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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민족문화
제1절 민족 찬탄가( 民族讚嘆歌)
1. 우리민족은 삼재(三在,森才,森財)를 근본으로 한다.
우리민족은 시작하는 민족이다.
우리민족의 시작하는 민족으로 민족의 뿌리는 하늘(霞乙)에 있고,
하늘(霞乙)에 뿌리를 둔 우리민족은 태어나면서 땅에 뿌리를 박고,
땅의 생리로 살아온 민족이다.
그래서 우리가 죽으면 귀천(歸天)한다고 했으며,
죽음을 돌아간다고 말 했다.
이것은 모두 하늘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하늘과 땅에 모두 뿌리를 두면서 하나가 되는 체질성의 민족이다.
하늘은 하을(霞乙)로서 붉음이 나르는(乙) 현상이고, 이것은 운(雲)의 시작이다.
이러한 현상이 땅에 내려와 만물을 창조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의 원초적인 마음은 하늘경에 본심 본(本心 本)으로 하얀 마음이니
하얀 마음은 인류의 근본으로 시작의 마음이다.
그래서 만물의 삶은 땅에서 시작하고, 시작하는 땅을 백이(白里)라 한다.
백이(白里)의 땅에는 흰옷 입고, 흰 마음으로 살아가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이 있었다.
그 민족의 시작은 구름(雲祀)과 비(雨祀) 그리고 바람(風白)이 일어날 때부터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류 시작이요. 인류의 시작은 문명(文名)의 시작이니
모든 자연물의 형상은 갑골문자(甲骨文字)의 문자가 되고,
갑골문자의 형성과정은 미래를 알 수 있는 운(雲)을 품고 있으니
자연물의 원색이 체질성이 되어 문자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동해의 아침노을(朝霞)에 의해서 움직이는 땅으로,
움직이는 땅에는 운(雲)이 일어나고,
일어난 운은 태몽으로 알려주고,
알려준 태몽의 운(雲)을 성취하고자 일생을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살아온 자연민족이다.
자연민족은 하늘의 뜻을 받들고 조상의 덕을 기리고 자손의 번창을 위해 살아온 민족이다.
그래서 삼재(三在)인 하늘과 땅 그리고 시절의 작용으로 살아가는 민족이다.
백의민족(白衣民族)은 시작하는 민족이요.
배달민족(拜道民族)은 땅에 감토(感土)하는 민족이다.
그리고 땅위의 만물은 줄기와 잎이 되는 민족은 생활민족이고,
생활민족은 그 민족의 혈통과 풍속을 민족성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우리민족은 땅속의 뿌리와 땅위의 줄기, 잎 그리고 꽃, 열매까지 모두 함께하는 단일민족이다.
단일민족이란 등골, 뼈골, 혈액, 살부의 유전으로
우리 몸이 자연의 자연성으로 되어 있다. 는 뜻이다.
그래서 영감과 육감의 정신으로 살아온 민족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 시절의 삼재(三在)에는
재물로 풍성한 삼재(森財)의 땅이 되고,
삼재의 땅에는 재주가 특출한 삼재(森才)의 인물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삼(森)으로 움직이는 땅에는
삼족오(森足烏)가 승천(昇天)하여 풍족한 재물이 가득하니
움직이는 인물이 태어나니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체질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창조할 수 있는 체질의 민족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어 시절의 세상을 열어가니
그 날이 개천(開天)의 날로 우리에게 처음의 차사(茶祀)를 받들게 한다.
하늘의 시작은 천간의 갑(甲)자에 그 작용을 담았고,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우리민족이 창시한 운(雲)이 담긴 문자로서
우리민족만이 하늘의 작용을 표현할 수 있었고,
또한 필요한 작용을 선택해서 쓸 수 있었다.
지지(地支)는 자(子)자에 땅의 시작을 담았고,
땅위의 시작을 눈 설(雪)자에 담아서 일 년의 시작을 알리고
일 년의 시작은 차(茶)자에 담아 설 차사(雪茶祀)로서 새로운 시절을 맞이함을 알리고,
차(茶)자의 뜻으로 참자가 형성되고,
참(茶)자는 만물의 시작을 뜻한다.
그래서 차자나 참자는 차(茶)자에서 그 뜻이 비롯된다.
