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전쟁사]
고대 왜(倭)와 벌인 전쟁과 외교 (상)
왜, 3~5세기에 집중… 태풍 피해 여름철에 침략
신라 침략 35회 중 22회가 여름, 식량 고갈되는 시기와 겹쳐
경주, 왜인에게 함락된 적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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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왜
신라인들에게 왜인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먼저 ‘왜’라는 명칭부터 알아보자. 720년 무렵 편찬된 일본의 대표적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왜(倭)와 일본(日本)이 혼용되고 있으나, 일본학계에서는 대체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일본이라는 국호가 제정됐다고 본다. 중국 측 사료에는 한서(漢書) 이후로 지금의 일본열도를 왜라고 기록하다가, 구당서(舊唐書) 권6 측천무후본기 대족(大足) 2년(702) 기사에서부터 일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문무왕 10년(670)에 왜국(倭國)이 일본으로 명칭을 변경했다(倭國更號日本)고 했고, 실제 670년을 전후해 왜와 일본을 분명히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즉, 670년 이전에는 왜국(倭國)·왜국왕(倭國王)·왜인(倭人)·왜병(倭兵)·왜적(倭賊)·왜국사(倭國使) 등으로 관련 기사를 기록하고 있으나, 670년 이후에는 일본(日本)·일본국(日本國)·일본적(日本賊)·일본국사(日本國使) 등으로 적고 있다. 한편 고려말-조선시대에 남해안과 서해안에서 창궐해 우리 백성들을 크게 괴롭힌 ‘왜구(倭寇)’라는 명칭은 광개토대왕 비문에 1회 사용된 것[대방계를 침입한 백제군과 연합한 왜를 격파한 부분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무수히 많이 참살하였다(왜구궤패참살무수 倭寇潰敗斬煞無數)]” 외에는 삼국사기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삼국사기, 왜의 신라 침략 35회로 기록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왜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서는 전쟁이나 약탈 등의 적대적 군사행동을 한 바가 없었으나, 신라는 35회에 걸쳐 크고 작은 규모로 침략[침(侵)·범(犯)·습(襲)·략(掠)·공(攻)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중 침(侵)으로 기록한 경우가 가장 많음]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왜의 신라 침략과 일치하거나 관련된 기록이 없다. 다만, ①백제 성왕(聖王)이 신라를 공격한 553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요청에 의해 일정 규모의 왜군을 파견해 지원했다는 기록, ②660년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함락 후 왜에 있던 백제 왕자 부여풍(扶餘豊)이 복신의 요청으로 귀국할 때인 662년 5월에 왜가 수군 170척을 함께 보냈다는 기록, ③663년 백강 전투에서 2만7000명 규모의 왜국 군대를 파견해 백제를 회복하도록 했다는 기록 등 3회에 걸쳐 신라와 관련되는 군사행동을 일본서기에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신라 침략 시기와 지역
삼국사기에 기록된 왜의 신라 침략을 시기, 지역, 원인, 규모, 신라의 대응 및 결과 등으로 구분해 살펴보면 그 침략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데, 이번 편에서는 시기와 지역만 우선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왜의 신라 침략은 1세기 2회, 2세기 1회, 3세기 9회, 4세기 5회, 5세기 16회, 6세기 1회, 7세기 0회, 삼국통일 이후 1회의 빈도로 이뤄졌다. 이는 신라가 고대 국가의 체제를 갖춰 가는 지증왕 및 법흥왕 통치 이전과, 국력이 약했던 3세기부터 5세기에 왜의 침략이 집중되고 있다고 해석된다. 수도 경주까지 침략해 들어간 경우도 232년, 260년대, 346년, 364년, 393년, 405년, 431년, 444년 및 459년으로 3·4세기와 5세기에 집중됐다. 왜의 신라 침략 35회 가운데 월(月)이 기록돼 있는 28회를 살펴보면 4월 13회, 5월 5회, 6월 4회로 여름(옛 기록은 모두 음력으로 기록됐는데 음력 4·5·6월이 여름임)에 22회가 집중돼 있다. 이는 태풍을 피할 수 있는 시기, 식량이 고갈되는 시기 등이 반영된 데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왜구는 신라의 해안에 상륙해 인근 지역을 약탈하고 돌아간 경우가 16회[변(邊) 3회, 해변(海邊) 1회, 동변(東邊) 7회, 남변(南邊) 2회, 경(境) 1회, 진(鎭) 2회]로 가장 많았으며, 해상의 섬을 침략한 경우는 2회[목출도(木出島), 풍도(風島) 각 1회]였다. 신라의 수도 경주까지 왜인이 쳐들어온 온 경우는 총 9회[금성(城) 5회, 명활성(明活城) 2회, 월성(月城) 1회, 토함산(吐含山) 1회]에 이른다. 그러나 경주가 왜인에게 함락된 경우는 없었다.
이외 왜가 침략한 다른 곳은 사도성[沙道城, 조분왕 4년(233)에 이찬 우로(于老)가 사도에서 왜인과 싸울 때 바람을 이용해 화공(火攻)을 해 배들을 태우자 적들이 물속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고 했으므로 해안가일 것임], 유촌(柚村, 현재의 영덕군 흥해), 일례부(一禮部, 위치를 알 수 없음), 부현(斧峴, 토함산 동남쪽의 고개로 추정됨), 독산(獨山, 현재 포항시 신광면에 있음), 활개성(活開城, 위치를 알 수 없음), 삽량성(?良城, 현재의 경남 양산시) 등이다.
따라서 신라에 가장 큰 위협이 됐던 왜의 공격로는 신라의 동쪽 해안으로 상륙해 경주로 접근하는 통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무왕이 681년 임종할 때 “유언을 남겨 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으며, 민간에서 전하기를 왕이 용이 됐으며,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고 한다(群臣以遺言葬東海口大石上 俗傳 王化爲龍 仍指其石大王石)”라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왕이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바다의 용이 되어 지금 삼한을 진호하고 계신다(崩爲海龍…聖考今爲海龍 鎭護三韓)”라고 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서도 이 사항은 확인된다. 이것은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장차 예상되는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죽은 후 용이 돼서 동해 바다를 지키겠다는 염원을 후세에 전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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