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의 심연에 잠재하는 무수의 발화를 통하여 현 존재의 환상을 가늠하며 때로는 내일을 예지하는 끝없는 담론의 세기가 펼쳐졌다. 시의 상상은 점점 다변화의 길을 걸을수록 혼돈과 심미적 긴장감은 시인의 내면에 유포된 치열성을 잠재울 수는 없다. 새로운 천년과 새로운 세기를 열어가는 마당에서 일면 엄숙주의의 난맥상을 살펴볼 수도 있으며 골계적 향연의 징후 또한 지울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시의 신화적 상상으로부터 담론을 쟁점화하고 언술적 자의성의 필치 위에 조응되는 세계를 묘파하기 위한 취사선택의 문학적 환경을 다시금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일상의 몰개성적 환멸을 간간히 떠올리며 정교한 삶의 태도로 우리 앞에 드러나는 표피적 자각의 적극적 환상을 항시 꿈꾸는 일이 산문시의 열린 생존방식이라 할 수 있다. 시인 자신의 선험적이고 때로는 주술적이기까지 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알레고리를 서열화하고 압도하는 능력 또한 산문시가 같는 도약된 형국이다.
우리 산문시의 출발을 서구시의 유입설로만 보고자 하는 일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본다. 산문시의 원형을 더듬어 올라가면 서구시보다 일찍 형성된 辭,
賦, 領 등이 이를 보여주듯 역시 산문시도 마찬가지로 재래설과 유입설의 통합으로 보고 있다. 조선의 사설시조와, 가사와 같은 산문문학이 산문시의 원형이라 볼 수 있다. 산문시는 자유시와 달리 행과 연을 구분하는 등의 운율의식은 비교적 약하나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산문과 다른 점은 시적 긴장과 약하나마 운율이 깃들어 있고 서정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자유시의 모태를 유입설과 재래설의 두 경향으로 보는 설이 있으나 어느 한쪽만이라고 강하게 말할 수는 없듯이 산문시 역시도 산문과 시의 변증법적 화해의 문학장르로 볼 수 있다. 산문과 시의 장점만을 꿈꾸는 도약된 단계의 세계관을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특징을 갖는다. 산문의 보편성에 기대어 현실의 역동적인 삶을 우호적인 코드 안에 배태시키는 것이다.
시의 절제와 긴장의 끈을 결코 늦추지 않으면서 산문이 추구하는 바 서술미학을 담지하는 두 장르의 상호보완적 화해의 감수성을 갖는다. 시적 통어
(通御)와 산문의 언술적 필치가 서로 길항하면서 우리 정서의 실증적이고 심미적인 필치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시의 초월적 근원 안에 산문의 실존적 생존방식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2.
지난 계절에 발표된 작품들 중에서 산문시만을 살펴보았다. 새 천년의 시작과 21세기를 맞는 시대적 긴장과 지나간 세기말적 현상의 징후 때문인지 모르나 유난히 산문시의 발표가 많았다. 각 시인들의 관심의 폭에 따라 다양한 상상력의 전모를 보여주고 있다. 서정과 현실, 무수한 감정의 발화, 때로는 위악적 포즈의 심각성 등등 시인 각자의 관찰과 심미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귀덮개를 내린 빛바랜 검정빛 방한모를 눌러 쓴 노인이 검은 염소떼처럼 한 무리의 슬픈 영혼을 거느리고 굽은 허리를 앞뒤로 흔들며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잠적을 보았다. 썰렁한 초겨울 논두렁 끝에 외로운 눈부심처럼 수직으로 서 있는 잎 진 한 그루 미루나무가 사라진 그 노인이란 사실을 깨달았던 것은 내가 탄 삼천포행 첫버스 낡은 차체가 살을 부비는 바닷가 자갈돌처럼 삐걱거리기 시작하던 그때였다.
