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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협은 깊었어도 파도는 없었다.
첫날 출국 시 탑승 트랩을 오르니 “안녕하세요오.. 반갑습니다아”. 하고 어슬픈 발음으로 인사하는 안내원을 보는 순간 이들이 필리피노 임을 짐작했다. 그들을 보는 순간 국제선을 탑승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침 일찍 8시경 시모노세키항 국제터미널에 닻을 내리고 안내방송에 따라 하선하여 셔틀버스를 타고 입국절차를 위해 세관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건너편 부두에는 부관페리호가 정박하고 있어 이곳은 정기적으로 여객선이 왕래가 많은 항구임을 알 수 있었다. 입국절차는 많은 여행객들로 인하여 느리고 지루하게 줄을 서야만 했다.
일본전역은 요즈음 지난 3월의 대지진에 있었던 쓰나미로 인한 핵 피해를 염려한 탓에 관광이 많이 줄었기 때문에 일부 피해가 염려되는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혀 걱정 없다고 하면서 정부차원에서 관광 진흥에 노력하고 있었지만 외국인에게 지문등록을 하는 절차는 여전히 완화하지는 않고 있었다. 입국절차를 마치고 대합실로 나오자 드디어 일본 투어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대합실은 단조로 와 일하는 사람들도 한가하였고 사무실이나 상점이나 여행객들의 동선 따라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 평범하였다.
버스는 벳푸로 가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데 중앙차선을 두고 왼쪽으로 달리다 보니 커버 길마다 마주 오는 차량을 보며 느끼는 긴장감은 RIGHT HANDLE 방식에 익숙하지 못한 내 탓이었다. 달리는 차창에 비치는 농촌풍경에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깨끗한 거리를 따라 흐르는 차량 물결들과 함께 스쳐지나가는 도로표지와 간판글씨가 이방인인 나를 주눅 들게 하면서도 모든 것들이 이국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일본의 후미지고 한적한 시골풍경에서 부터 투어를 시작하는 나는 오래 동안 굶주린 이리 마냥 후각과 시각을 분주하게 연동시키고 있었다.
정오가 가까운 시간에 우사신궁에 닿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우선 근처 식당으로 안내되어 갔는데 이미 가이드가 전화로 예약된 곳이라 자리가 앉기가 바쁘게 작은 화덕에 불을 붙이고 1인용의 작은 뚝배기에 된장국을 끓이기 시작하였다. 가만히 살펴보니 수제비국수 같이 납작하게 빚은 작은 면발 몇 가닥이 약간의 채소나부랭이와 함께 들었고 공기 밥에 도시락 반찬 같은 몇 점으로 우리 눈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빈약한 차림이었으나 하나라도 남김없이 다 먹는 식문화를 따랐더니 부족함을 몰랐다.
곧 바로 신궁탐방에 나섰다. 시간에 쫓기는 빠듯한 일정이라 한가롭게 노닥거릴 여유가 없어 즐비한 상점들도 돌아볼 틈도 없었다. 궁 입구에는 커다란 돌기둥이 양편에 서있고 그 위 가로로 두 가닥 기둥을 걸쳤는데 멀리서 얼핏 보면 하늘 천(天)자 같이 생긴 것이 신궁입구의 문이었다. 솟을 대문 같고 솟대 같기도 하였다. 경내로 들어가자 깊은 숲 속에 들어온 것같이 고목이 즐비하게 우거져 있었고 길 따라 가까운 곳은 잘 다듬은 정원과 보물관 건물이 자리 잡아 경관풍치를 더하였다. 이곳 우사신궁은 전국의 4만 여개의 하치만궁의 총본산이며 천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큰 사원으로 본궁은 일본 특유의 하츠만 츠쿠리라고 하는 건축양식으로 지었고 기둥과 벽체 심지어 석 가래와 문살까지 모두가 온통 붉은 주황색 일색으로 단장되어 너무나 강렬한 색감이 섬뜩하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천년이 넘는 고목들이 잔뜩 이끼를 걸친 채로 긴 세월을 감내하고 있었으니 고궁을 찾은 현대인들에게 무언의 예지를 감추고 있는 듯 으스스한 신비감마저 깃들어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천왕의 위세와 위용은 사라지고 오직 그들을 모시는 신사는 지붕에 삼나무 껍질을 층층으로 덧 데어 세월을 이고 있으면서 수 백 년 묵은 고목 군을 장군처럼 거느린 풍광에 이방인은 넋을 잃었지만 궁내를 흐르는 개천에는 무심한 오리한마리가 먹이를 쫒아 노닐고 있었으니 덧없는 인생무상의 단면을 한 폭 그림같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한창 모내기를 하고 있는 풍경에 친밀감이 느껴졌지만 이내 고도가 높은 산 계곡으로 치닫는 버스가 급 커버를 유연하게 몇 번 돌아가니 무수한 삼나무 군이 산자락을 뒤덮어 창창이 우거진 계곡과 주변산세를 볼 수 있었고 이따금 대나무 숲이 있는 풍경이 이채로웠다. 