루를 심었다. 박씨는 “보기는 좋은데, 어르신들이 공원 생기면 땅 값이 떨어진다고 걱정하시네요. 오늘은 이곳에서 청개구리를 봤어요. 상권활성화가 되려면 우선 주차장이 생겨야죠”라고 말했다.
|
 |
|
옛 청주역사 자리에는 모형기관차와 꽃이 심겨져있다. 사진/육성준 기자 | 청주시는 2015년까지 127억원을 들여 중앙동과 성안동 일원에서 옛 청주역사 재현과 청주읍성 관아지 옛길 정비사업을 추진한다. 시는 국토해양부가 공모한 도시활력증진 사업에 서정됐다. 옛 청주역 자리를 매입해 역사의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지하주차장, 자전거 환승센터, 광장 등을 조성해 도심의 명물로 만들 예정이다. 이러한 ‘옛 청주 역사 재현 환경정비 사업’에는 88억원을 잡고 있다.
청주역은 충북선 개통 3년 후인 1924년 현 시청 부근인 북문로 2가에 건립돼 1968년까지 청주의 관문이자 상징 역할을 했다. 이후 철로 교외 이설로 우암동 옛 청주MBC 자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도시 팽창으로 1980년 현재의 정봉동으로 이전됐다. 현재 청주 도심에는 충북선 철로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청주역이 떠난 이후로도 중앙동에 사창가는 여전히 남아있다. 여인숙 간판을 단 낡은 주택 사이로 한 나이든 여성이 담배를 길게 내뱉었다. 역사 재현 사업을 하면서 사창가 일대 환경정비 사업도 함께 이뤄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