우리는 하늘민족으로
일찍이 문자를 창제하여 문명이 시작된 민족이다.
그 문자는 갑골문자로서 상형문자의 근본이 되어 우리의 오랜 역사를 잃어버리게 하고
오늘날 한글의 바탕위에 자연을 문자화 할 수 있는
상형문자를 선택하여 도학(道學)을 조합하게 된 것이다.
시작하는 색깔은 흰색이다.
우리민족이 시작하는 색깔은 흰색이요.
흰색은 흰 백(白)자, 눈 설(雪)자, 흴 소(素)자로
이 글자는 시작하는 민족의 근본색이 된다.
백이민족(白里民族)은 땅의 시작을 알리는 민족이요
그래서 흰옷을 입는 민족이다.
백일(白日)은 백성이 태어나는 날이 되고,
백성(白性)은 백일에 태어나는 사람이란 뜻이다.
백성은 스스로 훌륭한 임금을 추대하여
추대 받은 임금은 백성(白性)을 위한 다스림을 한다.
이러한 제도를 화백제도(和白制度)가 아니라
하백제도(霞白制度)라 한다.
하백제도(霞白)는
백(白)의 시작과 하(霞)의 결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민족의 정신과 얼(乙)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은 흰색과 붉은 색으로 시작과 결실을 위한 자연성으로 삶을 살아온 것이다
도(道)자도 시작을 뜻하므로
달(月)도, 딸(月)도, 닭(달/독새끼)도 큰 (大)자 시작의 뜻인 도(道)로 해석해야 된다.
도라지(道羅地)는 땅속의 뿌리의 시작을 알리고
제사상 나물 중에 시작하는 나물이 된다.
도배(道拜)는 절로서 만남을 시작하고,
절(拜)은 땅과 같이 하는 마음으로 감토(感土)한다는 뜻이다.
절로절로 이루어진다는 말의 뜻이 감토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배달(拜道)민족으로 절(拜)로서 시작하는 민족이다.
사찰(寺刹)을 절이라 하는 것도 사찰에 가서 절(拜)을 한다는 뜻이다.
절은 땅과 하나 되는 행위로 불교의 근본 사상되고
사찰의 절 만(卍)자도 사방팔방에 감토한다. 는 뜻이 된다.
감토(感土)하면 내가 기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땅과 같은 생리를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이 된장도 같은 생리이다.
그래서 일 년 농사라 하여 된장을 담글 때 붉은 고추와 숯을 넣고
금줄을 치면서 정성을 다 하는 것이었다.
된장이 변하면 가정에 불운이 온다는 것도 생리가 같기 때문이다.
가정의 운은 집안에서 키우는 개(開)가 행동으로 알려 준다.
개는 열 개(開)의 뜻으로 된장이 변하면 땅을 파는 행동으로 불운을 알려준다.
우리민족은 서쪽이 시작의 뜻으로 흰색이다.
우리민족은 서쪽이 시작한다는 뜻으로 선후(先後)의 선(先)이 된다.
시작하는 땅에는 씨를 심어야하고,
그래서 서쪽지방에서는 흰옷을 입고 씨김 굿이 아니고 씨 심이 굿이 내려온다.
그래서 흰옷을 입고 모심기하는 것이 씨 심이(始 深里)굿이다.
그래서 씻어내므로 천도제의 해원 굿이 아니라
서쪽지방에서 시작한다는 뜻으로 흰옷과 흰 수건을 쓰고 씨앗을 파종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제사상의 붉은 대추를 서쪽에 놓는 이유는
붉은 대추는 운(雲)이 시작한다는 뜻으로 흰색이 아니어도 서쪽에 놓는다.
대추의 운(雲)을 받으려면
땅인 밤(栗)에 감토하기 위하여 배(拜)를 놓고,
감(感)을 놓으므로 감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과는 시절의 과실로 제사상이 시절상이라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절상인 제사상에 조율이시(棗,栗,梨,柿)는 감토하는 작용을 과실의 명칭에 담았고,
시절로 가는 뜻을 사과(四果)에 담은 것이다.
