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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군부 몰락사> 란 책을 보면
과달카낼 작전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육군의 전환점이었다. 일본에 있어서는 해군 패배의 기점이 미드웨이 해전이라면 육군이 육전에서 처음으로 미국에 패배한 것이 과달카낼이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종군기자였던 이토 마사노리는 "그것은 일본육군의 묘지이름이다" 라고 까지 표현했다.
어쨋든 일본은 과달카낼 전투이후 수세에 몰리게 된다.
말레이 작전과 필리핀 작전을 주체로 하는 남방 제일단 작전은 일본해군의 진주만 기습과 육해군 항공부대에 의한 제공권 확보로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제 1단계 작전의 성공은 연합군의 준비 부족을 노린 작전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연합군의 대병력과의 결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본영의 전략적 과제는 제 1단계 작전이 끝난후의 연합군의 반격시기와 규모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개전 전의 일본 해군은 요격작전을 기본으로 적극적인 진공을 하여 미국의 주력함대와 결전을 시도할 의사는 없었다. 그러나 1단계 작전인 진주만 기습의 성공으로 제 2단계 작전은 적극적 진공에 의한 적함대의 각개격파로 그 방침은 전환했다.
그리하여 일본해군은 당초 계획에도 없었던 하와이 및 오스트레일리아의 공략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일본육군의 생각은 어떻했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태평양 지역으로 공략해 가기보다는 인도방면의 작전에서 영국의 숨통을 끊어놓고 중국을 단독으로 굴복 시킨다음 기존의 점령 지역의 완전한 확보를 주로 하는 전략을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육군은 4천 해리나 떨어진 오스트레일리아 까지 진출한다는 것에는 보급문제 때문에 곤란하다면서 완강히 반대했다. 이것은 육해군의 병참문제의 차이에서 당연한 것이다.
원래 해군은 육군과 같은 병참 보급선이 없다. 함정에는 몇달치의 양식.탄환을 적재하여 목적지를 향해 항해 하므로 추송보급의 필요성이 거의 없다. 만약 전세가 불리하면 함대란 간단히 후퇴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육군은 그처럼 간단히 행동할수가 없는 것이다. 지상병력이 커질수록 병참보급선도 규모가커지고 일단 결정된 작전 방향은 변경하기가 곤란하고 만약 보급선이 끊기기라도 한다면 철수도 불가능할 뿐더러 전멸의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대작전의 개시 여부에는 육군은 충분한 보급능력을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육군은 오스트레일리아가 미군의 일본에 대한 반격개시에 있어서 최대의 거점이 된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남방작전의 대성공에 힘입어 미.호주 차단 작전의 필요성에 동의 하여 준비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육군,해군 양군이 타협한 요지 획득의 목표는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피지(Fiji),사모아(Samoa) (FS 작전), 및 포트모로즈비(Port Moresby. MO 작전)로 정해졌다.
그러나 해군은 FS작전 전에 미드웨이.알류산(Aleutian) 공략 작전을 제안했으며 보병 1개 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부대의 파견을 육군에 요청했다. 육군측도 여기에 찬성하여 이치키 연대 3천명을 할애하여 여기에 충당했으나 미드웨이의 참패로 FS작전은 일시 중지되었다. 그러나 FS작전의 중지가결정되기 전에 현지 해군부대는 미국.호주간의 차단 작전에 이용될 비행장 건설을 과달카낼에서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2.
....한편 미군은 미드웨이해전후 처음으로 주도권을 쥐고 일본군의 진출을 억제할 시기를 맞았다. 니미츠 제독과 멕아더 장군은 반격을 될수 있는대로 빨리 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 했으나 맥아더는 직접 라바울(Labalu)을 탈환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해군측은 단시일에 출동이 가능한 유일한 수륙양용부대 제 1해병사단을 솔로몬(Solomon)제도를 넘어, 미.호주 연합군의 항공위력권 밖에서 강화되고 있는 일본 항공기지의 전면공격에 돌린다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성공이 용이하며 큰손해를 피할수 있는 단계적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반격의 제 1단계가 일본군이 비행장을 건설중인 과달카날로 정해졌다. 일본군의 미.호주 연락선에 대한 진공 기도를 미연에 격파해야겠다는 의도에서 이 작전은 가속화 되었던 겄이다.
원래 미국의 대일전략의 기본은 일본 본토 직격에 의한 전쟁종결에 있었다. 그러나 중부 태평양 제도의 제압없이는 미군의 대일 진공은 있을수 없으며 항공기의 전진확보도 곤란했다. 미군은 이와같은 장기구상 하에 일본의 반격 예측 시기보다 빨리 일본군의 보급선이 무척이나 먼 과달카날 섬을 공략해 왔던 것이다.
다시 일본의 상황으로 본다면.
1942년 8월 7일, 미군이 과달카날과 트라기 섬에 상륙했다는 첫소식이 들어 왔을 때 대본영 육군부 내에서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과달카날 섬은 남태평양 솔로몬(Solomom)해상에 떠있는 일본의 시코쿠 의 약 3분의 1정도의 작은 섬이다. 또한 이 섬에서 해군육전대 150명과 인부 약 2천명 이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이때가 처음 이었다. 그만큼 일본 육군측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무지 했던 것이었다.
대본영 육군부는 미군의 반격시기는 빨라야 1943년 이후가 되리라는 희망적 관측에 쏠려 있었으므로 적의 상륙은 일종의 정찰작전 이거나 비행장 파괴작전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적의 상륙부대는 보잘것 없을테고 거기에다가 미육군은 약하므로 과달카날 섬 탈환 병력은 소규모일망정 빨리 파견할수 있는 부대가 좋으리라고 판단 했던 것이다.