―허만하 <검은 염소떼와 미루나무> 일부 (『문학과 사회』2000년 봄호)
복분자 술 몇 모금에 목젖엔 쏙쏙 가시가 돋고 산딸기빛 취기를 거슬러 풍천장어떼가 내장 어둑 한 수로를 어지러이 퍼덕인다. 미당의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는데 피지도 않은 꽃 그림자가 선운산 고랑 타고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린다 동구밖 술청들이 다 잠겨 목울대까지 차오른다 이렇게 침몰할 수는 없어 노송의 샅바를 잡고 물꼬를 트다가 풀밭에 퍼질러 앉아 목쉰 육자배기나 한 자락 토해볼까 한밤내 이를 물고 악을 쓰는데 어둠은 수로 따라 칠산 앞바다로 빠져나간다 타다 만 숯토막 같은 어둠의 찌꺼기들 모아 도솔암 능선 위로 화롯불을 피우는
―홍은택 <선운사 유감> 일부 (『작가세계』 2000년 봄호)
허만하 시인은 지난 기억의 잔상 속에서 물리칠 수 없는 한 편린들을 떠올리고 있다. `눈부심'이 시인 스스로 `삐걱거리기'까지의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노인'을 자연의 일부인 `미루나무'로 인식하게 하는 기능은 산문시의 한 울림일 것이 분명하다. 시적 인식의 변용 속에서 긴 문장이 풀어내는 유장한 호흡을 볼 수 있는데 마치 영화 속에서 오버랩되는 듯한 상의 연속적 행보는 회화적 수법으로 시를 읽는 독자의 몫을 그만큼 크게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앞에 생략된 두 문장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비교적 긴 문장으로 연속된 이 시는 한 문장마다 제시부와 결론부를 가지고 있다. 시인이 얘기하고자 하는 결론을 좀더 세밀하게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제시부에서 남다른 울림의 코드를 보여주는 것은 산문시가 갖는 한 특색이라 생각된다. 상의 연속적 도식 속에 화해로워지려는 앞에 오는 이미지와 뒤에 오는 이미지의 겹침 속에 은근하게 울려오는 울림은 새로운 신비감으로 독자의 몫이 되고 있다.
홍은택 시인의 경우에는 허만하 시인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연속적인 문장 속에 끊임없이 전개되는 상의 난립과 빠른 템포로 읽혀지는 속도감이 율격을 더해주고 있다. 허만하 시인의 경우가 심미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쪽이라면 홍은택 시인은 잔잔한 이미지를 율격의 아우름 속에 던져 마치 사설시조의 중장처럼 읽힌다.
허만하 시인이나 홍은택 시인은 서정의 아름다움을 취택한 경우는 마찬가지이다. 서정의 아름다움 속에 이미지의 교합이 만만치가 않다는 점에서 시의 성취를 얘기하고 싶다. 특히 허만하 시인의 “잎 진 한 그루 미루나무가 사라진 그 노인”으로 설정한 부분이나 홍은택 시인의 “산딸기빛 취기를 거슬러 풍천장어떼가 내장 어숙한 수로를 어지러이 퍼덕인다”고 한 부분 등이 절창으로 읽힌다.
그가 몇 해 전 내게 주었던 春劍 한 盆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 꽃은 고사하고 이파리들마저 뿌리째 놓치고 말았다 그가 내게 준 이 상징의 實物 하나를 나는 그렇게 잃고 만 셈인데 내 게으름 탓이었겠으나 그걸 열고 들어가 보면 밝힐 수 없는 황량한 들판 하나가 거기 가로놓여 있었다 저문날 겨울 저녁녘 그렇게 사무실 한 구석 먼지를 쓰고 숨어 있는 푸르고 빛나던 날의 그 春劍들, 春劍 두 글자 작은 팻말 하나로만 겨우 꽂혀 있는 蘭盆 하나, 지워져 있다가도 이토록 살아나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일순, 우리들 사랑의 허공을 베어내던 따뜻했던 날의 초록 칼날들 꼭 한 번 보았을 뿐인 허공의 속살! 그게 바로 꽃이었던가 그러고는 끝이었던
―정진규 <春劍> 전문 (『동서문학』2000년 봄호)
모두가 그렇게 붉을 따름이어서 더 붉지 않아도 탓할 사람이 없는데 유독 선연하여 눈길 끄는 단풍 일가 아래 걸음이 절로 멈췄다 붉은색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빛의 산란 때문에 내 속에서 먼저 울며 켜졌던 등불의 숫자가몇인지 헤아려보려고, 그 등불을 매달고 달리던 기차의 창이 얼마나 많은지 고개 끄덕이려는데, 만산홍엽이 무엇이 그리 급한지 내 멱살부터 잡고 한없이 높은 음으로만 소리지르기 시작한다, 살여울이 내 몸의 휘모리 부분만 훑고 지나간다.
