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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듬어진 글이라고 생각된다.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 그리고 구원에 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와 한나 아렌트의 ‘사랑’ 개념을 중심으로 -
2024. 2. 1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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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사랑의 신비, 그리고 구원에 관하여
- 아우구스티누스와 한나 아렌트의 ‘사랑’ 개념을 중심으로 -
박정서
연세대학교 신학과 / 3학년
국문 초록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인류의 역사에 편만해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인류의 역사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그 국면을 달리해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언제나 실패한다.”[1]라고 지적했던 바와 같이 사랑은 신비다. 마치 고통이 신비이고 불안이 신비이며, 선과 악이 신비이고, 하나님께서 신비인 것과 같이 말이다. 또한 사랑은 신비다, 우리는 항상 사랑을 정의하는 일에 있어서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 여기서 사랑하고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사랑은 현전한다. 사랑하고 있는 자의 안에, 사랑받고 있는 자의 안에서 사랑은 존재하며 동시에 그들은 사랑 안에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어떠한 지성적 언어로도 그것의 본질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사랑은 인간의 마음에 닿아 그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본 기말 보고서에서 필자는 2023년 연세대학교 신학과의 ‘기독교고전강독’ 강의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의 저서 『삼위일체론(De trinitate)』를 강독하며 떠올렸던 “사랑은 무엇인가?”그리고“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사랑’에 대한 몇 가지 상념들과 엮어서 풀어낼 것이다. 이를 위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에서 제시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된 사랑의 개념을 개괄할 것이다. 또한, 교부의 사랑 개념이 지니고 있는 실천적 한계에 대한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비판 및 대안을 그의 저서 『사랑,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Love and St. Augustine)』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지수로 남을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해 온전히 규명되고 증명될 수 없는 사랑의 신비에 대하여 필자는 고찰할 것이며 “사랑의 신비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이웃을, 타자를, 세계를 그리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나아가 이에 대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상으로서의 마음과 죄와 구원의 문제를 평등하게 공유하는 타자에 대한 사랑의 시선이라는 답을 제시할 것이다.
주제어: 사랑,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 마음, 한나 아렌트, 세계 사랑, 구원
I. 서론: 사랑의 신비에 관하여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인류의 역사에 편만해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인류의 역사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그 국면을 달리해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2]. 국어 사전에 등재되어 있기를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하는 사랑에 대해 과연 이 한 문장이 그것이 가진 신비를 모두 담을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 사랑은 신비다. 물론, ‘사랑=신비’라는 공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에 대해서 규명하기 위해 그리고 이것을 정의하기 위해 아무리 무어라고 말한다고 한들, 사랑은 애초부터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 상식 등으로부터 초월해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기에 신비라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언제나 실패한다.”[3]라고 지적했던 것은 그가 지혜롭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사랑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한다고 한들, 그것은 실패로 귀결될 것임을 알았던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고 이에 대해 자신 있게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역시 일찌감치 사랑의 신비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신비다. 마치 고통이 신비이고 불안이 신비이며, 선과 악이 신비이고, 하나님께서 신비인 것과 같이 말이다.