미군이 해병대를 중심으로 육해공의 기능을 통합하여 섬에서 섬으로 축차 총반격을 감행하고 수륙양용 작전 이라는 새로운 전법을 개발했다는 것을 일본 육군, 해군 모두가 꿈에도 생각 하지 못한 것이다.
3.
결과적으로 대본영은 8월 10일, 불과 2천 명의 병력을 가진 이치키 지대를 제 17군 지휘하에 넣고 과다카날 섬의 탈환을 명령 했던 것이다.
이치키 지대는 홋카이도 소재의 제28연대를 기간으로 하는 보병부대로
미드웨이 섬점령을 위해 출진했다가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상륙이 불가능해져 괌(Guam) 섬으로부터 본국으로 귀환길에 있다가 급거 과달카날 섬으로 전용 되기에 이른것이다.
이치키 대령은 육군보병학교 여러차례 역임한 실병지휘에 숙달한 군인 이었다. 이치키는 일본육군의 전통적 전법인 백병총검에 의한 야습을 감행하면 미군의 격파는 용이하리라 믿고 있었다.
여기서 그의 자심감을 엿볼수 있는 대화가 나오는데 제17군 참모에게 "트라기 까지도 우리부대가 진격하여 탈취해도 무방한 것인가? "
하고하고 물었다고 한다.
구축함 6척에 나누어 탄 이치키 지대의 선발대 9백명 은 8월 18일 밤,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미군 진지에서 약 30Km 떨어진 타이보 곶에 상륙했다. 과달카날 섬에 상륙한 미군은 해병대 제1사단을 중심으로 한 1만3천 명이었으나 이치키 대령은 미군숫자는 많아봤자 약 2천명으로 보고있었다.
이치키 대령은 식량 7일분으로 수륙양용작전을 개발한 미해병대와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치키 지대의 선발대는 보병 1개대대 공병 1개 중대로 이루어졌다. 8월 18일의 상륙과 동시에 후속부대의 상륙을 기다리지 않고 선발대 9백명 만으로만 비행장 탈환에 나섰다.
이치키 지대의 후속부대는 22일 대형 수송선 2척으로 뒤쫓아오기로 되어 있으며 다시 가와구치 기은다케 소장이 지휘하는 제224 보병연대 가 28일 증파될 계획 이었으므로 이들 증원부대의 도착을 기다렸다가 그곳의 지형을 정찰한 후에 총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치키 선발대는 미군은 약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륙하자마자 행동을 개시하여 다음날인 19일에는 오전중에 이미 베렌데 강에 도달 했던 것이다.
이 날 오후 14시 30분, 34명의 첨병소대는 잠복하고 있던 미군에게 갑자기 포위되어 거의 섬멸 되고 말았다.
4.
한편 과달카날 섬의 미해병대 최고 지휘관인 반데그리프트 해병 소장은 유리하다고만 할수 없었다. 해병대는 대일 작전에 대비하여 수륙양용작전의 방법과 이론을 개발했으나 1943년 까지는 실전에 참가하리라고는 예상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보장교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트라기, 과달카날 섬에대한 정보도 부족한 상태였다. 뉴질랜드에서 상륙작전준비를 했으나 항만 노동자의 조합이 귀찮은 병참을 위한 하역을 거부했기 때문에 해병들은 8시간 교대로 물자의 적재 작업을 해야했다.
또한 과달카날 섬에 무혈 상륙은 했으나 이 작전에 비관했던 플레처 제독은 8월 8일, 일본의 내습의 위험을 느끼고 제61 기동부대를 보급품의 반밖에 하역시키지 못한채 철수하고 말았다.
제62 기동부대.수륙양용부대 지휘관 튜너 소장은 후에 이것을 "중요전력의 탈주"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모든함대가 돌아간건 아니었다. 클레처 영국해군 소장휘하의 미.호주 혼성의 순양함부대가 작전해역에 머물고 있었으나 8월9일, 미가와 구니치 일본해군 중장의 준순양함 5, 경순양함 2, 구축함,1 척으로 이루어진 제8함대와 교전하여 5척의 중순양함 중 4척이 격침, 중순양함 1, 구축함 1척의 손상이라는 완전한 대패를 안고 말았다.
이 때 룽가 근해의 미 수송선단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다. 만일 미가와 함대가 공격을 속행하여 수송선단을 격파했다면 과달카날 전세는 아마 180도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가와 중장은 공격을 중단했다. 미군의 반격과 어뢰 등의 감소를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지만 함대결전사상이 이런 행동을 취하게 했을 요인의 하나였을 것이다.
제17군 사령부는 제8함대가 미 수송선단에 재돌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불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후다미 아키사부로 참모장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8함대는 정규 순양함5척을 격침 시키고 귀항한듯 하다. 적의 항모를 두려워한 조치일까.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으니 유감천만이다. 이제 트라기는 끝내 미군의 유린에 맡겨 버린 것인가. 과연 그렇다면 이것의 수복은 쉬운일이 아니다."
이 < 제1차 솔로몬 해전>의 패배 후 플레처는 그의 함대를 위험수역으로부터 철수한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해병대는 과달카날 섬에 방치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반데크리프트는 공격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방어에 중점을 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가장 중요시한 것은 비행장의 신속한 정비였다. 방어 진지는 룬가 강 유역에서 일 강 까지 연장되었다. 중화기 진지도 방어선을 따라 각처에 구축되었다.
또한 전차대에 대해 즉응 태세를 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럴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군 천병소대와 마주쳐 이를 쓰러뜨리고 나서야 일본군의 육상부대가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일본군에게 사로 잡혔다가 탈주민의 전직 경찰관 자코브 부처가 일본군의 병력에 대하여 통보했다.
