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웅 작/ 친구의 초상
구본웅

서산西山 구본웅(1906~53)은 1906년 3월 7일 서울 필운동의 진보적 명문 개화가정의 해방 후 유도회 총본부회장을 역임한 주자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3살 무렵 그를 업고 나갔던 가정부의 등에서 떨어지는 돌발사고로 인해 척추를 다쳐 곱사등이 불구가 되었다. 그가 비운의 신체적 불구를 극복하고 서양화가로 등단하자 사람들은 그를 ‘서울의 로트렉’이라고 불렀다.
구본웅은 1921년 서울 경신중학교에 입학하여 미술반 활동을 했고, 1924년에는 고려미술원 연구회 서양화반에 다니면서 동경미술학교 출신 이종우로부터 서양화 기초를 배우면서 이듬해 가을부터는 YMCA 청년학관에 신설된 미술과에도 나가면서 역시 동경미술학교 출신 조각가 김복진으로부터 조각을 배웠다. 신체조건 때문에 집안에서 유학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서울에서 연구소를 다니며 유화와 조각을 배우던 중 1927년 제6회 선전 조각부에 석고 조소 <얼굴 습작>을 출품하여 입선과 동시에 특선을 수상했다. 조각으로 특선을 수상했으므로 그가 조각가의 길로 들어설 듯 하지만 회화에 관심이 많았고, 김복진은 자신에게서 배운 구본웅을 조각가로 만들고 싶었겠지만 김복진은 1928년 봄 제3차 공산당 검거 때 당원으로 체포되어 복역함에 따라 조각가의 활동이 중지되었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간 구본웅은 초기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던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부에 다녔고, 이듬해 니혼(日本) 대학 전문부 미학과에 등록하고 예술이론을 배웠다. 그는 1929년과 30년 다이헤이요미술회(太平洋畵會) 연구소가 주최한 콩쿠르에서 거듭 수상하고 1930년 봄부터 수십 년 역사의 그 연구소에 다니기 시작하다가 그 해 10월에 서양화 전문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로 승격하자 계속 정규과정을 밟아 1933년에 본과를 졸업했지만 연구과에서 1년 더 수학한 후 귀국했다.
다이헤이요미술학교 2학년 때인 1931년 6월 그는 동경에서 제작한 유화 50여 점을 가지고 서울로 와서 동아일보사 옥상 전시장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때 신문 보도를 통해 그가 동경에서 독립미술협회전과 이과전에 출품하고 있었음이 알려졌다. 개인전에 소개된 작품에 대한 사진자료가 없어 어떤 작품이 소개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이 개인전에 관해 서양화가 김주경은 1932년 정초에 『조선일보』에 기고한 ‘화단의 회고와 전망’에서 “규비즘과의 중간층과, 포비즘과의 중간층과, 내지 익스프레셔니즘 또는 임프레셔니즘과의 중간층에 속하는 작품들도 병진(竝陳)되어 있었다”고 적었다. 구본웅이 그때까지 누구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못한 입체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양식을 골고루 실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동료 화가들의 주목을 받았음은 1930년 12월 동경에서 명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재학 중이던 김용준, 길진섭, 이마동, 김응진 등이 모두 친구 사이이기는 하지만 대단치 않은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 재학하던 구본웅을 넣어 전향적인 미술연구를 다짐한 백만양화회를 만든 데서 알 수 있다.

구본웅 작 /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