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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詩》가 선정한 좋은 시·41 / 나병춘 추천
* 이승훈 :「 피안」(《시향》2009년 여름호)
* 문정희 :「 물 만드는 여자」(시집,『 양귀비 꽃 머리에 꽂고』에서)
* 송수권 : 「나팔꽃」(꽃시 그림집 공저『다시는 헤어지지말자 꽃이여』에서)
* 신현정 :「 토끼에게로의 추억」(시집,『 바보사막』에서)
* 이문재 :「 마음의 오지」(시집,『 마음의 오지』에서)
사단법인『우리詩진흥회』가 ‘좋은 시 읽기 운동’의 일환으로 매월 본지에 좋은 시를 선정 소개한다.
시와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이 운동에 독자 여러분들의 뜨거운 관심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피안 | 이승훈
머리를 빡빡 깎고 싶은 밤이 있지 어제도 거실에서 술 마시다 말고 스님처럼
머리 빡빡 밀고 싶어 화장실 들어가 거울보고 그래 빙판을 머리에 얹고 다니는
거야 검은 머리칼이 아귀다 중얼대고 나왔지 어느 날 머리 빡빡 깎고 집에 오면
아내는 내가 이젠 완전히 미쳤다고 하겠지
-《 시향》2009년 여름호에서
시읽기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똑같이 단순 반복하는 일상이 싫어
그냥 아무 까닭 없이 새롭게 변신하고 싶은 그런 날들이 있다.
그런 때면 나는 동네 목욕탕으로 향한다. 그동안 쌓인 피로도 풀고 스트레스
도 날리고 켜켜이 쌓인 때도 슬슬 문지르면서 아무도 몰래 상처 난 마음의 비듬
을 털어버리는 것이다.
화자는 암자의 스님처럼 빡빡 머리를 밀고 싶은 것이다. 속세를 벗어나 도를
닦는 청정한 삶이 종종 그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내의 잔소리로부터 혹은 일
상의 자질구레한 망상 번뇌로부터 저만큼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머리에 빙판
을 얹은 듯 서늘한 스님들의 모습에서 화자는 무엇을 읽은 것일까?
/검은 머리칼이 아귀다/ 소리치는 시인의 외침에 이 세상 누가 공감할 것인
가? 나를 가까이 잘 이해한다는 아내가 소리치는 말, “ 이젠 완전히 미쳤군요!”
단 한 마디 일갈에 주눅이 들고 말 남편들이여. 하지만, 시인은 지금 당장 머리
를 빡빡 밀고 싶은 것이다. 이 세상 누가 뭐라고 하든, 검은 머리칼을 거부하며
시원시원한 빙판을 마련하고 싶은 것이다. 영혼의 스케이팅을 즐길, 아무도 모
르는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코자 하는 것이다.
짧은 시이면서도 현대인의 아귀 같은 속물근성을 한 번쯤 신랄하게 뒤틀고
뒤돌아보게 만드는 시다. '낯설게 하기' 기법에 충실한 한 편의 시로 일상을 벗
어나 동네목욕탕 한 번 다녀온 기분이 든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효자손’ 하
나가 고독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때도 가끔은 있는 것이다.