―송재학 <홍단풍> 전문 (『문학동네』2000년 봄호)
정진규 시인의 작품은 춘검, 즉 난을 통한 자아의 심연(深淵)을 바라보는 처연함은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여실하게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 자아의 일상을 통하여 얻어진 극진함의 비유에서 비롯되긴 하였으나 그것은 결국 우리 모든 인간의 속성일 것이고 인간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허망함과 닿지 못한 세계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다.
“밝힐 수 없는 황량한 들판”의 세계를 통하여 끝내 마음의 한켠에 아쉬움은 오래도록 잔재한다. “지워져 있다가도 이토록 살아나는 것들”은 “우리들 사랑의 허공을 베어내던” 것으로 “꼭 한 번 보았을 뿐인 허공의 속살”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놓쳐 버린 시간과 놓쳐 버린 것들에 대하여 자유시에서 풀지 못한 세계의 또다른 성향을 보여준다.
송재학 시인은 `단풍'의 아름다운 세계의 관조를 통하여 시인 자신의 마음에 `등불'을 켜고 결국에는 그 `단풍'이 `멱살'을 잡는다는 의인화의 수법을 끌어내고 있다.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며 “내 몸의 휘모리부분만 훑고 지나간다”고 표현하고 있다. 산문시의 서술적 알레고리는 자유시에서보다 오히려 그 자유로움이나 활달함이 진보된 단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진규 시인이나 송재학 시인은 어쩌면 자유시보다 더욱 자유로운 세계를 지향하다 그 탈출구로 이와같은 산문시를 연출하였을 것이다. 자유시의 행 배열이나 연의 구분에서 오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토막나는 의식의 흐름을 산문시에서 더욱 자유롭게 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산문이 아닌 시적 이미지의 상승적 효과를 간과하지 않고 후반부로 갈수록 그 충실도에도 사려깊은 배려를 주어 독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흔들고 있음을 본다.
메주골 사는 너부죽하고 거무티티한 순복이 오메 언제나 눈코입귀 다 떨어져 나간 미륵보다 더 멍청한 흙빛 웃음 웃는 제자꾼 순복이 오메는 비오면 비에 젖고 눈보라치면 눈보라에 얼고 볕 쨍쨍한 날엔 햇볕에 바랜 누더기 삶 걸치고 제자 마당에 나온다 배추 열무 시금치 쑥갓 파 당근 마늘 냉이 쑥… 철따라 눈망울 풋풋한 제자거리 가지고 나와서는 밑지는 거야 품밖에 더 있나 손크게 듬뿍듬뿍 담아주는 거 있지 깔끔한 여자일수록 순복이 오메 찾아오는데 가만히 보자니께 손 큰 것도 손큰 거지만 너부죽하고 거무티티한 순복이 오메 아침 저녁 변함없이 빙그레 웃는 그 흙빛 웃음이 그렇게 싱싱할 수가 없는 거 바로 그거데
―김순일 <다시 瑞山 사투리> 전문 (『해동문학』2000년 봄호)
그녀는 의사의 아내, 그는 아내에게 한번도 청진기를 대본 적이 없다 그녀는 가끔씩 아팠고 자주 아팠고 이윽고 병이 들었다 그녀가 병을 키우는 동안 그는 아내에게 알약을 하나씩 버렸다 하얀 알약을 삼킬 때마다 그녀는 희디흰 새를 토해 내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곧 그 집은 흰새로 넘쳐 났다
우는 새, 웃는 새, 밥하는 새, 빨래하는 새, 꽃을 키우는 새, 바느질하는 새, 기다리는 새, 한숨 쉬는, 욕하는 새, 설거지하는 새, 접시를 깨는 새, 마루를 닦는 새, 티브이를 보는 새, 낮잠을 자는 새, 불면증에 걸린 새……,
―김종미 <아내의 병> 일부 (『현대시』2000년 4월호)
덧니란 말 예전엔 행복했습니다 덧니로 해가 뜨고 덧니로 밥을 먹고 덧니로 열중쉬엇 덧니 깊 숙이 고개 끄덕거렸습니다 덧니로 눈물 콧물 훌쩍거리고 덧니로 달맞이꽃 구경 나섰습니다