그리고 간단한 의식의 기본으로 주(酒), 과(果), 포(抱)를 쓰는 것도
결실의 열매를 얻으려면 땅에 감토하고,
포(抱)로서 시절을 안아서,
올라가는 운(雲)을 술(戌)에 담고 절(拜)로 감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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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 시절의 시작을 설(雪)이라 한다.
설에는 시절음식인 흰 떡국을 놓고
떡국은 시작하는 날의 시작하는 절식(節食)이 되므로 흰떡이어야 순응한다.
시절음식은 계절음식이 아니고
시작하는 때에 맞는 음식이다.
설날이 되면 까치가 즐거운 소식을 전하고,
까치가 울면 기쁜 소식이 온다고 전하여 온다.
그래서 설 전날을 까치설이라 하고 묶은 세배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雪)은 땅위의 작용이고,
우리민족은 뿌리민족으로 땅속의 시작이 설(雪)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지(冬至)가 아닌 동지(東地)가 되면
땅 속 뿌리가 흰 촉을 틔우는 날이 동지가 되며 설이 되는 것이다.
땅위의 시작은 시절의 시작으로 눈 설(雪)자에 그 뜻을 담았다.
정월 초하루를 설(雪)로서 일 년의 시작을 알리듯
설(雪)의 흰색은 땅위의 시절의 시작이 된다.
그래서 시작하는 음식도 흰색이어여 하고,
남녀가 혼사(昏祀)를 할 때도
국시(九始)를 먹는 것도 혼사(昏祀)로 일생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국시는 실타래와 같이 파(破)뿌리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파뿌리는 실뿌리가 되어 실뿌리는 뿌리의 시작이 되니
우리는 예로부터 생일날 국시를 먹는 풍습이 있다.
그래서 백일과 돌상에 실타래를 놓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차 고사(告祀)에도 실타래를 놓는 이유도
시작이 반이다. 라는 속담이 있듯이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야 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시작을 민족성으로 살고 있는 민족이므로
시작을 맞이하는 때를 알아야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소복(素服)을 입는다.
소복은 흰옷으로 부모의 음덕(陰德)의 운(雲)을 자식이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생전에 덕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덕을 닦는 행동으로 집안 행사에 떡을 만들어 돌렸던 것이다.
상복으로 검은 옷은 생활민족이 입는 옷으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소복은 선택이 아니다. 필수인 것이다.
우리가 소복을 입는 이유를 안다면 검은 옷을 입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신 분이 쓰던 물건을 산소에 넣어 주기도 하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에 태우는 풍습이 생겼다.
이러한 풍습도 자손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골동품을 쓰던 물건이라 선호하지 않았다.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낸다는 말이 있듯이
이 말은 새로운 시작으로 부모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그리고 동지는 양력의 동지(冬至)와 음력의 동지(東地)가 있다.
양력의 동지나 음력의 동지는 12월 21 일로 같은 날이다.
양력의 기준은 해가 가장 긴 날이 되고
음력의 기준은 지구를 도는 달의 공전 주기로 잘못 알고 있다.
천간지지(天干地支)속에 이미 하늘의 생리와 땅의 생리가 모두 들어있어
양력과 음력을 따로 쓸 필요가 없는데
맞지 않는 책력으로 기후의 혼란을 그리고 지구의 혼란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자연민족이라는 이유가 세계의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주어진 삶의 여건도 모르니 아! 아! 우리민족이여
낮의 시간이 가장 긴 날의 작용으로
땅속의 동지(東地)가 되어 땅속의 설(雪)이 되므로
땅속의 설(雪)은 흰 차(茶)꽃이 담아 알리고,
땅속에는 뿌리가 움직여 흰 살을 드러내고,
땅위에는 붉은 운(雲)의 시작으로 동백꽃이 피니,
그 시절을 맞이하는 팥죽을 쑨다.
팥죽은 일 년의 결실로 월계관의 벼슬을 맞으라는 뜻으로
팥의 명칭에 깨어질 파(破)가 들어 있어 좋지 않는 것은 모두 깨어지고
그래서 팥죽 속의 새알은 땅속의 설(雪)로 새 촉을 뜻하니
차 꽃과 동백꽃은 이 땅의 시작과 운(雲)의 시작을 알리는 꽃이다.
우리 몸은 땅의 생리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몸도 땅과 같은 생리로 되어 있어
여성의 생리가 28일로 땅의 생리와 같은 것이니
동지가 되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생리현상이 일어난다.