물 만드는 여자 | 문정희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 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 시집,『 양귀비 꽃 머리에 꽂고』에서
시읽기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떠오른다. 최상의 善은 물과 같이 되는
것, 가장 겸허하게 자신을 비우는 것, 남을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하는 것(自利
利他), 남의 더러움을 깨끗이 정화하는 것, 남이 인정해주든 안 해주든 신경 쓰
지 않는 것, 온 생명을 기르는 데 삶의 의미를 두는 것, 생과 사에 연연하지 않
고 자연의 부름에 따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것, 목마름을 달래주고 온 세상을
부드럽게 애무하는 것 등등, 물의 미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희랍의 철인 탈레스는 '물은 만물의 根本'이라고 갈파했다고 한다.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
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렇다. 물은 흙을 만나야하고 흙은 물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뜨거운 불과
시원한 바람이 만나야 한다. 흙속에 스미는 물소리,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가? 치마를 걷고 둥근 달 같은 하초를 대지에 대는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 살다
보면 때때로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주고 싶을 때가 없을 것인가? 높은
곳에 서서 폭포처럼 온 세상을 향해 오줌을 시원하게 배설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네 어머니들은 조용한 곳에 숨어서 수줍은 듯 쉬이 쉬이 오
줌이 땅으로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연의 이법을 배웠다. 물 흐르는 소리
에 귀를 씻고 눈을 씻고 마음을 말끔히 정화하였다. 대지와 하나 된 오줌에서
온갖 이쁜 풀꽃과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길 기도하면서 제의를 치르듯 조심조심
오줌발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우리 몸은 한 방울의 물이다. 지구도 우주도 한 방울의 물이다. 지구의 70%
가 바다이며 우리 몸도 마찬가지이다. 시원한 물 한 컵을 마시며 맹물 같은 물
방울을 닮고 싶은 오늘이다. 부드럽게 흐르는 시냇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함
께 어우러진 오솔길, 햇살 그림자 징검징검 뛰다가 걷다가 건들거리며 아무 생
각 없이 호젓한 숲길을 거닐고 싶다
나팔꽃 |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 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종鐘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 꽃시 그림집 공저『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에서
시읽기
바지랑대 끝으로 끝으로 진격해가는 저 초록 병사들, 그들의 목표 지점은 어
디일까? 태양인가 혹은 구름인가, 아니면 뒷동산 소나무 가지 끝인가?
허공을 향해 소리치는 아우성을 들어본 적 있는가? 허공을 쥐고 또 다른 허
공을 향해 날아가는 향일성 앞에 아연실색하고 만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무모
한 도전. 나팔꽃의 희망은 단지 텅 빈 허공에 종소리 하나 매다는 것, 소박한 마
당 한 켠 바지랑대 하나 의지하고 끝없이 끝없이 타오르다가 마침내 보랏빛 꽃
을 피우는 것, 바지랑대는 그저 아무 의미 없이 혼자 서 있다가 나팔꽃을 만나
흥겹게 단소 부르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아침 햇살에 종소리 댕댕 울리는 나팔꽃과 더불어 쓸쓸하고 외로웠던 오랜
권태감을 훌훌 털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꼬이고 꼬여서 짠하고 아름다운 종소리는 울려 퍼지
는 것인가? 푸른 종소리에 귀가 먹은 흰나비는 절뚝거리며 숨바꼭질하듯 난반사
하며 날아오는 것인가? 시장기 달래줄 꿀을 찾아서 하루치 희망을 찾아서.
토끼에게로의 추억 | 신현정
토끼에게서는 달의 향기가 난다
분홍 눈은 단추 같다
앞이빨이 착하게 났다
토끼의 두 귀를 꼬옥 쥐어봤으면 했다
몽실했다
두 귀를 잡고 공중으로 들었다가 내렸다도 해보았다
토끼와 시소를 타고 싶었다
그러면 토끼는 올라가고 나는 내려오겠지
토끼는 구름이 되겠지
아하함 이참에 토끼와 줄행랑이나 놓을까.
- 시집,『 바보사막』에서
시읽기
토끼를 기른 적이 있다. 여고 3학년이던 딸내미 소원으로 큰 용기를 낸 적이
있다. 시골 연곡초등학교 똘이동산에서 기르던 토끼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해
어느 날 문득 토끼를 사달라고 조른다. 아파트에서 어떻게 애완 동물을 기르느
냐고 처음엔 거절했지만 집요한 고 녀석의 청으로 마지못해 토끼를 보러 갔었
다. 애완용 토끼라서 그런지 다들 예쁘고 귀엽게 생겼다. 한 마리를 데려와 아
파트 베란다에서 지내게 했다. 가족들끼리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며 며
칠을 보냈다. 난 ‘위고’로 명명했고 딸내미는 '끼토'라 하잔다. 아카시 잎이 푸를
적에는 뒷동산으로 끼토(위고) 먹잇감 구하러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고구마 철
에는 고구마 순을 따다가 먹이를 주었다. 고 새빨간 눈과 기다린 귀, 그리고 벌
름거리는 코,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이 시를 보니 그때 그 위고가 생각난다. 얼굴이 빅또르 위고처럼 생겨서 위고
라 지었었는데 꼭 철학자 시인처럼 관상이 생겼었다. 퇴근하면 바로 위고에게
달려가 그날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하지만, 요 녀석은 아무 말 없이 눈만 말똥
거렸다.