덧니 속의 덧니 쓰다듬었습니다
―유병근 <쓸쓸한 골목> 일부 (『신생』2000년 봄호)
김순일 시인은 순박한 시골 아낙네 순복이 오메를 통하여 골계적인 이미지를 희화화하고 있다. 산문시가 같는 재담적이고 골계가 넘치는 표현은 자유시에서의 한정적이고 축약적 이미지에 대한 한 자유로움의 방편일 것이 분명하다. 이어지는 시어의 연속적 배열 속에 시인이 얘기하고자 하는 의도를 쉽게 독자들은 간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율격적 효과를 이루며 재미를 더해 주기도 한다.
김종미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는 현대인들이 겪는 정신이나 정서의 아노미(부족)현상을 아내라는 존재를 통하여 희화화하고 있다. 여기서의 `의사의 아내'나 `의사'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을 축약한 존재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미 우리 인간들은 충분히 자신들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상대방을 배려하려는 자세에서 점점 멀어지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해서 빚어지는 소외와 갈등은 여러 `새'로 현현되는 것이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 참다운 인간이 깨어져 버린 안타까움을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유병근 시인은 `덧니'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골목'을 쓸쓸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덧니는 잘못된 존재 혹은 어긋난 존재에 대한 회의의 한 자구책이며 책망의 그늘을 결코 지울 수 없는 울음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울음의 삶을 걷어내고 긍정적인 삶인 “달맞이꽃 구경 나섰습니다”로 희망의 희환을 꿈꾸고 있다. “덧니 속의 덧니 쓰다듬었습니다”의 선명함을 통하여 자기 존재의 궁극적 탐색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김순일 시인은 골계미와 토속적 언어의 정조(情調)를 조탁하는 반면에 김종미 시인이나 유병근 시인은 현대인들의 심리적 갈등과 소외 등에 관한 역설적인 표현을 위주로 하고 있다. 우리 삶의 실존과 위기 혹은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항상 확대와 축소의 터널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경직의 자각을 우리 인간의 심성 속에서, 항시 불안과 심각함을 내세울 뿐이다. 이런 경고의 메시지를 담아내는데 각자의 진력함을 개성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왜 아직도 추억의 1학년 3반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잔인하도다, 추억이여. 늙은 여우처럼 교활하게 고향을 돌아보게 하다니! 고단한 육신이여, 오늘은 낡은 기차를 타고 풀풀 먼지를 날리 며 추억의 1학년 3반으로 가자. 삐걱이는 복도를 지나 만국기가 펄럭이는 시간의 감옥에 갇히자.
-5-
즐겁게 얼음의 시간을 녹이자. 조개탄의 매캐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는, 밤이면 박쥐가 튀어 나오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교실에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들지 못하는 1학년 3반 원구식을 해방 시키자.