또한 사랑은 신비다, 우리는 항상 사랑을 정의하는 일에 있어서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 여기서 사랑하고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사랑은 현전한다. 사랑하고 있는 자의 안에, 사랑받고 있는 자의 안에서 사랑은 존재하며 동시에 그들은 사랑 안에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을, 받고 있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며 그들을 결속해주며 존재하는, 그럼에도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사랑이라고 명명한다. 다시 말해 어떠한 지성적 언어로도 그것의 본질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사랑은 인간의 마음에 닿아 그것을 드러낸다. 인정하건대, 사랑을 지성적 언어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아주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태초부터 무엇이 사랑인가에 대하여 자궁에서부터 그것을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사랑을 어떻게 알 것인가?”라는 인식론적 물음은 일별 무용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그리스도 즉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4]하라 한 구약의 율법[5]과 예수님의 제1 계명을 따라야 하며, 따른다. 그러나 주지하고 있듯,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6]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은 자연스레 생겨나게 된다. 첫째, 우리는 사랑에 대해 알 수 없다면. 사랑이신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둘째, 사랑을 무어라 알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매우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둘째 계명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7]까지 가세하게 된다면 문제는 다층적이게 된다. 같은 연유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산발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은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던 것과 같이 기적을 행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음을 차치하고서도, 지금 이 시대 즉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과학만능주의, 물신주의 등이 만연해 있고 이로부터 개인-이기주의로 인한 공동체의 파편화 및 분열 심지어는 한 명의 개인 내부의 분열과 자기 자신에 대한 소외가 편재한 시대에서 우리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자기 자신조차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과연 사랑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문제는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용납’[8]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인가. 2023년 12월 현재 고립은둔청년은 54만명이며,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무려 7조원에 달한다고 청년재단은 밝힌 바 있다.[9] 또한 더 이상 말할 바도 없이 청소년과 청년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를 기록할 정도로 심각하다.[10] 자, 이 시대의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이 시대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필자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신도 중 한 명이다. 모두와 똑같이 죄와 죽음을 지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으로 대속 받았으며 구원을 기다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러나, 필자는 부디 하나님께서 제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도와 주시기를 간구하며 기도한다. 어쩌면 앞으로 소개할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비록 시대는 달랐으나 이와 같은 고민을 공유했던 것이 아닐까,하고 필자는 추측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알려 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간구가 『삼위일체론』이라는 장대한 책을 통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 기말 보고서에서 필자는 2023년 연세대학교 신학과의 ‘기독교고전강독’ 강의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의 저서 『삼위일체론(De trinitate)』를 강독하며 떠올렸던 “사랑은 무엇인가?”그리고“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사랑’에 대한 몇 가지 상념들과 엮어서 풀어낼 것이다. 이를 위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에서 제시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된 사랑의 개념을 개괄할 것이다. 또한, 교부의 사랑 개념이 지니고 있는 실천적 한계에 대한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비판 및 대안을 그의 저서 『사랑,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Love and St. Augustine)』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지수로 남을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해 온전히 규명되고 증명될 수 없는 사랑의 신비에 대하여 필자는 고찰할 것이며 “사랑의 신비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이웃을, 타자를, 세계를 그리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인 답을 제시하며 글을 마칠 것이다.
II.『삼위일체론』 속 하나님과 사랑, 그리고 구원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힙포(Hippo)의 감독으로 취임한 직후(396)부터 시작하여 그의 나이 71세에 이를 때까지(425) 장기간에 걸쳐 저술되었으며 그의 신학 사상이 발전해가는 과정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11] 그의 전작이었던 『고백록(De confessione)』이 최초의 자서전이라 불릴 만큼 자전적인 성격을 짙게 띤다고 한다면, 『삼위일체론』은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을 주요 골자로 한 성경적이고 교리적인 주제를 다룬다. 삼위일체론은 총 1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부(1~4), 제2부(5~7권), 제3부(9~15권)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 1부와 제2부가 성서의 내용과 공교회의 교리적 표준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통해서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 있는 데 반해, 제3부의 서론 격인 제8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의 핵심인 ‘사랑의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 이후 제9권부터는 삼위일체론을 신학적 인간론(theological anthropology)과 사랑의 신학(theology of love)으로서 교부 고유의 인간학과 사랑론에 기반하여 개진한다.
교부는 책의 전반부에 수립된 명제, “세 위격이 한 분 하느님이시다. 성부는 성자, 곧 말씀을 낳으신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발한다. 성자는 진리이고 오성 활동과 연관된다. 성령은 사랑이고 의지와 연관된다. 이것들은 계시된 진리이다.”에 대해서 자기인식과 하느님 인식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내면에 깃든 삼위일체의 모상을 유비하여 후반부의 논의를 진행한다. 따라서 후반부의 삼위일체에 대한 탐구는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부는 오성으로 사유하는 인간 지성 즉 내적 인간을 지성, 인식 그리고 사랑으로 구별한다. 또한 각각의 작용으로서 기억, 오성 그리고 의지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성’이라는 주체가 행하는 ‘자기 인식’과 ‘자기 사랑’의 삼위를 관찰하면 그것이 셋이면서 한 사물을 이룬다는 점이 파악되는데, 그것이 완전할 경우 즉 지성이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경우 다시 말해서 세 기능인 지성, 인식, 사랑이 제각기 ‘전체를 인식하고 전체를 사랑하는’ 경우 이러한 현상에서 단일성이 발견된다. 이는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 분이면서도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것과 같이 “신비로운 어떤 양상으로 이 셋은 자기들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채 존재하며, 그러면서도 그 각체 역시 실체이고, 그러면서도 서로 상관적으로 언표할 경우에는 그 셋 전부가 함께 단일한 실체 혹은 존재이다 … 그러니까 저 셋, 즉 지성이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사랑할 때는 삼일성이 존재하니 지성, 사랑, 인식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어떤 혼합으로 섞이는 것이 결코 아니고, 자체들 안에는 각체로 존재하면서도, 서로 간에는 전체 안에 전체로서 존재한다.”[12]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학의 전제이며 그의 사랑의 신학은 이러한 전제를 기반으로 전개되며 다음과 같다.