어릴 때 지진이 나거든 대나무 밭에 들어가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도 지진이 잦은 곳이라 일찍부터 의도적으로 대나무를 많이 심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히가시시이아(HIGASHI SHIYA) 폭포를 찾았다. 창가에 스치던 산세를 보면서 경제림으로 속성수인 삼나무를 많이 심어 산림녹화에 애쓴 흔적에 부럽기만 했었는데 계곡에 들어가니 길옆에서 삼나무 군락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계획적인 프란테이션을 수십 년 전부터 일 꾸어 온 일본의 저력이 놀라울 뿐이었다. 아가씨아와 참나무 과의 활엽수들이 판을 치기는 하지만 아름드리 소나무가 일품인 우리의 모습과 비교되었다.
삼나무 역시 용도가 다양하여 풍치나 경제림으로는 많을수록 좋겠지만 소나무와는 격이 달라 비교할 수가 없다. 소나무는 산림이나 경관, 내구성에서 세계 으뜸가는 수종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 조선수군의 주력함대인 판옥선이 소나무로 만들어 무겁고 튼튼하였기 때문에 여러 문의 포를 달고도 동시사격의 충격과 반동에 견딜 수 있었고 일본 배는 저 삼나무로 만들어 충격이나 반동에 내구성이 약해 여러 문의 함포를 장착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우리수군은 주로 함포로 발사하는 원거리 전투로 적을 괴멸시킬 수 있었다. 이는 이순신의 통영앞바다 학익진 전술과 우수영의 울돌목 전투에서 적함의 결점을 여실히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메타세과이야 수종 같은 삼나무가 쭉쭉 뻗어 올라간 구역을 지나 천연적인 활엽수가 무성한 협곡을 따라 올라가니 한줄기 폭포의 낙하소리가 심산에 울리고 있었다, 이 폭포는 일본 폭포 100선중의 하나로 깎아지른 절벽위에서 직하로 내려 쏟는 85m의 장대한 물줄기가 깊은 계곡에서 주변의 암벽과 짙은 녹음의 산세와 어울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세속에 응어리진 속내까지 씻어주는 듯 가슴속 깊은 곳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깊은 계곡을 빠져나온 버스는 크고 작은 산길을 휘감아 달리며 유후인 마을로 향했다. 이곳은 규수의 오이타 현 거의 중앙부에 위치한 작은 온천마을이었다. 마을 곳곳에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갖가지 기념품상점들이 많아 일본인들이 뽑은 가장 가보고 싶은 휴양지(리조트)의 하나로 꼽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의 긴린코라는 호수가 온천이란다. 호수의 물고기가 수면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이 저녁 석양에 비쳐 그 비늘이 금빛으로 보인다 하여 긴린코(金麟湖)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였다. 또한 호수 바닥은 온천수가 뿜어져 나와 조석으로 일교차가 있을 때는 호수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나타낸다고 하는데 우리가 탐방했을 때는 오후 한 낮이어서 볼 수가 없었고 수심이 낮은 호수에는 산란기를 맞아 짝짓기 하느라 부산하게 노니는 물고기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호수주변에는 일본식의 근사한 집들이 주변경관과 어우러지게 제각각 멋을 내고 있었고 잘 가꾸어 다듬은 정원의 꽃과 관상수들이 눈길을 받고 있었다. 아늑한 호숫가 산책로와 마을골목길 그리고 상점가를 돌아보았는데 각지에서 온 많은 관광객들로 분비고 있어 과연 관광 명소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고 빼어난 경관과 깨끗한 마을풍경은 한마디로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마치 기모노를 입은 일본여인의 향기 나는 자태를 보는 듯하였다.
