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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철의 예술세계
강원대학미술교육과 / 관동대학교교육대학원 미술교육 수상-강원미술대전(우수상, 최우수상, 대상) / 신사임당미술대전 (우수상) 개인전 7회(예술의 전당 5회, 호주 시드니, 강릉미술관) / 단체기획전 102회 Art Sydney 06 -RHI&Hordern Pavilion, Moore Park, Sydney, Australia Korea Art Festival 초대전-세종문화예술회관 Korea Art Special Festival 초대전-인사아트센터 Korean Contemporary Art Festival(2006-2011)-예술의 전당 2009 한,몽수교19주년기념 특별기획초대전-몽골국립현대미술관(8.2-8.24) 2010 갤러리아트넥서스개관초대전-춘천 2011 제7회 강원아트페어-춘천문화예술회관(5.14-5.20) 2011 2011 MBC '힘있는 강원전'-국립춘천박물관(7.7-7.24) 2011 제7회 강원아트페어-춘천문화예술회관(5.14-5.20) 2011 2011 MBC '힘있는 강원전'-국립춘천박물관(7.7-7.24) 2012 제12회 KCAF(한국현대미술제-Korean Contemporary Art Festival)-예술의전당
현)한국미술협회강릉지부 서양화분과위원장, 강원구상작가회, 강원미술대전․강원교원미전 초대작가 / 삼척마이스터고등학교 미술교사
정(情) 2000-6/145Cm×110Cm/Oil On Canvas/2006
반영과 시선의 새로움이 빚은 정물 정물화. 스틸 라이프(Still Life), 즉 ‘정지되어 있는 생명’이란 영어는 좋은 뜻이 아니었다. 베니타스(Vanitas, 덧없음)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역시 정물화를 해석해야 할 때의 칙칙하고 어두운 단면들이다. 정교하고 치밀한 사실 기법은 어떤가. 네덜란드 정물화가 이런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대한 해석 역시 트롱프뢰유(trompe-lœ'il), 즉 속임수 그림이란 평가절하를 감수해야 했다.얼핏 정교한 그림의 취향일 듯이 보이는 사실주의 지지자들은 또 어떤가. 재현론과 사실주의를 역설하던 루카치도 하나하나의 세부에 치밀한 네덜란드 정물화는 자연주의 취향이라 하여 자신의 사실주의 구현 목표에서 제외했다. 그런데도 장국철은 끊임없이 이런 그림을 그렸다. 온갖 실험과 날 것 그대로의 취미가 예찬되는 이 시대에 그것은 그저 한물간 취미처럼 보이기 쉬운 그림이었다. 그렇지만 정말 그렇기만 할 뿐인가. 단선적인 시각은 언제나 커다랗게 구멍 난 오류들을 달고 다닌다. 인상주의 이후 저급의 장르였던 풍경화가 복권되었던 것처럼, 최악의 장르로 취급되던 정물화 역시 위상을 회복한다.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운동인 큐비즘은 정물화에서 그 본연의 방법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극사실 기법은 하이퍼리얼리즘에서처럼 이 시대에 오히려 저항의 기법이 되기조차 했다. 장국철의 화법을 퇴물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요즘의 예술 트렌드를 모르는 한물 간 시각이기가 쉬운 것이다. 그는 무엇을 그리도 열심히 그리고 있는가. 하나같이 예스런 소재들이다. 색동옷감, 광목 같은 옛 옷감들이나 놋그릇, 옹기, 자기 같은 예전의 정서를 드러내는 소재들. 이런 해묵은 골동품 역시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다고 그것을 추억과 기억을 소진할 뿐 새로운 창조를 담아내지 못하는 소재라고 볼 일이 아니다. 정(情), 다시 말해 미감을 울리는 정서와 같은 것이야말로 새로움을 끊임없이 생성해내는 닫히지 않은 주제이기 때문이다. 장국철은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향수를 작품으로 얘기하려 한다.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바느질은 그대로 삶 속의 예술이었다. 그에게 그 많은 삶의 지혜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좋은 기억은 아직도 그에게 끊임없이 샘솟는 삶 속 지혜의 원천이 되고 있다. 비록 옷감으로 직접 만들고 새기지 않아도, 그는 바느질 이상의 많은 것을 그 속에서 만들어낸다. 