내가 무엇인가 사랑할 때 거기 셋이 있다: 나, 내가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 자체. 내가 ‘사랑’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뭔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랑’을] 사랑하고 있다. 사랑받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연고이다. 그러니 셋이 있다. 사랑하는 이, 사랑받는 대상, 그리고 사랑. … 누구든지 자기를 사랑하는 경우에 사랑함과 사랑받음이 같은 식으로 동일하다. …‘자기를 사랑하는 일’ 다르고 ‘자기 사랑을 사랑하는 일’ 다르다. 그런데 ‘사랑이 사랑받는다고 하려면 [그 사랑]이 뭔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 무엇으로부터도 사랑받고 있지 않은 지경에서는 사랑은 아무 사랑도 아니다. 따라서 누가 자신을 사랑하는 경우에는 둘이 있다. 사랑 그리고 사랑받는 대상 둘이다. 또 이 경우에는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대상이 하나다. 따라서 어디든 ‘사랑’이 있으면 이미 셋이 존재한다는 [앞서의] 결론은 나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13]
교부는 내적 인간 즉 인간의 지성(마음)에서 삼위일체를 찾았던 것과 같이 사랑에서도 ‘사랑하는 이’, ‘사랑받는 이’, ‘사랑 그 자체’의 삼위와 그 단일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이것을 지성의 작용으로서 지성이 자기를 사랑하는 방식과 연관지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무엇으로부터도 사랑받고 있지 않은 지경에서는 사랑은 아무 사랑도 아니다”라는 문장이 그것을 잘 드러내어 준다. 즉 “사랑은 인간의 영혼이 가지는 기능 가운데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명료한 형상”[14]인 것이다. 교부에게 있어 사랑은 단순한 은유 같은 비유가 아니라 구원론적인 정향을 띠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이란 곧 진리이며,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리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교부는 이러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화 사건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다시 말해, 신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인간이 되신 것은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화 하신 후 피로 대속하심을 통해 구원받은 존재로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애’와 같은 이기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신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이 될 수 있다고 교부는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육신은 단순한 종교나 도덕의 차원을 초월하여 인간의 영혼 내면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부는 십자가의 구원 사건에서 삼위일체이신 신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보았다. ‘사랑받으시는 분’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사랑의 결속 혹은 연합이자 사랑 그 자체’이신 성령께서는 ‘사랑 하시는 분’이신 성부와 성자를 하나로 연합한다. 이는 성부가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이 사랑에 응답하시며 성령은 삼위일체를 모두 하나로 묶으신다는 요한 신학과 고대교회의 찬가(doxology)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교부는 “사랑의 교제로서의 무한한 신의 사랑(the infinite love of God as a community of love)이라는 개념에 도달”[15]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근거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과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교부가 보여주었던 사랑의 정수는 사랑이 일어날 때, 사랑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요한일서에서 기술되었듯,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며, 그 하나님께서 사랑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사랑 자체를 사랑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16]
이러한 교부의 주장은 사랑 자체와 하나님 사랑을 정당화하며 더 나아가 이웃 사랑까지에도 확장된다. 또한, 교부는 사랑과 지성이 분리되지 않음을 더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어서 사랑과 지혜는 같음 역시 역설한다. “마음이 자기 자신을 알고, 사랑이 자기 자신을 알 때, 거기에 삼위일체가 존재한다: 마음, 사랑, 지식; 이 세 가지는 혼동될 수도, 혼합될 수도 없다.”[17] 마음(지성)과 사랑의 단일성에 대한 교부의 주장은 인간 내면과 하나님의 합일까지도 이어지며, 삼위일체론 하나님을 알기에 앞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교훈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놀라운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이 어떻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교부는 논리적 증명이나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넘어서, 인식론적이고 심리학적인 분석을 통해 ‘삼위일체의 모상(흔적)인 인간 지성(마음)’관찰하며 답을 찾으려 했다. 따라서, 이러한 교부의 시도에 대해 Edmund Hill은 “한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사랑의 백서”라고 평한 바 있으며 동일한 맥락에서 “인간 내면에 깃든 신적 삼위일체의 모상임을 간파라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지성에서 그 모상을 완성하려는 사명감을 고취받는다”. 다시 말해, 교부가 믿음으로 매어 묶었던 삼위일체, 하나님 인간의 마음, 사랑의 관계는 당대에는 물론 가히 파격적이었으며 현재까지도 감동으로 남아있으며 여전히 신학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기 전에, 인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은 교부가 당시 금욕주의와 더불어 역설했던 하나님 얼굴의 관상에 대한 필수 조건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교부에게 ‘삼위일체론’이라는 교리는 단순히 교조주의적 교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세와 관련된 하나의 삶의 철학 혹은 삶의 신학이었던 것이다.[18]