5.
이치키 지대는 오후 6시, 렌고를 출발, 단숨에 비행장 부근까지 돌진할 생각으로 8시에 테날 강에 도착했다. 오후 10시 30분, 선발대가 일 강 우안 100 미터 부근까지 진출하자 소수의 적병이 자동소총을 발사해 왔으나 선발대는 이적을 따돌리고 강 우측 까지 진출, 거기서 정지했다. 지대장과 대대장은 선발대 중대장의 위치까지 선행하여 척탄통의 집중사격 지원하에 선발대를 전방 기슭까지 돌입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이치키 대령은 일 강 하구 가까운 곳 폭 50미터 남짓한, 도하가 쉬울것만 같은 사주를 발견하고 일부를 정면으로 전진 시키고 주력을 이 사주를 넘어 공격 하게끔 대기 시켰다. 그리하여 돌격을 감행한 것이 21일 새벽 이었다.
사주를 넘어서려는데 좌측 전방 언덕에서 맹렬한 포화가 쏟아져 왔다.
미군은 기관총.자동소총.박격포.수류탄 등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응전했다. 이치키 지대 일부는 철조망을 파괴.돌입하는 자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사주 앞뒤에서 시체로 쌓여 갔다. 지대장은 기관총 중대 대대포 소대리 전투에 참가 시켰으나 지역적으로 유리한 미 해병 제 1연대의 집중화력으로 전황의 호전은 바랄 길이 없었다.
당시 해군의 항공대 및 함정에 의한 육해공의 협력에 대해서는 사전의 계획도 준비도 없었다. 21일 9시, 지대의 남쪽으로부터 미 해병대의 반격이 시작 되었다. 전날인 20일에는 해병의 항공대인 < 돈트레스 > 및 < 와일드캬트 > 등 31대가 헨더슨(Henderson) 비행장에 도착해 있으며 이제 막 사용이 가능해진 활주로에서 떠오른 비행기도 지대에다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오후로 접어들자 미군 전차 6대도 가세하여 반격이 수행되었으며 지대의 배후를 짓밟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반데그리프트 제1해병 사단장은 "전차의 후부는 흡사 고기를 갈아 뭉개는 기계처럼 보였다." 고 표현했다. 장병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일본군에게 매우 불리해졌다.
이치키 대령은 이미 손을 쓸 방법이 없음을 느끼고 오후3시경 군 깃발을 불사르고 자결해 버렸다. 대다수의 장병들도 지대장을 쫓아 장렬한 죽음을 택했다.
이 과달카날 섬에서의 첫번째 승리는 미 해병에 대단한 자신을 가져다 주었다. 미군의 전사는 이 전투의 결론에 대해 " 이 시각 이 후 미해병대는 무적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 라고 기록 했다.
미군은 일본군이 만든 비행장을 20일 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 때문에 과달카날 섬의 제공권은 미군손으로 들어가고 이치키 지대의 제2제단은 과달카날 섬에 접근할수 없어 상륙은 25일로 연기 되었다. 따라서 일본연합함대는 24일, 미 기동부대의 진압차 출동하여 여기에 < 제 2차 솔로몬 해전 >이 전개 되었다. 결과는 미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의 대파, 일본의 항모 류오는 침몰, 또한 이치키 지대 제2제단을 호위하고 있던 제2수뢰전대의 일부는 손해를 입고 서북방으로 대피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 해전은 미.일 기동부대끼리 항공공격으로 맞선 해공전이었으나 쌍방이 모두 철저를 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해전 이후 과달카날 섬의 수송은 주간의 수송선에 의한 대규모 증원에서 야간의 고속을 이용한 추차 연속 수송으로 변경되었다.
6.
이리하여 과달카날 섬에서의 병원.무기.양식의 수송은 대형 수송기로는 불가능해지고 구축함등의 고속함에의한 수송으로 전환 되었으나 이 같은 수송작전은 다음과 같이 육군의 강한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1. 해군은 임무수행보다 자기 함선의 보전을 제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닐까.
2. 해군은 전황 임무여하에 아랑곳 없이 적의 항모, 전함만을 공격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닐까.
3. 해군에게는 적의 수송선을 격침시켜 작전 전반을 유리하게 전개시킬 착상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불만의 타당성 여부는 도외시하더라도 육.해군간의 불신감의 발생은 진정한 통합 작전의 수행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어 갔다.
태평양전쟁은 다른 전쟁과 달리 육.해군간의 철저한 협력과 상호보완성의 작전이 필요한 것인데 일본의 경우는 그런점에 있어서 어처구니 없다고 볼수있다.
어쨋든 야간의 수송에의해 구니후 유기치 소령의 제1대대, 와타나베 히사고토 중령의 제3대대 이치키 지대의 잔존병으로 편성된 혼성 1개대대 센다이 출신의 장병들로 구성된 아오바 지대 에서 지원된 다무라 마사오 소령의 1개대대 등 합계 4개대대로 구성된 가와구치 지대는 8월 29일부터 9월 4일에 걸쳐 타이보 곶 부근에 상륙했다. 여기에 병행하여 오카 아키노쓰케 가 지휘하는 1개대대 는 30척의 대형 발동선을 연결한 수송으로 서쪽의 에스페란스 부근에 상륙했다. 그런데 도중에 미군의 폭격으로 오카 아키노쓰케 부대는 약 450명으로 줄었다.
야간 수송의 경우 구축함 한척의 수송능력은 평균인원 150명, 군수품 약 100톤이 한도이며 대형 발동기의 경우는 인원 200명 정도이며 중화기의 수송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고심 끝의 수송으로 9월 7일까지는 육군 5400명, 해군 200명 ,고사포 2문은 구축함에 실을 수가 없어 시설함 쓰가루를 사용하여 여기에 야포 4문, 연대포(곡사포) 6문, 속사포 14문, 식량은 약 2주일 분만큼 하역할수가 있었다.
