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만 해도 화창하고 따뜻하며 초여름 같던 날씨가 갑자기 쌀쌀할 뿐만 아니라 아침에 서울역과 숙대입구역 사이에서 일어난 전철 탈선사고로 교통이 매우 혼잡한 가운에 4호선 한성대역까지 가는 길이 몹시 멀고 힘든 길이었다. 약속 시간을 30분가량 늦게 도착하여 발품을 팔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최순우 옛집
처음으로 들른 곳이 최순우 옛집이다. 혜곡 최순우가 살던 집이다. 최순우 씨는 개성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희순이라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국의 미 발견에 평생을 바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품인 ‘무량수전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통해서 소박한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있게 한 곳이 바로 이 옛집이다. 입구 현판에 최순우 옛집이라는 간판이 참으로 정겹게 느껴졌으며 뜰 안으로 들어서니 바로 눈에 띄는 것이 杜門卽是深山 문을 닫으면 바로 심산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마음이 곧 심산을 품고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방의 현판에는 午睡老人이라하여 자신을 스스로 낮잠 자는 노인으로 속세의 모든 짐들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운 상황을 이르는 말이 아닌가 하여 삶을 참 쉽고 가볍게 살았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시민문화유산 제 1호로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시민들이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는 유산이다. 도심 속의 깊은 숲 속 같은 한가롭고 조용한 곳이 마음을 가만히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뒤뜰의 툇마루에서 과일을 먹다가 관리인에게 지적을 받으니 미안하고 죄송하였다.
선잠단
선잠단은 사적 제 83호로 조선 초 성종4년(1473년)부터 운영하였으며 누에를 처음으로 치기 시작한 蠶神 서릉 씨에게 제사 지내며 누예 풍년을 기원하던 곳이다. 조선시대 임금이 친히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고 왕비는 친잠이라 하여 누예 치는 모범을 보여주므로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선잠단의 이름에 걸맞게 조그만 구내에는 수백년 묵은 뽕나무가 울창한데 그렇게 큰 뽕나무도 있구나 하고 놀라운 눈으로 보았다. 농경국가였던 우리 선조와 백성을 사랑한 임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길상사
김영한 (1916~1999)는 16세 때에 하규일 문하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에 입문하여 수업을 하였으며 시인 백석과 서로 사랑하게 되어 백석이 子夜라는 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과 ’내 사랑 백석’의 수필을 간행하는 등 백석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것 같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백석은 북에 남고 남으로 내려온 김영한은 바위 골짜기의 배밭골을 사서 청암장이라는 한식집을 운영한 뒤에 제3공화국 시절 우리나라 3대 요정의 하나인 대원각이 되었다고 한다. 김영한이 미국에서 법정 스님의 설법을 듣고 감명을 받아서 1987년 1,000억이 넘는 대원각을 시주하기로 하였으나 법정 스님이 받아 주지 않아서 계속 간청을 하던 중 1995년에 그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는 날, 법정 스님으로부터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게 되어 그녀를 길상화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주변의 사람들이 그 많은 재산을 모두 시주를 하여 아깝지 않느냐고 하니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고 했다니 얼마나 백석을 사랑했는가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처음에는 송광사의 말사로 대법사로 등록을 하였으나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그녀의 주검은 길상사 뒤뜰에 뿌려져 외롭게 서있는 작은 비석으로 이곳이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안자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눈오는 깊은 산골로
가마기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나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한 여인을 사랑하면서 쓴 고백적인 시다.
바로 이것이 진짜 연애편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고 싶은 그 곳에도 눈이 푹푹 내린다.
사랑에 대한 절절함이 묻어나는 시라고 하겠다.
이종석 별장
조선말 마포나루에서 젓갈장사로 거부가 되어 1900년경에 지은 별장으로 민속자료 제10호로 지금은 덕수교회 안에 있으며 교회가 영성훈련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한옥의 편안함과 우아함이 저절로 느껴지며 무엇보다 친환경적으로 지은 우리의 고유한 주택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도심 속의 아늑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정감이 들었고 북까페에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의 여유는 고전과 현대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듯 참으로 좋은 분위기였다.
