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엔 무얼 했을까?
김재원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민족은 그들 나름대로 풍속이 있고 기원이 있다. 우리 민족도 예외 없이 우리 문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들은 조상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풍속들은 고리타분하고 세련되지 못하다는 이유로 미련 없이 버리고 근원도 알 수 없는 요상하고 얄궂은 외래문물에 휩쓸려 나를 까맣게 잊어 가고 있다.
2월 21일, 정월대보름 달마중 행사를 계획하면서 우리 조상들은 대보름을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냈는지 살펴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아, 세시풍속을 살펴보고자 한다.
농가에서는 대보름 하루 전인 14일에 벼가릿대(禾竿)를 세워서 풍년을 기원했다. 벼가릿대란 짚을 묶어 벼, 보리,, 기장 조, 같은 곡식 이삭과 목화송이를 여기에 꽂아서 장대에 매달고 그 장대를 사립 기둥에 세우는 것을 말한다.
또 나후직성(羅睺直星)에 든 사람은 제웅으로 액막이를 하는데, 이것을 제웅치기라고도 한다. 나후직성이란 사람의 나이에 따라 그의 운수를 맡아보는 별을 말한다. 토, 수, 금, 월 등 9개의 직성이 있기 때문에 9년에 한 번씩 돌아온다. 남자는 10살에, 여자는 11살에 처음으로 든다. 자기에게 직성이 드는 해는 바로 액년의 해를 의미하는데, 직성의 액을 몰아내는 것을 <직성 푼다.>고 한다. 이 직성을 푸는데, 짚으로 사람모양을 만든 꼭두각시 위에 헝겊으로 옷을 해 입힌 제웅을 사용한다. 제웅을 처용이라고도 한다. 이는 신라시대 있었던 용왕의 아들 처용의 이름에서 따온 것 같다. 직성에 든 사람은 이름과 출생 간지를 적은 종이와 푼돈이나 쌀을 제웅 속에 넣어서 다리 밑이나 길가에 버린다. 지역에 따라서는 동네 아이들이 직성이 드는 사람의 집에 몰려가서 제웅은 찢어서 버리고 돈과 쌀은 빼내간다. ‘직성 풀린다’라는 말은 이 나후직성 풍속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이들은 겨울이 시작되면서부터 나무로 콩깍지 모양으로 호리병을 세 개 만들어 청, 홍, 황 색칠을 해서 색실 끈에 매어 차고 다니다 14일 밤중에 남몰래 버려서 액을 막았다.
보름날 시절 음식은 약밥이다. 이 유래는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 소지왕이 대보름날 천천정에 행차할 때 까마귀, 쥐, 돼지의 덕으로 목숨을 보전한 고사가 있다. 그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약밥을 만들어 제사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토 풍속도 있다. 대보름날 새벽 종각 네거리의 흙을 파다가 집 네 모퉁이에 묻거나 부뚜막을 바르면 복이 따라온다는 풍설에서 유래한다.
아침에 호두, 은행, 밤, 잣 같은 견과류를 깨 먹는 부름풍속도 있다. 이렇게 하면 일 년 동안 만사가 여의하고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부름과 부스럼이 발음이 유사한데서 온 것이고 그 기원은 부스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직까지 두꺼운 껍질 속에서 잠자고 있는 곡령(穀靈)을 일깨워 새싹 틔울 준비를 하라고 불러 깨우는 그야말로 “부름”의 습속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본래의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행위만 이어졌기 때문에 엉뚱한 부스럼과 관련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른 아침에는 귀밝이술(耳明酒)를 마신다. 데우지 않은 청주를 한 잔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청주 같이 맑고 투명하고 정확한 소식을 신속하게 받겠다는 정보 확보의 유감주술에서 나온 풍속이다.
박나물, 호박고지, 버섯, 시래기, 가지껍질, 오이껍질 등을 삶아 먹고 취나물, 아주까리 잎, 배춧잎에 밥을 싸먹는 복쌈 풍속도 있다. 이렇게 하면 꿩알을 많이 줍는다는데, 실은 여름에 나는 나물을 묵혀 두었다 나물이 없는 겨울에 맛보는 균형적인 영양의 섭취방법이다.
아침밥은 5곡 이상의 곡식을 섞은 잡곡밥을 먹는다. 오곡밥이라고 하는데 이웃과 나눠 먹는다. 제삿밥을 나눠 먹는 풍속에서 기원한 것이다. 필자의 고향에서는 아침이 되면 아이들이 복조리를 들고 성씨가 다른 3집 이상의 밥을 얻어 오는 풍속이 있었다. 사립문을 밀고 들어서면서 “밥 얻으로 왔심더”하면 주인아주머니는 쫓아 나와서 덥석 안아주면서 덕담과 먹을 것과 오곡밥을 덤뿍 담아준다. 이웃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같은 성씨끼리만 어울리지 말고 모두가 화목하게 지내자는 데서 창안된 풍속이다.