그러나 구루메, 하카다, 센다이, 아사히가와 (이상 각지는 구일본군 연대의 소재지) 라는 최정예를 자랑하는 4개 대대로 구성된 가와구치 지대는 미 해병대 1개 사단 1만 6천천 명을 공격하기 위하여 또다시 일본육군의 전통인 야습으로 대처할 예정 이었다.
7.
그러나 지대장은 이치키 지대가 감행했던 것처럼 해안선을 전진하여 일 강을 따라 포진하고 있는 미군을 동쪽에서 공격한다는 것은 같은 운명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테날 강 하구부근 동쪽지구 에서 정글내에 잠입 우회하여 비행장 남쪽에서 적의 배후를 기습하여 하룻밤 사이에 비행장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지대장은 "하룻밤 사이에 적을 무찌르고 짓밟아 새벽까지는 해안선 돌입하라" 고 훈시했다.
이치키 혼성대는 테날 강 상류의 최우단에 배치되고 그 왼편에 다무라 대대 구니후 대대를 차례로 왼편에 포진하고 가와구치 사령부는 구니후 대대의 좌익 후미에 바짝 붙어서 진을 치고 있었다.
13일 오후 9시 5분, 테날 강변의 포에서 다섯발의 신호가 울리고 가와구치 지대의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좌익 제일선의 구니후 대대의 돌진 목표는 비행장 북서쪽의 고지였으나 거기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에드슨 대대의 주력 2개대대 가 포진하는 언덕 좌우 측면은 제1공병대대 ,제1정진대대 후방에는 델 봐레 대령의 포병대가 각기 지원 포진하였다.
이 언덕은 주위의 정글에 있는 나무보다 높고 활주로가 내려다보여 비행장 공격을 위한 당연한 공격로였다. 이 언덕은 전투 후 에드슨 언덕 또는 < 피로 물든 언덕 >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지이다
구니후 대대장은 칼을 빼들고 적 주전지인 제1선을 돌파했으나 제2선을 빠져 나갈수가 없어 맹렬한 미군의 포격속에서 다수의 전사자를 냈다.
구니후 대대장은 적의 중포진지에 돌입하여 중포위에 걸터 앉은채 장렬한 전사를 하고 말았다.
제2선 공격부대인 다무라 대대는 오노데라, 구로키, 이시바시의 3개 중대를 나란히 배치하여 < 센다이 사단 > 의 명예를 걸고 에드슨 언덕으로 돌진했다. 에드슨 대령은 최전선으로 뛰쳐나가 "우리들에게 없고 적에게 있는 것은 근성뿐이다."하며 병사들을 질타 격려했다. 베일리 소령은 후퇴해오는 해병 대원을 잡아서 다시 일선으로 몰아세우며 "너희들은 영원히 살고 싶지 않은가" 하는 해병대의 전통적인 구호를 외치며 저항했다.
좌익의 오노데라 중대는 에드슨 대령의 가장견고한 진지에 부딪쳐 중핵부대의 맹렬한 반격에 육탄으로 맞서며 처절한 전투를 전개했다.
포복 전진과 돌격에 의해 적의 제2선 진지의 일부를 탈취했으나 중대장 이하 다수의 희생자가 생겨 그 후의 전진은 곤란해졌다. 우익의 이시바시 중대는 돌격 직후 평지에 나왔기 때문에 사방에서 집중된 총포전의 세례를 받고 사상자가 속출했으나 제1선 진지를 겨우 점령할수 있었다.
그후 중대는 에드슨 언덕을 넘어 그 북동지역으로 진출했으나 날이 밝아짐에 따라 전진이 곤란해졌다. 다무라 대대장은 제일선의 두 중대의 곤란한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공격을 속행하여 14일까지는 해안선에 진출한다는 결단을 굽히지 않고 예비대인 구로키 중대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다.
구로키 중대는 전투중인 오노데라 중대를 넘어서서 에드슨언덕 우측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중대장은 부상당하고 중대원의 반수를 잃었으나 중대장은 남은 병사 50~60명을 이끌고 적진을 돌파하여 날이 밝을무렵 비행장 남동지구의 제1해병사단 사령부 부근까지 진출했다. 구로키 중대는 그곳을 유린, 돌파를 시도 했으나 적의 방어 화력은 격렬하기 이를데 없고 활발한 공격행동을 취할수 없게 되었다. 플라이스 포병대의 105mm 박격포군만도 이날 약 2000발을 쏘았다.
" 델 봐레 포병대의 경이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에드슨 언덕을 확보할수 없었을것" 이라고 에드슨 대령의 선임장교 그리피스 중령은 후일 기록하고 있다. 다무라 대대장은 14일 야명을 기하여 여전히 공격을 속행하려고 각 중대와 연락을 취하려 했으나 각처에 분산하고 있기 때문에 장악이 매우 곤란했다. 얼마후에 가와구치 지대장의 공격중지 명령이 전달 되었다.
8.
우익 제일선에 위치하여 가장 기대를 걸었던 와타나베 중령의 제3대대는 그동안 무었을 하고 있었는지는 명확한 자료가 없다. 와타나베 대대의 13일밤 전투에 대해서는 야마구치 소장의 수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대대에는 비행장에 돌입하여 먼저 15고지라는 가장 중요한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13일 주간의 대대적인 적의 사격에 겁을 먹은 탓인지 대대장은 부관 그 밖의 인원을 데리고 안전한 장소에 숨어 나타나질 않는다.