이태준 생가
상허 이태준은 월북작가로 잘 알여져 있다. 강원도 철원 태생으로 달밤, 돌다리, 등의 소설과 수필집 無序錄 이 있으며 1999년 외손녀 조상명 씨가 당호 수연산방이라는 이름으로 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적인 정적인 분위기에 제법 많은 손님들이 차를 마시며 분위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작가가 1933년부터 1943년까지 10년간을 살았던 집으로 그 당시에는 제법 크고 좋은 집이었겠지만 지금 보면 자그마한 기와집으로 민속자료 11호로 지정하여 전해지고 있다. 시대적인 이데올로기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갈등하며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공산주의 이론에 속아서 월북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카프(KAPF-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동맹)라는 문학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을 하던 작가들도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가슴 아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심우장
서울시 지정 기념물 제7호로 만해 한용운 선생님이 1933년부터 44년까지 12년간 만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 성북동 골짜기에서 셋방에서 어렵게 지내고 있을 때 碧山스님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 몇 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하였다. 작은 기와집은 선생님의 성품을 닮은 듯 아담하고 정겨웠다. 다만 관리동이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조금 아쉬웠다. 집의 방향이 북향인데 그 이유는 남향으로 하면 조선총독부가 보이므로 일부러 북향으로 지었다고 하니 그의 민족정신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尋牛壯이라는 이름은 깨달음의 경기에 이르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붙인 이름이며 수행의 10단계 중 자기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어느 기사 식당에서 반반이라는 것을 먹었는데 떡갈비와 돼지고기구이가 절반씩 나오는 것이다. 값도 싸며 너무 푸짐하고 상추와 쌈장으로 싸 먹으니 맛도 좋아서 배부르게 포식을 하였다. 역시 기사식당의 본뜻을 잘 살린 식당 같았다.
서울성곽
성북동에서 성곽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니 성곽의 일부가 경신고등학교 담장이 되어 무거운 무게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 학교의 담장이 서울성곽을 깔고 앉아 있는 모습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계속 성곽을 따라 가다가 보니 혜화문이 우뚝 솟아 있는데 도로의 한 쪽으로 비껴서 있는 것이 왠지 어색하였다. 사연인 즉 원래는 길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도로를 내면서 약간 옆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문화재에 대한 의식의 일면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았다. 성곽을 끼고 서울 시장의 관사 붉은 지붕이 보이고 지금의 박원순 시장은 문화재 훼손을 하는 곳에서 살지 않는다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성을 따라 가니 서울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벚꽃과 개나리 진달래 등이 만개하여 운치를 더하였고 성안으로 들어가니 바로 공원으로 꾸며 놓아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너무 잘 만들어져 있어서 처음 가본 우리도 기분이 좋았다.
서울성곽을 처음 쌓은 사람은 태조로 기초석을 놓고 토성으로 쌓았다가 풍화작용에 쉽게 무너져서 세종 때 다시 돌로 쌓았는데 자그마한 돌들이다. 그 때까지는 전국의 백성들이 지역별로 부역으로 쌓았으며 장비나 기술이 부족하던 시대에 그렇게 큰 성을 쌓느라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다시 쌓았는데 돌이 크고 곧으며 임금을 주고 쌓으니 일도 잘 되고 성도 더 완벽하게 하여 지금도 그대로 보존이 되고 있었다. 다만 세월 속에 많이 훼손이 되고 조금 전에도 지적하였지만 무너진 성곽을 울타리로 이용하거나 돌을 가져다가 각자가 필요한 대로 사용을 하기도 하였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성곽의 돌에 직책과 이름이 새겨진 것이 있었는데 바로 실명제라고 할 것이다. 성을 따라 오니 바로 동대문 북 쪽 대로로 나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 성곽의 돌에 여러 가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실명제를 말하는 것인데 한 곳에 모인 것으로 보아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면서 모아놓은 것 같았다.
하루의 품으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생각을 한 하루였다. 힘들기도 하고 보람되기도 한 날이었으며 다시 다음 기회에는 숙정문 쪽으로 다시 걸어보기로 하고 마무리 하였다.
같이 동행하며 해설을 해준 서울시 문화재 해설사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2013. 4. 3. 김, 이. 최 선생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