유후인을 떠나 30분 정도 달리자 벳푸온천여행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유명한 지옥온천의 현장에 도착하였다. 12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벳푸 최고의 볼거리인 지옥온천 순례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마을로 접어들자 산 중턱과 마을 집들의 여러 곳에서 온천의 수중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원천수가 무려 2,848개로 세계 제일이라고 하며 1일 용출량이 13만 톤을 넘는 일본 제일이라는 지역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명소라고 소개되는 곳이었다.
한적한 시골 산골짜기 마을에 저녁을 짓기라도 하는 듯 여기저기에서 굴뚝도 없이 하얀 연기 같은 온천증기가 피어나고 있었는데 그렇게 피어오른 수증기는 활짝 핀 한 떨기 크고 작은 흰 꽃송이처럼 보이면서 진한 녹음의 숲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고 열대의 상징 같은 야자수가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심어져 있어 마을 풍경을 한결 부풀리고 있었다.
지옥온천이라는 곳은 지하 250∼300미터 깊이에서 섭씨100도 정도의 열탕과 증기가 분출되고 있는 현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온천수가 용출하는 모습이 마치 지옥을 연상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바다지옥(바다를 연상케 하는 신비로운 코발트빛의 수온98℃) 도깨비대머리지옥(잿빛 진흙이 끓어오르는 모습이 삭발한 스님머리를 연상케 한다) 산지옥(온천열을 이용하여 세계 각국의 희귀 동식물들을 사육, 재배하고 있는 미니동물원이 있다), 가마도지옥(일명 부뚜막지옥으로 온도에 따라 색갈이 다른 6개의 크고 작은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깨비지옥(일명 악어지옥으로 온천 열을 이용하여 150마리의 악어를 기르고 있으며 수증기의 압력이 엄청나다) 흰 연못지옥(분출 시에는 무색투명한 열탕이나 물이 연못으로 떨어지면서 온도와 압력저하로 인해 청백색으로 변한다), 피 연못지옥(짙은 붉은색의 연못은 일본최고의 천연지옥으로 이곳에서 나오는 점토는 피부질환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회오리지옥(30∼40분 간격으로 50m이상 높이 치솟아 간헐천을 볼 수 있는 온천으로 벳푸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등 8개의 각각 특색 있는 지옥이라 재미나는 이름들이 붙여져 있었고 한 개의 지옥온천 탐방에 400엔이고 8개 지옥온천을 모두 순례하는 데는 2,000엔이라고 하는 안내문을 유심히 보았고 이 8개 온천을 모두 순례하면 지은 죄를 모두 씻어내어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와 한 때 기독교인들이 수난 받던 곳이라 지옥온천이란 설명도 있었다.
우리일행은 그 중에서도 가마도(부뚜막)지옥온천에 들어갔다. 입구에는 진흙탕 같은 용출수가 보글거리고 있었고 온천수시음대에는 한잔마시면 10년이 젊어진다고 하여 음용해보니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였다. 신비하게도 붉은 피 빛, 황토 빛 그리고 파란 온천 용출수를 구경할 수 있었고 바위틈에서는 100도가 넘는 뜨거운 분연이 계속하여 분출되고 있어 강한 신비감에 매료되어 자연의 순수하고 무한한 태고의 생성현장을 보며 환상적인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피로에 지친 발길은 잠시 동안 족 욕 온천을 체험하였고 코발트색의 온천수는 물의 온도가 94℃이며 이 물에 계란을 삶아 팔고 있었는데 즉석에서 5분 만에 삶은 계란을 맛보는 별미는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가마도 지옥온천을 나와 이웃마을에 있는 벳푸온천의 꽃이라 불리는 유황제배단지도 돌아보았다. 유독 이 마을에서 움막 속에서 유황 꽃(花)이 생산되고 있었는데 이는 약재로서 신경통이나 성인병에 효능이 있다고 하였다. 마을전체가 유황냄새와 함께 땅에서 나오는 수증기로 덮여있었고 근처 산허리에도 한 무더기 수증기가 연신 솟아나고 있어 어우러진 자연경관과 함께 한 폭의 그림 같은 마을이었다.
벳푸시내는 작은 도시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야자수가 가로수로 제법 많이 식재되어 있어 일본 남단의 열대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벳푸해안에 위치하여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후지칸 호텔’에 여장을 풀고 창문 밖 풍경을 살펴보니 해안가에는 작은 모래사장이 있고 그 해안 따라 귀한 해송이 풍치림으로 식재하여 지주목을 받치고 있었다. 호텔주위로는 역시 야자수가 심어져 있어 이곳은 온천고장이면서도 열대의 느낌을 주는 이국적인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일본의 남단에 위치하여 비가 많고 다습한 열대기후를 느끼는 곳이었다.