방치된 대대는 고참 중대장이 대리로 대대를 지휘하여 야습을 해야 하지만 특별지원의 B대위는 그것을 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대대가 13일밤을 무위로 보낸 것이다.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희망을 걸고 있었던 유력한 대대가 이렇게 되어 버렸다.
나는 이것을 알고 망연자실, 무념의 눈물을 흘렸다. 15일 대대장을 불러 호통을 치고 노여움을 참지 못해, "비겁한 자여, 할복 자살하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당시의 대대장은 만주에서입은 외상이 제발 악화하여 돌격시에 보행불능에 빠져 부관과 함께 정글 내 저지대에 부득이 누워 있었다고한다. 그렇다고 제3대대 전부가 무위하개 지낸것이 아니라 대대장의 명령이 없는데도 일부는 야습에 참가한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도대체가 야습에서의 통합 행동은 매우 곤란한 것이었다.
9월 15일이 되자 가와구치 지대장은 "공격을 감행했으나 적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여 대대장 이하 다수의 손실을 입고 만부득이 룬가 강 왼편에 병력을 집결, 사후의 대책을 강구하고자 함. 장병들의 건투에도 불구하고 불명의 소치에서 온 실패를 통감하는 바임."
하고 군사령관에게 타전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가와구치 소장의 주력은 패배, 후퇴했다. 공격참가 주력 약 3000명. 생존자 약 1500명.
제 17군 사령부는 가와구치 소장 공격 실패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 타이포에 상륙한 적 때문에 일부의 식량등이 수중에 들어오지 않고 또한 공격 준비를 위한 충분한 시간 여유가 없었다는 것.
2. 적의 화력의 우월 (이 전투에 사용된 일본군의 화포는 불과 곡사포 1문, 박격포 2문이었다고 한다.)
3. 정글 때문에 부대간의 연락이 충분히 취해지지 않고 지대장의 명령대로 돌진한 지대병력은 5개 대대 중 구니후(제1) 대대, 다무라(나오보)대대의 2개 대대에 불과하며 결국은 돌격병력이 부족했다는 것, 곧 이치키의 혼성대대인 미즈노 대대는 13일, 공격준비 위치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격하지 못했다. 와타나베(제3)대대는 돌격하지 못했다.
오카 연대 주력은 룽가 서안지구에 책응할 예정이었으나 주정기동중 의 손해가 컷다는 것과 지형이 착잡 또한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락이 취해지지 않아 공격을 하지 못했다.
4. 지대장이 지대의 근간인 오카 연대 주력을 주정기동에 의해 장악하지 못하고 다른 건제가 아닌 여러부대를소수의 지대 사령부에서 지휘하여 이를테면 비건제 부대의 장악 불충분의 폐단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었다는것.
5. 밀림 내에서 더우기 지도가 매우 불완전하여 방향의 유지가 곤란했다는 것.
9.
한편 일본연합함대 사령부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1. 적의 결의가 완강하고 그 방비 대항 수단에 만전을 기하고 있음을 경시하여 제1단계 작전의 아군의 전술을 과신하여 가벼운 장비의 같은수의 병력으로 일거에 기습에 의한 승산을 추구 했다는 것.
2. 적의 제공권하에서 날씨의 장애가 많고 아군 비행기의 활용 및 수송이 곤란한데 비해 적은 손해를 돌보지 않고 상당한 증강을 계속하고 방어를 굳혀 갔다는 것.
3. 기습 이외의 화포이용, 등에 고려가 거의 없었으며 또한 군의 통솔에 만전을 기하지 못했음. 지리개개(支離個個)의 전투를 시켰다는 것.
4. 주체의 진출 위치가 적당치 못했으며 (낮에도 어두운 천연의 정글을 진출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진격이 용이하지 못한데다가 각 대대마다 좌우의 연락 협동이 불능에 빠졌다는 것.
5. 기습은 적의 의표를 찔러야 성공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음향 탐지기 등의 활용으로 조기에 발견되어 예기치 못한 총포화의 집중 사격으로
선두분대의 손해와 아울러 정신적으로도 좌절 상태에 있었다는 것.
이것은 적을 지나치게 멸시했던 결과다. 화기를 중용하는 것은 적의 본령(本領)임. 앞으로는 육해군 모두가 제일단계 작전의 성과에 도취되지 말고 정신을 일신하여 이론상으로 승산이 있는 작전을 확립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정공기습의 묘용(妙用)에 철저를 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
과달카날 전에서 제1회 총공격의 실패는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 후의 전투의 추이를 보아도 가와구치 지대의 공격이 과달카날 섬 비행장 탈환의 유일한 기회였다. 다무라 소령은 "1개 연대만 더 있었더라면 룽가 비행장은 완전히 점령되었을 것이다." 라고 했고, 다무라 대대의 장병은 " 그날 아침 주먹밥 두 개만 더 있었으면 비행장은 빼앗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발를 굴렀다고 전한다.
그 사실 여부는 알길이 없으나 이 야습전이 있은지 나흘 후에는 해병 제7연대 4백명이 도착하여 해병대의 필승의 신념은 더욱 고조되어 갔다.
사무엘 모리슨은 이 전투가 < 9월 위기(September crisis)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고지에서의 싸움은 태평양전쟁의 가장 결정적인 전투의 하나였다. 그것은 에드슨의 용기를 고취시키는 영도력과 해병대원 개개인의 숙련과 용기의 산물이었다. 이 싸움에서 실패했었더라면 헨더슨 비행장을 잃는것은 물론 해병대는 이 섬을 수호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전 이래 쾌속적인 진격은 계속하던 일본군에게는 과달카날 섬의 8월 20일자의 이치키 지대의 전멸과 9월 12~13일의 가와구치 지대의 공격 실패는 일본제국 불패의 사상이 미군의 작전앞에 무릎을 꿇었음을 뜻한다.