서당의 공부도 동지 날에 끝이 나고
일 년의 운수(雲數)도 동지가 지나면 점을 쳤다.
이 말은 우리민족이 땅력을 사용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동지가 지나면 나이가 한 살 더 먹(鶩)는 다는 것이다.
붉은 색은 운(雲)의 시작이다.
동지가 되면 동백꽃이 피기 시작한다.
“아주까리(訝朱柯里) 동백아 울지를 마라”는 아리낭(訝里囊)의 가사가 있다.
아주까리는 피마자 식물의 이름으로만 알고 있지만
따뜻한 정성으로 붉은 노을을 맞이하는 터를 아주까리라 한다.
정월 초에 아주까리 잎에 꿩알을 싸먹으면 홍재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꿩도 재물을 뜻하여,
옛날부터 만석꾼은 꿩 털로 부체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신라 화랑들의 모자에도 꿩의 깃털로 장식한 것은
이 땅의 모든 것이 재물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霞地)부터 백일홍(白一紅)이 피기 시작하여
일 년의 결실을 기다리는 꽃이 된다.
옛 부터 종가집이나 절집에서 심는 나무가 되고,
백일홍은 100일 동안 핀다는 뜻이 아니라
하운(霞雲)은 십일몽(始一夢)이요.
붉은 운(雲)은 하나의 꿈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동지(東地)에서 하지(霞地)까지의 기원을 동백꽃에 담았고
하지에서 가을의 결실까지의 운(雲)을
백일홍에 담아 알리는 꽃이 된다.
기원의 결실은 팔월 보름날 승편(昇片)으로 차사(茶祀)를 지내고,
추석차사는 가배(柯拜)로서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그래서 절을 할 때 이마를 땅에 닿게 하는 것이 감토(感土)하는 방법이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대원군이 배에서 내려서 땅에 절을 하는 것이나
카톨릭 교황이 이 땅에 입맞춤을 하는 것도 감토하는 방법이다.
감토하라는 뜻은 땅과 감응하는 행위가 절(拜)에 있기 때문에
절(拜)은 민족의 정체성이 된다.
대(大)자의 뜻도 시작할 도(道)로 해석해야 된다.
이러한 변용어는 도학(道學)에서 유학(儒學)으로
지방에서 지방으로 발음과 뜻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구(大邱)를 도구(道九)의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자연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구라(四九羅)를 벚꽃이라 하고,
목단(鶩丹)을 모란이라 하고,
이도사발(里道四發)을 정호(井戶)라 한다.
목화(鶩霞)를 고려 때 문익점이 들어왔다 하였다.
그 전에는 무명이 없었을까?
그래서 혼 함에 목화를 넣는 이유도 목아(鶩訝)로 먹음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먹음은 시절을 뜻하고 이것을 가계계승이라 한다.
목아(鶩訝)는 모가지의 뜻으로 모든 것을 먹으므로 운의 완성을 가져온다.
그래서 우리문화를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고 한다.
유학의 쓰임으로 인해 표준말과 사투리가 생기고
양반과 서민이 생기는 현상이 유학의 배움에 달려있다네
모든 유물은 도학으로 풀어야 그 뜻을 알 수 있고,
그 쓰임을 알 수 있고, 가치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달도 도(道)로 해석 하여 땅의 시작함을 알리고,
딸도 달의 강한 발음으로 시작할 도(道)의 뜻이다.
딸을 낳으면 살림 밑천이라 했다.
딸을 낳으면 가문의 운(雲)을 타고 났다하여
연당(蓮塘)이다 별당이다 하여 귀하게 여기고 꽃 수놓은 홍(紅)방석에 앉혔다.
오래전 우리민족은 딸로서 대를 잇는 모계사회였다.
그것은 세상의 운(雲)을 여인이 움직였으니까.
딸이 시집갈 때 장롱을 만들기 위해 白(벽)오동나무를 심은 뜻도,
오동나무(烏東羅巫)는 재물을 뜻하기 때문이다.
시집가서 살림이 풍족하여 잘 살라는 뜻이다.
오동(梧桐)은 유학의 표현이요.