객실마다 준비해둔 실내복인 유카타로 갈아입고 우선 온천수에 나른 한 몸을 담갔다. 욕실은 대중탕으로 낮은 깊이로 물을 담았고 탕 가장자리에는 자연석을 놓아 작은 연못같이 노천탕의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별도로 벳푸시내를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는 노천탕도 있다하였다. 일본의 온천은 언젠가 남녀 혼탕을 사진으로 본 기억이 있는데 요즈음은 혼탕이 점차 없어지고 남탕과 여탕으로 구분된 곳이 대부분이라고 하였다. 탕의 수온은 별로 높지 않아 바로 입욕하더라도 머뭇거릴 필요가 없는 정도였다. 온천수에 물을 섞었는지 아니면 식혀서 탕 물로 사용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나 미끈거리는 것으로 보아 원천수임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대중탕 모양과 단순한 실내장식 그리고 보통의 수온과 약간의 유황냄새와 미끈거리는 감촉이 전부였다. 뭔가 특별할 것 같았던 그 유명하다는 벳푸온천에 대한 기대는 무너지고 그저 보통온천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일행 모두가 유카타 복장으로 넓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게 되니 문득 영화 속의 한 장면같이 사무라이 조직의 중대한 집회 같아 처음에는 어정쩡한 묘한 분위기였었는데 반주로 곁들인 한잔의 술기운이 돌자 이내 어색하지 않게 담소를 즐길 수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일본문화체험의 순간이었는데 이렇게도 살아봤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다가 금세 지워졌다.
다음 날 새벽 6시가 되자 후딱 일어나 온천욕을 한 번 더 즐겼다. 온천은 새벽5시부터 밤 12시까지 개방되어 있었고 투숙객은 무료였다. 온천투어로 와서 10시간 만에 두 번째 온천에 몸을 담그면서 넉넉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곧 떠나야 하는 짧은 일정이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는 일로 그저 주어진 시간 내에서 최대한 즐길 수밖에 없었다. 온천투어를 가면 하루 3번 온천욕을 즐긴다고 하는데 두 번으로 만족해야 했다. 허기 사 관광여행이 다 간절하여 온천 하느라 기운 뺄 몸도 아니니 시간이 있어도 두 번 이상은 사양하고 싶었다.
아침식사는 뷔페식으로 불편이 없었다. 배추김치를 양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요즈음 식단의 큰 변화라 하여 다행이었지만 이것저것 먹어보고픈 것으로 골라가며 한가롭게 즐겼다. 평소에 아침식사시간을 한 시간 정도 여유롭게 한 적도 거의 없었는데 이렇게 여행 중에 틈새타임을 즐기는 것도 부산하게 새벽부터 설친 탓이라 생각하면 무슨 일이나 남보다 먼저 서둘러 빨리 빨리하는 우리들의 속성은 쉽게 버릴 수 없는 것 같았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곧 떠나야 하는 벳푸 앞바다 풍경을 내려다보니 창가에 비치는 벳푸 해변은 엷은 안개가 자욱하였고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하더니 잔뜩 찌푸린 하늘이 내려와 수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씨 사이드 모모치 해변공원을 찾았다. 후쿠오카에 위치한 도시에 접한 해변으로 지상 234미터를 우뚝 뻗은 후쿠오카 타워가 있는 곳이었는데 이 인공해변은 총길이는 2.5km로 그 긴 해변에 모래를 수입하여 깔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탐방하는 그 날도 먼 곳에는 모래작업을 하고 있는 장비들을 볼 수 있었다. 도심을 친환경적으로 가꾸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모모치 해변을 모래사장으로 채우고 공원까지 조성하다니 실로 그들의 야심찬 개발추진력이 그저 부럽기만 하였다.