더위팔기(賣暑), 아침 해뜨기 전에 만난 사람의 이름을 불러서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라”한다. 이렇게 하면 그 해는 더위를 먹지 않는 다고 한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으면 “학(謔실없는 희롱)”이라 했다. 대답을 하면 더위를 사게 되고 대답 하지 않으면 '학'이라고 놀림 받게 된다. 이것은 모든 일에 정신 바짝 차리고 신중하게 대처하라는 교훈에서 나온 풍속이다.
대보름날은 개를 굶긴다. 만약 개에게 밥을 주면 여름에 파리가 많이 꾀고 마르기 때문에 ‘개 보름 쇠듯 한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개에게 밥을 주는 경우가 있다. 몸이 마르고 얼굴이 까매지는 아이는 여러 집의 오곡밥을 얻어 와서 절구 위에 걸터앉아 개와 마주 보면서 개 한 숟가락, 아이 한 숟가락 이렇게 나눠 먹으면 살이 찌고 검은 기가 없어진다고 한다.
과일나무 시집보내기, 과일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우면 과일이 많이 열린다고 한다. <농경전서>에는 오얏나무에만 이렇게 한다고 했는데 민간에서는 모든 과일나무에 다 통용시키고 있다.
아이들은 겨울 들어서면서 날리던 연에다 가족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쓰고 身厄消滅(신액소멸)이란 글자를 써서 대보름 해질 무렵에 연줄을 끊어 멀리 날려 보낸다. 연에다 액을 실어서 멀리 날려 보내고 대보름 이후는 연을 날리지 않는다.
돈치기, 자그만 구덩이를 파고 돈을 넣고 일정한 거리에서 돈을 던져 맞추면 가져간다. 돈이 없는 조무래기들은 사금파리 치기를 한다.
다리밟기(답교) 대보름 밤이면 서울의 많은 사람들이 종로 보신각으로 몰려들어 종소리를 듣고 나서는 각각 흩어져 밤새도록 다리밟기를 한다. 대보름 날은 야금(통행금지)이 없기 때문에 밤새도록 웅성거렸고 그로 인해 사건이 많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대보름 다리밟기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는데 너무 성행하여 나라에서 금지하여 체포, 구속까지 해도 소용없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 풍속은 불교가 성행했던 신라시대의 탑돌이가 불교가 쇠퇴해지면서 변형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돌싸움(석전), 동서 두 편으로 나누어 줄다리기도 하지만 돌싸움도 많이 했다. 돌싸움 중에 가장 유명한 곳이 서울 만리현 돌싸움이다. 애오개(아현동) 사람들과 삼문(불타버린 남대문, 서대문, 동대문)밖 사람들이 돌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싸우는데, 지는 편이 달아날 때까지 계속되는 싸움이다. 이때 부정선수들이 용병처럼 무더기로 끼어들어 승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데, 용병의 대부분은 마포의 불량 청소년들이었다고 한다. 이 싸움은 무척 맹렬하여 머리가 터지는 것은 예사고 목숨을 잃어도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고 동국세시기에 나와 있다. 관에서는 금령을 내려 막으려 했지만 고질화 된 관습이라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고 한다.
안동에는 16일 날, 내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누어서 돌싸움으로 승부를 가리는 풍속이 있었다. 돌싸움 풍속의 기원은 <신당서>의 고려전에 나온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초 군중들이 패수 가에 모여 두 편으로 나누어 서로 돌을 던지고 물을 퍼부으며 싸우는데 밀고 밀리기를 두 세 번 하다가 그친다.”고 되어 있다.
달마중,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장 널리 알려진 세시풍속이다. 우리 지역에서는 점심 먹고 나서 조무래기들은 불쏘시개로 쓸 짚단을 한 단씩 들고 나이 든 형아들은 낫을 들고 산 꼭대기로 올라가 솔가지를 노적가리처럼 쌓는다. 달이 돋을 무렵 불을 붙여 태우면서 소원을 빈다. 동네마다 연기가 솟아오르고, 달불의 크기가 곧 동네의 세와 일치하기 때문에 이웃 동네와 달불 경쟁이 과열되어 패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때 가장 먼저 달을 보는 처녀총각이 시집 장가를 간다는 속설이 있다.
떠오르는 달을 보고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달빛이 붉으면 가물 징조, 허여면 장마가 들 징조다. 달의 테두리가 두터우면 풍년, 얇으면 흉년, 보통이면 평년작이다. 또 달이 뜰 때의 모양, 크기, 출렁거림, 뜨는 위치 등으로 점을 쳤다.
정월 대보름날 밤, 천하의 명당 갓바위서 바라보는 달은 어떤 모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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