여기에 처음으로 대본영과 현지군의 본격적 준비로 과달카날 섬 탈환과 전국 호전에의 작전이 취해지게 되고 전투단위로써의 사단급 규모가 과달카날 섬에 투입되기에 이르른다.
그 때까지 지대(支隊)의 집합체였던 일본 제17군은 제2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기존 2개사단을 바탕으로 증강되고 참모진도 대본영이 파견한 참모, 쓰지 마사노부, 쓰기다 가즈지를 포함하여 3명으로 부터 한꺼번에 11명으로 증원되었다. 9월 하순, 하꾸다케 하루요시 중장은 가와구치 소장을 라바울(Labaul)의 군사령부에 초지하여 과달카날 섬의 실정을 청문했다. 가와구치는 아군전력의 빈곤(특히 기근과 피로), 지형의 험준함, 적 병력의 강대함(항공,화력,전파 탐지기의 다방면 활용 등)을 설명 했으나 그의 비관적인 사실인식은 필승의 신념에 불타는 사령부의 반감을 샀다.
또한 적어도 2개 사단의 병력.야전중포 5개 연대 충분한 탄량(彈糧)의 보급,항공기의 협력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면 1000Km나 떨어진 외딴 섬에서의 결전은 감행할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후타미 아키사부로 참모장은 경질 되었다.
10.
그러나 이번의 일본의 총공격 계획은 적어도 지금까지의 야간 기습과는 달리 당당한 정면 작전이었다. 수송의 예정에는 제2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보병 약 1만7천5백, 화포 약 176문, 탄약 0.8회전분(會戰分),양식 2만5천명 분의 30링간 먹을수 있는 분량 이었다.
일본 제17군은 과달카날의 탈환에 이어 라비 및 모르즈비의 공략을 감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전력을 실제로 상륙시킬 보급에 있었다. 일본해군은 선단 호송에 연계하여 그 전날 제11항공함대의 폭격편대가 두 차례에 걸쳐 룽가 비행장을 공격 했으며 다시 전함 <공고> <하기나> 두 척에 의한 대대적인 함포 사격을 단행했다. 미군의 비행장은 막심한 피해를 입어 사용 가능한 항공기는90대에서 42대로 줄어들었고 B-17용 활주로는 한때 사용불능에 빠졌다.
그러나 이와같은 지원전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공권은 이미 미군이 쥐고 있었다.
제 17군은 야간을 이용한 빠른수송에 의해 예정의 반은 양륙(揚陸)했으나 함정 수송으로는 진척이 없자 수송선단에 의한 일거의 수송을 해군에다 요청했다. 그리하여 수송선6척으로 편성된 < 과달카날 섬 돌입선단 > 이 편성되어 10월14일 무사히 타사파롱 정박지에 닻을 내렸다. 그러나 자재의 하역 작업이 한창인 바로 그 때 함폭대편대가 내습하여 공격을 가했다. 선단은 6척중 4척이 불타오르고 한 척은 가까운 바다에서 모래밭에 돌진하여 각좌양륙을 감행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병력은 전부 상륙할수 있었으나 식량은 2분의1정도, 탄약은 약 20%정도가 하역된 것에 불과했다.
중요한 룽가 비행장 공략의 화포는 야포.곡사포 합하여 38문에 불과 했으며 특히 중포는 2문에 불과했다.
제17군 참모장은 이와같은 상황하에서 당초의 화력에 의존한 정공법을 180도 전환시켜 지난번 가와구치 소장이 단행했던 정글우회의 야간기습공격을 재차 감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우익 대장인 가와구치 소장은 10월15일, 제2사단의 명령을 수령하자 < 우익대의 신념 >이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부하들에게 배부하여 이 공격의 특성을 주지 시켰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제1). 천황 폐하를 위해 미.일 결전의 용사로써 생명을 바칠수 있는것은 바로 이 시간이다.
제2). 보병의 총검돌격은 일본군의 정화(精華)이다. 적은 이것을 가장 무서워한다.
제3). 적의 장점은 화력의 우세에 있다. 이것을 봉쇄하는 길은 야암(夜暗)과 밀림의 이용에 있다.
제4). 일단 총공격이 시작되면 각 부대는 부하의 장악을 철저히 하고 예정시각에 한꺼번에 돌입하여 제1선을 신속히 탈취하고 반드시 날이 밝기 전에 해안으로 돌진하여 적을 섬멸하라.
제5). 이렇게 하면 황군의 대승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가와구치 소장은 10월19일, 후타미 참모장을 대신한 미야사키 슈이치 참모장(라바울 주재)으로부터 "룽가 비행장 남측면의 적군방어의 강화상황은 공중사진을 보아도 분명하므로 진지공격의 준비에 유류가 없도록" 하라는 취지의 메모와 적진지 항공사진을 받아들었을때 생각이 달라졌다. 제1선 사단은 이미 기동을 개시하고 있었으나...
가와구치 소장은 이번의 돌입로가 앞서 실패한 에드슨 고지와 동일한 장소 였으므로 " 이렇게 되면 바위를 향해 계란을 던지는 격이 되므로 싸우지 않아도 실패는 일목요연하다. 나는 고민했다. 나는 이 자리를 피해 멀리 적의 좌측 배후로 돌아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와구치 수기)
11.
가와구치 소장은 22일, 마두야마 사단과의 갈림길에서 쓰지 참모와 만나자 정면공격을 피하고 좌측 배후로 우회하겠다는 의견을 말하고 제2사단장에의 전달을 의뢰했다.