투어스케줄에 따라 학문의 신으로 이름 높은 스키와라노미치자네 공을 모시는 신궁을 탐방하였다. 이 곳 다자이후덴만구(大宰府天滿宮)는 400개가 넘는 일본 덴만구(天滿宮)의 총본산지로 관광명소였다. 스키와라노미치자네 공은 어릴 때 신동이었다고 하며 훗날 정적의 음모에 말려 교토에서 이곳 규수로 유배되었다가 죽게 되었는데 시신을 교토에 가져 가려했으나 시신을 든 관을 실고 가던 소가 이곳에서 멈추는 바람에 넋의 뜻으로 여겨 봉(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공이 죽고 난 뒤에 교토의 정적들이 이름 모를 괴질에 걸려 죽거나 역병이 돌고 또 이상기온현상으로 민신이 흉흉하게 되자 이는 죽은 스키와라노미치자네 공의 저주라 하여 그를 위로하고자 신사를 지었으며 그 때의 소를 동상으로 만들어 함께 기리게 되었다고 하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입구에는 청동으로 빚은 소의 머리가 많은 사람들의 손길에 광이 날 정도로 반들거리고 있었는데 이는 소의 머리를 만지면 좋은 일이 (득남하거나 행운이 따른다는 얘기 등) 있다고 하여 호기심과 신궁을 찾은 기념으로 한 번 만져보고 기념사진으로도 담았다.
아침부터 잔득 찌푸리고 있던 하늘이 짙은 회색빛 구름층으로 두꺼워지더니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서둘러 신사 경내로 들어가니 유난히 많은 매화나무가 제철을 맞아 매실이 영결어가고 있었고 이날따라 학생들 수학여행팀이 있는 날이어서 많은 학생들이 몰려다녔다. 이곳 학문의 신을 모시는 궁에서는 시험합격이나 행운과 성공을 기원하는 신사로 유명하여 수학여행이나 신수를 보는 이가 많이 찾는지 경내에는 즐비하게 점 쾌에서 나온 운세를 적은 종이와 기원문들을 줄줄이 달아 놓았는데 우리나라에서 사찰마다 연등을 볼 수 있는 풍경과는 대조를 이루는 광경이었다. 본궁에 이르니 참배하는 이들이 몇 명 있었고 마당에는 무리 진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 역시 천 년이 지난 고목이 많아 태고의 신비감으로 다가왔고 부부가 해로 하는 형상의 부부목(夫婦木)이 보호수로 지정되어 살펴보았더니 주름진 모습으로 노구를 나란히 하고 우리들을 반기고 있었다. 후문 밖에서 주문한 도시락으로 허기를 채운 일행은 자유로운 시간을 갖고 나름대로 남은 여정의 짜투리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신사 주변의 즐비한 상점들을 돌아보니 초코파이 크기의 하얗고 동그란 우메가에 모치를 만드는 상점들이 유달리 번창하여 장사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 모치(일명 매화떡)가 유명하다 하여 내친김에 하나 먹어볼 생각으로 10개 1,050엔을 주었다. 조그마한 모치 하나가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니 1,300원인 셈이다. 하얗게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3대에 걸쳐 가업으로 모치를 만들어 팔고 있다고 하는 조그만 가게였는데 모치를 사자 손수 전통 차 한 잔을 마시라며 주는 것이었다.
한동안 커피를 못 먹었던 탓에 가는 곳 마다 자판기를 찾았으나 커피는 거의 볼 수 없었는데 다행히 여기 한 곳에 커피가 있어 가보니 400엔이었다. 한 컵이 우리 돈으로 5,000원인 셈이니 블랙커피가 아닌 밀크와 슈거가 약간 들어간 맛이었는데 카페커피 값을 주었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지 유난히 덤덤한 쓴맛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갖가지 기념품 상점들을 돌아볼 때마다 소비자 가격을 우리기준에 맞추어 비교하니 여간해서 손길이 가지 않았다. 이곳의 국민소득이 우리의 두 배 수준인 것과 비교하면 이곳 소비자가격이 짐작이 가야하는데 여전히 물건 값은 비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사실 엷은 지갑으로 잘사는 나라를 여행하는 심정도 즐거울 수 만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역시 이제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노후대책이 절실한 형편이지만 한편으로 노년에 외국여행이라도 갈 기회가 많을 텐데 어쩌다 여행할 때는 주머니 생각을 하면 물로 배를 채우고 발걸음이 무겁더라도 아이쇼핑만 부지런히 하고 다녀야겠구나 하는 떫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시모노세키항 국제여객터미날로 가는 길에 관문대교가 있었다. 큐슈와 일본본토인 혼슈를 연결하는 현수대교였는데 그 웅대한 모습이 놀라웠다. 마침 'TOKYO MARINE' 이라 새긴 커다란 화물선이 마주 오는 또 다른 큰 배와 교행하며 대양을 향해 다리 밑 해협을 건너가고 있었는데 물류의 관문이면서 대륙 간의 육해교통의 중심지답게 역동적인 항구도시의 일면이 커다랗게 다가와 카메라에 담겼다.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관문대교의 그 장한 경관이 짙게 끼인 연무 때문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신비롭기 까지 하여 맑은 날이면 곳을 광활하게 조망할 수 있는 히노야마 (Hinoyama) 산 정상 전망대에 가보고 싶은 기대감 만 남겼다.