도기 같은 정물에 군데군데 찍히는 흰 점도 눈에 띈다. 원래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밝은 지점에 찍히는 흰 포인트야말로 도자기를 생동감 있게 하는 표현이다.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것에서도 콧등이나 눈동자 속에 반사되는 흰 점을 찍은 것은 살아 있음을 표현하는 화룡점정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 속의 옹기나 자기, 놋그릇의 흰 반사점은 그림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표현으로 가볍게 지나쳐버리기 쉽다. 하지만 그 반사점을 다시 살펴보자. 그 흰 포인트는 넓은 표면의 반영들 속에서 빛난다. 그림 속에 서 있는 주요 소재들은 거의 모두 반사되는 이미지를 품고 있는 것들이다. 놋그릇에 비치는 색동옷, 백자나 항아리 어느 것이든 바닥에 놓인 모든 것들을 비쳐낸다. 그렇게 천정 어딘가에 있을 빛도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옛것과는 많이 다른 새로운 점이다. 놓여있던 방의 풍경 전부를 담아내는 정물들. 살펴보면 볼수록, 자기에 비친 풍경의 깊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보면 볼수록, 그림 안에는 무한히 큰 세계가 무한한 크기로 담겨있어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장국철 회화 예술의 현대적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현대미술은 새롭고 예민하게 보는 법을 끊임없이 가르쳐 왔다. 버넷 뉴먼이 널찍한 평면에 그은 단지 몇 개의 선으로 수많은 이야기와 수많은 시각 현상들을 말하게 하듯이. 추상이 아무런 시각적 소재 얘기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민한 지점에서 오히려 세계 전체 얘기를 하게 하거나, 가장 단순한 미니멀 아트가 가장 왕성한 논의를 촉발시켰듯이 말이다. 그림의 시점 또한 예사롭지 않다. 쳐다보는 시선으로 높게 놓인 탁자머리 위로 놓인 정물들은 놓여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 위에 놓인 걸친 천이나 접힌 천 조각은 탁자와 함께 바닥을 드러내 보일 수가 없다. 그 감추어진 부분이 바가지 표면에, 놋그릇 표면에, 백자의 표면에 담겨지는 것이다. 그건 그저 사물과 똑같이 그린 신기함만으로 보는 치밀한 사실기법의 그림 맛이 아니다. 쉽게 잡히지 않는 반사영상은 뚜렷하게 한가지로 제한된 이야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여백이 많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담을 풍성함이 이런 정교한 그림에 있는 것이며, 올려다 본 시선은 보이지 않는 바닥의 반사영상 속에서 그 효과를 더욱 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준엄한 주제가 큰 예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숭고한 이념과 도덕이 예술의 위대를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나른한듯한 선입견을 깨고 존재하는 장국철의 예술 방법적 역설은, 오히려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진정한 예술처럼 보인다. 소재와 기법의 예민한 지점과 가치를 보지 못하는 모든 해석을 질타하는 그의 고집스런 예술과 방법이 그 진정성의 이유인 것이다. 최형순(미술평론가)
정(情) 2006-1/53Cm × 45Cm / Oil On Canvas/2006 정(情) 2011-6/71Cm×61Cm/Oil On Canvas/211 정(情) 2011-8/45Cm×53Cm/Oil On Canvas/211 정(情) 2012-2/61Cm×71Cm/Oil On Canvas/2012
정(情) 2011-5130Cm × 163Cm / Oil On Canvas/2011 정(情) 2006-245Cm × 53Cm / Oil On Canvas/2006 정(情) 2009-271Cm × 61Cm / Oil On Canvas/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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