가와구치는 쓰지 참모와 이야기한 것만으로 사단장의 인가를 얻은것으로 믿고 23일, 우회의 행동으로 옮기려는데 사단 참모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공격개시가 하루 지연되므로 당초의 예정되로 정면공격하라는 지령이었다.
가와구치는" 정면공격은 부대장으로써 책임을 지기 어렵다. 제발 다시 한번 사단장에게 나의 작전안을 상신하여 허락을 얻도록 해달라" 고 간청하고 전화를 끊은뒤 30분을 기다렸다. 약 30분후에 걸려온 전화는 "사단장 께서는 우익 부대장 가와구치 소장을 직위해임하셨습니다. 후임으로는 쇼오지 대령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가와구치 소장은 총공격 직전에 파면되었다. <<전사총서>> 에 의하면 이파면에 대해서는 당시의 군전투사령부에서는 전혀 관여하지도, 아는 바도 없었으며 사단장,참모장,쓰지 참모 사이에서 결정된 것으로 전해진다.
제2사단은 10월 24일 저녁부터 드디어 야습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 날의 야습에 대해서는 지금도 각 부대의 행동이 밝혀지지 않았다. 가와구치 소장을 대신하여 쇼오지 대령이 지휘하게 된 우익대에 대해서는 [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일부가 돌입을 했으나 주력이 지체했다 ] [일부가 비행장에 진출했으나 후속이 없어 적과 대치 상태에 있었다 ] 등 세가지 자료가 있을 뿐이다.
쇼오지 대령은 "우익대는 초원을 북진하여 0시에 적진지에 근접했으나 맹렬한 적 포화 때문에 전진을 못한채 미군과 가까이 대치한 상태로 25일 새벽을 맞았다."고 회상하고 있으나 요컨데 통수가 혼란상태에 있었던 우익대의 공격은 실패로 끝나 버린 것이다.
센다이 야습사단의 별명을 가진 나스 유미오 소장이 지휘하는 좌익대(29연대 주력부대)는 적진에 돌입했다. 그러나 초계선은 돌파 했으나 제2, 제3의 견고한 방어선에 저지당하고 맹포화에 피해가 속출하여 공격은 진척을 보지 못했다. 연대장 후루미아 대령은 연대기와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고 대대장.중대장의 반수 이상을 잃었다.
이와 같은 사태에도 불구하고 이날 밤 <만세> (비행장 점령을 뜻하는 암호) 의 발신이 있어 사단 사령부는 환희에 들끓고 "축하하네"를 연발했다. 이모도 참모는 업무일지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큰글자로 <천하에 다시 없는 밤>이라고 썻을 정도였으나 후에 제일선으로부터의 오보 로써 정정을 하는 정보처리의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벌인 촌극도 있었다.
제2사단장 마루야마 마사오 중장은 25일 아침을 맞아 사단 손실은 막대하지만 제29연대가 적진에 돌입하고 있는 상황을 확인하고 이날 밤 여력을 다하여 재차의 야습을 감행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우익대는 보병 제16연대를 증가시켜 나스 소장이 선두에 서서 돌진 했으나 미군의 강력한 포화로 나스 소장은 전사, 제16연대장 히로야쓰 대령 전사, 제29연대장 후루미야 대령은 행방불명, 대대장과 중대장의 전사가 속출하여 공격은 적의 제일 진지를 돌파하지 못하고 좌절 되었다. 제29연대의 손실은 약 50%에 달했다.
26일, 날이 밝기 전에 제2사단의 다구치 참모는 이 상황을 보고 26일 중에는 돌파의 가망이 거의 없음을 사단장에게 보고했다.
쓰지 참모까지도 사단의 현황으로는 진지 돌파의 가능성이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일본 제17군 사령관은 오전6시, 공격중지의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복잡한 경위를 수반했던 과달카날 섬의 2차 총공격도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대본영은 육군.해군 모두가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과달카날 섬 탈환 방침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일선에서는 물론 중앙에서도 과달카날 섬 탈환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대두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누구 한사람 공식적으로 들고 나오는 자가 없었다.
11월24일, 25일에는 육군부.해군부의 작전 관계자 앞에서 쓰지 참모의 보고가 있었다. 그는 "길바닥에는 빈 반합을 손에 든채 죽은 병사들의 시체에 구더기가 우글거리고 있다."고 과달카날 섬의 참상을 설명했으나 철퇴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명이 없었다.
12.
-자다가 갑자기 깻는데 잠이 오질 안는군요-
육해군 사이에서는 [상호의 중추(中樞)에 깃든 오랜 세월의 대립관계가 뿌리를 내려각자의 체면을 존중하여 굽어들지를 않을려고하고 한편이 철퇴의 의사표시를 할 때까지는 상대방에서는 절대로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는 결향이 현저했다.] (이모도 구마오<<작전일지로 엮는 태평양 전쟁>>)
한편 과달카날 섬의 일본 제17군은 더욱 강화된 미군과 굶주림과 대치하면서 극한 상태에 있었다.
1942년 12월6일, 다나카 신이치 작전부장은 과달카날 섬 작전계속을 위한 선박 증징(增徵)16만 5천 톤의 요구에 대해 각의(閣議)가 8만 5천톤밖에 인정하지 않자 도죠 총리를 물고 늘어졌다가 흥분해서 "바보새끼"라고 소리쳐서 경질되었다. 12월8일, 구축함에 의한 드럼통 수송을 중지한다는 해군측의 통보가 육군측에 전해졌다.