시모노세키항 국제여객터미날 대합실에서 출국수속을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에 벽에 휘갈겨 써놓은 한마디에 몇 번인가 눈길을 보냈다. “ Travling is Dream ” 이라는 의미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 저것이야!” 하고 외치고도 싶었다. 사실은 꿈같은 크루즈여행도 하고 싶은 나다. 그러나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고 살아온 새 가슴 같은 내 삶에 엄감생심 어찌 꿈인들 꾸겠는가. 실로 크루즈여행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것이다. 크루즈여행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팜플렛이나 관광안내책자로 기본적인 것들은 알고 있지만 다녀온 사람들의 감동에 대해서는 그저 귀동냥으로 전해 듣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있을 뿐이다.
굵은 빗방울이 세차게 갑판 위를 내려치고 있었다. 갑판 출입문을 밀고 나왔으나 비 때문에 갑판으로 나가지 못하고 간신히 구멍보트가 매달린 밑에 한 몸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발견하고 들어서서 사위를 살펴보았다. 사방은 칡 흙 같은 암흑이었다. 배의 엔진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올 뿐 광양을 향해 대마도 해협을 항해중인 배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짐작 조차할 수가 없었고 선수와 선미에 켜져 있는 커다란 조명불빛만이 내려치는 빗줄기를 세고 있었다.
비록 짧았던 시간의 투어였지만 해외여행에 대한 갈증이 상처딱지처럼 붙어 있다가 빗물에 씻겨 한 껍질이 벗겨나가는 것 같았고 오래 동안 갑갑하게 가슴속에 누르고 있던 체증이 풀리는 듯한 시원함이 밤바다의 상큼한 내 음과 함께 전신에 젖어들었다. 여행의 끝자락에 귀국선상에서 느끼는 이 기분, 이 느낌, 뭐라 딱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감회가 스물 스물 괴는 것이었다.
뱃길 여행에 익숙한 편이다. 88올림픽 이후 인천항에서 중국산동성 「위웨이」항을 몇 차례 왕복 여행하였고, 산동성「얀타이」 항에서 요령성「다이랜」항으로 여객선을 타고 여행한 경험이 있어 선박 여행에 대한 남 다른 향수를 느끼는 나다.
모두가 잠든 사이 선상에 홀로 서니 죄어오는 기분 좋은 감회는 얼마간 잊고 있었던 여행에 대한 향수를 깔짝거려 피로감은 있었지만 갑판 위를 내려치는 굵은 빗소리가 오히려 경쾌하기까지 하였고 빗속에 묻어오는 싱 그런 해풍을 한껏 들어 마시니 온몸은 새로운 기운이 감돌아 밤을 설치는 나는 잠시 만상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투어에 나선 이 틀 동안의 기억이 선명한 것도 있었지만 모처럼 즐기고 싶었던 「뱃푸온천투어」였기에 그 여운이 남긴 흥분이 깊게 각인된 탓으로 이번 여정을 회상하는 데는 결코 어렵지 않았다. 인터넷을 검색하듯 순간적으로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추억들이 마치 활동사진속의 영상처럼 빠른 속도로 되감기며 재생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표표히 떠나 여행이라고 한번 해 보고 싶었던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저 배낭하나 달랑 둘러메고 떠나고 싶었던 충동을 늦게나마 경험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국땅 관광의 설레 임이 더욱 솟아나면서 여행에 대한 강한 갈증이 세차게 가슴속으로 미어 왔었다. 두 어깨에 짊어진 삶의 짐을 잠시라도 벗어놓지 못해 부대끼며 살아온 날 들 때문에 여태 미루어왔었는데 이번 여행기회는 놓치고 싶지 않아 휴가를 가불하여 올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저녁 7시경에 시모노세키항을 떠난 배는 대양을 헤매는데 우리 일행은 3박4일의 일정의 짧은 여정에 잠들어 있었다. 침낭 사이사이로는 담요를 밀친 발들이 여기저기 허옇게 들 나 있었고 끊임없이 들려오던 엔진의 규칙적인 펌프질소리도 코골이에 묻히고 있었다.