그러나 여전히 교부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드러나지 않은 점. 그리고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교부가 신플라톤주의의 현상계와 이데아계의 이분법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고 소유하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현실게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영원 이전의 현실적 삶의 세계를 경시했다는 점은 교부에게 충분히 가해질 수 있는 비판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III. 한나 아렌트의 아우구스티누스 비판과 사랑 개념의 확장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 한나 아렌트의 박사 학위는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에 대한 것이었다. “사랑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제목으로 기존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했던 사랑 개념의 한게와 모순을 지적했으며, 사랑이 단순히 이웃사랑에 그칠 것이 아니라 타자 사랑과 세계 사랑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그의 지도 교수였던 칼 야스퍼스에게 보냈던 서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세계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는 영원성보다는 시간적 차원에서의 세계의 지속성에 천착하였으며, 이 세계의 사멸성보다는 탄생성에 희망을 두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세계는 ‘천막’이나 ‘불모지’가 아니었고 오히려 ‘안식처’였던 것이다.
양차 대전과 특히나 홀로코스트 이후의 야만의 시대, 절망의 시대를 겪었던 아렌트는 전통과 종교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직접 보았다. 종말론적 절망이 세계를 뒤덮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세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디스토피아적 우울이 세계를 잠식하고 있을 때조차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에게 세계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런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의 세계에 대한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사유를 살펴보기 전에 그가 어떻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과 세계 개념을 비판하였는가에 대해서부터 먼저 살펴보자.
앞서 교부의 사랑 개념에 대해서 살펴본 바 있는데, 아렌트는 교부가 정의하는 사랑 개념이 과연 현실과 적실성을 지니는가에 대하여 질문했다. 교부는 ‘사랑’을 기독교 신앙의 최고 강령,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자신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씀을 구체적 현실에서 실천 가능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아렌트는 과연 그것의 실현 가능성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다시 말해, “세계와 세계적 욕구들로부터 소원해진 신자에게 이웃의 적실성(neighbor’s relevance)이란 무엇인가”[19]의 문제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문의 배경에는 아렌트에게 사랑은 현실의 영역에서 ‘이웃 사랑’즉 소외된 사람들, ‘타자에 대한 사랑’이었고 그 타자들과 더불어 사는 ‘세계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타자에 대한 무관심, 이기심, 극도의 개인주의로 인해 나의 안위의 보장만을 주장했던 세계의 결과는 참혹한 대학살과 전쟁인 그런 상황에서 아렌트의 ‘사랑 개념’은 매우 허공을 떠다니는 구름과도 같은 이상인 환상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에 대한 배려와 타자의 권리에 관심을 가졌으며 친절과 존중을 잃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단순히 개념적으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규명하기보다는 이웃 사랑과 타자 사랑 더 나아가 세계 사랑을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할 것이며 그것이 어떤 타당성을 갖는가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랑이란 외부의 어떤 대상을 향한 갈망으로 그 대상을 소유하고 보유하고자 하는 일종의 욕구”였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을 갈망한다는 것은 목적하는 대상의 결핍 상태를 의미하며 결핍된 대상을 소유하고 보유하게 될 때야 비로소 욕구가 충족되어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것이 교부의 행복론이라고 아렌트는 간주했다. 그렇게 충족이 되어 행복해지기라도 한다면 다행이지만, 교부가 보기에 연약한 인간은 현실 세계라는 유한성에 속해 있는 한 갈망하던 대상을 소유하거나 향유하게 되는 즉시 행복해지기는 커녕 어렵게 거머쥔 대상이 상실 될 것을 염려하여 갈망이 곧 두려움으로 바뀐다. 그것이 소멸, 생성, 변화라는 속성 다시 말해 죽음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한계였다. 그러나, 이애 대해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이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어떤 절대 현재”로 투사된 것이며 따라서 무시간적 영원과 대비되는 일상 세계의 삶과 사물의 가치는 무의미한 것이고 욕망되어서는 안되는 것의 자리로 박탈된다고 지적한다. 즉,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한 갈망으로서의 사랑의 개념이 수반하는 구조에는 완전한 존재로서의 하나님 사랑과 세계적 존재 이웃 사랑이 병행될 수 없는 모순이 배태되어 있다”[20]고 비판한 것이다.