12월31일, 나가노 군령부총장과 스기야마 참모총장은 과달카날 섬 철수안을 천황에게 상주하여 그 결과 천황은 "이 방침에 최선을 다하도록"하고 결재했다. 1943년 1월4일, 대본영의 철퇴명령이 떨어졌다. 대본영 참모가 철퇴를 생각한지 거의 2개월이 지난 후의 결정이었다. 그 동안의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기아와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과달카날 섬의 철수작전은 1943년 2월1일,4일,7일의 3차로 나뉘어 매회 구축함20척으로 실시되어 육군9,800명, 해군830명이 철수에 성공했다.
과달카날 섬에 투입된 일본군은 약 32,000명이었으나 그 중 전사는 12,500명, 전상사(戰傷死)는 1,900명, 전병사(戰病死)는 4,200 여명, 행방불명은 2,500 명에 달했다. 여기에 비해 미군은 미육군 공간(公刊)전사에 의하면 전투참가 장병60,000명 중 전사1,000명, 부상자 4,245명에 불과했다. 아사한 미군병사는 한사람도 없었다.
한편 해군측의 손실을 보자면 과달카날 섬을 둘러싼 수차에 걸친 해전과 선단 호송에서 함정 56척침몰, 115척손상, 그 중 구축함 침몰이 19척, 손상이 88척, 또한 항공기의 손실도 약850대에 달했다.
미군에게는 과달카날 섬공격이 일본본토 직격에의 이정표라는 기본적인 디자인이 있었다. 만약 과달카날 섬이 손에 들어오면 뉴기니아(New Guinea)에서 미.호주 해상 수송로를 위협하는 일본기지에 대한 항공작전도 용이해지고 다음차례가 될 라바울 공략을 발판으로 점차 일본본토에의 직접상륙도 가능해질 것이며 당시 일본군이 완성을 서둘고 있던 과달카날 섬의 활주로를 일본군 항공전대가 사용하기 이전에 신속히 과달카날 섬을 점령하는 것이 긴급과제였던 것이다.
한편 일본 육군의 전쟁관점은 주력을 중국대륙에다 두고 중경(重慶)공략작전에 의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에 대항하여 일본의 불패태세를 확립하는 것이였다. 따라서 주요 공략 지역은 중경.인도양 방면이었으며 남태평양 방면에서는 미.호주간의 해상지원 교통차단을 위해 주력은 라바울과 뉴기니아 동부에 있으며 해군의 솔로몬 해역에서의 작전을 중요시 하는것은 아니었다. 일본육군 중추부에는 과달카날의 이름조차 모르는 자도 있었다. 태평양은 해군담당 이었으므로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우기 미군의 자세한 동향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한 바도 없었다.
한가지 예를 들면 8월7일, 미군이 과달카날 섬에 공격해온 그 날 대본영 육군부 수뇌는 오후3시부터 제2부 제6과(대미 정보담당)의 주임참모 스기디 가즈지 중령으로부터 <최근 미국의 동향>에 관한 설명을 청취하고 있었을뿐 과달카날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당시 미국정보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던 스기다 정보참모의 설명은 미육군병력의 동향이 중심이었으며 미군이 해병대를 중심으로 수륙양용작전을 전개하여 태평양 정면에서 직접본토를 향해 진공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며 오히려 위험은 태평양보다 극동의 소련 영토 및 인도.중국 방면에 있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한편 해군은 미함대 주력을 솔로몬 해 부근에서 포착하여 격멸을 도모한 후에 전쟁 종결에의 방도를 생각하려 했으며 항공기지인 과달카날 섬 탈환을 이 주력 결전을 성공시키는 조건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군도 미군이 육.해.공 통합의 수륙양용 작전을 개발했다는 것은 예상조차 못했으며 태평양에 산재하는 여러 섬의 공방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한 바도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전략 인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육.해군간에 제대로된 통합작전이 시도된 바가없는 것은 물론 이치키 지대, 가와구치 지대, 아오바 지대, 제2사단, 제38사단의 차례로 축차(逐次)투입이 있었던 것이다.
또 일본육군은 보급은 적군으로부터 탈취하든가 아니면 현지 조달을 한다는 것이 상식화 되고있었다. 해군의 입장으로는 주요목표는 미 해군기동부대의 격멸이며 원래는 보급 물자 수송의 호위에 함정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과달카날 섬은 지리적으로도 라바울에서 560해리 거리에 있으며 중계기지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때 경이적인 항속거리를 자랑하던 제로형 21형이 선단 호위를 맡아 과달카날 섬에 선박을 호송해도 이 섬의 항공에서의 체공시간은 불과 15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같은 공세를 한계를 넘어선 곳에서 많은 수송선단이 미 항공전력에 의해 침몰당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공격 할때마다 궤멸상태에 빠진 과달카날 섬의 실정은 과거 일본군이 경 험한 적이 없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6천Km의 해양을 사이에 둔 도쿄의 책상위에서는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정경이었다. 약간의 막료가 현지에 진출하여 실정을 보고해도 수뇌부는 그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듯하다.
고급책임자 자신들이 직접 현지로, 아니라면 라바울까지라도 진출하여 제일선의 실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모도 구마오 <<작전일지로 엮는 태평양전사>>)
참고로 (대동아 전쟁)은 (태평양 전쟁)으로 (제국)은 (일본)으로 년도는 원래 예를 들면 1942년은 일본연호 본다면 (소화17년)1943년은(소화18년)인데 그냥 일본연호는 빼고 년대만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천황 이란말은 처음에 그냥 일왕으로 할려고 했지만 예전에는 신문이나 매스컴에서도 일왕으로 쓴적도 있으나 지금은 천황으로 통일하여 쓰고 있으므로 그냥 천황으로 하였습니다.
저자가 일본인 이다 보니까 일본쪽에 편애하는 글이 약간 있던데 그것은 삭제하고 서술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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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카페 '2차세계대전에 관한 짧은 이야기' Jung Won Suk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