―원구식 <시간의 감옥> 전문 (『현대시』2000년 4월호)
외로우니까 닭을 키우고 외로우니까 닭에게 말을 걸고 외로우니까 비로소 닭의 말이 解讀된다. 닭장에서 닭장에서 닭장에서…… 외로우니까 내가 보이고 외로우니까 나에게 말을 걸고 외로우니까 내가 비로소 解讀된다 닭장에서 닭장에서 닭장에서……
―한혜영 <말 걸기> 일부 (『현대시학』 2000년 3월호)
발그레한 단풍을 보고 온 날,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독백만하고, 무언가 헛헛해, 물고기 한 마리키우기 시작했지요, 등이 까만 물고기, 내 뱃속에서 조용히 유영해요, 회기역에서 흑석동까지 거리의 풍경들과 친해졌어요, 물고기도 뱃속의 실핏줄과 얽히며 놀았지요, 그렇게 낯선 곳과 친해지고 싶어서,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비디오를 켰어요, 내 몸을 조각내 사각의 시간 속으로 끼워 넣었어요
―이재훈 <슬치> 일부 (『시와사상』2000년 봄호)
원구식 시인은 과거의 기억을 통하여 오늘의 영혼의 지표를 향한 갈구의 희원을 이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시인 혼자만의 추억이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 존재의 오늘을 살펴보며 무수의 질곡 속에 버티고 서 있는 영혼의 외로움을 달래려 함이다. 스스로에게 스스로의 위안과 경직된 삶의 파편화된 허위의식을 벗고 순수한 동화적 상상력 속에 안식할 수 있는 내일을 쳐다보려 함이다.
한혜영 시인은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여 결국은 `외로우니까'로밖에 상흔을 남길 수 없는 존재의 허망함을 궁극적으로 묘파하는 경우가 되겠다. 돌아갈 수 없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린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짚어보면 상처뿐인 기억의 남루를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끝까지 가더라도 외로움은 끝나지 않은 존재의 허망함을 근원적으로 침잠하여 독자로 하여금 많은 상상을 하게 해주는 시이다.
이재훈 시인은 인간의 즐거움 뒤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낯선 세계에 대한 불안과 지나친 세월에 대한 아쉬움의 교차 속에 파생되는 또하나의 빈곤감을 설파하고 있다. 결국은 인간의 한계점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탄식을 `슬치'라는 물고기를 통하여 보여줌으로 하여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시간 속으로 사라질 “내 몸을 조각내 사각의 시간 속으로 끼워넣었어요”라는 자신의 의지 밖으로 밀려나는 존재의 빈곤함을 우회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원구식 시인은 과거의 기억 속에 함몰되어 있는가 하면 한혜영 시인은 현재의 관점에 머무르고 이재훈 시인은 미래의 불안함 속에 지향점을 두고 있다. 이런 시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 시인 모두 산문시를 통하여 현대인들이 알게 모르게 겪을 수밖에 없는 심리적 불안과 피폐를 산문시라는 장르적 특성 안에 잘 앉혀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통찰력을 발휘한 경우가 된다. 산문시 본래의 유연한 의식(意識)의 장식적(裝飾的) 효과에 기대어 새로운 담론을 위한 우호적 코드 안에 자리매김되었다 해도 좋으리라고 본다.
