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1일 화요일
오전 9시 김해 집에서 출발해서
부산 노포동에서 시외 버스로 12 시에 경주에 도착
시외 버스 주차장에서 1 킬로 가까이 떨어진 김유신 장군 묘를 거쳐서
김유신 장군 묘에서 2 킬로 가까이 떨어진 무열왕릉 묘를 구경하고
김유신의 작은 여동생 문희는
무열왕 김춘추의 부인이 되었다.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무열왕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시내로 와서 천마총 구경하고
오후 4 시에 경주에서 출발해서
김해 집에 오후 7시 도착
28대 진덕여왕(眞德, ?~654)
휘는 승만(勝蔓)
29대 무열왕(武烈, 604~661)
휘는 백제를 멸망시킴.
30대 문무왕(文武, ?~681)
휘는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673) 죽음.
31대 신문왕(神文, ?~692)
휘는 정명,명지(政明,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듬.
32대 효소왕(孝昭, 643~702)
휘는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33대 성덕왕(聖德, ?~737)
휘는'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34대 효성왕(孝成, ?~742)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
35대 경덕왕(景德, ?~765)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주조.
김유신 출신 및 배경
본관은 김해.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이며
아버지는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낸 서현(舒玄)이다.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文明王后)는 그의 작은 누이동생 문희이다.
백제·고구려 정벌
609년(진평왕 31) 15세 되던 해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수련했다.
신라는 6세기 이래 비약적인 팽창을 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맺었던 나제동맹을 깨뜨렸다.
그러자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연합하여 신라를 위협했다.
이에 신라는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당과의 연결을 꾀했다.
629년 신라군이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할 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참가한 김유신은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고구려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부터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641년(선덕왕 10) 백제가 신라의 서쪽 40개 성을 함락하고
대량주(大梁州:지금의 경남 합천)를 점령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피해를 주자,
신라는 당시 적대국이었던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원병을 청하기로 했다.
이때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북 경산) 군주로 있으면서
고구려에 억류되었던 김춘추의 귀환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644년 소판(蘇判)이 되고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백제국의 가혜성 등 7성을 점령하고, 매리포성(買利浦城)을 방어하는 등
수차에 걸친 싸움에서 이겼다.
647년(진덕왕 1) 명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을 진압했다.
그해 10월에는 압량주군주로서
무산성·감물성·동잠성을 공격한 백제군을 격퇴했다.
648년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대량주를 공격하여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飡)이 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올랐다.
이듬해 백제장군 은상(殷相)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공격하자,
중앙군 편대를 지휘하여 죽지(竹旨)·진춘(陳春)·천존(天存) 등과 함께
백제군을 도살성(道薩城)에서 격파했다.
그뒤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워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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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
654년 진덕여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 귀족회의에서
추대된 상대등 알천(閼川)과 상의하여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다.
그가 태종무열왕이다.
무열왕의 즉위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회의의 결정을 원점으로 돌릴 만큼 큰 것이었다.
즉위 다음해에 대각간(大角干)이 되었고,
그해 10월 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와 혼인했다.
660년 상대등이 되었다.
그해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고전 끝에 물리친 뒤 소정방군과 합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어 661년(문무왕 1) 6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던 중
식량부족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소정방 군대를 지원하여
군량을 전달하고 돌아왔다.
663년 백제 부흥군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봉기를 꾀하자
인문·천존·죽지 등과 함께 물리치고, 그 공으로 밭 500결을 상으로 받았다.
665년 당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지고 식읍(食邑) 2,000호를 받았다.
666년 아들 대아찬 삼광(三光)이 당나라로부터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668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연합군의 사령관격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원정을 떠난 문무왕을 대신하여 신라 국내의 통치를 맡았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승진했다.
그뒤 직접 정치나 군사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신라 지배층의 원로로서 내부 단결과 전략수립에 자문 역할을 했다.
당의 축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고구려 땅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심지어 신라 본토에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두어
삼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당의 침략행위에 대한 투쟁에서도 김유신은 지도적 역할을 했다.
아들 원술(元述)이 당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오자
참수할 것을 주장하여 결전의 의지를 보였으며,
672년 석문(石門) 벌판전투에서
신라군이 당에게 패배하고 있을 때 문무왕에게 전략을 자문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군은 그가 죽은 뒤인 676년 당의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673년 가을 79세로 죽었다.
유해는 금산벌에 장사지냈고,
문무왕은 유사(有司)에게 비를 세워 공과 명예를 기록하고
거기에 거주할 민가를 정해 묘소를 지키게 했다.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
경주의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
현재 김유신의 묘는 경주시에 있으며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를 통하여 포항쪽으로 흘러 가는 형산강
김천 감천 폭 정도 니는데 감천 보다 물이 조금 많아요
김유신 장군 묘
김유신 장군 묘
김유신 장군 묘 옆을 자세히 찍은 것
김유신 장군 묘 울타리를 자세히 찍은 것
높이 2 미터 정도 됩니다.
김유신 장군 묘에서 약 300 미터 떨어진 곳의
묘를 (김유신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아마 일본 아들이) 도굴해 간 것
자세히 볼 수 있어서 공부하기는 좋다.
안 쪽은 가로 세로 각각 약 3 미터 입니다.
무열 왕 김춘추의 묘
무열왕 비석
거북 밑받침도 (폭이 약 2 미터)
중간이 개진 비석 모자 밖에 없다
그래도 국보이다.
갈라진 모자 가운데
김춘추의 아들이라는 것이 적혔다는데
나는 읽을 수 없었다.
이 비석의 몸둥아리도 아마 일본 어디에 감추어져 있거나
훔쳐 가다가 바다에 빠트렸거나
아니면 일본 아니고 다른 어디에 가 있을 까
일본 아들 말고는
길이가 약 3 미터로 추정 되는 거대한 비석을 누가 가지고 갔을까
신라와 고구려 백제에 대한 기록도 많이 적혀 있을 것 같은데
무열 왕릉 뒤의 무덤 4개
(올라가서는 안되는) 맨 뒤쪽 무덤에 올라가서 찍은 것
천마총 안쪽 시신과 유물이 발견 된 곳
천마총 주위의 다른 무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