오동(烏東)은 도학의 표현으로 검은 땅에 붉은 노을의 만남으로 이 땅의 재물을 뜻하는 것이다.
부모의 산소에 오동나무가 절로 자라면 자손이 재복이 크다는 뜻이다.
이것은 땅속의 까마귀 烏가 땅위에 올라와서 오동나무로 오(烏)의 뜻으로
그래서 예로부터 오동나무에는 봉황이 앉는다는 말이 있다.
이 뜻 또한 오동나무는 큰 재물의 뜻이 있다는 유학의 표현이다.
그래서 오리동(烏里洞), 오전리(烏田里), 오실(烏實)등의 이름이 있는 마실은
큰 부자가 살았거나 살고 있는 마실(馬實)의 명칭이다.
고대 무덤 속에 붉은 토분을 넣는 것도
근대에 붉은 흙을 넣는 것도 모두 움직이는 자손이 태어나길 바란다는 뜻이다.
움직이는 자손은 재물과 직위의 운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땅은 우리 몸의 생리와 같으므로
옛날부터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 졌다는 말이 내려온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민족으로 우리 몸이 땅의 생리와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자라는 것을 먹고 살아야 한다.
이 말은 우리 몸이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생리와 생태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의 생리는 지지(地支)의 땅력으로 되어 있다.
생일도 택일도 모두 땅력으로 해야만 만남의 운이 일어난다.
가축의 닭도 시작할 도(道)의 뜻이 원색이다.
제사상에 고기를 담는 도적(道積)에 닭을 시작의 의미로 먼저 놓아야 하지만
맨 위에 얹어 벼슬의 뜻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닭을 쓰지 않는 집안도 있다.
그 이유는 닭의 생리는 유천역(酉天逆)으로 역성을 가지고 있으며,
생태는 가정의 번창을 뜻하는 이중의 본성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이다.
원초적인 시작의 뜻으로 차(茶)자를 쓴다.
차(茶)자는 초(初)+아(訝)로 처음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처음을 맞이하는 시절은 동지차사를 설 차사로 그리고 승천차사로 추석차사가 있다.
새로운 농작물을 생산하여 그 시절에 고하는 것도 차사 혹은 고사(告祀)라 한다.
인간사에 고해야 할 일인 유사즉고(有事則告)도 고유(告有)가 되겠다.
차사(茶祀)는 처음 맞이하는 시절이요
고사(告祀)는 때를 알리는 것을 말한다.
차사의 사(祀)는 기복의 뜻이다. 그래서 모든 의식에 사(祀)자를 붙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는 순응과 역성으로 복과 벌이 따른다는 것이다.
생활의 시작으로는 초(初)자를 쓴다.
한 달의 시작을 초순(初旬)이라 하고,
마음을 처음 일으키는 것을 초발심(初發心)이라 한다.
의식행사에 술(戌)을 놓은 것도 초례로 초(初)자를 서야 한다.
이유를 모르니 내초(乃醋)라 하여 옛날부터 그렇게 한다고만 한다.
술(戌)은 개 술(戌)로서 술과 개(開)는 오르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뿌리에서 시절을 열어 올라간다는 운(雲)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민족이 살고 있는 이 땅은
까마귀의 검은 땅의 작용과 조하(朝霞)의 붉은 노을이 만남으로
까마귀가 승천(昇天)하여 삼족오(三足烏)가 되어 땅이 움직이고,
세상의 모든 이치(理致)를 밝혀 만물을 움직이게 한다.
이것을 비단에 담아 현훈(玄纁)이라 하고,
현훈(玄纁)은 태국기(胎國基)의 근본 색으로
현훈은 하늘의 하(霞)색과 땅의 현(玄)색을 비단에 새기니 현훈이라 한다.
그리고 혼사(昏祀)의 혼 함의 예물로,
상사(喪祀)에는 영전과 관속에 쓰이는 문자와 색깔이 된다.
그러나 현훈도 유학의 문자이다.
우리민족은 까마귀 땅인 검은 색과 조하(朝霞) 붉은 노을 색을
태국기(胎國基)에 그 뜻을 담아
아래는 검은 색의 땅 색과 위에는 붉은 노을색의 의미로
우리민족의 원색(原色)을 말하는 것이다.