몸 속에 심긴 목소리를 따라가면 피맺히는 울음 소리 들린다 `밀' 뻑 `어' 뻑 `내' 꾹 `등' 뻐 `지' 꾹 `밖' 쿵 명치끝을 콕콕 쪼는 저 울음이 심상찮다 알 밖에선지 안에선지 점점 절절해지는 소리 무섭 도록 아름다운 초록 숲에는 무섭도록 마음의 날 세워야 한다는 저 울음에 길들여지는 나 햇빛이 알 속으로 빨간 실핏줄울 들이민다
―정영선 <실업뻐꾸기> 일부 (『현대시학』2000년 3월호)
어쩌면 삶은, 저 층계만이 유일한 이유이고 명분일지 모르겠네 당신이 끝없이 위로만 기어오르고 있을 때도 세상의 모든 아슬한 꼭대기들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고 싶어한다네 오르고 내려오려는 안간힘이 한 생애를 떠메고 간다는 걸 사북에 가면 알 수 있지 천년 혹은 아주 잠깐
―송종규 <검은 비탈> 일부 (『다층』 2000년 여름호)
정영선 시인은 실업의 아픔을 절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뻐꾸기 울음 속에서 실업의 아픔은 더욱 절실해지고 결국 “햇빛이 알 속으로 빨간 실핏줄을 들이민다”는 것은 다시 깨어나기 위한 “마음의 날을 세워야 한다”는 처절한 마음의 상처가 알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각오의 반증이다. “밀어내 둥지밖”을 희화화한 표현은 골계의 미를 보여준다.
송종규 시인의 시는 `검은 비탈' 즉 석탄더미를 보고 시인은 인생의 위대한 깨달음의 시간을 체득한 시라고 본다. 흔히 높은 이상을 향하여 인간은 미래를 내다보지만 그 미래라는 것이 한없이 불필요하거나 불편한 것이라는 선적 자각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산문시는 가볍게 풀어서 대중들에게 쉽게 알 수 있다는 일반적 견해에서 이 시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이미지가 한결 높은 차원으로 이 시를 끌어올렸다.
정영선 시인이 물질의 빈곤에 대한 현실의 아픔을 표현한 것에 반하여 송종규 시인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정신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현실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지만 그것을 쳐다보는 관점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현실을 풍자하여 통열한 반성을 심각하게 변전시킨 힘을, 후자에서는 초월적 명상의 긍정을 자신의 내면적 투쟁을 통하여 조응시킨 숙고를 사줄 만하다. 산문시의 언술적 필치에 따라 쓰고자 하는 세계의 담론을 시인 자신이 어떻게 취사선택하여 묘파하느냐에 따라 자유시의 일면 사물화된 관점을 극복하는데 우위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모든 걸 잠그고 삽니다. 대문을 잠그고, 현관을 잠그고,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저녁어스름, 그 뒤켠에 고요히 내려앉는 허무를 잠그고 삽니다. 매일 밤 내 가슴을 열고 내려오는 그대, 내 갈비 뼈 사이 녹슨 철제 계단이 덜컹거리고, 발소리를 따라 내 눈썹이 가볍게 흔들리고, 그 흔들림이 두 려워 나를 잠그고 삽니다. 잠긴 문 앞에 서성이다가 위태로운 철제 계단을 오르는 그대여.
―김해원 <만능 열쇠로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일부 (『시와 반시』 2000년 봄호)
지붕위에 한 여자가 누워 있다. 두 발이 세월에 검게 그을려 타들어 간다. 햇빛에 몸이 마르고 쩍, 쩍 갈라지는 몸 위로 수많은 길들이 새롭게 생겨난다. 굽은 길 위로 빛 바랜 먼지들이 부옇게 날아 오르는 여름날, 수많은 개미들이 여자의 몸 속에서 흙을 파 내치고 있다. 여자의 몸이 제 무게에 못 이겨 뚝, 끊어진다.
―정찬일 <지붕 위의 열한 명> 일부 (『다층』 2000년 봄호)
김해원 시인은 폐쇄된 우리 인간의 자아를 적나라하게 묘파하여 걸출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배태되어 있는 허무의 강렬한 통증을 시의 설득력으로 정치하게 객관화하고 있다. “내 갈비뼈 사이 녹슨 철제 계단이 덜컹거리고,”에서 보듯 닫힌 우리 감각의 맨 밑자리 앙금의 침전물까지 휘저어 우리의 인식의 표층에 적극적 인식으로 환치시키고 있다. 여기 배어 있어 이미 명시되어 버린 언표는 상징의 체계를 파편적으로 모아서 상상적 질서를 구축하여 시적 신비의 담론을 형성한다. 시적 상징의 그물망을 여리게 여리게 사슬을 이어가듯 조립해가는 기술적(記述的) 미학을 사고 싶다.