두 귀를 잡고 공중으로 들었다가 내렸다도 해보았다/ 토끼와 시소를 타고 싶
었다/ 그러면 토끼는 올라가고 나는 내려오겠지/ 토끼는 구름이 되겠지/ 위고
와 지낸 날들은 그야말로 동화의 나라였다. 귀를 잡고 올렸다 내렸다 하면 위고
는 낑낑거리지도 않고 시소를 탔다. 바깥에 뭉게구름 둥실둥실 지나가면 정말
구름 속에서 위고랑 날아가는 듯 황홀하기도 하였다. 새털구름이 비껴 날고 낮
달이 떠있으면 달나라 토끼랑 떡방아를 찧는 것 같았다.
떡방아 찧던 신현정 시인은 벌써 달나라로 이사 갔다. 토끼랑 줄행랑을 쳐서
그곳으로 도망을 가버린 것이다. 동심으로 가득한 그의 시심은 시방 어디서 빛
나고 있을까? 그 언젠가 조계사 인근에서 <불교문예> 행사가 끝나고 어느 허름
한 음식점에서 술을 함께 마신 적 있다. 소박 담백하던 담소와 특유의 머쓱한
미소가 생각난다. 꼭 우리집 위고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마음의 오지 |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 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 시집,『 마음의 오지』에서
시읽기
「마음의 오지」를 떠올리면 범종각이 떠오르고 종을 떠올리면 그 밑에 묻혀
있는 큰 항아리가 생각난다.
종소리하면 어릴 적 학교 종이 생각나고 학교종이 생각나면 현재도 학교를
벗어나지 못한 나 자신을 떠올린다. 얼마나 철없고 아는 것이 없으면 아직도
학교를 벗어나지 못한 평생 학생 부군인가?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종 밑에 묻혀 있는 저 독이 바로 큰 종이기에 밑에서 소리를 떠받치고 있는지
모른다. 저 큰 항아리가 없었다면 어디 그 종소리가 저 멀리 계곡을 빠져나가
저 속세 마을에 닿을 것인가?
그윽한 계곡의 종소리 덕에 그 계곡들은 홍수에도 태풍에도 아랑곳없이 수
천 년 풍상을 견디는 것이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
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종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을 돌아본다. 초승달 아래 홀로 거니는 내 그림자, 마
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이 돌아오지 못한다. 내 항아리가 작아서 그런 것인가?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 자신이 그립다”
이 시는 가을에 잘 어울리는 시인 듯 하다. 가을은 자기 성찰의 계절, 수렴하
는 계절이다. 밖으로만 확산되던 에너지를 안으로 모을 때, 휴식을 준비하며 다
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변화의 계절이다. 나의 그림자는 바로 나의 어둠이며
나의 항아리라 할 수 있다. 나의 종소리의 향기는 색깔은 어떤가? 혹 깨진 소리
찢어진 소리는 아닌가? 점검해볼 때인 것 같다.
마음의 오지, 저쪽에서 들려오는 내 마음의 종소리 내 몸의 종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볼 때인 것이다.
나병춘시인
* 1994년 계간《시와시학》신인상으로 등단.
* 시집으로『새가 되는 연습』『하루』
『어린왕자의 기억들』이 있음.
* 현재, 숲 해설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