태극기(太極旗)라는 명칭은 청색과 홍색으로 극(極)을 이루어 분리를 시키고
그 색을 음양색이라 한다. 음양은 물과 불로서 우리의 국기를 은유하니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래서 삼족오(三足烏)는 붉은 노을의 작용으로
까마귀 오(烏)자에 땅의 생리를 담아 움직이는 삼(森)으로
우리 땅이 재물의 풍부한 땅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속을 여는 삽살개도 검은 색이어야 한다.
사신도(四神圖)의 현무도 재물이 풍부한 땅을 표현한 것이다.
현무(玄巫)를 북쪽에 놓고 북 현무,
남쪽에는 남 주작이라 표현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이 아니고,
하늘과 땅 시절의 자연성을 표현한 것이다.
남쪽의 움직이는 땅인 현무(玄巫)에서,
시절의 시작인 서쪽의 백호가 동쪽의 청룡으로 연계되어 빠른 성장을 하므로,
북쪽의 붉은 주작인 결실을 취할 수 있다는
삼재(三財)의 자연성을 배치한 그림이다.
하늘민족인 우리는 까마귀의 검은 땅에 붉은 노을을 만나 세상을 움직이다.
하늘은 하을(霞乙)의 변용어로 붉은 노을인 조하(朝霞)가 되고
가정에는 할배(霞拜}가 가정의 하늘로 하늘 하(霞)와 절 배(拜)로서 그 뜻을 다한다.
그래서 아침에 붉은 노을이 일어날 때 좃(朝)이 서는 것이다.
좃은 조상 조(祖)를 말하고,
좃이 선다는 것은 땅(몸)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늘이 움직여서 하늘의 운을 받는다는 것으로
자연의 운(雲))은 붉은 구름에 의해 일어나고
사람의 운(運)은 인간의 삶의 행동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경천사상(敬天思想)과 조상 숭배사상(崇拜思想)이 있다
경천사상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 것을 다짐하는 예(禮)를 다 하고
조상 숭배사상은 조상을 받들어 효에 근본을 두고 자연에 감사하는 뜻을 전한다.
붉은 노을의 움직임이 하늘이요. 하늘(霞乙)은 하을인 것이다.
인간에겐 할배 할매의 할(霞)자가 되어 하늘이란 뜻이다.
그래서 붉은 노을의 움직임이 하늘인줄 모르고
하나님이 따로 신(神)이 되어 있는 줄 알고
푸른 하늘이 우리의 하늘인 줄 알고 있다.
붉은 노을은 붉은 구름이 되고
원천은 동해(東海)가 되어
동이족(東夷族)의 동(東)자가 된다.
동해(東海)와 동이족(東夷族)이 사는 이 땅이 한 몸이 되었을 때
우리민족은 세상의 패권을 누린다.
그러므로 동해의 명칭이 바꾸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국토를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동해에 떠오르는 붉은 빛이 구름에 담겨 조하(朝霞)가 되면
그 날은 조하우류(朝霞雨流)로 비가 온다는 것이다.
비가 오면 뿌리가 튼튼하게 자라고
저녁에 붉은 노을이 일어나면 모하청류(暮霞晴流)로서
다음날 날씨가 청명하여 땅위의 만물이 자란다.
동해의 붉은 노을에 의해
까마귀 땅이 움직여 삼족오(森足烏)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 문화(雲 文化)의 민족으로
구름의 형태와 색깔에 의해 지상의 기후가 형성되고,
지상의 기후는 하늘의 구름의 작용이니
하늘의 작용은 땅속의 작용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작용은 바람에 의해서 일어나고 바람은 땅속에서 땅위로 불어오니
우리의 산천과 지형의 길은 바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운(雲)이라는 기복의 용어가 우리의 삶이 된다.
땅의 움직임이 시작하는 오미곳(烏未곳)에서
동해를 끼고 오천(烏天),
토함산은 토하산(土霞山)의 해석으로 동해의 붉은 노을을 머금은 까마귀 산을
삼족오 산으로 승천시키고,
석굴암은 까마귀의 입으로 붉은 노을을 먹고
울진의 하대(霞臺)로 붉은 노을을 맞이하고
강릉의 옛 지명인 하슬라(霞乙羅)는 시절에 순응하여 하늘을 맞이하는 땅이 되고
북쪽으로 함흥(霞興), 하산(霞山)으로 붉은 노을이 일어난다.