상실의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영원한 대상을 향한 갈망은 오직 미래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현실 세계에서 누리는 삶의 가치는 부정되어야 한다. … 세계의 이미지는 도상위에 잠시 거치는 장소, 곧 순례자가 영원에 도달하기 위해 잠시 머무는 천막과 같은 세계로 그려진다. …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실행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21]
위 인용구는 아렌트가 교부의 ‘갈망으로서의 사랑’을 왜 비판하였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며 이때 세계가 왜 도구적 가치만을 지니는 ‘천막’으로 박탈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아렌트는 교부의 ‘귀환으로서의 사랑’에 대하여 세계를 ‘불모지’로 박탈시킨다는 연유로 비판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갈망으로서의 사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랑으로 이는 이미 행복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에 결국 욕망 이전에 이미 과거의 행복에 대한 지식,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선재된 행복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기억에 있으며 이러한 기억은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내재된 본유 관념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에 저장되어 있다.”[22] 즉 아렌트의 요지는 인간이 현실에서 행복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과거의 행복의 기억을 회상함으로써 재현하는 것일 뿐이기에 현실에서는 완전한 행복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를 ‘불모지’로 만드는 까닭은 하나님만을 사랑(카리타스)하고 하나님만을 위해서 행동해야 하는 인간이 현실 세계에서 온전히 행복한다는 것 자체가 그 자체로 세계를 자신의 기원으로 선택하는 잘못된 사랑 즉 ‘큐피디타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창조주 하나님을 선택해서 귀환해야 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세게에 대해 자기 부정적 태도를 견지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부정’은 자아상 뿐만 아니라 세계상을 부정적인 것으로, 즉 불모지로, 그 어떤 완전한 행복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곳으로 만드는 동시에 따라서 이웃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쓸모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린다. 영원의 세계의 아류 밖에 안되는 곳에서 실천하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비관이 그리 비합리적인 비관은 아닌 듯하다.
따라서 아렌트는 이러한 ‘세계’에 관한 오해와 멸시를 극복하기 위해 교부의 핵심 문제인 ‘신의 현존 앞에 홀로 선 단독자의 고백적 특징을 갖는 신앙’ 즉 매우 개인적인 신앙을 어떻게 공동체의 영역으로 환원시키고 확장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에 당도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아렌트는 죄와 죽음이라는 평등성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평등성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이브라는 조상이라는 역사를 공유하며 그렇기에 죄와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운명의 문제를 공유하는 인간의 평등성, 그리고 낮아지신 하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구속과 구원의 은총을 공유하는 인간의 평등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러한 평등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상호사랑을 가능케 한다고 아렌트는 설명한다. 따라서,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제는 아렌트에게 더이상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평등하게 신 앞에 서있다는 상호성의 해결책이 되는 것이다.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이웃 사랑, 타자 사랑 그리고 세계 사랑의 적실성이 긍정적으로 실천되고 상호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은 집단적 신자들의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의 개인의 신앙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기원과 정체성을 획득한 이후에야 비로소 카리타스 사회적 사랑으로 이웃과 타자를 사랑할 수 있으며 바로 이러한 형제자매애가 의무가 된다고 지적한다. …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단독자의 관계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명시성”을 획득한 개인이 자신의 과거 죄악에 있어서 평등성, 현재 은총에서의 평등성에 기인해 모든 사람,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형제처럼 상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렌트는 사랑은 인류를 향하는 것이 아닌 개별자를 향한다고 말한다.[23]
또한 아렌트는 교부의 사랑 개념에서 유추된 ‘영원을 향한 도상에서의 천막 이미지’, 무가치한 ‘불모지’를 극복하고 오직 사랑으로 만들어야 하는 목든 인간의 안식처로서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전 삶 자체를 헌신한다. ‘사멸성’이 팽배한 세계가 아니라 ‘탄생성’으로 충만한 세계, 즉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진 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과 행위의 탄생을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의 세계를 만든다. 이것은 용서와 약속의 세계이다. 아렌트는 인간 행위가 갖는 특수성인 ‘예측 불가능성’과 ‘환원 불가능성’에 대하여 각각 ‘약속’과 ‘용서’의 개념을 제시한다. 세계의 지속성과 안전성을 위해 되돌릴 수 없는 행위의 결과의 환원 불가능성에 대해 ‘용서’를 통해 잘못된 과거와 단절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허락함으로써 세계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대속하셨음과 같다. 또한, 예측 불가능한 세계의 불안에 대해서 예수께서 언약하셨듯이 세계의 지속과 희망을 약속한다. 이러한 현실 세계 속에서 인간은 소외된 모든 사람들 다시 말해 이웃을 위해 책임지고 배려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세계는 안식처가 될 것이라고 아렌트의 사랑은 기대한다.