정찬일 시인은 “쩍,쩍 갈라지는 몸 위”, “여자의 몸이 제 무게에 못 이겨 뚝, 끊어진다.” 등에서 보여주듯 위악적 포즈의 상징을 통하여 시적 이미지의 극대화를 통한 상징의 담론을 향한 치열성을 보여주고 있다. 단선적인 언어의 조립을 통하여 시인이 그려나가고자 하는 언어의 가능태를 향한 저돌적 탐색의 물결이 거칠기는 하지만, 새로움을 향한 건강성을 이미 시의 몸과 힘의 가속력으로 굳건히 앉히고 있다. 시가 신비와 신화적 상상력을 꿈꾸기는 하지만 현실의 실증적 위력 안에 울려퍼지는 구체적인 것이어야 하는 두 갈림길의 아득한 거리(距離)에서 시인은 심각한 긴장감으로 목도(目睹)하여 시를 쓰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찬일 시인은 걸출한 상징을 통한 시의 반열 속의 선두에선 주자라고 본다.
3.
산문시는 자유시가 갖는 총체적 힘의 가능태 속에 진일보한 시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인류는 시가 산문과 대별된 관계를 이루면서 계속 오랜 세월 시라는 짧고 힘있는 장르를 연출하여 왔다.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알게모르게 시의 우위성과 힘의 논리에 빠져들 수 있었다고 본다.
산문은 언어의 논리성을 견지한 장르이며 시가 언어의 논리성을 일탈한 장르이고 보면 우리 인류는 틀에 밖힌 산문의 무력함을 벗어나서 짧고 힘있는 장르인 시를 쓰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원시종합예술에서 음악과의 분파의 영향도 간과할 수는 없으나 짧은 형태인 시의 필요성에 의하여 시가 산출되었을 것이다. 시의 발전 속에서 우리 인류는 시 속에서의 표현방법의 확장이 필요했으리라고 본다.
시의 표현방법의 확장을 불러일으키는 바는 산문에서와 같은 갇힘이 없는
언어의 논리성이나 전개가 필요했으리라고 본다. 언어의 논리성이 배제되었다고 생각한 자유시 자체가 알게모르게 갇히는 심각성을 풀어내는 방법을 찾다 탄생한 장르가 산문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시와 산문의 중간자적인 산문시는 시의 장점과 산문의 장점을 비교적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문학에서 보면 가사나 사설시조 등이 결국은 산문시가 이루어지는 모태가 되었다고 보아 무리가 없다 서구시의 유입으로 인한 보다 구체적인 대안으로 핵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본다. 우리가 현재 창작하고 있는 산문시는 서구와 동양을 통합한 총체적 시의 고도의 발전적 장르라고 봄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 인간은 거듭되는 역사의 발전 속에 점점 인공화되어 가고 있다. 우리 인류의 기원이 모든 것을 자연에서 의지하고 인간 자체가 자연이었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신이 자연, 즉 인간을 만들었다고 본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신의 경지 즉 신성성(神聖性)을 향하여 진보하려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신의 경지에 올라선다면 인류는 사멸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해본다. 자연에서 진화된 존재인 인류가 모두 그런 경지에 이른다면 삶의 논리를 이미 깨트려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문시는 시의 논리와 산문의 논리를 규합하여 신성성에 가 닿으려는 발버둥의 한 표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앞에서 얘기한 신과 인간과의 관계처럼 산문시는 최선의 길을 향한 방책으로 계속 시인들이 창작의 열을 올릴 것이 분명하다. 더욱 도약된 단계의 합리적 언술방식을 통하여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고, 시와 산문을 넘나들며, 때로는 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계속 창작될 것이다. 산문시는 결국 우리 인간의 정서를 가장 알뜰하게 표현하는 시적 장치이면서 산문의 논리성의 한 방법을 취택한 도약된 열린 장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