가지런히 누운 침실을 볼 때는 지난 날 군대시절의 내무반 생활이 생각났다. 담장하나 사이로 사회와 그렇게 단절되어 힘들게 보낸 날 들이었지만 내무반에만 들어서면 그렇게 포근하고 따스했던 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하면 이런 선실 여행은 ‘그래도 호강이다 ’ 싶은 생각을 하면서 혼자 피식 웃었다.
일행들과 함께 묻어가는 뱃길여행이라도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또 경험하고 싶은 것은 나만의 꿈일까? 뱃길이 약간 흔들리면 어떤가? 한참 지루하면 어떤가? 세상사 마음먹기 달렸다는 데 뱃길여행이라도 못해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페리호의 갑판에 서서라도 대양을 바라볼 수 만 있다면 호화판 크르즈 여객선의 선상과 뭐가 다르겠는가? 지그시 눈을 감고 “지금 내가 지중해를 건너고 있는 크루즈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상상하면 그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이번은 아내와 함께하는 외국여행의 첫 기회였는데 뱃길여행이라 다소 힘들었겠지만 이번 기회를 경험삼아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크고 편한 뱃길 여행을 위해서 경험해 보자고 우기며 동행한 것이었다. 나는 해외근무에다 여러 번 출장과 관광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고 아내는 친구들과 짧은 기간이었지만 중국여행을 두 번 경험하면서 여행의 맛을 본 뒤로는 가끔 다음에는 어디를 가고 싶다고 얘기를 하였기 때문에 이번 뱃길여행도 경험삼아 하게 된 것이었다.
광양비츠훼리호는 지난 1월부터 광양과 시모노세키를 주 3회 운항하였다고 하는데 일본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 피해 때문에 일시 중단되었다가 5월말부터 운항을 다시 하게 되면서 이번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22노트로 지루함도 있었지만 여객750명 객실에, 화물 200TEU급의 큰 배로 롤링이나 멀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나라는 5천년을 넘는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근세에 와서 일본의 침략으로 오랜 기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수탈을 당하고 그 좋은 산림들이 훼손되었으니 오래전부터 오늘날까지 일본에 대해 골 깊은 한이 남아있다. 이번 투어에서도 진실을 왜곡하고 자연환경까지도 바꾸는 짓을 서슴지 않는 나라, 그 일본의 야망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었다. 개발이니 발전을 넘어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본 신궁이나 신사의 얽힌 인물들에 대한 진실은폐, 산림녹화를 위한 삼나무 프란테이션 현장, 친환경을 위한 모모치 해변의 변신, 그 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독도영토권 주장을 하는 현실을 보면서 소름이 돋는 그들의 속내와 집착에 두려움과 함께 야릇한 적개심이 찌꺼기로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으로 시모노세키항을 대하니 아버지가 학도병으로 징용에 끌러가 온갖 고생을 하고 왔다는 슬픈 기억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에 와 보니 잘 가꾸어 놓은 산림, 깨끗한 도시, 대지진 속에서도 잘 사는 모습을 보면서 퉤! 하고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일진데 세월은 흘렀고 그 흐른 세월 탓에 이제는 나의 감정도 삭고 무디어진 것이었다. 약세국의 국민으로 스스로 울분을 달래야 했고 그들의 문화와 생활의 일면을 엿보면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뇌까리는 것으로 이번 여행의 의미를 자위하고 있다.
해외여행은 꿈이고 추억이다. 세계 곳곳에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이 어디 있었던가. 비록 몸은 못 갔었지만 마음은 항상 떠돌고 있지 않았는가? 여행은 역시 꿈같은 즐거운 추억만 남기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인생은 나그네길 떠돌다 가는 길..♫♪ 이라는 노랫가락이 있지 않는가. 어찌 이틀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버스로 다니며 대일본을 구경하겠는가. 그 저 하룻밤 묵고 온 것이었다. 가까운 일본, 가보고 싶은 갈증은 해협같이 깊었었는데 느낀 감회는 잔잔한 호수처럼 파도가 없었다. 이번 투어 역시 한 모금 이슬방울로 입술만 적시고 말았으니 이 목마른 갈증을 어떻게 달랜단 말인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