그리고 내륙으로 만주(滿珠)까지 뻗어나가 만주에서 세계로 일어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시원의 땅으로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는 우리국토 모습이 반도다 토끼다. 라고 일본인이 말한다 했다.
아니다. 호랑이다. 하여 호랑이 꼬리라는 듯으로 호미(虎尾)곶이라 한다.
호미곶은 오미곳(烏未㖜)으로 땅의 움직이고 운이 좋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한반도(翰奤道)는,
뿌리 한(翰)자 얼굴 반(奤)자로 발끝에서 얼굴까지 자연민족 전체가 사는 땅을 말하는 것이다.
조하(朝霞)가 일어날 때 지상의 모든 삶은 아리낭(訝里囊)이 되어
아리낭은 시절 주머니에 하운(霞雲)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흰색 노랑색 초록색 빨강색으로 시절은 움직이고
시절색이 움직이는 것을 색동(色動)이라 한다.
색동은 어린아이의 저고리 소매, 혼례복인 원삼 소매, 할 옷 등에 남아 있다.
청색은 승천 색으로 인간의 삶에 쓰지 않는 색이다.
그리고 검은 색도 죽음의 색으로 생활에는 쓰기를 꺼렸다.
그래서 개업할 때 걸어놓는 깃발도 색동으로 시절색이다.
어린아이의 돌상에 백설기와 수수떡과 함께 무지개떡을 놓는 것도,
백설기는 시작의 뜻이요. 수수떡(首受德)은 수장이 되라는 뜻이다.
무지개떡은 아리낭 떡으로
시절에 순응하여 하늘의 하운(霞雲)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아리낭(訝里囊)은 노래와 춤 그리고 지명(地名)으로 민족성을 표현하였다.
시절을 표현한 사찰의 그림을 단청이라 하고,
단청은 청색(초록색)으로 단장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움직임을 용(龍)의 작용을 표현하였고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雁)이라 하고,
임금이 입는 옷을 용포(龍抱)라 한다.
사찰 곳곳에 용의 형상이 건축물 속에 남아있다.
이것은 사찰의 작용이 최상의 운(雲)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조각으로는 음각과 양각 그리고 투각으로
하늘과 땅의 조화와 시절의 통함을 나타낸 것이다.
땅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삶의 움직임을 도라지(道羅地)에 그 뜻을 담았다.
도라지는 가문에 뿌리를 박으라는 뜻이다.
그래서 제사상에 나물로서 도라지나물이 되었다.
우리민족의 얼(乙)과 정신(精神)은 말과 글에 있고
우리의 말과 글은 자연물의 원색을 표현 하였다.
자연물의 만남과 만남에서 일물(一物)이 생겨나서 움직임을 시작하고,
이것은 순리에 순응이냐 역행이냐에 따라 결과가 있다.
순응하기 위한 절기마다 시절 풍속(風俗)이 행하여지고,
어른들의 올바르게 살라는 말씀도 많았다.
그래서 가정범절(家庭範節)이 지역마다 가정마다 자연스럽게 행하여 졌다.
이러한 논리(論理)가 자연을 표현한 도학(道學)의 근본사상(根本思想)이며
우리가 도학(道學)을 알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옛것이 미신이다.
우리조상은 문맹(文盲)이다 이 어인 말이요
과학과 문헌을 중요시하는 현대인들의
뜻도 모르고 암기해야하는 학문,
체질이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외국 것은 무조건 좋다는 의약품들
자가 자신을 남에 의해서 알려하고 하는 모순을
의문시 하지 않는 이 땅의 지금 풍토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자연성에 의해 이루어진 민족의 위대한 정신과 얼이
이 시대에 우리가 우리의 민족성과 인류애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는 것을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느낄 것이다.
부디 우리의 민족성(民族性)이 무엇인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의 정신을 바로 알고
우리의 삶을 바로 알아서
세계의 인류를 평화롭고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것이 민족의 정신과 얼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참 된 삶이 되며
이 길은 바로 도학(道學)의 가르침을 익히고 실천하는데 있는 것이다.
2018년 7월 아라하 법주 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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