이러한 아렌트의 사랑은 관념적이지 않고 매우 실천적이며 구체적인 실천의 장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아렌트는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곧 우리가 누군지를 결정한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며 책임적 사랑을 역설한다. 그리고 용서와 약속을 상기시키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이 승리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IV. 결론: 사랑의 신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인해 고통받고 두려워하며 사랑을 믿지 못할 때에도 사랑을 알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어차피 불가해한 것이기에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끝없이 탐구하고 연구했다. 어떻게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전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랑을 받는 것인지, 어떻게 사랑을 주는 것인지 어떻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지,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지의 질문을 차례로 던졌다. 생각해보면 친구가 해 준 말 하나가 기억이 난다. 그 친구는 나에게 “너는 사랑을 신앙하는구나.”라고 말했다.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평생 구하며 그것을 바라보는 것, 어쩌면 지금까지 관련된 모든 사랑과 관련된 질문이 결국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착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부러 ‘사랑’을 글에도 입에도 담지 않으려 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럴수록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강박은 비대해져만 갔다. 하지만 어떠한 사랑의 실천도 무용하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정말 무기력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기력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대속으로 이미 극복된 것이 아닌가! 그분께서 용서하셨고 언약하진 이상, 세계는 더 이상 불모지나 천막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랑이 충만할 수 있는 곳이며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사랑에는 원칙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칙은 “혼자서가 아니라 반드시 타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24] 다시 말해 인격과 인격의 만남, 그 마주함이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이 만남이라는 것은 특별하다. 진정한 사랑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생명을 고양시키면서 나의 생명이 동시에 살아나게 된다. 서로의 성장을 기뻐하고 성장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단지 나는 사랑의 연합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그 관계성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나와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음에 그 신비를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참여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직도 내게는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있다. 나에게 가장 와닿았던 구속 교리에 관한 설명은 아담과 이브가 지은 원죄는 신에 대한 죄이므로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은 절대로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줄 수가 없으며 그 죄를 씻을 만한 처벌 또한 없다. 공의의 하나님의 정의에 입각한다면 인간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음을 가엽게 여기시고 뭍으로 강생하셨다. 인간이 되셔서 고통을 똑같이 느끼시면서도 그들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고 피로 대속하셨다. 그렇게 받은 용서고 구원이고 생명의 언약이다. 이 신비를 어떻게 인간이 이해한다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살아게신 하나님은 사랑이시자 생명이셨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여전히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상이 남아있다. 또한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이 인간들이 살아있는 세계는 사랑이 가득하리라는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이 두 학자가 성경이나 교리를 비롯한 이 둘을 다루는 신학 전체를 설명할 수도 없고 절대적 진리라 할 수는 없을 것임이 자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폭력이 만연한 시대에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스스로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고 그것을 정결하게 할 수 있으며 아렌트의 권고처럼 타인을 좀더 다정하게 대하고 그들을 배려하며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사랑이 무엇인지, 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의 모상인 나의 마음을, 그리고 나와 같이 죄와 죽음 그리고 구원을 평등하게 공유하고 있는 저 사람들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는 강령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참고문헌
아우구스티누스. (2016). 고백록. (성염, 역). 파주 : 경세원
아우구스티누스. (2015). 삼위일체론. (성염, 역). 칠곡군 : 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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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구. (2014). 사랑에 관하여. 한국여성신학,(79), 141-147.
김정숙. (2016). 기독교 신학적 사유를 통한 한나 아렌트의 세계사랑의 의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개념과 세계 이해를 중심으로. 신학사상, 175, 205-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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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하. (2008). 어거스틴의『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 나타난 사랑의 개념. 대학과 선교, 15, 171-195.
한병수. (2019). 사랑의 해석학: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장신논단, 51(3), 9-39, 10.15757/kpjt.2019.51.3.001
<Abstract>
The Mystery of Trinitarian Love and Salvation: Exploring the Concepts of Love in Augustine and Hannah Arendt
Park Jeongseo, Yonsei Univ.
Theoloy, Junior
The existential question of "What is love?" has been a recurring theme throughout human history. It can be said that the course of human history has been shaped by how love is defined. However, as Roland Barthes pointed out, "We always fail in speaking about what we love." Love is a mystery, much like pain, anxiety, good and evil, and the divine. Love remains elusive to any intellectual language, yet it manifests itself in the human heart.
In this final report, the author reflects on the question of "What is love?" and "How can we love God and our neighbors?" inspired by the study of St. Augustine's book "De trinitate" in the course "Reading Christian Classics" at Yonsei University in 2023. The author aims to explore various concepts of love and intertwine them with the central questions. To achieve this, an overview of the concept of love related to the Trinitarian God, as presented by St. Augustine in "De trinitate," will be provided.
Furthermore, the report delves into the critique and alternative perspectives of political philosopher Hannah Arendt, as presented in her book "Love and St. Augustine," regarding the practical limitations of the concept of love proposed by St. Augustine. However, despite these efforts, the mystery of love, which remains unresolved and unproven, will be contemplated. The author raises the question of how to love oneself, neighbors, others, the world, and God within the enigmatic realm of love. Moreover, the report proposes an answer in the form of a perspective on love that encompasses the image of the heart as a reflection of the Trinitarian God, and equal love for others who share the issues of sin and salvation.
Keywords: Love, St. Augustine, Trinitarian Theology, Heart, Hannah Arendt, Love for the World, Salvation
[1] Roland Barthes, “On échoue toujours à parler de ce qu’on aime”, Le Bruissement de la Langue (Paris: Seuil, 1984), pp. 333-342.
[2] 사랑의 정의에 대한 역사는 사회학에서 주로 다루는 영역이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하겠다.
[3] Roland Barthes, “On échoue toujours à parler de ce qu’on aime”, Le Bruissement de la Langue (Paris: Seuil, 1984), pp. 333-342.
[4] 마 22:37
[5]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요일 6:8
[7] 마 22:39
[8] 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차성구 옮김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06).‘용납’은 틸리히가 『존재의 용기』의 6장에서 제시한 개념으로서 존재와 비존재를 모두 싸 안으시는 하나님, 즉 용납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맥락에서 차용하였다.
[9]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4388488
[10] http://www.ngo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37964
[11] 이재하. (2008). 어거스틴의『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 나타난 사랑의 개념. 대학과 선교, 15, 173.
[12] 아우구스티누스. (2015). 삼위일체론. (성염, 역). 칠곡군 : 분도출판사. 9.5.8.
[13] 아우구스티누스. (2015). 삼위일체론. (성염, 역). 칠곡군 : 분도출판사.
[14] 이재하. (2008). 어거스틴의『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 나타난 사랑의 개념. 대학과 선교, 15,
184.
[15] 위의 논문, 186쪽.
[16] 아우구스티누스. (2015). 삼위일체론. (성염, 역). 칠곡군 : 분도출판사. 8.7.11.
[17] 위의 책, 9.5.8.
[18] 또한 사랑과 지성, 인식의 관계에 있어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 사랑할 수 없다는 것과 인간은 이미 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 역시 저서에서 교부가 주요하게 다룬 지점이나 이 글에서는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19] 한나 아렌트. (2013).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 한나 아렌트 저작선. (서유경, 역). 서울 : 텍스트.
[20] 김정숙. (2016). 기독교 신학적 사유를 통한 한나 아렌트의 세계사랑의 의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개념과 세계 이해를 중심으로. 신학사상, 175, 212쪽.
[21] 위의 논문, 213쪽.
[22] 위의 논문, 215~216쪽.
[23] 위의 논문, 25~26쪽.
[24] 강선구. (2014). 사랑에 관하여. 한국여성신학,(79),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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